[리뷰] <이스케이프>
영화 <이스케이프> 포스터 ⓒ와인스타인 컴퍼니
'가족'의 개념이 바뀌고 있는 지금, 역설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가족에 관한 다양한 장르의 콘텐츠가 많이 생산되고 있다. 새로운 가족을 생각해보게 하는 것도 있고, 이전의 가족을 홍보(?)하는 것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이전의 가족'은 단란한 3인 또는 4인 가족이 되겠다. 이젠 대가족에 관한 콘텐츠는 찾아보기 힘들다. 1인 가족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지금, 그런 형태의 가족은 이제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런 경향은 영화를 통해 자주 접할 수 있는데, 특히 극도로 힘들고 위험한 상황에서 빛을 발한다. 가족이 힘든 상황을 이겨내고 전보다 한 층 더 뭉치게 되는 것이다. 한국 영화 중 <해운대>가 그랬고, 지난 4월에 나온 할리우드 영화 <샌 안드레아스>가 그랬다. <우주전쟁>, <더 임파서블>, <테이큰>도 생각난다. 힘든 상황을 함께 겪지 않으면 진정한 가족이 되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어 씁쓸해진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긴장을 놓칠 수 없다
그런 류의 영화가 한 편 더 개봉했다. <이스케이프>란 영화로, 그 어떤 영화보다 더 극한 상황에 몰린 가족을 그렸다. 아빠 잭(오웬 윌슨 분)의 해외 파견 근무로, 4인 일가족은 동남아시아의 이름 모를 나라에 도착한다. 편안히 쉬고 여유로운 시간을 만끽해야 하는데, 호텔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TV, 전화, 인터넷 등 모든 것이 불통이다. 뭔가 꺼림칙하고 이상하다.
이튿날 잭은 신문도 없는 호텔을 떠나 영자 신문을 구하고자 한다. 어찌 저찌 해서 사흘 전 영자 신문을 구했는데, 그 자리에서 반군 시위에 휘말린다. 단순 시위가 아닌 전쟁을 불사한 시위다. 급기야 잭은 미국인이 살해 당하는 장면을 보는데, 자신도 그 살해 대상에 포함되었다는 걸 알게 된다. 잭이 이직한 글로벌 그룹 카디프가 그 나라의 수도 사업을 장악했다는 것이다. 영화는 비로소 시작되고 끝날 때까지 한두 순간을 제외하곤 긴장을 놓칠 수 없는 시간이 계속된다.
영화 <이스케이프>의 한 장면. ⓒ와인스타인 컴퍼니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하는데 딱히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에서도 반군 시위가 벌어졌고 벌어지고 있다지만, 중동처럼 서양인을 직접적인 대상으로 삼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한편 정확한 나라 이름이 나오지 않는데, '캄보디아'일 거라 예상된다. 영화 속에서 호텔 직원이 언급한 캄푸치아 끄라옴과 마오쩌둥 거리가 캄보디아 수도인 크롬펜에 있기 때문이거니와, 잭의 가족들이 탈출하고자 하는 곳이 이 나라와 국경을 맞댄 베트남이라는 점 등등 때문이다. 베트남과 국경을 맞댄 나라는 라오스와 캄보디아 뿐이다.
철저한 가족주의 영화
잭의 가족은 매 순간 죽을 고비를 넘긴다. 반군이 잭을 직접적인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것과 다름 없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마구잡이로 죽어나가는 서양인들, 그 죽음의 길을 뚫고 유일한 희망인 미국 대사관으로 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들에 딸들이 태클을 건다.
영화 <이스케이프>의 한 장면. ⓒ와인스타인 컴퍼니
건너지 않으면 죽음밖에 없는 건물과 건물 사이를 첫째 딸 때문에 가까스로 건너고, 뒤도 안 보고 도망가야 하는 상황에서 둘째 딸이 곰인형을 떨어뜨려 소리를 꽥꽥 지르는 바람에 총에 맞아 죽을 뻔하고,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숨어 있어야 하는 상황에서 둘째 딸이 오줌 마렵다고 칭얼대 한숨을 돌린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건, 잭과 아내가 그 만큼의 힘을 낼 수 있었던 이유가 딸들이었던 한편 그들이 그토록 힘들었던 이유가 다름 아닌 딸들이었다. 가족의 인생이란 게 이와 같이 않을까. 잭의 아내는 한숨 돌린 상황에서 잭에게 진심 어린 말을 건넨다.
"이번 삶은... 내게 정말 가치 있어. 비록 내가 원하고 계획했던 삶은 아니지만... 그랬다면 당신과 아이들을 만나지 못했을 거야. 설령 우리가 돌아가지 못한다고 해도 정말 가치 있는 삶이었어."
가족주의 영화의 단점은, 그 형용할 수 없는 오글거림 뿐만이 아니다. 가족을 제외한 모든 걸 '적'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그 적을 이해해보려는 어떤 움직임도 없다. 이 영화 또한 마찬가지이다. 중간에 잭의 가족을 도와주는 영국의 알 수 없는 첩보원 해먼드(피어스 브로스넌 분)의 입을 통해 적들의 정체를 간략히 보여주고 옹호하고자 하는데, 그것 뿐이다. 그들도 잭처럼 자신의 가족을 지키고자 할 뿐이라는 것. 하지만 잭은 이해할 수도 이해할 여력도 없다. 누구나 그 상황에 처하면 마찬가지일 것이다.
쿠데타가 일어나고, 탈출할 수 없다, 탈출한다?
영화의 미국 개봉 제목은 <NO ESCAPE>, 한국 개봉 제목은 <이스케이프>, 일본 개봉 제목은 <クーデター(쿠데타)>라고 한다. 이들 제목이 모두 이 영화를 이루는 주요 라인인데, 한 번 이어보자면, 쿠데타가 일어나고, 탈출할 수 없고, 탈출한다. 결국 탈출한다는 결론에 다다를까? 그렇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탈출할 수 없기 때문에, 탈출이라는 제목이 가능한 것인지도?
그러는 한편, 일본과 미국, 한국이 본 이 영화는 완연히 다른 것 같다. 미국과 한국은 상황에 처한 가족을 영화의 중심으로, 일본은 가족이 처한 상황을 영화의 중심으로 보았다. 영화 내적으로는 상황에 처한 가족이 더 재미있을 테고, 영화 외적으로는 가족이 처한 상황이 더 재미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후자의 시선이 더 흥미롭게 다가온다.
영화 <이스케이프>의 한 장면. ⓒ와인스타인 컴퍼니
자칫 밋밋할 수 있었던 영화를 해먼드 역의 피어스 브로스넌이 살린 것 같다. 영국 첩보원의 중심과 같았던 007에서 나와 머나먼 타국 땅의 오지에서 고생하고 있는 제임스 본드인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여유롭고 유머러스하지만 언제나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는 실력파의 모습은 여전하다. 그러면서 그 자신이 영화배우로서 007 시리즈 이외엔 딱히 기억나는 게 없는 불운한 모습도 겹쳐진다. 그럼에도 열심히 하는 당신이 멋있다. 불운에서 탈출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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