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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희망'에 해당되는 글 2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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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이 든 성배를 든 제임스 완, 기대와 걱정을 희망으로 <아쿠아맨> 2018.12.31
  • '잘돼가? 무엇이든'이라고 묻는 배려 2018.12.18
  • 반란 이야기로 성공시킨 스타워즈 시리즈의 확장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 2018.07.18
  • 현대사회 악과 싸운 연대 투쟁의 희망 <내일을 위한 시간> 2018.01.12
  • '우리'가 바꾼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 <1987> 2018.01.03
  • 길 잃은 바링허우 세대, 어찌해야 할까? 2017.12.11
  • 힘겨운 시대의 젊은이들을 위한 현실공감판타지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2017.11.08
  • 아픔과 슬픔의 설원... 그럼에도 희망의 작은 불씨 <윈드 리버> 2017.10.05
  • '희망을 버리지 말자'는 인생에의 지독한 은유 <쇼생크 탈출> 2017.09.01
  • 똥파리 같은 삶... 나비가 되고자 하는 이의 희비극 <똥파리> 2017.07.19

독이 든 성배를 든 제임스 완, 기대와 걱정을 희망으로 <아쿠아맨>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8.12.31 12:17



[리뷰] DC의 마지막 희망 <아쿠아맨>


영화 <아쿠아맨> 포스터. ⓒ워너브러더스코리아



2008년 <아이언맨>으로 시작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는 슈퍼히어로 영화계를 넘어 영화계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파워를 얻게 되었다. 마블 코믹스 원작은 이전에도 계속 영화로 만들어져 왔는데, <판타스틱 4> <데어데블> <엘렉트라>처럼 완전히 망해버린 영화도 적지 않다. 하지만 아무렴 DC만 하랴. 


2013년 <맨 오브 스틸>로 시작된 DC 익스텐디드 유니버스(DCEU)는 시작부터 삐그덕거려 이후 2년 동안 영화가 나오지 못했고 2017년 <원더우먼> 정도를 제외하곤 모두 망작으로 분류되는 참혹한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유니버스를 만들기 이전엔 슈퍼맨과 배트맨만을 앞세워도 마블보다 훨씬 인지도가 높았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린 것인지. 


DCEU는 단순히 절망의 수준을 넘어 존폐 위기로 몰렸고 '마지막 희망'으로 제임스 완을 불러들여 <아쿠아맨>을 만든다. 사실 <아쿠아맨>은 잘 알지도 못하는 캐릭터와 세계관일 뿐더러 별로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제임스 완이라면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공존했다. 


제임스 완이 누구인가. <쏘우> 시리즈, <인시디어스> 시리즈, '컨저링' 유니버스를 창조하고 모조리 성공시킨 공포영화의 귀재이자, '분노의 질주' 최고의 흥행작이자 수작인 <분노의 질주: 더 세븐>을 연출한 차세대 명감독이 아닌가. 그가 만든 <아쿠아맨>은 어떨까. 


괜찮은 슈퍼히어로 오락영화


DC로선 최상의 결과물을 도출할 괜찮은 슈퍼히어로 영화 <아쿠아맨>. 영화 <아쿠아맨>의 한 장면. ⓒ워너브러더스코리아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쁘지 않은' DC치고는 '굉장한' 오락영화였다. 영화사적으로나 영화 내적으로 논할 가치는 없다고 해도, 그럴 바엔 차라리 재밌게 즐길 만하면 되지 않겠나 싶은 마음을 대변해줬다 하겠다. 스토리라고 해봐야 역시 별 말 할 게 없지만 소소한 소구점은 있다. 


아틀란티스 왕국의 공주 아틀라나(니콜 키드만 분)는 정략결혼을 피해 육지로 온다. 평범한 등대지기 토마스에 의해 발견되어 이후 둘은 사랑에 빠지고 아이 커리가 태어난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아틀라나는 아틀란티스로 돌아가 정략결혼을 하고 옴을 낳지만 결국 쫓겨난다. 


이 세계와 저 세계, 바다와 육지를 잇는 유일한 다리 커리는 커서 근육질 아쿠아맨(제이슨 모모아 분)이 된다. 무지막지한 힘과 함께, 바다와 육지를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다. 한편, 육지의 공격에 옴(패트릭 윌슨 분)은 아틀란티스 7왕국을 모아 육지와의 전쟁을 치르려 한다. 


이에 옴의 약혼녀이자 동맹국 제벨의 공주 메라(앰버 허드 분)는 아쿠아맨을 찾아와 옴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라 육지와의 전쟁을 멈출 것을 간청한다. 아쿠아맨은 옴의 최측근이지만 사실은 아틀라나와 아쿠아맨의 최측근인 벌코(윌렘 대포 분)에게 들어서 알고 있지만 그러기 싫다고 거절한다. 하지만 옴의 야망이 도를 지나쳐 수많은 이들이 죽고 다칠 게 분명하기에, 아쿠아맨은 메라와 함께 벌코의 지원을 받으며 육지와의 전쟁을 멈춘다는 명분을 앞세워 왕위를 찬탈하기 위한 먼 여행을 떠난다. 


볼 거리 반석 위에서 순혈주의 비판


화려한 액션과 볼 거리를 장착하곤 순혈주의 비판에 힘을 기울인다. 영화 <아쿠아맨>의 한 장면.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아쿠아맨>은 가장 걱정거리이자 가장 기대되기도 하는 바닷속 화려한 액션과 전투를 기본 장착인 것처럼 자유자재로 내비친다. 바닷속 <스타워즈> <반지의 제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랄까. 바닷속 액션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그 반석 위에 영화는 하고픈 얘기를 마음껏 펼치고 보여주고 싶은 소소한 장면들을 마음껏 내보인다. 좋고 말고 할 것 없이 '짬뽕'이라고 해두자. 시작부터 다른 세계, 다른 계층의 두 남녀가 결혼하여 낳은 혼혈이 주인공이 되어 왕위에 오르려 하고 나아가 영웅이 되려 한다니. 


제임스 완 감독 본인이 말레이시아 화교 출신의 말레이시아 태생 호주인으로 미국에서 살고 있는 만큼 그에 대해 하고 싶은 말도 해야 될 말도 많았을 것이다. 더욱이 그가 살고 있는 곳은 미국, 미국은 트럼트가 대통령이 되고 난 후 이른바 순혈주의 노선이 주가 되었다. 순혈주의는 국수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데, 전 세계적으로도 난민 문제가 괘를 같이 한다. 


영화 시종일관 대사와 행동과 캐릭터를 통해 순혈주의를 비판하고, 정녕 장면장면마다 위에서 언급한 두 영화 말고도 <아바타> <인디아나 존스> <쥬라기 공원> 심지어 <타이타닉> 등 온갖 영화들이 생각나는 건 또는 생각나게 하는 건 전부 의도가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그걸 스토리와 따로 또 같이 노골적으로,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건 감독의 능력이라 하겠다. 


후속편, 명배우, DC의 희망


후속편을 염두에 둔 점, 명배우들이 출연한 점, DC의 희망으로 작용한 점 등 할 얘기가 많은 영화다. 영화 <아쿠아맨>의 한 장면.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영화는 후속편을 염두해두는 작업도 소홀히 하지 않았는데, 옴의 야망을 실현시킬 명분이자 아쿠아맨이 왕위에 오를 명분이기도 한 육지와의 전쟁이 제대로 시작되지 않았던 점이다. 이를 어떤 식으로 풀지 귀추가 주목되는 가운데, 육지의 공격 양상이 현재 인간이 자행하는 자연을 향한 수많은 만행과 다름 아니고 이에 바다가 대항하는 양상이 인간이 말하는 자연재해와 다름 아니라는 점이 흥미롭다. 


2편이 만들어진다면, 1편에선 '그들'과 '우리'의 좁은 의미로 순혈과 혼혈이 싸우는 양상이었다면 2편은 보다 넓은 의미로 인간과 자연이 싸우는 양상이 아닐까 예상해본다. 큰 희생을 막기 위한 작은 희생, 큰 전쟁을 막기 위한 작은 전쟁,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평화를 위한 전쟁을 어떤 식으로 내보일지도 궁금하다. 


2010년대 들어서 영화계를 뒤흔드는 슈퍼 히어로 영화, 단순히 무지막지한 자본을 앞세워 화려한 볼거리와 수많은 흥밋거리로 관객들을 불러오는 게 아니다. 명감독과 명배우들이 함께 한다는 점도 크게 작용한다. <아쿠아맨>에도 명배우들이 함께 했다. 


아카데미, 골든글러브, 베를린를 석권한 명배우 니콜 키드만과 베를린, 베니스를 석권한 명배우 윌렘 대포가 아쿠아맨과 메라와 옴을 보필한다. 물론 옴을 분한 패트릭 윌슨은 연극과 뮤지컬과 드라마 부문에서 자타공인 최고의 연기파 배우이기도 하다. 


<아쿠아맨>은 DCEU 이전부터 꾸준히 DC가 추구했던 특유의 '진지함'을 한껏 몰아내고 명품 오락영화 감독에게 전권을 주어 보다 대중친화적으로 세계관 자체를 살려낸 케이스이다. 한편 씁쓸하지만, 한편 이후 마블과의 훌륭한 라이벌 관계로 보다 건설적인 앙상블이 기대된다. 관객으로선 볼 거리가 많아져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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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 명배우, 순혈주의, 슈퍼히어로, 아쿠아맨, 제임스 완, 후속편,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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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돼가? 무엇이든'이라고 묻는 배려

오래된 리뷰 2018.12.18 08:00


[리뷰] 이경미 감독의 데뷔작이자 첫 책 <잘돼가? 무엇이든>


이경미 감독, 한국 영화계에서 굉장히 특이한 존재이자 케이스이다. 많지 않은 여자 감독이라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다섯 글자 짜리 장편영화 단 두 편 <미쓰 홍당무> <비밀은 없다>로 마니아까지 양산시킨 장본인이다. 그녀의 작품들은 호불호가 명확히 갈린다. '이경미 월드'가 존재한다.


이런 경우가 흔치 않은데, 그녀의 작품들은 관객 평점과 기자·평론가 평점이 비슷하다. 대중이 평단 수준까지 올라왔다는 방증인가, 그녀의 작품들은 수작임에 분명하지만 별개로 기막히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기막히게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일까. 둘 다 맞는 말일 테다. 그녀의 작품들은 흥행에 참패했지만 무수히 많은 상을 탔다. 


그녀가 최근에 책을 냈다. 지난 15년 동안의 끼적거림을 모아 놓은 에세이 <잘돼가? 무엇이든>(아르떼), 나와 하등 상관없을 것 같은 그녀의 지난 편린들이 무슨 의미일까. 그래도 그녀의 영화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아 집어들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위로를 받았고, 누군가에게 위로를 건네주고 싶다. 


그런데, 그녀의 첫 책 <잘돼가? 무엇이든>의 '잘돼가? 무엇이든'은 그녀의 또 다른 처음과 겹친다. 뒤늦게 들어가 꿈을 펼친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 작품 <잘돼가? 무엇이든> 말이다. 이 작품으로 대대적인 호평을 받으며 수많은 상을 탔고 결국 지금의 그녀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경미 월드'의 시작이랄까. 


기묘하게 함께인 지영과 희진


이경미 감독의 공식 데뷔작 <잘돼가? 무엇이든>의 한 장면. ⓒ빵미필름



'주성쉬핑'에서 근무 중인 4개월차 경력사원 지영, 사장의 말마따나 영리하고 일도 잘하는 믿음가는 일꾼이지만 정작 본인은 세상 사람들 모두가 불만이고 못마땅하다. 반면, 지영보다 2살 어린 3년차 희진은 아무 생각도 눈치도 없이 자기 일 욕심만 많다. 


희진을 지영은 당연히 극도로 싫어하지만, 사장은 그런 둘을 붙여 비밀스럽게 장부 조작 일을 시킨다. 공평하게 일을 나눠 각자 하자는 지영, 같이 하자고 하기도 하면서 모른 척 함부로 지영의 자리와 일 영역을 침범하는 희진. 잘 맞을리가 없는 둘이다. 


어쨋든 중요하게 시킨 일이라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둘. 하지만 지영은 이 일을 용납할 수 없어 꿈자리도 뒤숭숭한 와중에 희진은 계속 자신의 영역을 이래저래 침범하고 이어 현실인지 환상인지 모를 뒤죽박죽 믿기 힘든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결국 회사에 큰 사단이 벌어지고, 무너지는 지영과 그런 지영이 버티게 도와주는 희진이다. 역시 아무 생각이 없는 희진은 자기 갈 길을 가고자 하는데, 예민하게 날 서 있는 지영이 무너지니 기댈 곳이 희진밖에 없다. 그들은 기묘하게 함께다. 


이경미 감독의 공식 데뷔작 <잘돼가? 무엇이든>


영화 <잘돼가? 무엇이든>은 이경미 감독의 공식적 데뷔작이다. 졸업 작품이기에 그러한대, 졸업하기 전 몇 편의 영화들을 내놓기도 했었다. 그녀는 20대 중반이 넘어 뒤늦게 한예종에 입학했는데, 이전엔 해운회사를 3년 다녔고 그 이전엔 한국외국어대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이 작품은 그녀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그녀는 책에서 이 작품을 얘기하는데, 성공 신화를 이룬 거대 중소기업을 다닌 그녀이지만 그곳에서의 이십대 회사 생활은 끔찍하고 암울했다고 한다. 그때 회사에서 그녀의 유일한 친구들 둘이 있었고 나중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단편으로 만들어서 대히트를 쳤다고 밝힌다. 


이 영화에 대해 '미래에 대한 작은 기대도, 설레는 희망 한 조각도 없이 그저 살아야 되니까 살던 그 시절의 나에게 안부를 묻고 싶었다'(본문 99쪽 중)고 하는 그녀, '싫다는 감정에는 삶을 달리게 하는 에너지가 있다'(cine21 2016.1.13. 인터뷰 중)고 연출의도를 밝히는 그녀. 앞엣것이 그녀가 오랜 후에 이 영화를 뒤돌아본 느낌일 테고, 뒤엣것이 그녀가 한창 '이경미 월드'를 구축하고 있던 때의 생각일 테다. 


한편 이 영화는 버팀목 하나 없이 얇디얇은 현대사회에 내던져진 두 여직원의 이야기로도, 하찮지만 치명적일 수 있는 권력 관계를 치밀하게 그려낸 이야기로도 읽힐 수 있다. 앞엣것이 그녀가 회사를 다닐 당시 피부로 직접적이게 느꼈던 바일 것이고, 뒤엣것이 그녀가 그녀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당시 간접적이게 느꼈던 바일 것이다. 


단편이라 하면, 단편소설이 인생의 어느 한 지점이나 순간을 포착해 치밀하게 드러내는 작업이듯 단편영화도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 이 영화는 그런 면에서 완벽에 가깝다 하겠는데, 그래서 소위 '킬링 포인트'가 몇몇 장면들에서 보인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3분이 가장 좋다. 지난 30분의 짜증과 갈등이 터져 나오는 이야기를 한 소구점으로 모아 새로운 이야기를 하려는 듯하면서 기묘하게 봉합되고는 한순간에 환한 위로를 건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여운은 처음 느껴본다. 


이경미 감독의 첫 책 <잘돼가? 무엇이든>


이경미 감독의 첫 책 <잘돼가? 무엇이든> 표지. ⓒ아르테



그녀는 책에서, 누군가가 '잘돼가? 무엇이든.' 하고 물으면 갈대 무성한 망망무제한 벌판에서 낫을 들고 서서 외치겠다고 말한다. "어떻게 이렇게 평.생.을 살아요, 아저씨이??!"(본문 102쪽 중에서) 그러면서, '나는 염치 불고하고 조금 행복한 편이다.'(본문 126쪽 중에서)라고 말하기도 한다. 무엇이 진담인지 무엇이 농담인지 모를, 꿈과 환상과 현실이 뒤섞인 '이경미 월드' 그 자체가 아닌가. 


그런가 하면, 곧 그 절정의 문구들을 발견한다. JTBC 대선 토론을 보고 그녀가 머릿속으로 외친 말들, '나는 조금 행복한 편이다. 그러니까, 오늘 낸 세금, 행복한 내일로 돌려줘! 제발 우리 모두에게 수치심을 되돌려줘! 내가 먹기 싫은 우유를 돈이 없어서 굶는 아이에게 버리는 일이, 돼지발정제를 먹이고 강간을 시도하는 일이, 동성애를 차별하는 일이 없기를, 그게 자랑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도와줘. 제발 고양이들아!!!! .......으응?'(본문 129~130쪽 중에서)


'엔딩 크레디트에 넣을 '고마운 사람들'을 정리하려니 엄두가 나질 않는다. 지나온 시간이 길기도 하고, 여기까지 오기 위해 완성하고 버리기를 반복했던 시나리오들까지 떠올리자니 좀 많긴 많다. 특히나, 이번 작품에는 '고마운 사람들'과는 별도로 '고맙고 미안한 사람들' 항목을 따로 만들어야 할 지경이다. 덕분에 좋은 친구들을 얻기도 했다. 그 친구들도 나를 그렇게 생각해줘야 할 텐데...... 그 부분은 조금 걱정이다. 아무튼 사랑한다. 쓰다 보니 유서 같다? 그럼 안녕. (으응?)'(본문 153~154쪽 중에서)


3부로 구성된 46개의 글들과 수많은 일기들은 얼핏 별 게 아닌 듯하다. 쉽게 읽히기도 하거니와 편린에 불과한 것들이 많아 이해하고 지나가 머리에 남는 게 아닌 스치고 지나가 머리에 남지 않게 된다. 하지만 끝까지 읽어보고 나면 정말 신기한 것이, 그 하나하나가 지나가버리지 않고 남아 뭉쳐져 하나의 형체를 이룬다. 뒤죽박죽 뒤섞임들이 일관되게 이어지니 그 자체로 하나의 길로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아, 영화 아닌 책으로도 이경미 월드는 보다 공고해졌구나, 앞으로 보다 공고해지겠구나, 난 이경미 감독의 팬이 되어버렸구나.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녀의 장편 두 편 <미쓰 홍당무> <비밀은 없다>를 아직 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단편 데뷔작으로 사로잡다니 대단한데... 


종국에 그녀가 묻는 건 '잘돼가? 무엇이든.'이다. 자신은 힘들고 슬프고 아프고 죽고 싶어도 어쨋든 가고 있다고, 그러니 너는 잘돼가냐고 안부를 전하는 것이다. 전하는 방식이 특이해, 자신의 평범한 일상과 기괴한 머릿속을 뒤섞어 보여주고 있다지만... 그녀의 농담들이 이제 불편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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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 이야기로 성공시킨 스타워즈 시리즈의 확장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

오래된 리뷰 2018.07.18 08:00



[오래된 리뷰]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


영화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 포스터. ⓒ월트디즈니코리아



스타워즈 시리즈에 온갖 최초와 최고의 수식어를 붙인다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영화'라는 걸 본다는 사람이면 반드시 지나야 하는 필수코스 중 하나인 것이다. 영화 역사상 최고의 시리즈들인 <007>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쥬라기>, '마블' 등이 모두 영화 아닌 원작이 있는 반면 <스타워즈>는 영화가 원조이다. <캐리비안의 해적> 정도가 완벽한 원작 없이 영화로 만들어진 유명 시리즈이다. 


<스타워즈>라고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할 순 없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신화 연구자의 필수코스인 미국의 비교신화종교학자 조지프 캠벨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으니 말이다. 조지프 캠벨의 신화연구 자체가 <스타워즈>의 원작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역사가 짧아 신화라고 할 것이 마땅치 않은 미국에게 선사한 현대 신화라고 할까. 미국은 <스타워즈>를 시작으로 수많은 현대 신화를 만들고 있다. 


개인적으로 스타워즈 시리즈를 전혀 접하지 않았다. 못한 건 아니니 일부러 접하지 않았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너무도 방대한 세계관에 압도 당해 부담을 느꼈다. 한참 전에 끝난 시리즈를 이제 와서 다시 보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2015년 10년 만에 오리지널로 돌아왔고 이듬해에는 최초로 스핀오프를 선보이며 최소 2020년 이후까지 매년 오리지널과 스핀오프를 선보일 예정이라고 한다. 


두 번째 이유는 사라진 것이다. 첫 번째 이유는 오리지널과 세계관은 동일하지만 독립된 이야기를 내세우는 스핀오프를 보는 것으로 해결이 가능할 것이었다.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이하, '로그 원')는 나의 스타워즈 시리즈 입성의 시작이 되었다. 


실패 없는 성공을 위한 작전


영화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의 한 장면. ⓒ월트디즈니코리아



제국이 하는 일이 옳지 않다고 생각해 숨어 살던 제국군 과학자 겔렌 어소 가족은 결국 제국군 크레닉 국장에게 걸리고 만다. 겔렌은 제국으로 끌려가는 한편 겔렌의 아내는 죽고, 겔렌의 딸 진은 탈출한다. 시간은 흘러 15년 후, 겔렌은 제국에서 행성 하나를 파괴해버릴 치명적인 무기 '데스 스타' 개발에 다시 투입되고 반군은 이 사실을 알고는 그의 딸 진을 이용해 저지하려 한다. 


처음엔 거절했지만 이내 설득 당하고 만 진은 호기롭게 실행에 옮기고자 한다. 하지만 완성단계에 있는 데스 스타를 파괴하는 건 한없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 그때 갤런이 극비리에 남긴 비밀 영상을 보고 데스 스타의 설계도 존재와 위치를 알아낸다. 설계도를 탈취할 가능성은 불과 2.4%, 즉 이 작전에 투입된 모든 이들의 죽음을 뜻했다. 


더군다나 반군 의장단 내에서는 그냥 항복하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까지 나온다. 그럼에도, 아니 그럴수록 진은 강경하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그녀를 따르는 일행이 있다. 정보 요원 카시안, 무술 전사 치루트, 전투 전사 베이즈, 전향한 제국군 파일럿 보디, 그리고 새롭게 프로그래밍 된 제국군 안드로이드 K-2SO까지. 이들은 실패 없는 오직 성공을 위해 작전에 투입된다. 


스타워즈 시리즈의 확장


영화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의 한 장면. ⓒ월트디즈니코리아



<로그 원>의 시작은 상당히 중구난방이다. 시리즈 사상 처음으로 오리지널 스토리와 동떨어진 '스핀오프'를 선보임에 따른 딜레마가 존재했을 것이다. 오리지널 스토리를 전혀 몰라도 즐기는 데 큰 문제가 없게끔, 즉 새로운 팬을 위한 영화가 되어야 하면서도, 기존의 스타워즈 팬들에게 다시 없을 선물로 다가와야 했기 때문이다. 


'스타워즈' 시리즈라는 큰 골격과 세계관에 속해 있거니와 스토리를 모르는 이들을 위해서 최소한의 설명이 필요했기에 영화 초반 이곳 저곳, 이 사람 저 사람을 수시로 오가는 것이다. 제국군과 반군, 이 행성과 저 행성. 그것도 모자라 <로그 원>의 주인공들, 즉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처음 선보이는 캐릭터들까지. 


영화는 다양한 종류의 관객들에게 다양한 상황과 관계와 캐릭터를 최소한으로라도 보여주고 난 초반 이후에 비로소 날개를 핀다. 밉상 하나 없는 캐릭터 구성, 누가 봐도 납득할 만하거니와 한없이 직진에 가까운 작전 수행 과정, 이전 스타워즈 시리즈에서도 볼 수 있었다는 소규모 전투신과 볼 수 없었다는 대규모 전투신까지. 압도적이다. 


스타워즈를 모르는 이들과 잘 아는 이들 모두를 만족시킨 결과물이었다고 할까. 이는 스타워즈 시리즈의 확장과 관련이 깊다. 스핀오프의 가능성은 스타워즈 팬의 유입을 크게 도울 것이다. 동시에 그동안 비울 수밖에 없었던 구멍들을 메울 수 있게 되었다. 기존 팬들에게 큰 즐거움과 기쁨을 줄 것이다. 


'희망' 하나에의 반란


영화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의 한 장면. ⓒ월트디즈니코리아



로그(rogue)는 악당이라는 뜻이다. 악질적이고 악마적 기질이 있는 류의 것이 아니고 악동에 가깝다고 보면 되겠다. 극 중에서 전 제국군 파일럿 보디가 순간적으로 생각해낸 일당의 이름이다. 이들이 수행하는 건 '반란'이다. 아직 혁명이 일어나기 전, 반대를 무릎쓰고 자신들만의 신념으로 수행하는 반란 말이다. 그래서 이들의 반란은 제국에의 물리적 반란뿐만 아니라 반군연합에의 정신적 반란이다. 


이들의 불가능에 가까운 작전 수행의 원동력은 오직 '희망' 하나다. 제국의 최종병기 데스 스타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작동되지 않게 하지 않는 이상 단순히 반군연합뿐만 아니라 이 은하계에 아무런 희망이 남지 않게 된다는 생각, 그 생각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는 희망으로 수행한다.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고, 개인보다 집단이 더 이성으로 수렴된다고 하지만, 현실을 바꾸는 건 이성이 아닌 이상이다. 실행되기 어려운 이상의 실행이야말로 그러하다. 한없이 불가능에 가까운 작전을 실행에 옮겨 성공해내고야 마는 그 사람들이 있어서 이 세계는 끊임없이 바뀌고 그래서 지탱해나가는 게 아닐까. 


로그 원 일당은 스타워즈 세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이들로 남을 것이다. 한국 영화 <아나키스트> <암살>의 주인공들이 생각난다. 자신만의 삶을 살다가 어느 순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죽게된 그들. 하지만 그들은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닌 자신만의 삶을 살아 왔기에, 죽음도 자신만의 죽음이었을 것이다. 그건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스스로의 선택과 신념. 사사(私事)와 대의(大義)는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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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 스타,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 반란, 성공, 스타워즈, 스핀오프, 팬,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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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 악과 싸운 연대 투쟁의 희망 <내일을 위한 시간>

오래된 리뷰 2018.01.12 08:00



[오래된 리뷰] 다르덴 형제의 <내일을 위한 시간>


자타공인 거장 '다르덴 형제'의 원숙하고 완성된 스타일을 보여준 <내일을 위한 시간>. ⓒ그린나래미디어㈜



1990년대에 이어 2000년대, 2010년대까지도 칸이 가장 사랑하는 감독(팀)이라 할 수 있는 다르덴 형제. <로제타> <더 차일드>로 황금종려상을, <자전거 탄 소년>으로 심사위원대상을, <아들>로 심사위원특별상과 남우주연상을, <로나의 침묵>으로 각본상을 탔다. 그야말로 자타공인 명백한 거장이다. 


영화제가 사랑하는 그들의 작품은 예술성보다 현실성에서 기인한다. 그 현실성엔 지극히 현대적인 불안이 내재되어 있는데, 그들은 그 불안에 천착한다. 그 불안이야말로 현실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대체로 짧고 굵은 느낌이다. 군더더기 없이, 겉치레 없이, 미사여구 없이 다큐멘터리적으로 메시지를 전한다. 


2014년작 <내일을 위한 시간>은 다르덴 형제의 명성에 걸맞는 수상 실적을 내진 못했지만, 그들의 원숙하고 완성된 스타일의 면모를 가장 잘 내보인 작품이라해도 무방하다.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특별할 것 없는 설정이지만, 여지없이 그 이면에 깊숙이 깔려 있는 불안이 너무 직접적이어서 특별하게 다가온다. 거장의 솜씨다. 


짧지만 악몽 같은 투쟁 일지


영화는 주말 동안의 투쟁, 그 짧지만 충분히 악몽 같은 1박 2일을 보여준다. ⓒ그린나래미디어㈜



복직을 앞둔 금요일 오후, 산드라(마리옹 꼬띠아르 분)에게 줄리엣의 전화가 걸려온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 회사 동료들이 그녀의 복직 대신 보너스 1000유로를 선택하는 투표를 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반장에 의한 겁박에 의해 행해졌기에 사장한테 말하면 월요일에 재투표를 하게 해줄 거라는 것. 


산드라는 일자리를 되찾고 싶지만, 동료들에게 보너스 1000유로를 포기하고 자신의 복직을 선택하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하지만 그녀의 월급 없이는 생계를 충분히 꾸려가기 힘들다. 산드라는 남편의 격려와 협박 아닌 협박에 힘입어 주저하고 힘들어 하면서도 주말 동안의 동료 설득하기 여정에 나선다. 


이미 자신의 복직을 지지해주는 몇 명의 동료들을 확보해놓았지만 16명의 과반수인 9명을 설득시키기란 너무나도 어렵다. 말그대로 '일희일비', 우울증을 앓았고 아직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산드라에겐 지옥과 다름 아니다. 지지해주는 동료를 만나면 한없이 기쁘고 힘이 나지만, 반대하는 동료와 폭력을 휘두르려 하는 동료를 만나면 당장 때려치고 싶다. 복직한다고 해도 반대한 동료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운명의 월요일이 다가오고 있다. 


<내일의 위한 시간>은 주인공 산드라의 복직을 위한 주말 동안의 짧지만 악몽 같은 투쟁을 그린다. 그녀는 회사 동료들을 찾아다니며 계속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월요일 재투표에서 자신의 복직에 투표해 달라고. 그러면 동료들은 하나같이 묻는다. 다른 동료들은 어떤 의견을 냈느냐고. 이 단순한 설정에서 오는 긴장감이 묘하게 상당하다. 


산드라를 원하는 동료들, 원하지 않는 동료들


산드라를 지지하는 동료들과 지지하지 않는 동료들, 전부 각자의 사정이 있다.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그린나래미디어㈜



상상을 해본다. 대입을 해본다. 내가 산드라였다면? 내가 아파서 자리를 비웠음에도 회사는 충분히 잘 돌아갔다는데, 그리고 내가 복직하는 대신 동료들이 보너스를 받는다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가. 그들 모두 각자의 사정이 있다. 보너스를 받아야 하는 사정 말이다. 그걸로 그 이들을 원망할 수도 없는 거 아닌가. 


내가 산드라의 회사 동료들이었다면? 솔직히 말해서 무슨 이유를 지어내든 보너스를 택했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그녀가 돌아오든 돌아오지 않든 내가 일하는 데 있어 큰 변화가 있을 것 같지 않고,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에게 꽤 큰 돈이 돌아오는데 말이다. 그녀가 돌아온다면 그녀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뭐지?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는다는 걸 영화는 보여준다. 나처럼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않고, 모두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산드라를 원하지 않는 동료들은 모두 다 다른 이유와 사정이 있지만, 산드라를 원하는 동료들은 아무 이유없이 그저 산드라의 복직을 원하고 산드라에게 미안하고 산드라를 응원할 뿐이다. 


톨스토이의 저 유명한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다르다."가 생각나게 하는 대목인데, 주말 동안의 여정에서 산드라가 행복할 때는 그저 활짝핀 웃음만을 내보이는 반면 불행할 때는 그때마다 다른 표정과 행동과 말투가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현대사회의 '악', '불안', '투쟁', '연대', '희망'


현대사회의 '악'에 직면해 연대 투쟁의 희망을 이어나간다. ⓒ그린나래미디어㈜



영화는 산드라의 여정, 그 반복되는 여정에서 오는 긴장감 어린 서스펜스를 겉으로 내보이고 있지만, 이면에는 사실 이 현대사회의 뿌리내린 거대한 '악'의 결정체가 자리하고 있다. 애초에 한 사람의 인생이 달린 회사 복직과 생계에 아주 미묘하게 결정적인 보너스를 동일선상에 놓고 양자택일을 하게 만드는 것 자체가 악랄하기 그지없는 짓이 아닌가. 그에 비하면 반장이 협박을 일삼으며 자신을 포함한 사원들이 보너스를 타게끔 하려는 수작은 애교에 가깝다. 


거기에 산드라를 비롯한 회사 동료들은 모두 현대사회에 만연해 있는 '불안'의 일면들이다. 기본적으로 월급 없이는 생계조차 꾸려갈 수 없는 건 물론이거니와, 1000유로 정도의 보너스로 동료 한 명의 생계를 알면서도 짓뭉개버리는 결과를 찬성한다. 심지어 그 돈이 원래 받지 않았어야 할 돈임에도 말이다. 돈에 대한 막연한 불안은 이 사회에서 절대적인 것이다. 


한편, 산드라는 '열심히' 싸웠다. 지지하는 동료들과 함께 반대하는 동료들에 맞서 싸운 게 아니라, 심지어 반장과 사장을 상대로 싸운 게 아니라, 이 악몽같은 상황 그리고 우울증에 시름하는 자신에 맞서 싸웠다는 것이겠다. 그녀는 이겼을까, 졌을까. 이기는 게, 지는 게 의미가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 그녀는 왜 싸운 것일까. 그 회사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는 없어 보였는데 말이다. 


그녀의 짧은 여정이 긴 여운을 남기고 번뜩이는 깨달음을 안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녀는 바로 다른 회사를 알아볼 수도 있었을 텐데... 다름 아닌 그녀를 지지해준 이들이 있었기에 그녀는 이를 악물고 끝까지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그녀는 싸웠던 것이다. 그들 덕분에 그녀는 불행하지 않고 행복하다. 이것이 '연대'의 힘이 아닌가. 영화는 이 지독한 현대사회에 맞설 수 있는 희망의 불씨를 연대에서 찾았다. 우리도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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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위한 시간, 다르덴 형제, 불안, 악, 연대, 투쟁, 현대사회,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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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바꾼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 <1987>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8.01.03 08:00



[리뷰] <1987>


한국 현대사 중 가장 뜨거웠던 그때 1987년 상반기다. 지난 2017년 상반기도 그만큼 뜨거웠다. ⓒCJ엔터테인먼트



소름끼친다. 먹먹하다. 분노가 인다. 답답하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느꼈던 감정들이다. 이미 사건의 큰 얼개와 결과를 다 알고 있지만 이런 감정들이 들어와 마음을 헤집는 걸 막을 순 없었다. 2017년의 대미를 장식했던 장준환 감독의 <1987>에 대한 감상평 아닌 감정평이다. 


영화는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2013년을 전후로 본격적으로 우리를 찾아왔던 일명 '정치 영화'들과 맥을 함께 한다. 개중 상당수의 영화들이 흥행과 비평에서 성공하며 국민의 염원을 재확인하는 데 일조했다. <1987>은 그 정점에 서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1980년의 5.18만큼 한국 현대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바꾸는 거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들이 1987년에는 잇달아 터졌다. 


장준환 감독은 필모 통상 채 5편의 장편도 연출하지 않았다. 그중 대표작으로 2000년대 이후 최고의 안타까운 걸작 <지구를 지켜라>와 묵직한 수작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가 있다. 아무래도 <1987>이 장준환 감독의 새로운 대표작이, 아니 장준환 감독을 대표하는 작품이 될 게 확실해 보인다. 


평범한 우리에게로 이어지는 역사의 물줄기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바꾸는 건, 평범한 한명 한명이다. 즉, 우리들이다. ⓒCJ엔터테인먼트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조사를 받던 박종철군이 사망한다. 비상사태에 직면한 대공수사처, 책임자 박 처장(김윤석 분)은 시신을 화장시켜 증거를 인멸하려 한다. 하지만 박종철 사망 당일 당직이었던 최 부장검사(하정우 분)는 서류에 도장을 찍지 않고 부검을 명한다. 그의 검사 인생이 끝날 줄 알면서도. 


경찰은 이에 언론에는 박종철군의 사망을 단순 쇼크사로 전하고, 내부에서도 무슨 수를 쓰든 단순 쇼크사로 만드려 한다. 하지만 부검 소견 결과가 가리키는 건 명백한 고문 치사 사망, 여기에 동아일보 윤 기자(이희준 분)가 끈질긴 취재 끝에 박종철 사망 당시 소생시키려 했던 당사자 의사와 최 부장검사를 만나 진실을 밝혀낸다. 박 처장은 결국 박종철 고문 팀의 조 반장(박희순 분)과 말단을 구속시켜 사건을 무마하려 한다. 


이 거대한 사건의 물줄기는 조 반장이 수감된 교도소로 나아간다. 평소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었던 한 교도관(유해진 분)은 조 반장을 통해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되고 갇혀 있던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 재야인사 이부영의 편지를 역시 재야인사이자 민주화운동 기획자 김정남에게 전하는 임무를 맡는다. 하지만 그도 검문에 자유롭지는 못했던 바, 조카 연희(김태리 분)에게 부탁한다. 


민주화 같은 건 전혀 관심 없는 대학생 연희는 아무 생각 없이 이 거대한 물줄기의 일원이 된다. 그녀의 생각이, 그녀의 변화가, 그녀의 앞날이 궁금하다. 그녀의 변화가 곧 평범한 우리의 변화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그것이 아닐까. 연희에게 달려 있는 게 아닐까. 


영화 중심에 있는 사건, 그리고 연결고리 인물


영화는 중심에 '사건'을 두고, 그 사건의 다리 혹은 연결고리로 '인물'을 두었다. ⓒCJ엔터테인먼트



영화는 투 트랙 전략으로 그때 그 시절의 진실을 전달한다. 영화의 중심에 사건이 있고, 사건을 연결하는 인물이 있다. 일반적인 영화 서사에서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최소 한 명 이상의 영웅적, 또는 영웅과는 거리가 멀지라도 서사를 이끌어가는 핵심적 인물이 있기 마련이다. 관객은 그 인물 또는 인물들을 따라가며 영화를 즐긴다. 


반면 <1987>은 1987년 한국에서 일어난 가장 첨예한 사건들을 중심에 놓았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모를리 없는 사건들이기 때문에 더더욱 사건을 중심에 놓으면 안 되지 않을까 생각하기 쉬운 와중에, 흥행에 결정적 역할을 할 터인 인물들을 사건들의 연결다리로 배치했다. 


배우들의 희생 아닌 희생, 그리고 자연스레 이어지는 영화의 흥행적 희생, 이 영화는 일종의 의무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많은 배우들이 연기한 이들은 진실에의 희망을 전달하기 위해 일신의 영달을 포기한 이름모를 이들이다.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들이다. 마치 그들의 이름이 불리는 것, 그들이 한 일이 조명되는 것이 이 영화의 사명인 것처럼. 


결국 영화는 그때 그 시절의 진실을 다시금 전달하며, 이름이 알려졌던 알려져 있지 않던,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소소한 역할을 했던 다양한 사람들을 재조명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거기에는 비단 '착한 일'을 한 사람뿐만 아니라 '나쁜 일'을 한 사람도 포함된다. 픽션이든 팩트든 그 사람들의 속사정을 알게 된 것도 성과라면 성과일까. 


그때 그 시절의 힘


한 번 터진 희망의 물줄기는 것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거기엔 희망만 있진 않았을 터, 영화는 희망만을 보여줄 뿐이다. ⓒCJ엔터테인먼트



영화를 보는 내내 계속 생각난 영화가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루었지만 일명 '최루성 신파'로 호불호가 갈렸던 2007년작 <화려한 휴가>. 묵직하고 잔인하며 뜨겁고 가슴 저릿한 실화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영화의 씁쓸한 뒷맛. <1987>을 보면서 1980년도 제대로 재조명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최루성 신파와는 거리가 먼, 다큐멘터리라고 해도 하등 이상하지 않은 전반부와 그에 비해선 더 영화적이고 스토리텔링이 가미된 후반부로 구성되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전말을 아주 소상히 전달하고자 하였고, 연희라는 영화에서 거의 유일한 가상의 인물을 1987년 당시 소시민의 상징으로 등장시켰다. 


그럼에도 시종일관 가슴 먹먹한,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영화의 힘은 그때 그 시절에 있지 않을까. 그때 그 시절을 그야말로 제대로 전달하고자 했던 영화에 있지 않을까. 30여 년이 지난 2016~2017년에 한국 현대사에 남을 큰 일을 함께 치뤄낸 우리이기에 그 힘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게 아닐까. 


<1987>을 기점으로 최소한 당분간은 더 이상의 '정치 영화'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영화 내외적으로 성공적인 전달을 수행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 영화는 희망만을 전해준 폐해를 남기기도 했다. 1987년 이후 정부는 전두환에서 노태우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것도 양김 분열로 인한 참담한 정치적 현실 하에서의 32년 만에 실시된 직접 선거로 인해 말이다. 


여기에 영화 <1987>이 전해준 희망이 끼어들 틈 따위는 없다. 그래서 영화는 한편으로 그때 그 시절, 아주 짧았던 희망의 시절만을 보여준 허무맹랑한 실화 기반 판타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영화가 나온 이 시기가 다름 아닌 희망의 시절이길, 그 시절이 오래오래 가길 진심으로 바란다. 이 영화의 역사적 성패는 이 시대의 성패와 맥을 같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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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민주화, 박종철, 사건, 이한열, 인물, 정치 영화, 한국 현대사,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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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바링허우 세대, 어찌해야 할까?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7.12.11 08:00



[서평] <바링허우, 사회주의 국가에서 태어나 자본주의를 살아가다>


<바링허우, 사회주의 국가에서 태어나 자본주의를 살아가다> 표지 ⓒ미래의창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세대를 규정짓는 움직임이 있다. 우리나라는 '58년 개띠' '386 세대'를 지나 '88만원 세대'와 'N포 세대'에 이르렀다. 일본도 마찬가지, '단카이 세대'를 지나 '사토리 세대'가 있다. 이에 비해 중국은 생소할 수 있다. 중국은 '링허우'라는 말로 50년대부터 최근 90년대까지 10년 단위로 세대를 구분한다. 


그중에서도 중국의 80년대생을 일컫는 '바링허우'는 특별한 함의를 지닌다. 1980년대 직전, 1978년 10월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을 상징하는 문화대혁명을 부정하고 중국 사회주의의 현대화와 개혁개방정책 노선을 결정한다. 중국사회는 완전한 전환기를 맞이한 것이다. 이후 1가구 1자녀 정책 아래 태어난 바링허우들은 '소황제'라 불리며, 나라와 가정의 전과 비교할 수 없는 풍요를 누리며 성장한다. 


한편으론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체제와 사회의 전면적 변화를 온몸으로 체험한다. 50년대 이래 수많은 변화들이 거대한 틀 안에서 행해진 것이었다면, 80년대의 변화는 세상을 뒤엎는 경천동지격의 변화였다. 단도직입적으로 그들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태어났지만 엄연히 자본주의를 살아간다. 하지만, 여전히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이기에 그들은 때론 갈팡질팡하며 헤매고 때론 탄력적 선택을 행한다. 


1980년에 태어난 바링허우의 대표적 지식인 중 하나인 양칭샹이 그의 저서 <바링허우, 사회주의 국가에서 태어나 자본주의를 살아가다>(미래의창)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건 바링허우 세대의 현실이다. 그들은 대부분 실패의 연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고단하게 살아가는데, 저자는 그런 한 세대 전체의 실패를 결코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순 없다고 주장한다. 그건 사회의 문제라는 것이다. 


근본적인 변화 속 바링허우 세대


'슈퍼차이나' 시대가 도래한 지 이미 꽤 되었다. 2020년이면 세계 경제대국 1위에 오를 것이라는 전망 또한 이미 오래다. 엄청난 고속성장 시대가 지나고 성장 연착륙이 시작되었다지만 여전히 중국의 성장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가파르다. 중국은 연일 환호하고 전 세계는 중국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앞서 말했듯 그 엄청난 성장의 이면엔 근본부터 뒤바뀌는 변화가 있다. 그리고 그 변화의 한 가운데에 다름 아닌 바링허우가 있는 것이다. 물론 개중에는 시대를 이끌고 시대를 주름잡는 이들이 있다. 극소수의 선택받은 자들이다. 저자가 바라보는 건 '소수'의 그들이 아니다. 소수라고 소외받는 이들 중 하나라고 생각하지는 말자. 


이 책이 바라보려 하는 건 '다수'의 선택받지 못한 자들이다. 변화한 시대를, 변화하고 있는 시대를, 결국 혼란스런 시대를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살아갈 수 없는 이들이다. 책의 본문은 굉장히 짧은 편인데, 저자는 인문학자답게 사회인문역사적 비평론을 내세워 바링허우 세대를 조명한다. 


우선 자신 또한 바링허우 세대라 규정하고 자신의 피폐하고 어려운 일상을 풀어낸다. 무슨 짓을 하던 절대 살 수 없는 집, 이건 절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과거로 시선을 돌려 바링허우 세대가 역사 허무주의에 빠졌다고 규정한다. 그들에게 역사는 무거운 게 아니라 가벼운 것이다. 


현재로 돌아와 바링허우 작가의 대표주자이자 중국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한한'을 주목한다. 그는 저항의 상징이기도 한데, 저자가 보기에 진정한 자아의식과 힘 있는 정치적 신조의 결핍 때문에 영혼을 뒤흔들 힘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반면 바링허우 세대의 대부분은 '침묵'한다. 


어찌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현실은 피폐하고, 쉼없는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고, 저항하지 못하고 침묵할 뿐이며, 역사 허무주의에 빠져 있는 바링허우 세대를 말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중국의 현재와 미래를 짊어져야 할 세대가 아닌가. 문제도 이런 문제가 없다. 저자의 주장을 들어보자. 


"개인의 실패감과 역사 허무주의, 거짓과 허장성세가 사회와 역사로부터의 일탈의 구실이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실패감을 초월하고 다시금 역사의 현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강의와 서술, 글쓰기로 그칠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이런 행위들을 현실적인 사회 실천으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본문 137~138쪽 중에서)


굉장히 두루뭉술하고 추상적인 주장인듯, 정확히 핵심만 짚어 해야하는 것들을 말한듯, 모호한 결말이긴 하다. 내가 받아들이기엔 이렇다. 규정된 세대론에 갇히지 말고 직접 자신의 세대를 규정하라, 침묵하지 말고 저항하라,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옮겨라. 조금은 더 명확해지지 않았나 싶다. 


본문이 끝난 뒤 저자가 직접 바링허우 세대 5명과 각각 시행한 인터뷰가 실려 있다. 책 자체로 보면 다분히 끼워 맞춘 듯한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는데, 사실 본문보다 이 인터뷰들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는, 같은 듯 조금씩 다른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 같고 친구의 이야기 같고 우리의 이야기 같다. 


그들은 말한다. 그리고 저자는 그들의 입을 빌려 말한다. 바링허우 세대에게는 진정한 청춘이 없고, 악세집단이며, 차별의 한 가운데 있으며, 희망이 없으며, 꿈을 꿀 수 없다고 말이다. 와중에 눈에 띄는 건, 잘 나가는 한 바링허우가 자신이 속한 세대가 그 어느 세대보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인터뷰였다. 


이것이 현실이다. 대다수가 실패했다고 느끼고 희망이 없다고 느끼는 현상, 세대와 세대가 쪼개지는 건 물론이거니와 세대 내에서도 쪼개지고 양극화되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될 것이다. 이미 여기까지 와버렸다. 어찌할 것인가? 돌고 돌아 저자의 주장이 허무하게만 들리고, 앞은 깜깜하다. 역설적으로, 어떻게든 나 혼자라도 잘 헤쳐나가야겠다는 생각만 더 굴뚝같아 진다. 암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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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링허우, 변화, 사회주의, 슈퍼차이나, 자본주의, 현실,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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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운 시대의 젊은이들을 위한 현실공감판타지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7.11.08 08:00



[리뷰]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제목만으로도 힐링을 주는, 흔치 않은 영화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이수C&E



파라다이스 같은 곳에서의 뜬구름 잡는 희망섞인 대화에서, 썩어가는 포도와 출근 준비를 하는 찌든 얼굴의 남자로 이어진다. 그리고는 좁은 사무실에 우루루 모여 있는 직장인들의 모습들까지. 아오야마는 홀로 도쿄에 올라와 자취를 하며 오랜 취업활동 끝에 영업사원으로 발탁되었다. 하지만 상사에 의한 일방적인 갈굼, 당연히 수당을 받을 리 없는 야근, 한밤중까지 걸려오는 상사의 전화로 더 이상 살아갈 마음이 없다. 


어느 날 밤늦게 퇴근하던 그, 너무 힘들어서 쓰러진 것인지 자살하려고 했던 것인지 지하철이 들어오던 찰나 선로로 떨어지려 한다. 간발의 차이로 그를 살려내는 이, 야마모토. 다짜고짜 만면의 웃음을 띄며 아오야마의 초등학교 동창이란다. 그러며 한잔 하러가 서로를 알아간다. 그것도 모자라 아오야마가 쉬는 날을 이용해 아오야마의 고루한 외모를 세련되게 바꿔준다. 이후 일이 잘 풀리는 듯한 아오야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못한다. 가장 중요한 계약건을 거의 다 끝내놓고도 마지막에 가서 황당하고 어이없기 그지 없는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급기야 부장의 명령에 의해 그 계약건은 에이스인 이가라시에게 맡겨진다. 한편 야마모토가 성가신 아오야마인데, 우연히 길을 가던 야마모토의 평소답지 않은 우울한 모습에 전격적으로 인터넷 검색을 하고 다름아닌 그가 3년 전에 자살했다는 기사를 접한다. 이게 무슨?


힘겨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희망이란?


'제로'에서 시작하는 게 아닌 '마이너스'에서 시작하는 시대에 '희망'이란 존재할까. 있다는 그건 무엇일까. ⓒ이수C&E



힘겹게 살아가는 현대 젊은이들의 삶의 면면, 특히 취업을 다루는 콘텐츠가 정녕 부지기수다. 사실 2008년 전세계 금융 위기가 있고 나서 몇 년 후인 2010년대 초반에 절정으로 유행했기에 이젠 조금 시들한 감이 있다. 하지만 그 여파는 취업시장에서 회사로까지 침투했으니, 영화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는 그 이야기다. 


물론 회사에서 힘든 이야기는 비단 지금뿐의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육체적으로는 위기 시대가 아닌 성장일로 시대 때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때의 노동자는 성장을 위해 한몸 바쳐 희생하는 조직체였다. 지금의 객체적 개념과는 천지 차이다. 그래서 '나때는 말이지-' '요즘 젊은 것들은-'으로 이어지는 장광설이 나오는 것일 테다. 


지금은 제로성장, 아니 마이너스성장 시대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가까스로 제자리를 지킬 수 있는 지금, 육체적 고통 이전에 정신적 고통이 기본적으로 수반된다. 압박을 하고 압박을 당하는 모양새가 전과 비할 바가 아니다. 육체적 고통은 어떠냐고? 절대적 강도가 줄어들었을 뿐, 여러모로 발전된 현대사회의 기준과 일치하진 못한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배경으로 사는 게 뭐냐는 질문에 희망을 갖는 거라고 대답하는 대화로 영화가 시작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국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희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희망이라는 게 어떤 성격일까. 더 나은 회사원이 될 거라는 희망? 더 나은 인간이 될 거라는 희망? 부디 후자이길 바래본다. 


치가 떨리게 공감되는, 회사의 악랄한 일들


영화는 신입사원이 겪는 악랄하기 짝이 없는 회사 상사의 술수를 초중반에 집중적으로 보여주며 후반에 있을 감동 코드를 배가시키고자 한다. ⓒ이수C&E



영화는 아오야마가 야마모토 덕분에 보다 밝게 바뀌어가는 만큼 회사에서의 일로 더욱 힘들어 한다. 그러며 한순간 눈물 쏙 빼놓는 감동도 선사하는 걸 잊지 않는다. 전형적이리만치 일본적인, 즉 밝은 것이든 악랄한 것이든 감동적인 것이든 극단을 선보이는 것이다. 그중 가장 와닿는 건 단연 회사에서 겪는 악랄한 일들이다. 


같은 회사원으로 공감을 하고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아오야마를 위로하고 걱정하는 나를 발견한다. 힘든 하루 일을 마치고 오직 상사만을 위해 야근까지 완료한 후 걸려오는 상사의 전화, 그저 쉬고 싶고 자고 싶고 내일 따위는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여기서 가장 악랄한 건 업무시간 이후에 걸려오는 상사의 전화다. 


믿기 힘든 실수로 중요한 계약건이 날아간 아오야마에게 내려진 명령, 에이스 이가라시에게 계약을 통째로 넘겨라. 그리고 사무실 직원 모두에게 무릎 꿇고 진심으로 사과하라.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여기선 인격살인과도 같은 사과 방식보다 몇 개월 동안 공들인 계약건이 성사 직전 통째로 넘겨졌다는 게 더 악랄하게 다가올 수 있다. 


아오야마가 자살을 생각하는 건 그리 와닿진 않는다. 극의 전개상 어쩔 수 없는 거라고 해도 말이다. 반면, 다음날 기다리고 있을 끔찍하고 견디기 힘든 일을 생각하느라 '자야 한다, 자야 한다' 말하면서도 잘 수 없는 아오야마의 잠자리는 치가 떨리게 공감된다. 생각이 꼬리를 물어 잘 수 없고, 벌떡벌떡 일어나고, 괴로워 미칠 것 같은...


전형적인 현실공감판타지


이 영화는 현실공감판타지다. 현실을 기반으로 하지만, 결론으론 현실에서 거의 불가능한 일들이다. 그럼에도 공감이 가는 건... ⓒ이수C&E



우린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야마모트를 쫓아가 들여다봐야 한다. 모르긴 몰라도 그에게도 아마 아오야마와 비슷한 일이 있었을 게다. 그가 아오야마에게 건네는 별 거 아니지만 그 어떤 말보다 진실된 말들에서 행간을 읽어볼 여지가 있다. '무슨 일 있니?' '잠은 잘 자니?' '밥은 잘 챙겨먹고?'


저렇게 물어봐주는 사람은 아마 가족, 또는 가족 같은 사이뿐이지 않을까. 영화는 이쯤에서 자연스럽게 가족 이야기, 가족의 소중함으로 이어진다. 이어서 회사원이 아닌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로까지. 전체적으로 본연의 맛을 잃고 조금 삐그덕대는 느낌이 들지만, 한순간에 짧고 굵은 감동의 눈물로 어느 정도 상쇄가 된다. 


아오야마의 선배이자 팀 에이스 이가라시의 표정에서 드러나는 불만과 불안 등이 일찌감치 겉으로 표출되어 갈등이 이어졌으면 단순히 신입사원의 이야기가 아닌 회사 전체의 이야기가 될 수 있어 영화 전체적으로 더욱 입체감이 살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그러기엔 이 영화의 가고자 하는 방향이 다른 데 있긴 했다. 


자신을 제외하고는 책임질 사람이 없는 아오야마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제목처럼 쉽게 회사를 그만두는 것에 긍정적 공감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현실공감판타지. 영화를 보는 순간이나마 공감하고 위로하고 위로받고 대리만족할 수 있었다. 이 영화의 목적이 그것이었을 테고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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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과 슬픔의 설원... 그럼에도 희망의 작은 불씨 <윈드 리버>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7.10.05 08:00



[리뷰] <윈드 리버>


영원한 설원의 그곳 '윈드 리버'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 ⓒ유로픽쳐스



2015년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2016년 <로스트 인 더스트>로 칸을 사로잡으며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린 테일리 쉐리던. 그는 이 두 편의 웰메이드 영화 각본을 책임졌다. 아무래도 영화 스텝 중에선 연출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클 텐데, 각본이 각광받는 영화가 종종 있다. 이야기가 주는 힘이 어마어마한 경우가 그렇다. 


테일리 쉐리던이 다시 1년 만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 영화로 찾아왔다. 이번엔 각본에 더해 연출까지 책임진 <윈드 리버>다. 미국 서부 와이오밍주에 위치한 '윈드 리버'라는 곳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꾸려지는데, 그곳은 인디언 보호구역이거니와 끝없는 설원이 펼쳐져 있다. 8월까지 눈이 내려 쌓인다. 


아무래도 사건이 단순히 사건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이 분명할듯, 상징과 비유가 보는 이의 머리와 가슴을 뒤흔들고 후벼팔 것이다. 대략의 분위기만 훑어보아도 전작 두 편의 향기가 나는 것 같다. 우린 이 영화에서 미국의 속살을 보게될 여지가 크다. 그리고 거기에서 거대한 두려움이나 불안, 희망의 작은 불씨를 느낄 것이다. 


아픔과 슬픔, 그리고 희망


설원에 파묻힌 아픔과 슬픔들, 그럼에도 희망의 불씨는 살아 있다. ⓒ유로픽쳐스



끝없이 펼쳐진 설원의 한밤중, 피투성이 얼굴의 한 여인이 맨발로 달린다. 무엇인가로부터, 누군가로부터 도망치는 듯하다. 그녀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그곳은 일개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없는 윈드 리버 아닌가. 한편 야생동물 사냥꾼 코리(제레미 레너 분)는 옛 장인어른 농장에서 소가 피습당했다는 속보를 접하고 윈드 리버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향한다. 그 원인을 찾아 근처를 수색하던 도중 여인의 시체를 발견한다. 


그 여인은 인디언 나탈리, 코리도 잘 안다. 다름 아닌 3년 전 잃은 딸의 절친이었다. 그런데 나탈리는 성폭행을 당한 뒤 설원의 한복판에서 죽어 있다. FBI의 허가가 필요한 일이다. 가장 근처에 있는 FBI 요원 제인(엘리자베스 올슨 분)이 달려온다. 하지만 그녀는 신참이거니와 윈드 리버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코리가 앞장서 그녀를 이끈다. 코리에게도 아픈 과거가 있는 만큼, 나탈리의 아빠와 약속한다. 반드시 그 놈을 잡겠다고, 잡아서 죽여버리겠다고, 아주 고통스럽게, '윈드 리버'만의 방법으로. 제인과 코리, 코리와 제인의 공조 수사가 시작된다. 그 끝에서 형용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이 반길 준비를 마쳤다. 


그럼에도 희망을 언급할 수 있는 건, 아픔과 슬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그래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 덕분이다. 또한 그런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이해하고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사람들 덕분이다. 영화는 사회에 만연한 '잔인'에 창끝을 겨누는 것에 초첨을 맞추면서도, 잔인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조용한 응원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설원과 미국


이 설원은 미국 그 자체다. 단적으로, 변화를 기대할 수 없지 않은가. ⓒ유로픽쳐스



설원은 자연이 줄 수 있는 최악의 조건 중 하나다. 바다에서 생존하는 것, 사막에서 생존하는 것 모두 어느 정도 가능하다. 하지만 설원은 이것들과는 또다른 차원이다. 설원에 오아시스 따위가 있겠는가. 맹렬한 추위의 설원에서 춥지 않을 방법을 찾을 수 있겠는가. 시시각각 변하는 사막과 바다와 달리, 변함없는 설원 아래 무엇이 있는지 알 방도가 있겠는가. 눈이 와서 더 쌓이면 쌓였지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설원이 상징하는 건, 이제까지 테일리 쉐리던이 취한 스텐스를 볼 때 '미국'이다. 더이상 변화를, 발전적이고 건설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미국의 축소판이다. 그렇다면 왜 와이오밍주 윈드 리버일까. 인디언 보호구역말이다. 영화는 미국에 남은 유일한 희망이 거기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코리는 비록 인디언이 아닌 백인이지만 100년 전에 선조가 건너와 거의 인디언이나 다름 없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고 그들의 생각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몇몇 인디언들은 그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한편 코리와 달리 그곳에 일을 하러 온 백인들이 있다. 그들은 인디언들을 이해하기는커녕 그곳의 자연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불이해는 백인과 인디언만의 문제 따위가 아니다. 이는 일종의 상징이고, 미국에서 이런 모습은 전 세대와 전 인종과 전 계급 간에서 볼 수 있다. 그러하기에 영화에서 FBI 신참요원 제인의 행동이 중요하다. 그녀는 단순히 여러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어리바리 신참의 클리셰가 아닌 것이다. 그녀야말로 '희망'이다. 그녀가 얼마나 이 자연을 이해하고 인디언들을 존중하고 그 모든 것에 공감을 할 수 있는지. 


이해와 공감의 부재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다름 아닌 '이해와 공감의 부재'다. 쉬우면서도 어려운... ⓒ유로픽쳐스



설원에서 사람 죽이는 일은 아주 간단하다.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할 필요가 없다. 기절시키고는 제대로 된 장비 하나 없이 설원 한가운데에 버려두면 된다. 멀리 못가 죽고 말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그런 곳이 비단 설원뿐이겠는가. 어느 사회에서라도 가능한 일이다. 우린 그런 사회에서, 그런 나라에서 살고 있다. 미국만의 얘기가 아니다. 세계는 긍정적인 방향으로든 부정적인 방향으로든 서로를 따라간다. 


모든 건 이해와 공감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수없이 오랫동안 그곳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부재는, 아무 준비와 생각 없이 현장에 온 제인의 모습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또한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부재는, 영화의 내용과 메시지 특성상 나와 있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과연 친히 나서서 악을 처단하려는 코리의 행동은 옳은 것일까. 물론 그가 행하는 처단 방법은 인간에게 절대적 최악의 조건인 '설원'이라는 자연에 맡기는 것일 테다. 그럼에도 그런 생각 자체가 괜찮은 걸까. 영화가 그를 희망에의 연결고리로 포지셔닝해도 좋은 것일까. 판단하기 힘들지만, 그만큼 세상이 절망적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거 하나만 기억해도 충분하다. 그 설원에서 죽어간 그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을까. 그 아픔에 공감하고 기억하고, 그 아픔에 슬퍼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 희망의 작은 불씨일지 모르지만, 결코 꺼지지 않을 불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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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버리지 말자'는 인생에의 지독한 은유 <쇼생크 탈출>

오래된 리뷰 2017.09.01 08:00



[오래된 리뷰] <쇼생크 탈출>


어느덧 개봉 20년이 훌쩍 넘은 자타공인 최고의 영화 <쇼생크 탈출>. Best of Best다. ⓒ더 픽쳐스



평생 가장 많이 본 소설은 J. 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우연히 접하곤 1년마다 꼭 한 번씩은 봐서 최소 10번은 족히 봐왔다. 한국어는 물론 영어로도 중국어로도 봤고, 일본어로는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요즘 몇 년 동안엔 못 보고 있는데, 여전히 내 생애 최고의 소설로 남아 있다. 드라마도 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 <하얀 거탑> <하이킥 시리즈> <응답하라 시리즈> 등. 


영화는 어떨까. 한국과 미국 것이 나눠진다. 윤종빈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를 참 많이 봤다. 군대 경험이 있는 한국 남자라면 뿜어져 나오는 웃음과 평생 남을 트라우마의 역설로 괴로워하면서 재밌게 볼 것이다. 그리고 스티븐 킹 원작,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의 <쇼생크 탈출>이다. 


스티븐 킹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은 미드의 새로운 신기원을 이룩한 <워킹데드 시리즈> 초창기를 진두지휘한 이로 유명하다. 모르긴 몰라도 많은 이들이 가장 많이 본 영화로 <쇼생크 탈출>을 뽑지 않을까 싶다. TV에서 잊을 만하면 방영되는 결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수많은 명작을 제치고 '네이버 평점'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명작 중의 명작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쇼생크 탈출'의 의미는 무엇일까?


주인공 앤디에게 탈옥, 즉 '쇼생크 탈출'은 자유 그 자체다. 뭐가 더 있겠나. ⓒ더 픽쳐스



영화는 1947년 미국, 전도유망한 은행 부지점장 앤디(팀 로빈슨 분)가 바람난 아내와 그 애인을 총으로 쏴죽인 혐의로 종신형을 언도 받고 '쇼생크' 교도소에 갇히면서 시작된다. 다음날 입소 동기 중 한 명이 잘못 보여 간수장에게 얻어맞고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하지만 그건 으레 있는 일로 치부된다. 이곳의 갇힌 죄수들은 인간 이하 취급을 받으며 소장과 간수장 이하 간수들은 절대적 권력의 소유자들이다. 


교도소에 갇힌 죄수들 모두가 그리 주장하듯이 앤디도 한사코 무죄를 주장한다. 자신은 아내와 그 애인을 죽이고 싶었지만 결코 죽이진 않았다는 것. 곧 쓰러질 것 같이 비리비리한 앤디의 첫인상을 좋지 않게 보았지만 점점 그 결기랄까 아우라랄까에 빠져든 레드(모건 프리먼 분), 그는 이미 20년째 복역 중인 종신형수로 구하지 못하는 물건이 없는 이다. 앤디는 그에게 상식 밖의 물건들을 요청하곤 한다. 


앤디는 오래지 않아 간수장과 소장의 눈에 띈다. 은행원이라는 점을 이용해 간수장의 세금 문제를 해결해주고 이어 소장의 회계 비서를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그건 곧 소장의 비리를, 즉 돈세탁과 세금포탈을 맡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앤디는 우연히 자신의 혐의가 벗겨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소장이 이를 가로막는다. 어느날 앤디는 방에서 감쪽 같이 사라지는데... '쇼생크 탈출'을 감행한 것일까. 


자유에의 희망


앤디가 역설한다. '자유' 그 자체보다 더 필요한 건 자유에의 '희망'이라고. ⓒ더 픽쳐스



원작자 스티븐 킹은 스릴러공포 장르로 유명하고 또한 정평이 나 있다. 소설도 소설이지만 영화로 나와 엄청난 인기를 얻었는데, <캐리> <샤이닝> <미저리>라는 공포스릴러의 대명사급 영화들이 그것이다. 반면 생각 외로 공포와는 거리가 먼 드라마 장르로도 우리를 설레게 했다. <쇼생크 탈출>을 필두로 <그린 마일> <스탠 바이 미> 등의 영화들이 그것이다. 그는 정녕 장르를 가리지 않는 이야기꾼인 것이다. 


<쇼생크 탈출>은 제목에서도 충분히 유추가 가능하듯 <몬테크리스토 백작> 이후 '감옥 탈출'이라는 오래되었지만 엄청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모토를 가져왔다. 우리는 영화에서 주인공이 '어떻게' 탈출할지 노심초사, 학수고대하며 지켜볼 수밖에 없다. 얼마나 기상천외한 방법을 선보일까?


하지만 이 영화는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한 것들을 우리에게 선보인다. 그건 '왜' 탈출해야 하는지와 맞물려 있는데, 영화는 시종일관 단순명쾌하게 '자유에의 희망'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 모습은 전적으로 앤디의 행동과 그 행동으로 레드가 유추하는 바를 통해서다. 그리고 몇몇 죄수들의 에피소드들까지. 


앤디는 간수장의 세금 문제를 해결해주는 대신 함께 땡볕 아래서 일하는 동료 죄수들에게 '맥주' 2캔씩을 부탁하고, 한창 소장 밑에서 잘나가고 있을 때 모든 죄수들에게 모짜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선사하곤 독방으로 직행한다. 레드에게는 반드시 탈옥하여 완벽한 자유를 선사할 멕시코의 어느 해변에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이름으로 함께 사업할 것을 약속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자유'로 수렴된다. 그 장면들이 하나같이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들이다.


'희망을 버리지 말자'는 인생에의 지독한 은유


그렇지만, 희망에의 과정은 너무 가혹하다. 그리고, 자유에의 결과는 더욱 가혹하다. ⓒ더 픽쳐스



마냥 좋을 것만 같은 '자유'의 역설도 잊지 않는다. 장장 50년 동안 교도소에서 생활하다가 이제는 자신의 죄를 완전히 뉘우치고 사회생활을 해도 되겠다고 판단해 풀어준 죄수가 있다. 그는 교도소 내에서 도서관 사서로 꽤 중요한 일을 하며 간수와 죄수 모두에게 두루 신뢰를 얻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밖에 나가면?


죄수들 중에서야 중요하고 신망이 두텁지 일반인 중에서는 죄수 출신 늙은이일 뿐이다. 그는 교도소에서 나가기 전에 사고를 일으켜 형을 연장하고자 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교도소를 나가서도 사고를 일으키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너무 늦었음을 직감했다. 결국 그가 그가 할 일은 생을 마감하는 것밖에 없었다. 자유를 진정 바라고 그에 준비된 사람만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역설을 몸소 보여준 에피소드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딜까, '내가 있고자 하는 곳'은 어딜까. 나에게 자유가 없을 때 과연 끝없이 자유를 탐할 수 있을까. 본래 자유로운 몸이었다면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실로 오랫동안 자유가 주어지지 않을 때도 여전히 자유를 탐할까, 오히려 자유가 없는 그곳이 더 자유롭다는 역설이 가능하지 않을까. 


문제는 그럼에도 강제로 자유가 주어졌을 때다. 강제로 자유를 빼앗고 다시 강제로 자유를 부여하고. 그보다 더 '강제'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사례는 없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말한다. 희망을 절대 버리지 말라고. 여기서는 '언젠가 반드시 풀려날 거라는' 직접적 희망이겠다. 인생의 부분부분들에 대한 지독한 은유인데, 살면서 진정 자유롭다고 생각할 때가 언제인지, 과연 그런 때가 있긴 한 건지 생각해보면 알 것이다. 실제 감옥을 탈출해서는 안 되겠지만, 인생 감옥에서는 탈출을 꿈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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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파리 같은 삶... 나비가 되고자 하는 이의 희비극 <똥파리>

오래된 리뷰 2017.07.19 08:00



[오래된 리뷰] 양익준 감독·각본·주연 <똥파리>


똥파리 같은 삶을 사는 이가 있다. 모두가 다 피하는 그. 그는 어쩌다가 그런 삶을 살게 되었을까? 그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주)영화사 진진



용역 깡패 상훈(양익준 분)은 닥치는 대로 욕을 하고 폭력을 휘두른다. 돈을 받아와야 할 대상은 물론, 같이 일하는 후배들도 마음에 안 들면 가차 없이 팬다. 그런 그도 이복 누나와 그 아들인 이복 조카한테는 그나마 대해주는 편이다. 상훈은 사람을 패서 번 돈을 조카 손에 쥐어주며 그 표현을 한다. 


한편 상훈은 길을 가다 우연히 여고생 연희(김꽃비 분)와 시비가 붙는다. 안하무인 상훈에게 대적할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있을까 하는데, 연희는 전혀 주눅들지 않고 상훈에게 대들며 욕을 날리고 침을 뱉고 때리기도 하지 않는가? 이에 상훈도 주먹을 날리고는 곧 둘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가까워진다. 그들에겐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상훈은 15년 만에 출소한 아버지를 찾아가 무지막지한 폭력을 가한다. 그는 왜 아버지에게 폭력을 날리는 것인가? 곧 기가 막힌 사연이 밝혀진다. 상훈이 어린 시절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무차별 폭력을 휘둘렀다. 어느 날 급기야 식칼로 위협을 하려 하는데, 여동생이 사이에 끼어들어 대신 칼에 맞고 죽는다. 상훈이 여동생을 들쳐엎고 병원으로 향하고 뒤따라 오던 어머니는 차에 치여 유명을 달리한다. 그리고 이미 아버지는 새살림을 차렸던 것이다. 


연희에게도 사연이 있다. 엄마는 포장마차를 운영하다 용역 깡패에 맞아 죽고 없다. 아빠는 정신 이상으로 집에서 놀고 먹는데, 허구헌날 죽고 없는 엄마 타령이다. 오빠라고 있는 영재는 하는 일 없이 연희에게 돈을 뜯어가며 욕을 하고 폭력을 휘두른다. 여고생에 불과한 연희는 공부는 물론 알바를 해서 돈을 벌고 집안일을 도맡아 한다. 


양익준 원맨쇼의 수작 <똥파리>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한국 독립영화 르네상스 한 가운데에 <똥파리>가 있다. ⓒ(주)영화사 진진



2009년작 독립영화 <똥파리>는 양익준 감독·각본·주연의 원맨쇼에 가까운, 그럼에도 수작 중 수작이라 할 만한 작품이다. 악마의 폭력을 휘두르는 가해자와 그로 인해 어떤 식으로든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긴 피해자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함께 살아가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거니와, 그 해결 방도를 나름대로 제시하고 또 피해자였던 가해자의 흔하디 흔한 자기 변명을 정면으로 응시한 문제작이다. 


이 작품은 2010년을 좌우한 독립영화의 르네상스 한가운데에 위치한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독립영화 3대 작품으로 2005년작 <용서받지 못한 자>, 2009년작 <똥파리>, 2011년작 <파수꾼>을 뽑는데 <똥파리>가 그중 가장 덜 어렵고 가장 직선적인 작품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가장 성공한 독립영화 중 하나이다. 


사실 이 영화는 상대적으로 그리 폭력적으로 비춰지진 않는다. 육체적 폭력의 수위 자체가 그리 높진 않은 것이다. 다만, 폭력의 주 상대가 다름 아닌 가족이라는 점에서 거부감이 크게 다가온다. 그리고 영화 내내 쉬지 않고 나오는 쌍욕도 거북하게 다가온다. 욕은 육체적 폭력의 전조처럼 느껴지기에 더 두렵고 무서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린 이 영화의 폭력 수위 자체가 아닌 폭력의 주 상대와 그 연유에 집중해야 한다. 혹여 거기서 폭력의 미학이라든지 폭력의 정당함 따위를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폭력의 되물림이 결코 정당방위처럼 여겨져서는 안 된다. 나는 상훈의 폭력성이 아닌 상훈의 자상함과 따뜻함, 착함을 찾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똥파리>가 남겨둔 기회의 희극 가능성


일말의 가능성도 없이 나락 같은 비극으로 끝나기 마련인 폭력에 관한 영화들 와중에 기회의 희극 가능성을 남겨둔 <똥파리>. ⓒ(주)영화사 진진



위에서 언급한 <용서받지 못한 자>나 <파수꾼> 또한 다분히 폭력에 관한 영화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또는 인지 정도는 하고 있는 사이에 '폭력의 되물림'의 희생자가 된 이들이 주인공이다. 그들은 그 사슬을 끊고 과거의 나와 단절하고자 도움을 청하고 자신을 바꾸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 대상은 어쩔 수 없이 폭력의 되물림과 연관된 자들이다. 결국 주인공은 자살을 택한다. 


<똥파리> 주인공 상훈 역시  '폭력의 되물림'의 희생자다. 그 역시 그 사슬을 끊고자 다짐하고 자신을 바꾸고자 하려는데, 어이없게도 그는 죽임을 당한다. 그 대상은 예상했듯이 폭력의 되물림과 연관된 자이다. 누군가가 시작했을 이 폭력들은 결론적으로 가해자 없이 피해자만 속출시킨다. 


하지만 <똥파리>는 다른 작품과 달리 여지를 남겨둔다. 비극적 요소는 당연한 것이지만, 한편으론 기회의 희극 가능성, 그 씨앗을 완전히 거두어들이진 않는다. 상훈이 죽고 나서, 그를 제외한 거의 모든 이들이 함께 하는 모습이 보인다. 상훈의 아버지, 상훈의 이복누나와 남편, 그 어린 아들, 그리고 연희까지. 여기서 다른 누구도 아닌 상훈의 아버지가 눈에 띈다. 아이러니하지만, 어떤 '희망'과 '기회'의 열망을 엿볼 수 있다. 


물론, 다분히 비극적 요소도 있다. 그 연결고리는 제2의 상훈이라고 할 수 있는, 연희의 오빠인 영재. 그는 비록 불우하기 짝이 없는 가정환경이지만 꿋꿋하게 살아가는 연희와는 달리 상훈처럼 용역깡패의 길을 간다. 다름 아닌 그가 상훈을 죽이는데, 상훈의 아버지조차 희망과 기회의 공동체 안에 속하지만 그만은 속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안엔 연희와 영재의 엄마를 죽게 한 이가 상훈이라는 비극의 선대(先代)가 있었으니...


폭력의 사슬을 끊어내는, 최소한의 해결 또는 방편


이 뫼비우스의 띠 같은 폭력의 사슬을 끊어낼 방법이 있는가? 이 영화는 그걸 몸소 보여준다. ⓒ(주)영화사 진진



어떤 종류의 폭력이든, 그것이 잉태된 이후에는 수많은 길이 존재한다. 하지만 가장 악질적인 폭력인 '가족에의 폭력'은 누가 어떻게 구원할 수 있을까. 거기엔 과연 길이 존재할까. 오직 비극으로의 길밖에 없지 않은가. 영화에서처럼 당사자들 중 누군가가 어떤 식으로든 사슬의 고리를 끊어내야 하는데, 그 사이에 퍼진 암세포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일이다. 이쪽이 해결되는 저쪽이, 저쪽이 해결되면 그쪽이 문제다. 


양익준 감독은 이런 거시적인 관점까지 완벽하리만치 균형있게 그려냈다. 이 세상에 완벽한 해결이라는 건 없다는 진리 위에, 비극의 계속되는 잉태와 희망을 꿈꾸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양면을 올려놓은 것이다. 그는 불안하지 않은 상태를 불안해 하는 현대인의 모순적인 정상을 이런 식으로 포착해낸 듯하다. 


나 또한, 우리 또한 어떤 식으로든 폭력의 사슬 위에 서 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무수히 많은 종류의 폭력들이 지난 세월 나를 괴롭혀 왔다. 그건 즉, 나 또한 누군가를 괴롭혀 왔다는 뜻이다. 내가 알기론, 사람은 받은 것을 최소한은 돌려주려는 습성이 있다. 문제는, 그걸 당사자한테 돌려주긴 쉽지 않으니 다른 누군가에게도 전해지는 것이다. 그건 설사 내가 의식하고 있어도 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거기엔 당사자 또는 당사자가 포함된 집단에 어떤 큰 결단 내지 큰 사건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게 어떤 결과를 낳을지 전혀 알 수 없음에도 말이다. 심지어 그 결과가 대부분 그리 좋지만은 않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영화는 그 잔인하기 짝이 없는 속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최소한의 해결 또는 나아감을 위한 방편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다르다. 제3의 인물이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슷한 아픔을 겪은 사람이라면 비록 애초에 다가가기 힘들겠지만 훨씬 더 가깝고 이해 가능한 도움을 줄 수 있을 테지만, 그저 그(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이후를 생각하지 않은 불행한 끝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생이라는 게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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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ingenv
기회, 독립영화, 똥파리, 방편, 양익준, 폭력, 해결,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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