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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청춘'에 해당되는 글 1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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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시' 아닌 '인생'에 도움이 되는 교육, '카르페 디엠'! <죽은 시인의 사회> 2019.01.23
  • 결국, 다시, 사랑이라고 말하는 러브 스토리 <먼 훗날 우리> 2019.01.14
  • 장르 폭풍이 전하는 재미와 질문 '누가 진짜 괴물인가' <몬몬몬 몬스터> 2018.08.15
  • 속절없이 빠르게 지고 마는 청춘에 대한 찬미와 안타까움, 영화 <아웃사이더> 2018.07.27
  • 이창동이 말하는 이 시대 청춘의 공허와 무(無), 영화 <버닝> 2018.06.15
  • 삶도 죽음도 치열한 청춘들의 이야기, 영화 <수성못> 2018.05.18
  • 이 시대, 우리 청춘들의 이야기 <초행> 2018.01.17
  • 세상에 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 그리고 제대한 나 <아기와 나> 2017.12.13
  • 여성의 인생, 그 한 단면을 현실적으로 그리다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2017.12.08
  • 시간이 흘러 비로소 알게 된 사랑,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사랑 <중경삼림> 2016.06.17

'입시' 아닌 '인생'에 도움이 되는 교육, '카르페 디엠'! <죽은 시인의 사회>

오래된 리뷰 2019.01.23 08:46



[오래된 리뷰-교육 1] <죽은 시인의 사회>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포스터.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명품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가 세상에 나온 지 올해로 30년, 중고등학생일 때 최소 한 번 이상 대학교에서도 최소 한 번 이상 완연한 어른이 되어서도 최소 한 번 이상 봤던 작품이다. 그리고 이렇게 또 보았다. 앞으로도 종종 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이 영화는 북미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큰 흥행을 했지만 우리나라에서 특히 유명한대, 필자처럼 학창 시절 선생님이 한 번쯤은 보여주기 때문이다. 주인공 키팅 선생님의 교육 방식은 그야말로 '이상(理想)' 그 자체이다. 


누가 이 작품을 만들고 연기했나 간략히 살펴보자. 호주 출신의 피터 위어 감독으로, 이 작품 전부터 유명했지만 이 작품으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으며 후에 <트루먼 쇼> <마스터 앤드 커맨더> 등의 두고두고 회자될 명작을 남겼다. 


그리고 5년 전 세상을 뜬 로빈 윌리엄스가 있다. 그는 수많은 유명 작품과 좋은 작품에 출현하여 수많은 상을 휩쓸고 적절한 흥행을 선사한 대배우로, 비록 2000년대 이후 좋지만은 않은 모습을 보였지만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영원히 남을 배우다. 최근 몇 년새 완연한 연기파 배우로 우뚝 선 에단 호크의 앳된 모습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카르페 디엠! 현재를 즐겨라


'카르페 디엠!' 현재를 즐겨라.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한 장면.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아카데미 각본상에 빛날 만큼 빈틈 없이 탄탄한 이야기를 자랑한다. 1950년대말 미국, 졸업생의 75% 이상이 아이비리그에 진학한다는 명문 웰튼 아카데미 입학식이 열린다. 여지없이 훌륭한 인재들이 입학하고, 퇴임한 영어 선생의 후임으로 키팅 선생이 부임한다. 


빡빡한 스케줄로 입학 초기의 시간을 보내는 학생들 가운데 닐, 녹스, 토드, 찰리 등 친한 7명이 있다. 이들은 '전통, 명예, 규율, 최고'라는 학교의 교훈을 '익살, 공포, 타락, 배설'로 고쳐 부르며 담배도 꼬나무는 악동들이지만 저녁이면 어김없이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함께 공부하는 모범생이기도 하다. 아중에 키팅 선생의 수업은 이들로 하여금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게 한다. 


키팅 선생은 '시(詩)'를 점수 매기려는 시 교과목 교재의 서문을 찢어버리고 직접 자작시를 지어오게 하고 통일되게 걷지 말고 제멋대로 걸어보라는 등 파격적 수업을 이어간다. 그 모체에는 '카르페 디엠' 즉, 현재를 즐기라는 말이 있다. 


급기야 그가 웰튼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을 때 만든 비밀 회합 '죽은 시인의 모임'이 7인의 손에 부활된다. 그 여파로 닐은 연극을 시작하고 녹스는 남자친구가 있는 여자에게 솔직한 마음을 구애하며 찰리는 회합에 여자를 데려오기도 한다. 하지만 닐이 아버지의 극심하고 완고한 반대에 부딪혀 괴로워하다 결국... 생애 처음으로 진정 자신을 알게 된 행복한 시절을 보낸 이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입시' 아닌 '인생'에 도움이 되는 교육


키팅 선생은 학교가 추구하는 '입시'가 아닌 학생들을 위한 '인생' 교육을 실시한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한 장면.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오 캡틴, 마이 캡틴'이라 부르며 책상 위로 올라가는 명대사와 명장면으로 유명한 이 영화, 비단 미국이 아닌 한국의 수십 년 교육 역사와 현실에 정확히 반(反)하는 이상향을 내보이기에 판타지로 읽히면서 시원한 과정과 씁쓸한 결말을 안긴다. 


영화가 말하는 교육의 이상향은 키팅 선생으로부터 발현된다. 그는 외우는 법 아닌 생각하는 법, 점수 매기는 법 아닌 판단하는 법,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법, 다른 각도에서 보는 법, 신념을 기르고 유지하는 법 등 '입시'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을 가르친다. 


반면 그것들은 '인생'에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일 테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인생에서 입시가 차지하는 비율을 생각해볼 때 도움이 되어야 하는 그것들은 도움은커녕 오히려 방해가 될 소지가 다분하다. 그게 현실이고, 그래서 하염없이 안타깝다. 


키팅 선생과 아이들의 미래는 불 보듯 뻔하다. 해고, 퇴학 또는 복종.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없고 바뀌는 것 또한 없다. '죽은 시인의 모임'은 말 그대로 죽은 시인의 모임일 뿐이다. 죽은 자들이 무엇을 할 수 있으랴. 그렇다고 살아 있다 해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니다. 


시와 미, 낭만, 사랑


시와 미, 낭만, 사랑이 지향하는 건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들과의 조화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한 장면.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건 사실일지 모르지만 진실은 아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건, 지배한다고 생각되는 건 현실을 바꿀 수 없다고 믿고 그게 사실이라고 굳건히 생각하는 이들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바꿀 수 있다. 그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그들이 신봉해 마지 않는 '교육'적 방법으로. 그건 바로 영화 속 키팅 선생이 말하는 시와 미, 낭만, 사랑이다. 


여기서 쉽게 착각할 수 있는 지점은 시와 미, 낭만, 사랑이 지향하는 바이다. 그것들은 '예술'과 '예술가'만을 지향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다름 아닌 삶의 목적이자 삶에 예술적이고 낭만적 감수성을 품게 하는 게 목적임으로, '모 아니면 도' 식의 극단으로 바라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의학, 법률, 경제, 기술 등 삶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것들과 대척점을 이루지 않고 조화를 이루면 되는 것이다. 


'카르페 디엠' 현재를 즐겨라, 현재를 잡아라 등의 뜻을 지녔다. 한 번 지나간 청춘은 다시 오지 않는 법, 그때만 할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 영화가 말하는 교육의 이상향, 그것은 다분히 교육의 대상을 향한다. 교육의 대상인 학생들이, 청춘들이 주체가 된다. 한 명 한 명 모두 이성과 감성을 두루 갖춘 삶의 주인이 된다.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 영화가 교육 현장에서 주요한 교재로 사용되면 좋겠다. 하지만 앞으로는 제발 이 영화가 그렇게 사용되지 않으면 좋겠다. 교육의 방향과 방법이 바뀌어, 학생들의 삶이 주체가 되고 우리 모두 아주 잘 알고 있는 교육적 이상에 조금이라도 다가가 수많은 종류의 비극이 청춘의 한 가운데에서 일어나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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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로빈 윌리엄스, 인생, 입시, 죽은 시인의 사회, 청춘, 카르페 디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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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다시, 사랑이라고 말하는 러브 스토리 <먼 훗날 우리>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9.01.14 12:15



[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먼 훗날 우리>


영화 <먼 훗날 우리> 포스터. ⓒ넷플릭스



2007년 춘절, 고향으로 귀향하는 기차 안에서 처음 만나 친구가 된 린젠칭(징보란 분)과 팡샤오샤오(저우둥위 분), 알고 보니 같은 동네에 살고 있던 그들은 베이징에서 함께 지내며 꿈을 키운다. 린젠칭은 게임 개발자의 꿈을 키우는 반면, 팡샤오샤오는 잘 나가는 베이징 남자와 결혼할 때까지는 그저 먹고 사는 데만 치중할 뿐이다. 


린젠칭은 팡샤오샤오를 좋아한다. 팡도 린을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 그들은 연인으로 발전한다. 그렇게 시작되는 다시 없을 열정적이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하지만 그들의 현실은 너무나도 팍팍하다. 


언제 꿈을 이룰지 알 수 없지만, 꿈을 이루기 노력하는 한편 현실을 살아가려고 발버둥 쳐야 하는 린. 팡은 그런 린을 응원하며 그저 먹고 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계속할 뿐이다. 그들의 사랑은 삐걱대기 시작한다. 


영화는 동시에 10년이 흐른 후 린과 팡이 우연히 베이징행 비행기에서 만나는 장면을 보여준다. 담담히 서로를 응시하며 조용히 대화를 이어가는 두 사람, 분위기로 봐서 그들은 헤어졌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들에게 어떤 일이 닥쳤던 것일까. 


중국 멜로의 대세이자 현재


이 영화는 단연코 중국 멜로의 현재이자 대세이다. 영화 <먼 훗날 우리>의 한 장면. ⓒ넷플릭스



영화 <먼 훗날 우리>는 중국 현지에서 신드롬에 가까운 흥행성적을 내고는 북미와 한국엔 넷플릭스로 공개되었었다. 중국 대세 배우들인 징보란과 저우둥위가 함께 한 청춘 감성 멜로로, 대만 출신의 만능 엔터테이너 류뤄잉의 첫 연출작이다. 


류뤄잉을 간단히나마 소개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녀는 수많은 상을 휩쓴 영화배우, 대박 음반을 낸 가수, 10권이 넘는 책을 낸 작가, 그리고 이젠 영화감독이기도 하다. 이밖에 작사와 작곡도 하고 뮤지컬도 하고 다양한 사회활동도 한다. 


그런 감독의 작품이다 보니 영화도 지루하지 않고 빠르고 다채롭게 진행될 것 같고, 다방면의 이야깃거리들이 한데 잘 뭉칠 것 같다. 정통 멜로에 한 발만 걸치고 다양한 이야기들이 펼쳐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대 했던 것을 훨씬 웃도는 만듦새를 보여주었다. 단연코 이 영화는 중국 멜로의 현재이자 대세이고, 당분간 '중국 멜로' 하면 이 영화를 떠올릴 듯하다. 재미와 감동의 두 마리 토끼를 잡았고, 현재의 청춘을 보여주는 데도 성공했다. 


첫사랑 지침서


첫사랑 지침서 <건축학개론>을 생각나게 하는 외관을 지녔다. 영화 <먼 훗날 우리>의 한 장면. ⓒ넷플릭스



영화는 우리나라의 첫사랑 지침서 <건축학개론>을 생각나게 하는 외관을 보인다. '그때 우린 왜 그랬을까' '그때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의 우린 달라졌을까' 하는 덧없지만 할 수밖에 없는 질문들. 정처없다. 


보다 깊이 들어가보면, 밖으로만 도는 팡을 향한 린의 일편단심과 그 일편단심의 소소하고 디테일한 면면들이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호감인지 사랑인지 모를 미묘함이 웃음 아닌 미소를 짓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란 게 또 그럴 수밖에 없다'라고, 누군가는 말하게 만들고 또 그 말이 맞을 때가 있는 법. 사실, 팡이야말로 린을 계속 사랑해오지 않았을까. 그러지 않고는 그들의 연애와 사랑의 모습들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울 수 있겠는가. 


팍팍한 현실이라는 벽 또는 핑계는 그들로 하여금 아니 팡 아닌 린으로 하여금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마치, 운명 같다.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건, 운명 같다. 영화는 이 운명의 거시적 관점을 현재의 시점에서 풀어내고, 이 사랑의 미시적 관점을 과거들의 시점에서 풀어낸다. 우린 영화의 시작부터 결말을 다 알고 있지만 과정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누구나의 과거, 현재, 미래가 빠짐없이 녹아 있기에.


결국, 다시, 사랑.


중국 청춘들의 현실을 들여다보는 데 사랑과 연애를 수단으로 사용한 것 같지만, 결국 다시 사랑이라고 말한다. 영화 <먼 훗날 우리>의 한 장면. ⓒ넷플릭스



중국은 이제 명실상부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지만, 실상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운 과도기라고 할 수 있다. 중앙 통제의 공산주의 국가라고는 하지만, 세계 최고의 빈부격차를 '자랑'하는 나라가 아닌가. 성공을 위해서라면 도시에서의 집도 절도 없는 생활을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린과 팡의 베이징 나날들이야말로 그 자체이다. 


영화는 중국이, 중국 청춘들이 처한 현실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정공법을 택하면서, 사랑과 연애를 표나지 않게 어우르는 데 성공한다. 이 영화가 명작의 면모를 갖추었다는 게 바로 그 부분인데, 홍콩 반환기의 혼란과 10년 동안의 사랑을 절묘하고 절절하게 그린 20여 년 전 진가신 감독의 <첨밀밀>과 궤를 같이 한다. <건축학개론>보단 <첨밀밀>이 연상된다. 


그런 면에서 <먼 훗날 우리>는 단순명쾌한 영화는 아니다.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시골 청춘의 도시 상경기 또는 성장기 그리고 회상기인 건 맞지만, 영화를 온전히 품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개인 아픔, 사회 현실, 시대 정신까지 차례대로 두루두루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랑과 인생이 그들만의 것이 아닌 게 가슴 아프다. 그렇다고 다른 무엇의 것이라고 한다면 더욱 가슴 아프다. 


단순히 개인과 개인의 사랑에서 오는 아픔과 슬픔이라면 공감에의 '치유'가 가능했을 텐데, 이 영화의 사랑이 낳은 아픔과 슬픔은 끼어드는 것들이 너무 많고 일개 개인으로선 어찌 해볼 수 없는 것들이라 형용하기 힘든 감정을 유발시킨다. 하지만 영화는, 그럼에도 사랑이라면 다 이길 수 있고 이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다시, 사랑이라고 말하니 이 영화는 러브 스토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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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류뤄잉, 먼 훗날 우리, 사랑, 중국, 중국 멜로, 청춘,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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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폭풍이 전하는 재미와 질문 '누가 진짜 괴물인가' <몬몬몬 몬스터>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8.08.15 08:00



[리뷰] <몬몬몬 몬스터>


영화 <몬몬몬 몬스터> 포스터. ⓒ더쿱



'대만영화', 어느새 우리에게도 익숙해졌다. 2000년대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필두로, 2010년대 괜찮은 청춘영화가 우후죽순 우리를 찾아왔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나의 소녀시대>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 등, 우리나라 감성과 맞닿아 있는 대만 감성이 두드러진 작품들이다. 


하지만, '진짜' 대만영화는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대만 출신의 세계적인 감독들과 작품들이 있다. 허우 샤오시엔의 <비정성시>,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 리안 감독의 <결혼 피로연>, 차이밍량의 <애정만세> 등. 이들은 1980~90년대 대만영화의 새로운 시작을 알린 일명 '뉴 웨이브'의 기수들이다. 이들의 감각적이고 예술적인 경향이 지금의 대만영화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비단 대만청춘영화뿐만 아니라. 


최근에 우리를 찾아온 강렬한 영화 <몬몬몬 몬스터> 또한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2010년대 대만청춘영화의 시작을 알린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의 감독이자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의 원작, 각본, 제작을 맡았던 이른바, '대만청춘영화'의 기수 구파도의 신작이다. 젊은 감독의 '청춘' 사랑은 여전하지만,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다채로운 수단과 방법이 이채롭다. 거기엔 청춘은 물론 공포, 스릴러, 코믹까지 있다. 


괴물 같은 인간과 괴물의 한판


영화 <몬몬몬 몬스터>의 한 장면. ⓒ더쿱



린슈웨이는 런하오 일당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거기에 반 친구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동조한다. 심지어 담임 선생님도 피해자 린슈웨이가 아닌 가해자 런하오를 두둔한다. 복도에서 홀로 수업을 듣고 밥을 먹는 왕따이자 아웃 오브 안중인 여자 학생만 그를 위할 뿐이다. 자기처럼 되지 말라고. 하지만 린슈웨이 또한 그녀를 왕따시키는 학생일 테니, 그녀의 위로를 거들떠도 보지 않는 게 당연하다. 


한편 노숙자들과 독거노인들만 사는 곳엔 '괴물 자매'가 산다. 그들은 사람을 잡아먹는데, 어느 날 사냥하러 나왔다고 차에 치이고는 우연히 근처에 있던 런하오 일당에게 붙잡힌다. 그때 거기엔 린슈웨이도 있었다. 그들은 동생 괴물을 자신들의 아지트로 데려와서는 하염없이 괴롭힌다. 린슈웨이가 찾아보니 그 괴물들은 원래 사람이었다. 돈을 노린 누군가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런하오 일당과 언니 괴물은 한판 붙어야 한다. 사람을 잡아먹고 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괴물과 사람을 죽도록 괴롭히면서 사람이었던 괴물을 아무 이유 없이 잡아와 한없이 괴롭히는 사람. 사람으로서 사람을 응원하지만, 사람이니까 괴물을 응원해야 할 것도 같다. 


장르 폭풍이 선사하는 재미


영화 <몬몬몬 몬스터>의 한 장면. ⓒ더쿱



영화 <몬몬몬 몬스터>는 생각지도 못한 재미를 선사한다. 영화로만 느낄 수 있을 쾌감 어린 재미는 물론, '진짜 괴물은 누구인가'를 묻는 은근 철학적 질문으로 재미를 반감시키는 게 아닌 배가시킨다. 우선 재미 요소에는 위에서도 언급한 이 영화의 장르 폭풍이 있다. 청춘, 코믹, 공포, 스릴러 등. 


학교에서 벌어지는 왕따 이야기, 흔히 거기에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야기가 있고 다시 가해자가 되는 피해자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가해자가 된 피해자는 또 다른 피해자를 물색하거나, 간혹 다른 루트로 본래의 가해자에게 피해를 입히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가해자가 된 피해자가 명백한 가해자인 괴물을 상대로 가해자가 된다는 설정이 특이하다. 


괴물이 나오면서 장르는 자연스레 공포와 스릴러로 옮겨간다. 혐오스러운 몰골은 존재 자체로만으로도 공포를 유발하며, 언제 갑자기 튀어나올지 모르는 긴장감 어린 순간들은 스릴러의 세계에 한 발을 들여다놓게 한다. 


구파도 감독의 전매특허인 청춘과 더불어 코믹이 빠질 수 없다. 특히 그가 제작, 원작, 각본을 맡은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의 황당무계한 판타지 코믹이 이 영화에도 살짝살짝 묻어난다. 그런 코믹들이 공인된 청춘 장르는 물론 공포와 스릴러와도 잘 어울리니 더할 나위 없이 잘 빠진 영화가 될 수밖에 없다. 


누가 진짜 괴물인가


영화 <몬몬몬 몬스터>의 한 장면. ⓒ더쿱



런하오 일당은 이 영화의 공공의 적이자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들의 궁극적 원인이다. 왠지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고 싸그리 죽을 것만 같은 느낌을 풍기는 영화에서, 런하오 일당이 린슈웨이를 괴롭히지 않았다면 또 동생 괴물을 납치해오지 않았다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상은 어떨까. 겉 아닌 속은 어떨까. 결국 런하오 일당 또한 언젠가 피해자였을 테고 언젠가 피해자가 될 운명이 아닐까. 그들도 이 강자와 약자가 나뉘어져 있는 거대한 시스템의 약자 측에 속해 더 절대적 약자를 괴롭히고 있는 게 아닐까. 약자들의 세계에서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피눈물 나는 모습들을 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접할 수 있다. 


영화의 시작, 정신지체아와 가게를 꾸려 나가는 노인에게 물세례를 맞은 노숙자는 다른 노숙자와 경찰의 눈을 피해 더 깊숙히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갔다가 괴물 자매에게 잡아먹힌다. 하지만 정작 괴물 자매는 그보다 더 깊숙한 곳에서 박스 하나에 의존한 채 살아간다. 그런 괴물이 런하오 일당에게 잡히고, 런하오 일당은 린슈웨이를 괴롭히는 한편 함께 하는데, 린슈웨이는 다시 가게의 정신지체아를 향해 폭언을 하고... 


'누가 진짜 가해자인가'라는 질문을 넘어, '누가 진짜 괴물인가'를 말하려는 이 영화, 런하오 일당이 어떤 식으로든 '괴물'이라는 건 인정한다. 그렇다면, 린슈웨이는? 그 사이를 오가며 자신하지 못하는 그는, 어찌 보면 정녕 인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리 저리 휘둘리고 끝없이 고민하지만 결정하지 못하는 인간적인 인간. 하지만 그는 명백히 런하오 일당에 동조하고 함께 행동했다. 런하오 일당이 괴물이라면 그도 괴물이 아닌가? 영화가 질문하는 '누가 진짜 괴물인가'의 대상은 런하오 일당이 아닌 린슈웨이다. 그리고 우린 대부분 린슈웨이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렇다면 우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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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절없이 빠르게 지고 마는 청춘에 대한 찬미와 안타까움, 영화 <아웃사이더>

오래된 리뷰 2018.07.27 08:00



[오래된 리뷰]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아웃사이더>


영화 <아웃사이더> 포스터. ⓒ워너브라더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1970년대 미국 최고의 감독 중 하나이다. 당시 <대부>, <컨버세이션>, <대부 2>, <지옥의 묵시록>을 연달아 내놓으며 그야말로 영화 세계를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어 <카게뮤샤>도 기획 제작했으니 뭘 더 말할 수 있으랴. 


80년대 이후에도 꾸준히 영화를 찍었지만 70년대만 못했다. 최근까지도 주로 기획과 제작에 참여해왔고 괜찮은 작품이 적지 않다. 그의 영화 연출, 그 빛나는 재능은 비록 한때였지만 그 한때가 남긴 흔적이 영원할 것이기에 아쉬움은 적다. 


여기 그의 1983년도 작품 <아웃사이더>가 있다. 아마도 코폴라 전성기 끝자락에 있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호밀밭의 파수꾼>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성장소설 중 하나인 S. E. 힌턴의 1967년 소설 <아웃사이더>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굉장히 매력적이다. 범상치 않은 스토리 구도에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들이 대거 출연해 흥미로운 조화를 이루었다. 물론 정점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일 것이다. 


부자와 빈민


영화 <아웃사이더>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미국 오클라호마의 어느 마을, 남쪽에는 백인 부자가 북쪽에는 백인 빈민이 살고 있다. 그들은 서로를 쏘시와 그리저라 부르며 적대시한다. 그리저 포니보이는 어려서 부모님을 사고로 잃고 큰형 대릴, 작은형 소다팝과 함께 산다. 그는 감옥까지 다녀온 댈러스 무리와 함께 다니며 비행을 일삼지만, 소설과 시를 좋아하는 감수성 어린 열네 살 소년이기도 하다. 


위에서 언급하기도 했던 영화의 원작은 S. E. 힌턴의 자전적 이야기로, 그녀가 열일곱 살에 집필했다는 사실로도 유명하다. 한 소년의 성장 이전에 부자와 빈민 마을로 나뉘어진 배경이 인상적이다. 인상적이다 못해 기괴하고 무섭기까지 하다. 자유라는 것이 명백히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는 벽도 존재한다는 게 어떤 의미일지...


서울의 강남, 그중에서도 핵심적인 몇몇 구는 우리나라 전체 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어른이 되어 갈수록 그런 사실 하에서 '계급'의 존재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그런데 그런 느낌을 갖게 되는 시기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 부자들이 돈을 많이 버는 이유와 돈을 많이 벌고 나서 하는 일이 교육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릴 때 갖는 상대적 박탈감이다. 그건 시작될 당대에도 자신의 세계를 부정으로 잠식하는 심각한 영향을 끼치지만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결코 좋을 수 없는 영향을 끼친다. 상대적 우월감도 좋을 수만은 없다. 한 인간을 구성하는 건 결코 한 가지만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영화의 재미들


영화 <아웃사이더>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포니보이에게는 친한 친구 쟈니가 있다. 그는 매일 같이 싸우는 부모님 때문에 집에 들어가기 싫어한다. 어느 날, 그 둘이 새벽에 밖에서 배회할 때 쏘시들이 덮친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포니보이를 죽일 듯이 괴롭히는 모습을 보고 쟈니는 칼을 꺼내든다. 정신을 차려 보니 쏘시의 한 아이를 죽인 것이 아닌가. 


영화는 데뷔한 지 4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도 여전히 탑배우의 자리에 있는 톰 크루즈와 지난 2009년 세상을 떠난 90년대 최고의 스타 패트릭 스웨이지, 80년대 최고의 청춘 스타 맷 딜런을 비롯, 지금까지도 꾸준히 연기를 펼치는 배우들이 총출동하다시피 했다. 이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영화의 재미는 쏠쏠하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재미는 시의적절한 OST들이다. 영화의 주제를 완벽히 구현하는 스티브 원더의 <Stay Gold>(황금빛 시절)을 필두로 제리 리 루이스, 엘비스 프레슬리, 칼 퍼킨스의 노래들이 영화를 수놓는다. 


그 정점은 노래가 아닌 시인데, 포니보이가 존경해 마지 않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금빛은 오래 가지 않는다'이다. '청춘은 오래 가지 않는다'라고 바꿔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이 영화의 재미, 그 기저에는 속절없이 빠르고 속절없이 지고 마는 청춘에 대한 찬미와 안타까움이 있는 것이다. 


자연의 첫 푸름은 금빛//붙잡아두기 가장 어려운 빛깔.//자연의 첫 번째 잎사귀는 꽃.//하지만 한 시간은 피어있을까요.//에덴은 슬픔에 잠겨버렸고//새벽은 낮으로 퇴색하는 것.//금빛은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지요.


속절없이 흘러가는 황금시절, 청춘


영화 <아웃사이더>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포니보이와 쟈니는 이런 일에 도가 텄을 것 같은 댈러스에게 도움을 청하고, 댈러스는 그들에게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버려진 교회 건물에 숨어 있을 것을 추천한다. 그들은 곧 야영을 시작한다. 얼마 후에 찾아온 댈러스와 함께 오랜만에 시내에 나가 맛있는 것도 먹고 앞으로의 일을 의논한다. 그리고 돌아왔는데, 교회 건물이 불타고 있는 게 아닌가. 그곳에는 견학온 어린 아이 몇몇이 갇혀 있었다. 포니보이와 쟈니는 주저없이 들어가 아이들을 구하는데, 쟈니는 그만 크게 다치고 만다. 


갈 곳 없는 포니보이와 쟈니에게 도망쳐 온 버려진 교회 건물은 역설적으로 파라다이스에 가깝다. 무엇보다 절대 헤어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계급적 배분의 하위 단계 삶에서 멀리 빠져나왔다는 생각이 절대적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새롭게 부과된 굴레는 또다른 되돌릴 수 없는 상황 '살인'. 


그들의 절대 되돌릴 수 없는 또다른 '청춘'은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갈 뿐이다. 영화는 현실에서 절대 달아날 수 없이 두 발을 디디고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선보이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는 굉장히 문학적이다. 현실과 맞닿아 있다고 보기에 좀 어려운 면이 있는데, 이는 아이들이 처한 비참한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함이라기 보다 문학적으로 승화 내지는 비참한 현실에 당당히 맞서기 위함이라고 보는 게 맞다. 


쟈니가 포니보이에게 남긴 편지가 이를 증명한다. '황금은 어린 시절을 말하는 것 같아, 우리처럼. 어릴 때는 모든 것이 새롭잖아 새벽처럼. 네가 석양을 보며 생각하는 것이 바로 황금이야. 계속 그렇게 사는 게 좋은 것 같아. 아직도 세상엔 좋은 것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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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이 말하는 이 시대 청춘의 공허와 무(無), 영화 <버닝>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8.06.15 08:00



[리뷰] 이창동 감독의 <버닝>


영화 <버닝> 포스터. ⓒCGV아트하우스



한국이 자랑스럽게 전 세계에 내놓을 몇 안 되는 영화감독 중 하나인 이창동, 그의 영화는 탄탄하다. 90년대 초반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기 전 이미 주목받는 소설가로 입지를 굳혀가고 있던 바, 스토리텔러로서의 역량이 한껏 발휘된 케이스라고 하겠다. 한국 시인계의 총아였던 유하 감독, 영화계와 소설계를 오가는 천명관 작가가 생각난다. 


80년대 초중반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던 이창동, 그는 영화로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지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가 주로 해왔던 작업은, 영화로 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빈틈 없는 서사와 대표성을 짙게 띠는 캐릭터와 함께. 


그의 8년만의 신작 <버닝>은 그동안의 이창동 영화와 다른 듯하다. 가히 그 대표성 짙게 띠는 캐릭터들이 극을 주도하고 이면을 들여다보는 건 여전하지만, 빈틈 없는 서사를 보여주는 대신 문학적 메타포와 영화적 이미지를 기반으로 하는 질문을 던진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보는 사람이 답을 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종수, 해미, 그리고 벤...


영화 <버닝>의 한 장면. ⓒCGV아트하우스



문예창작학과를 다니다 군대를 다녀와 택배 아르바이트를 하며 복학을 준비 중인 소설가 지망생 종수(유아인 분)는 어릴 적 동네 친구 해미(전종서 분)를 만난다. 카드 빛을 갚지 못해 가출해 행사 도우미 아르바이트를 하며 전전하는 해미는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나려 한다. 그러며 종수에게 고양이를 부탁하는 것이다.


한편, 종수는 아버지한테 일이 생겨 북한이 눈앞에 잡힐듯 보이는 파주 본가로 이사한다. 여행이 오래 걸릴 것 같았던 해미는 문제가 생겨 금방 돌아온다. 근데 혼자가 아니다.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지만 부자인 것만은 확실한 벤(스티븐 연 분)과 함께다. 그와 그녀는 나이로비 공항에서 며칠간 함께 갇혀 있던 동지란다. 종수는 해미와 어릴 적 동네 친구였고 얼마 전에는 두 번째 만남에 섹스를 했던 사이란 말이다. 


이후 세 명은 벤의 집에서, 종수의 집에서 모임 아닌 모임을 가진다. 종수의 뜻은 반영되지 않은 모임이었고, 종수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말과 행동이 오갔던 모임이었다. 그 두 번의 모임 이후 해미는 연기처럼 사라져버린다. 종수는 벤의 말에서 심상치 않은 무엇을 감지하고 그를 추적하는 한편 그가 호언장담한 말을 추적하는데...


하루키적 메타포들


영화 <버닝>의 한 장면. ⓒCGV아트하우스



영화는 저 유명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했다. 단순히 그래서일까, 감독이 더더욱 의도한 걸까, 영화 전체가 '하루키적'이다. 영화의 장면장면이 고스란히 하루키만의 묘사와 대사로 옮겨지고, 영화 전체가 고스란히 하루키만의 소설로 옮겨질 수 있을 것 같다. 이보다 더 완벽하게 소설을 영화로 옮기기란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마냥 즐기기, 있는 그대로 즐기기 쉽지 않은 영화이다. 아니, 애초에 그렇게 볼 수 없고 그렇게 보아서도 안 되는 영화이다. 이창동 감독이 제대로 벼른 것이다. 하루키 특유의 허세를 수직 또는 수평에서 바라보는 느낌이 그대로 살아 있다. 오그라들어 제대로 들어주기가 민망할 정도의 대사들이 그대로 굉장히 중요한 메타포다. 


종수, 해미, 벤의 세 주인공 자체가 메타포이다. 소설가 지망생임에도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며 비(非) 메타포적인 삶을 영위하는 종수는 눈앞만 보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청춘을, 번 돈으로 빛을 갚지 않고 메타포적인 삶의 의미를 찾아 아프리카를 찾는 해미는 길을 잃었거나 다른 길을 찾거나 길을 이탈하고 싶은 청춘을, 무위도식의 삶을 살아가는 벤은 끝에 다다른 자가 느끼는 허무함을 표출하는 청춘을 의미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그 어떤 청춘도 불안하고 불만 있고 불행하다. 평범함이 되어버린 밑바닥은 햇빛이 작렬하는 위를 바라보고 동경하는 것이, 더 이상 내려갈 길이 없어 방황하는 이는 도무지 현실에 두 발을 굳건히 디디기 힘든 것이, 더 이상 올라갈 길 없어 허허로운 이는 채우고 태우고를 반복하는 것이. 


무(無)에의 바람과 몸짓만


영화 <버닝>의 한 장면. ⓒCGV아트하우스



영화는 다분히 종수의 시선이다. 겉으로 보여짐은 종수 아닌 해미와 벤이 더 많을지 모르지만, 화자이자 주체는 종수인 것이다. 종수는 가장 평범에 가깝다. 그저 묵묵히 일상을 영위하며 앞을 고민하고 종종 뒤를 돌아본다. 그에게 벤과 해미는 앞과 뒤이고, 미래와 과거이며, 동경의 대상과 부러움의 대상인가. 무엇보다 소설가 지망생인 그에게 그들은 눈앞에 생생히 살아숨쉬는 소설적 메타포가 아닌가. 


이 셋을 두고 혹자는 연대의 희망이 보인다 하였고 혹자는 분노가 보인다 하였다. 셋은 철저히 다른 듯하지만 삶의 의미를 찾는 이들이라는 연대의 희망이? 그러하기에 따로 또 같이 불안과 불만과 불행을 태워버리듯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몸짓도, 먹고 살자는 몸부림도 사라져버린다, 의미가 없다. 불에 타 재가 되어버리고, 해가 져 어둠에 묻혀버리고, 연기처럼 사라져버리고... 그런 무(無)에의 격렬한 바람과 몸짓만이 보일 뿐이다. 


와중에 홀로 실재하고 있는 듯한 종수는 어떨까. 여기저기 들쑤시며 사라져버린 이의 행적을 찾고, 매일 새벽에 달리고 달리며 사라졌을 것같은 비닐하우스를 찾고, 이 두 증발의 매개체가 될 사람을 추적한다. 어느새 생업을 포기한 종수는 이 추적들을 통해 본인의 또 다른 실존인 소설가로서의 길을 닦는다. 추적이 먼저인지 소설가가 먼저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그는 나아가는 듯 보인다. 이 모습에서 굳이 희망을 엿보는, 엿보고 싶은 이도 있을 테다. 


그건 또 다른 실재과 실존으로의 나아감인가, 해미나 벤처럼 현실 아닌 곳으로의 도피인가. 우리는 단서를 달고 있지 않은가, 자기 위로를 하고 있지 않은가. 현실이 투박하고 질척이고 두루뭉술할 때 사실은 선명하거나 희미한 것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이다. 거기엔 분노도 희망도 연대도 자리하기 힘들다. 자칫 공허만이 또아리를 틀고 있을 것이다. 이 시대 청춘을 잠식하는 거대한 공허이자 무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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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도 죽음도 치열한 청춘들의 이야기, 영화 <수성못>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8.05.18 08:00



[리뷰] 영화 <수성못>


영화 <수성못> 포스터. ⓒ인디스토리



대구 수성구 수성유원지 수성못에서 오리배 아르바이트를 하며 편입 공부를 병행하는 오희정(이세영 분), 그녀는 집안의 도움 없이 홀로 치열하게 분투한다. 어떻게든 이곳을 떠나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가기 위해서다. 그러던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손님도 없고 해서 쏟아지는 잠을 감당 못하는 사이 중년 남성 한 명이 무단으로 오리배를 탈취해 수성못으로 나아간다. 그러곤 곧 투신자살을 시도한다. 


희정은 오리배 담당자로서 당연히 지급해야 했던 구명조끼를 조느냐고 깜빡했다는 걸 사장이 알게 되면 잘리게 된다는 사실에 질겁한다. 당일 야밤에 몰래 구명조끼를 수성못에 버리려다가 때마침 촬영을 하고 있던 차영목(김현준 분)에게 들킨다. 그는 자살시도자들을 촬영하고 있었던 것. 영목은 희정의 비밀을 빌미로 그녀를 자살센터로 끌어들여 자살시도자 촬영을 도우게 한다. 


한편, 희정에겐 오빠 오희준(남태부 분)이 있다. 그는 아무런 생산적인 일도 하지 않고 아무도 만나지 않은 채 집에서 책만 들여다보고 있다. 그러며 희정에게 '하고 싶은 일도 있어서 좋겠다'고 푸념한다. 그는 자살충동에 못이겨 정신병원을 다니고 있는데, 군대에 가지 않으려는 수작 같기도 하고 군대를 못 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KAFA 출신 감독의 장편 데뷔작 <수성못>


영화 <수성못>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영화 <수성못>은 한국의 영화 사관학교라 불리는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출신의 유지영 감독 장편 데뷔작이다. 이 작품은 KAFA의 2017년 장편데뷔작 기획전에 출품되었는데, 장편제작연구과정 9기의 대표 완성작 중 하나이다. 지난 2009년 시작된 이 과정의 기획전 대표작들을 들여다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2010년엔 개인적으로 2000년대 한국 독립영화 중 최고라 할 만한 <파수꾼>이, 2013년엔 <잉투기>와 <들개>가, 2015년엔 <소셜포비아>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등을 선보였다. 출중한 데뷔작 이후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않는(못하는) 감독들이 상당한 게 마음에 걸리지만 KAFA의 능력에 의문을 품게 하진 않는다. 


<아기와 나> 등과 함께 2017년에 선보인 <수성못>. 3명의 주인공을 통해 보여주는 시선과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두루뭉술한듯 선명하고 식상한듯 신선하다. 청춘의 삶과 죽음, 삶과 죽음에의 치열함, 지방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 등의 주제가, 수성못이라는 소재로 집결하고 수성못이라는 소재에서 비롯된다. 


'삶'도 '죽음'도, '치열하지 않음'도 치열한 청춘들


영화 <수성못>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정녕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희정, 돈도 열심히 벌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운동도 열심히다. 이 시대, 바로 지금 가장 청춘다운 청춘의 모습이다. 그녀에게로 한 발자국 더 들어가보면, 지방과 여성이 보인다. 지방에선 성공할 수 없다는, 즉 이곳에서 살아선 안 된다는 열망과 함께 여성으로 살기 힘들다는, 즉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열망이 합쳐진다. 일반적인 청춘의 치열함보다 더 목적적이다. 


영목이 자살시도자를 촬영하고 그들의 말을 듣는 건 알고보니 사회봉사의 일환이었다. 그는 다름아닌 동반자살클럽회장으로, 동반자살을 주도했다가 실패한 경력이 있다. 정녕 '죽음'을 치열하게 치르려는 영목이다. 그 치열함에서 희정의 치열함이 떠오른다. '그들'의 '목적적'인 치열함 말이다. 그들은 대구를 떠나 서울로 가든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가든, 지긋지긋한 '이곳'을 떠나 '그곳'으로 가려 한다. 


장강명 작가의 히트작 <한국이 싫어서>(민음사)가 겹쳐진다. '헬조선'을 탈출해 호주로 가려는 청춘들, 하지만 호주도 또 다른 '헬'일 뿐이라는 교훈 아닌 교훈을 던진다. 이 소설이 주로 탈출 이후까지의 이야기를 그리는 반면, <수성못>은 주로 탈출하기까지의 이야기를 그린다. 


삶이든 죽음이든 정녕 쉽지가 않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공중에 붕 떠 있는 것 같다. 영화는 그 모습을 수성못에 떠 있는 오리배라고 보았다. 하염없이 떠 다니지만, 절대 수성못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오리배들 말이다. 그 어떤 치열함으로도 대구를,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그들이 애처롭다. 


그렇다면, '치열하지 않음'을 치열하게 내보이는 희정 오빠 희준은 어떨까. 우리 안에 희정과 영목의 결이 다른 치열함이 공존할 텐데, 당연히 희준의 치열하지 않음의 치열함도 존재할 것이다. 희정과 영목이 애처로운 개인들의 형상이라면, 희준은 그 개인들에게 있는 또 다른 형상이 아닐까. 혹은 있으면 하고 바라는 형상. 


광범위하게 그저 보여준다


영화 <수성못>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영화는 삶과 죽음, 무엇을 지향하고 무엇을 지양하라고 가르치지도 가리키지도 않고 설교하지도 선언하지도 않으며 판단하지도 재단하지도 않는다. 그저 보여준다. 때론 우스꽝스러움 속의 진지함으로, 때론 흐리멍덩함 속의 적나라함으로. 


그 모든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고 우리 주위의 모습이고 우리 사회의 모습인 게 맞다. 그래서 이 영화 <수성못>은, 독립영화가 흔히 추구하는 '사회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작가적 시점으로 파고드는 게 아니라 의외로 꽤나 광범위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그러다 보니 파괴적인 영화적 재미에선 조금 떨어질 우려가 있는데, 자살이라는 소재와 더불어 극초반에 벌어진 자살미수 사건에서 비롯되는 소소한 미스터리를 흥미 유발의 원천으로 사용한다. 


대체로 적절하고 적정하고 적재적소한 이 영화, 감독의 능력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더욱 기억에 남는 영화를 남기기 위해선 오히려 이 영화의 장점이었던 적절함과 적정함을 버리고 한 곳을 파고드는 집요함이 필요해 보이기도 한다. 이제 갓 데뷔한 감독한테 흔히 보이는 패기 대신 노련함이 엿보이는 유지영 감독, 오히려 다음 작품에서 패기있는 모습을 보이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래서 더 기대가 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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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우리 청춘들의 이야기 <초행>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8.01.17 08:00



[리뷰] <초행>


2017년 마지막을 장식한 독립영화 <초행>. ⓒ㈜인디플러그


결혼한 지 만 2년에 다가간다. 적어도 나에게는 꿈꾸던 결혼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는 것 같아, 당연하게 생각되어지기 시작한 이 생활에서 때때로 신기함을 느낀다. 여기서 절대적으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남자'라는 것, 내가 아닌 남자가 꿈꾸던 결혼생활에 가깝다는 건 여자에겐 정반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린 연애 7년 차에 결혼에 다다랐다. 나는 결혼이라는 걸 꼭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항상 옆에 있고 싶었다. 무엇을 하든 함께 하고 싶었다. 부부인 건 물론, 친구이자 동반자이자 또 하나의 나였다. 그러나 쉽지 않은 게 있다. 모든 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게 말이다. 


영화 <초행>은 연애 7년 차에 접어든 30대 커플의 이야기이다. 우리나라에선 자연스러운 일일까, 이 정도 시간 동안 만난 30대 커플이면 '결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또한 자연스러운 일일까, 이들의 관계에 있어 '가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곧 우리의 이야기이다. 


모든 삶의 길은 초행길이고 또한 가시밭길이기에...


모든 길이 초행길일 것이다. 그리고 모두 가시밭길일 것이다. ⓒ㈜인디플러그



연애 7년 차 커플 수현(조현철 분)과 지영(김새벽 분), 그들은 동거 중이고 지영이 생리 끊긴 지 2주째라 걱정하고 있다. 임신의 가능성이 있다는 걸 모를 리 없는 수현은 좋아하는 반응도 걱정하는 반응도 없이 그저 '진짜로?'만 되풀이하며 더 이상의 생각을 하기 싫어하는 눈치다. 자연스레 걱정은 지영에게로 집약된다. 


수현과 지영은 인천에 있는 지영네 집과 강원도 삼척에 있는 수현네 집을 차례로 방문한다. 편안하고 무난한 지영네 집에서의 일일, 다만 엄마가 지영이에게 결혼 압박을 가한다. 남들처럼 결혼한 딸 자랑도 하며 손주 또는 손녀도 돌보고 싶다는 것이다. 지영은 이 집에서 내 의견은 없다며 반발한다. 


한편, 수현 아버지 환갑 잔치 겸사 처음 수현네 집에 방문하는 그들. 지영은 곧바로 수현 엄마와 일을 하고 수현은 하릴없이 돌아다닌다. 저녁이 되어서 수현 엄마가 운영하는 횟집에 모이는 일가족. 말 한 마디 없던 수현 아빠가 취하더니 돌변하고 만다. 그렇게 잔치 아닌 잔치를 파하고 만다. 


어느 집을 가도 마음 편할 길 없는 수현과 지영, 더군다나 그들은 각각 좌절의 미술 강사이고 불안의 방송국 계약직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고 보살펴주는 것만으로는 온전하기 힘든 삶의 양태가 아닌가. 그렇지만 그 또한 삶, 모든 삶의 길들은 누구나에게 초행길이기에 또한 가시밭길이기에 누구에게 묻기도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초행길의 어려움에, 현실의 부정적 작태


영화는 현실의 부정적 작태를 예리하게 포착한다. ⓒ㈜인디플러그



영화에서 단연 중요한 모티브는 제목과 같은 '초행길'이다. 수현과 지영이 연애에서 결혼으로 가는 길이나, 서로의 집으로 찾아가서 생전 처음보는 어른들과 너무나도 깊은 인생의 선택을 종용받는 일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그 길을 따라 내비게이션 없는 차를 타고 간다. 길을 잃기도 하고 헤매기도 하는 건 당연한 일. 


여기서 왜 내비게이션도 없이 길을 나서는가 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내비게이션 없이 길을 나서는 건 참으로 위험하고 고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이 나서야 하는구나 하는 상황 자체가 중요하다. 아니,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적 장치. 그들은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길을 헤매지 않는 법이 없다. 


영화는 참으로 현실적이다. 여기서 현실적이라는 건 주연 배우들의 연기가 연기 같지 않다는 것에서 기인하기도 하지만, 수현과 지영이 투영하는 '남자'와 '여자'의 모습에 있다. 단 한 장면만으로도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알 수 있는데, 수현이 지영네 집에 갔을 때 가장 처음 한 건 안마의자에 앉아보는 일이었고 지영이 수현네 집에 갔을 때 가장 처음 한 건 수현 엄마와 함께 수현 아빠 환갑 잔치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주장할 생각이라면 일찌감치 접어두는 게 좋을 것이다. 이밖에도 이 영화에서만 수없이 많은 장면을 근거로 댈 수 있거니와, 굳이 이 영화를 볼 필요도 없이 실생활에서 몇몇 장면들만 생각해보아도 훨씬 더 다양하고 적확한 근거를 댈 수 있지 않겠는가. 잔잔하고 오밀조밀하게 초행길의 어려움을 표현하는 와중에, 세심한 날카로움으로 현실의 부정적 작태를 보여주니 감복할 따름이다. 


이 시대, 청춘의 길이란


결국, 이 시대를 조망하는 영화이다. 청춘의 길이란 무얼까. ⓒ㈜인디플러그



결국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이 시대상이다. 그중에서도 이 시대의 청춘. 행복하지 않았던 과거, 좌절하는 현재, 불안한 미래를 떠앉고 살아가는 청춘의 길이란, 그게 초행길이라서 힘들고 헤매는 것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어려움이다. 거기엔 넘어야 할 산들이 너무나 많다. 


특히 이 영화가 집중하는 건 '지영'일 텐데, 그래서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2016년 말에 나와서 지난해 초유의 베스트셀러에 등극한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생각나게 하는 이름으로, 청춘의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힘듦을 지나 다음 '단계'에 진입하려 할 때 그녀에게만 짓누르는 엄청난 압박들. 그 압박에는 가장 힘이 되어주어야 할 수현의 압박 또한 있으며 그것이 가장 견디기 힘들다. 


그들이 어떤 길로 나아가 어떤 결과를 도출할지는 모른다. 헤어질 수도 결혼할 수도, 아기를 낳을 수도 낳지 않을 수도, 그들의 직장에서 그저 현실에 안주하며 때론 좌절하고 때론 불안에 떨 수도 뭔가 다른 길을 찾을 수도 있다.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갈 수도, 자신들이 정한 기준에 따라 길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자, 우린 이 영화로 충분하고도 넘치는 공감을 받는다. 저건 내 이야기니까. 그렇다면 위로는 받을 수 있을까, 좋은 방법을 얻을 수 있을까. 아니, 그러지는 못할 것 같다. 본래 공감과 위로는 함께 따라오는 법인데, 이번 경우는 그러지 못할 것이다. 저런 수많은 어려움이 계속해서 우리를 따라올 거라는 확신만 생길 뿐이다. 


영화는 더할 나위 잘 만들어진, 나무랄 데 없는 수작이다. 군더더기 없지만, 수많은 생각들이 들게 만들며 아련한 여운까지 남긴다. 몇 번이고 다시 봐도 지루함 없이 헤아릴 요소들을 이러저리 굴려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일말의 판타지적 요소를 찾을 수 없는 칙칙한 현실에 씁쓸해지는 걸 막을 길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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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 그리고 제대한 나 <아기와 나>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7.12.13 08:00



[리뷰] <아기와 나>


이제 갓 제대한 도일 앞에 있는 건 아기 예준, 그리고 아내가 될 순영. 갑자기 순영이 사라졌다? ⓒCGV아트하우스



군대 전역을 앞두고 말년 휴가를 나온 도일, 엄마와 아내가 될 순영과 이제 갓 세상에 나온 아기 예준이 있는 집으로 향한다. 고아 출신인 순영이 엄마와 모녀지간처럼 지내는 건 좋은데, 합세해서 날라오는 잔소리는 듣기 힘들다. 도일은 결혼도 해야 하고 아이도 키워야 하는 가장인 것이다. 


엄마와 순영이 일을 나간 사이 예준이가 아파 병원에 갔다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예준이의 혈액형이 자신과 순영 사이에서 절대 나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일은 이 사실을 순영에게 차마 얘기하지 못하지만, 운은 뗀다. 다음날 갑자기 순영이 사라졌다. 전화도 안 되는 건 물론, 평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까지 모른댄다. 


아는 사람들한테 부탁을 해 예준이를 하루이틀씩 맡기고 도일은 순영을 찾아 삼만리를 감행한다. 순영이에 대해 몰랐던 사실들을 하나둘씩 알게 되고, 마음은 조금씩 차가워진다. 예준이를 보는 스킬은 늘어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할 때 이대로 계속 지낼 수는 없다는 생각도 한다. 도일은 순영이를 찾을 수 있을까? 예준이는?


아기를 통해 성장해가는 나


세상에 갓 나온 아기, 역시 세상에 갓 나온 얼마전까지 군인이었던 나. 이 조합은? ⓒCGV아트하우스



영화 <아기와 나>는 단편영화계에서 인정 받은 손태겸 감독의 장편데뷔작이다. 엄마 뱃속에 있다가 세상에 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 그리고 역시 군대라는 울타리 안에 있다가 세상에 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나'의 조합이 의미심장하고 또 자못 흥미진진하게 다가오는 영화다. 


10여 년 전쯤 나온 장근석 주연의 아기와의 명량동거를 다룬 영화 <아기와 나>, 20여 년 전쯤 나온 부모님을 잃은 주인공이 아기인 동생을 돌보며 일어나는 그린 애니메이션 <아기와 나>가 자연스레 생각나기에, 말 그대로 세상에 아기와 나뿐만 남은 암울한 와중에 현실을 헤쳐나가는 코믹&드라마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영화는 아기와 '함께' 성장해가는 주인공의 이야기라기보다 아기를 '통해' 성장해가는 주인공의 이야기라고 하겠다. 이제 갓 군대를 전역한 어린 나이임에도, 자신이 '저질러놓은' 일을 자신이 직접 책임져야 한다는 엄혹한 현실. 아니, 그건 엄혹한 게 아니다. 세상에 나온 건 자신의 선택이 아니지만, 그 이후부턴 수많은 선택의 연속일 뿐이다. 현실은 그 선택과 결과일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최악의 상황, 어른이 되는 통과의례


최악의 상황에서 맞이한 결혼, 출산, 육아의 어른이 되는 통과의례. ⓒCGV아트하우스



영화의 포커스는, 감독의 시선은 도일에게로 맞춰져 있다. 특히 제목과 조금 맞지 않는듯한, 그래서 으레 그러려니 했던 식상한 기대와는 달리, 도일이 사라진 순영을 찾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물론 그 사이에, 그 와중에 예준이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는 게 사실이다. 결국 도일은 예준이를 택하게 될 거라는 결말이 눈에 선하고 말이다. 


흔히,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직접 길러봐야 비로소 어른이 된다고 말한다. 일종의 통과의례라고 할까. 그만큼 결혼과 출산과 육아가 인간에게 가장 무게감 있게 다가오고 가장 막중한 부담감으로 짓눌려 오거니와 가장 처절하게 힘든 순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어른이 되는 방법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영화는 그 힘든 통과의례를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에 처한 어른아이 한 명이 어떻게 헤처나갈 것인지 함께 기대하고 절망하고 응원하고 답답해 하며 보여준다. 확실한 감정이입을 선사하는 동시에, 절대 주인공처럼은 되기 싫거니와 되지 말아야겠다는 교훈(?)도 선사한다. 


아기가 없더라도 살아가기 힘든 막막한 현실, 앞날이 창창한 청춘이기에 무서울 게 없을 것 같지만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청춘이기에 무섭지 않은 게 없기도 하다. 그 옆에 아기란 차라리 판타지의 영역이다. 자신을 버리고 아기를 위해 살아가는 인생이 되는 건 가능하지만, 그럼에도 진정 아기를 생각한다면 자신의 손에서 떠나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또다른 냉혹한 현실 앞에서 치를 떨며 무릎을 꿇는다.


수작은 아닐지언정 기대감은 들게 한다


기대감을 들게 하는 게 수작이라고 인정받는 것보다 좋을지도? ⓒCGV아트하우스



저예산 독립영화 중에 유난히 수작이라고 평가맞는 것들이 많다. 지극히 감각적이고 시대와 소통하는 작가와 연출자의 시각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일 테다. <아기와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길이남을 수작, 한 해 또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수작 독립영화라 말할 순 없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지도 않는다. 


대신, 감독이나 배우들에게 기대감을 들게 한다. 수많은 감독들과 배우들이 길이남을 명작 한 작품만을 남기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반해, 이들은 앞으로도 자주 또는 종종 모습을 드러내 이전보다 더 좋은 모습을 보일 것 같은 기대를 주는 것이다. 그런 기대감을 가장 확실하게 심어준 장면이 마지막 장면인데, 그 프로페셔널한 롱테이크가 기억에 남는다. 


인생에 길이남을 큰일로 세상을 이제 막 경험한 이들의 마지막 장면은, 그 뒤에 이어질 수없이 많은 질곡들을 암시한다. 개인적으로 얼마전에 큰일을 저질렀고 누군가의 도움 아닌 도움으로 간신히 저지할 수 있었지만 아직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니다. 엄청난 압박이었는데, 실현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배운 게 많다. 


누구나 이렇게 살아간다. 겪고 겪고 또 겪으면서. 그 와중에 뭐라도 얻으면 좋으련만 대부분 남는 건 상처 뿐이다. 그래도 잊어서는 안 되는 건, 그 자체가 성장의 일면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가 수작(秀作)이 아니라도 좋다. 이 영화는 나에게 손수 경험해보지 못한, 경험해보지 못할 경험을 건네준 수작(手作)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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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인생, 그 한 단면을 현실적으로 그리다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7.12.08 09:55



[리뷰]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안생과 칠월, 두 소녀의 14년 우정의 나날을 그린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나이너스 엔터테인먼트



안생과 칠월, 열세 살에 우정이 시작된다. 엄마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는 칠월과 달리 집안은 잘 살지만 외로움에 떨며 빗나가기 일쑤인 안생이다. 그래서 안생은 칠월의 집에 자주 놀러가고 칠월의 엄마 아빠는 안생을 친딸처럼 생각한다. 3년이 지나 칠월은 명문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안생은 직업고등학교에 진학하며 그들의 인생이 갈린다. 그리고 열일곱에 칠월은 가명에게 첫사랑을 느낀다. 그들은 곧 사귄다. 


하지만 모범생 가명은 모범생 칠월보다 자유분방하고 털털한 안생에게 끌린다. 이성으로서 끌리는 것인지, 자신이 가질 수 없는 자유와 행할 수 없는 분방함을 향한 열망인지는 알 수 없다. 스무살이 되어 안생이 고향을 떠나 북경으로, 밖으로 향할 때 칠월은 알게된 듯하다. 칠월과 가명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그들은 그렇게 4년을 떨어져 지낸다. 서로 자신들의 현재를 자랑하다가 지루해 하다가 낙심하다가 절망에 빠진다. 결국 그들은 다시 만난다. 가명이 칠월을 떠나고, 안생이 칠월에게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성인, 서로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지만 그때까지의 삶이 너무나 달랐던 걸, 그래서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면서 상대방을 비하하기 쉬워졌다. 소울메이트의 비참한 말로인가, 다들 그렇게 되는 것인가.


두 소녀의 아름다운 연대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중국영화로는 믿기 힘든 포스를 뿜는다. ⓒ나이너스 엔터테인먼트



<도둑들>에서 조니 역을 맡는 등 많은 작품에서 얼굴을 선보여 우리에게도 어느 정도 익숙한 배우 증국상의 연출작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는 두 소녀의 아름다운 연대기다. 홍콩을 대표하는 배우 중 한 명인 증지위의 아들로도 유명한 증국상의 이 작품은, 중국영화로 믿기지 않는 포스를 시종일관 내뿜는다. 


특히 인물들 간의 미묘한 심리 표현, 복잡한듯 중심 잡힌 각본, 세련된 촬영 등에서 빛이 발하는데, 캐나다 유학파 출신의 감독과 현존 중국 최고의 청춘 작가의 원작에 두 여주인공의 상반된 삶을 대변하기 위해 투입된 4명의 여성작가들 덕분이지 않을까 싶다. 확실히 담보된 대중성에, 최대치로 끌어올리고자 한 작품성이 더해진 것이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적은 수의 인물들(조연)이 출연하는 이 작품에 두 주인공 안생과 칠월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인데, 그 둘만으로도 영화가 전혀 비어 보이지 않는 건, 허전해 보이지 않는 건 그 자체로도 대단하다. 나름 남주인공 가명이 이 둘 간에 일어날 사건사고들의 도구나 소품처럼 쓰이고 있어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덕분에 시종일관 세련된 멋을 풍기는 화면이 때론 더 빛나고 때론 그 힘을 캐릭터와 스토리에 실어준다. 그들의 대단한듯 별거 아닌듯 청춘의 순간순간들이 이 멋스러운 화면과 함께 하는 것이다. 서양 영화를 따라하는 듯한 느낌을 다분히 풍기지만, 조악한 측면은 없고 잘 배워 잘 따라했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진정한 여성주의


정반대의 삶과 생각을 가진 듯한 안생과 칠월. 진정한 여성주의는 그 둘의 합이 아닐까. ⓒ나이너스 엔터테인먼트



영화는 다분히 여성주의적이다. 영화의 핵심인 두 주인공이 여성이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여성을 주인공을 내세우며 고전적인 여성상을 아주 자연스럽게 그려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이 영화의 두 주인공은 사실 한 몸이나 마찬가지인 소울메이트로 굉장히 입체적이고 변화무쌍하다. 


칠월은 중산층의 안정적인 집안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며 나무랄 데 없는 모범생으로 자란다. 그렇게 남들과 다르지 않은 인생을 살아간다. 지극히 고전적인 여성상을 지닌 채 말이다. 반면, 안생은 비정상적인 가정에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며 어딘가 삐뚤어진, 그러나 생각이 깊은 이로 자란다.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 자신의 손과 발로 모든 걸 체험한다. 그녀에겐 남성, 여성의 나눔이 불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얼핏 칠월의 인생이 재미없고 지루해 별볼일 없을 정도로 느껴진다. 반면, 안생의 인생은 스펙터클하고 화려해 이상향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사랑하면서도 서로의 삶을 부러워한다. 우리네 인생은 그들 사이의 어디쯤엔가 일 텐데, 영화가 이처럼 양극단을 보여주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진정한 여성주의란 안생이나 칠월의 양극단에 있지 않다. 그들이 한몸과 같은 소울메이트인 것처럼, 여성주의란 여성으로서의 모든 삶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옳고 그름은 이차적인 문제이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을 때 반드시 맞게될 파국은 안생과 칠월만의 것이 아닌 모든 여성의 것이다. 


여성의 인생, 그 한 단면을 그리다


영화는 안생과 칠월을 통해 여성의 인생, 그 한 단면을 그리고 있는 것 같다. ⓒ나이너스 엔터테인먼트



단순한 로맨스 영화도, 치밀한 심리 영화도, 루즈한 인생 연대기 영화도, 청춘의 아름다운 한때를 그린 영화도 아닌, 수많은 여성의 인생 그 한 단면을 현실적으로 그러면서도 감각적으로 그려낸 영화가 이 영화이다. 누구도 안생과 칠월, 그들의 인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영화는 그들의 청춘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시작되고 그들의 청춘 끝자락에서 끝난다. 어쨌든 외형은 청춘영화일 수밖에 없다는 점, 그 이후의 인생을 알 수 없다는 게 아쉽지만 그들의 청춘을 아주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는 점이 고마웠다. 청춘은 완성되지 못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들의 모습은 그 절정이었다. 


누구에게나 눈부시게 찬란했던 날이 있다. 그런 날이 영원하진 못하는 법, 빛 한 점 느끼지 못할 만큼 처절하게 힘들었던 날도 있다. 인생은 그런 날들의 무한반복이다. 그래서 인생이 아름답다고 하는 게 아닐까. 멈춰 있지 않으니까, 끊임없이 나아가니까. 그러면서도 멈춰서 주위를 살피고 뒤를 돌아보기도 하니까. 더할 나위 없다. 


안생과 칠월은 서로를 부러워하지만, 난 안생과 칠월이 부럽다. 그들은 둘도 없는 친구이자 분신으로, 서로 자신을 온전히 줄 수 있지 않은가. 온전히 마음을 나눌 수 있지 않은가. 그래서 온전히 자신을 버릴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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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비로소 알게 된 사랑,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사랑 <중경삼림>

오래된 리뷰 2016.06.17 08:00


[오래된 리뷰]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


<중경삼림>은 '시간과 공간'에 관한 영화이다. . 영화 <중경삼림> 포스터. ⓒ엔드플러스



왕가위 감독을 세계적인 거장 반열에 오르게 한 영화 중 하나인 <중경삼림>. 제목을 이야기하지 않고 영화를 이야기하기 힘들다. 중경삼림을 영어로 바꾸면 'Chungking Express'이다. 홍콩에 가면 Chungking Mansion(重慶大廈: 중경대하)이 있다고 하는데, 처음 지어질 당시에는 고급 아파트였던 것이 현대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사는 소란스럽고 낡은 건물이 되었다고 한다. 왕가위 감독은 그곳을 중심으로 <중경삼림>을 찍었다.


또 하나, Express는 영화에서 주된 장소로 등장하는 패스트푸드점의 이름이다. 많은 사람들이 왔다가 머무르지 않고 떠나곤 하는 곳이다. '급행의' '신속한' '속달'의 의미를 지닌 Express와 일맥상통한다. 영화에서는 사랑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이 찾아와 외로움과 고독을 놓고 가곤 한다. 그러며 그곳에서 또다른 사랑을 찾는다. 


<중경삼림>은 이처럼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목에서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은유와 상징이 상당한, 그래서 난해하고 지루할 수 있는 이 영화를 보기 전에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다면, 그건 스포일러 등의 방해가 아닌 도움이 될 것이다. <중경삼림>은 '시간과 공간'에 관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홍콩이 반환되기 3년 전에 만들어졌다. 그래서 그 시기 만들어진 많은 홍콩영화가 그렇듯이 홍콩 사회의 불안과 혼란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이 영화에 그런 점이 없다고 할 순 없다. 다분히 있다. 반환을 앞두고 불안과 혼란에 빠진 홍콩사회를 사랑을 잃고 방황하는 청춘들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무방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건 분명 너무도 뻔한 도식이다. 애초에 실화도 아니고 사회를 보여주려고도 하지 않는다. 


기억이 통조림에 들어있다면 유통기한이 끝나지 않기를


"기억이 통조림에 들어있다면 유통기한이 끝나지 않기를, 만일 유통기한을 꼭 적어야 한다면 만 년 후로 적어야겠다." 영화 <중경삼림>의 한 장면. ⓒ엔드플러스



영화는 두 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진다. 사복경찰 223(금성무 분)은 매일 Chungking Express에서 만우절에 거짓말처럼 헤어진 옛 애인에게 전화를 건다. 그녀가 좋아했던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들이며 자신의 생일이자 이별 한 달 째가 되는 5월 1일까지 연락이 안 오면 그녀를 잊겠다고 다짐한다. 결국 그녀한테서 연락은 오지 않고 223은 파인애플 통조림 30개를 모조리 먹어치우며 그녀를 잊는다. 비로소 이별이다. 


파인애플 통조림의 유통기한은 곧 223과 옛 애인 간의 사랑의 유통기한이다. 그가 매일 사들인 유통기한 5월 1일자 파인애플 통조림을 유통기한이 지나기 전에 다 먹어치운 이유는, 자신의 사랑이 쓰레기 취급 받기 싫어서 라는 순수한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그 순수함은 비웃음을 사는 게 아닌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그는 무작정 새로운 사랑을 찾으려 한다. 그렇게 만나게 된 이(임청하 분)와의 하룻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223의 순수함이 뚝뚝 묻어난다. 그가 왜 사랑을 잃었는지 왠지 수긍이 가게 되는 장면이지만, 세상은 그런 이의 사랑이 있기에 청량하고 아름답다. 급기야 그는 그 스쳐지나간 사람의 생일 축하한다는 한 마디에 "난 그녀를 잊지 못할 것이다. 기억이 통조림에 들어있다면 유통기한이 끝나지 않기를, 만일 유통기한을 꼭 적어야 한다면 만 년 후로 적어야겠다."고 독백한다. 


특별한 공간 '집', 그녀의 사랑 방식


사랑하는 이와 함께 했던 공간에 다른 이가 들어온 걸 견디긴 힘들 것 같다. 그래도 정성을 다해 집을 꾸며주고 사랑으로 다친 상처를 치유해주려는 그녀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을까. 영화 <중경삼림>의 한 장면. ⓒ엔드플러스



정복경찰 663(양조위 분)은 223처럼 매일 Chungking Express에서 애인이 좋아하는 샐러드를 사간다. 하지만 애인은 곧 이별을 고하고 Chungking Express 점원 페이(왕페이 분)에게 편지와 열쇠를 건넨다. 663은 실의에 빠진다. 밖에서는 멀쩡해보이지만, 집에서는 어딘가 나사가 빠진 느낌이다. 물이 떨어지는 수건에 자신을 이입해 울지말라고 위로하고, 인형이나 비누를 붙잡고 하소연한다. 


한편 페이는 매일 663의 집에 몰래 가 663의 옛 애인의 흔적을 지워나간다. 그렇게 663이 자신도 모르게 이별을 해나가게 도와주는 것이다. 그러며 자신도 그곳에서 힐링을 받는다. 663이 받아줄지는 미지수이지만, 그것이 페이의 사랑 방식이다. 


언젠가는 663이 애인이 집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달려 들어온다. 그런데 잡그지 않은 수돗물이 넘쳐 집이 물바다가 된 게 아닌가. 663은 집을 치우며 "이 집은 점점 감정을 가진다. 강한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많이 울 줄은 몰랐다."며 급기야 집에 자신을 이입한다. 그녀와의 특별한 공간인 집이 우는 건 아직 그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그런 집에 페이가 몰래 침입한 사실을 알게 된 663은 어떤 마음일까. 가택침입죄를 물어 감방에 쳐 넣을 것 같지는 않지만, 사랑하는 이와 함께 했던 특별한 공간에 다른 이가 들어온 걸 견디긴 힘들 것 같다. 그래도 정성을 다해 집을 꾸며주고 사랑으로 다친 상처를 치유해주려는 그녀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을까. 


시간이 흘러 비로소 알게 된 사랑 혹은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사랑


<중경삼림>의 이야기는 곧 우리들의 이야기다. 그때가 과거로 머물지 않고 매순간 현재화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다. 영화 <중경삼림>의 한 장면. ⓒ엔드플러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영화는 시간과 공간을 주제로 한다. 그렇다면 223과 663의 이야기가 각각 시간과 공간에 관한 것일까? 많은 이들이 그렇게 볼 것 같은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 223과 663의 이야기 모두 시간과 공간을 말하고 있다. 두 이야기에 공통으로 나오는 Chungking Express라는 공간, 223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사랑의 유통기한', 663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특별한 공간, 집'과 시간이 흘러 비로소 알게 된 사랑 혹은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사랑이 그것이다. 


이 영화를 이렇게 한 마디로 정의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모순적으로 이 영화는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양가위 감독의 비서사적이면서 상징과 은유로 꽉 찬, 그러며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영상미가 그러하다. '감성의 자유로운 표현이나 놀이의 요소를 도입한 사고 방식이나 표현 수법'이라는 뜻의 '포스트모던' 스타일의 대가 양가위의 대표작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꿰뚫는 무엇을 말하라면 단연 'California Dreaming'을 들겠다. 극 중에서 페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인데, 황금빛 낙원 캘리포니아를 근심 있고 우울한 감정선으로 처리했다. 그건 곧 <중경삼림>과 일맥상통한다. 영화는 순수함과 불안이 공존하고 시종일관 우울한 듯하지만, 결국 해피엔딩을 이룬다. 


이름도 나오지 않는 이들(남자 주인공)의 도시 홍콩은 이들에게 불안과 혼란을 주지만, 불안과 혼란에서만 잉태되는 설렘과 꿈을 청춘에게만 허용되는 방황을 준다.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 <중경삼림>의 이야기는 곧 우리들의 이야기다. 그때가 과거로 머물지 않고 매순간 현재화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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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책하다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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