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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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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날짜
  • 영화 안팎에 메시지를 던지는 스티븐 소더버그의 실험 <높이 나는 새> 2019.02.15
  • '돈'이 되는 '무명'의 그림을 향한 추악한 욕망 천태만상 <벨벳 버즈소> 2019.02.11
  •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 근원에 목마른 인간이 들어가다 <서던 리치: 소멸의 땅> 2019.02.07
  • 21세기형 비극이자 악몽이자 재앙 <FYRE: 꿈의 축제에서 악몽의 사기극으로> 2019.02.01
  • '중국영화'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적절한 킬링타임용 영화 <동물세계> 2019.01.30
  • 너무 무게 잡지 말고, 웃기려면 제대로 웃깁시다! <극한직업>(2) 2019.01.28
  • 호불호가 갈릴, 혁신적 인터랙티브 방식의 영화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 2019.01.25
  • 100년 전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흔적을 따라서... <임정로드 4000km> 2019.01.21
  • 결국, 다시, 사랑이라고 말하는 러브 스토리 <먼 훗날 우리> 2019.01.14
  • 하나의 공간, 하나의 세계, 하나의 우주를 둘러보는 것 <인 디 아일> 2019.01.11

영화 안팎에 메시지를 던지는 스티븐 소더버그의 실험 <높이 나는 새>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9.02.15 08:00



[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높이 나는 새>


영화 <높이 나는 새> 포스터. ⓒ넷플릭스



하나의 브랜드가 된 지 오래인 그 이름 '스티븐 소더버그', 그 누구보다 충격적인 센세이셔널한 데뷔 이후 하염없이 '내리막길'만 걷고 있는 불세출의 영화 감독이다. 물론 그 와중에도 말만 들어도 알 만한 작품을 수두룩하게 내놓았다. 


그는 할리우드 메인 스트림과 실험정신 가득한 독립영화계를 오가며 연출, 제작은 물론 촬영, 편집까지 도맡아 하는 괴이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영화계에서 이만큼의 천재도 없고 이만큼 노력하는 이도 없으며 이만큼 자유롭게 즐기는 존재도 없다. 


작년에는 본인이 직접 아이폰 7 플러스로 촬영을 도맡아 한 영화 <언세인>을 내놓더니, 올해에는 역시 본인이 직접 아이폰 8으로 촬영을 도맡아 한 영화 <높이 나는 새>를 내놓았다. '내리막길'을 이처럼 즐길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각설하고, 영화 <높이 나는 새>는 NBA 직장폐쇄에 당면해 상황을 일소해보려는 차세대 스타 에릭의 에이전스 레이와 그의 전 비서 샘의 이야기이다. 실제로, NBA는 8년 전 2011년 7월 1일을 기해 NBA 역사상 4번째의 직장폐쇄를 단행해 11월 말쯤에야 끝났던 전력이 있다. 


NBA 직장폐쇄 와중에서


NBA 선수 에이전트 레이는 NBA 차세대 스타가 될 재목인 신입 에릭을 맡고 있다. 하지만 리그는 직장폐쇄 6개월 째, NBA와 선수협회의 끝나지 않는 대립으로 개막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서 선수들이나 에이전트들 모두 일도 못하고 돈도 벌지 못하고 있다. 


모두가 곤란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레이는 회사의 해고 압력에 시달리는 한편 진심으로 선수들을 걱정하고 있다. 선수협회를 대변하고 있는 마이라와 연락하고 만나면서 수시로 상황을 엿보지만 변하는 건 없어 보인다. 


NBA는 오직 돈만 생각하고, 선수협회도 돈을 생각하는 건 매한가지이지만 선수로서의 인생도 생각하고 있다. 선수와 한 몸이나 매한가지인 에이전트는 선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지만, 에이전트 회사는 역시 돈만 생각한다. 정작 선수는? 그저 경기를 뛰고 싶을 뿐이다. 


와중에, 할 수 있는 게 없어 보이던 레이는 구조 자체를 바꿔보려는 '게임체인저'가 되고자 그만의 게임을 시작한다. 게임을 뛰지 못해 재능 있는 선수들이 파산으로 향해 인생을 말아먹는 걸 두고볼 수만은 없지 않은가. 그는 과연 게임체인저가 될 수 있을까. 그건 거시적일까, 미시적일까.


스티븐 소더버그의 실험, 영화 안팍의 메시지


영화 <높이 나는 새>의 한 장면. ⓒ넷플릭스



영화는 촬영의 한계 때문인지 각본과 연출의 의도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어떠한 액션 없이 인물들의 대화를 위주로 진행된다. 의외로 전혀 지루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일말의 스펙터클이나 서스펜스 비슷한 것도 기대할 수 없다. 


영화를 끌고가는 주요 배경이 NBA 직장폐쇄이고 주요 이야기가 에이전트 레이의 워너비 게임체인저 작업이니 만큼, NBA 자체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있어야 할 것 같지만 딱히 그렇진 않고 오히려 영화 외적으로 스티븐 소더버그의 실험행각을 살펴봐야 한다. 


그는 누구도 넘보기 힘든 출중한 실력을 앞세워 영화계를 바꾸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하고자 발판과 영역을 마련하려고 하는 것인지, 새로운 걸 시도함에 주저함이 없다. <높이 나는 새>는 그 자장 안에서 영화 안팎으로 동일한 메시지를 던진다.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 본인에게 권리가 돌아가는 시스템을 만들고 싶은 그, 아마도 그래서 직접 제작, 연출, 촬영, 편집을 도맡아 하는 것일 테다. 영화에서 레이는 경기를 뛰는 사람 본인에게 권리가 돌아가는 시스템을 만들고 싶어 한다. 그것이 비록 아직은 판을 흔들 순 있어도 깰 순 없고, 선각자가 가지는 위험 부담을 지니려는 이가 없기에 실행되려면 아직 멀다는 걸 알고 있지만 말이다. 


시스템을 부수고 시장을 선도하다


익히 잘 알고 있듯 넷플릭스가 전 세계 콘텐츠 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일각에서는 판이 깨졌다고 보고 있고, 눈에 보이는 여러 측면에서 직접적으로 보더라도 판이 깨지는 순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런가 하면, 기성권력들은 넷플릭스를 따라하는 한편 이왕 깨진 판을 자신들 쪽으로 가지고 오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영화에서도 보이듯, NBA 직장폐쇄 당시 외부적으로 보이는 대립의 문제는 구단과 선수 간의 수익률 배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구단과 방송사 간의 계약이 문제이다. 무시무시한 금액으로 계약을 하기 전에 선수들에게 돌아가는 수익률을 줄여야 하는 게 진짜 문제이다. 이 치졸하다면 치졸한 머니 게임의 판을 깨는 건 역시 머니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팬들 입장에서는 어떻게 마무리되든 그저 경기를 보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래서 그들의 머니 게임에 비상한 관심이 가는 게 이상하다. 팬이 아니라면 아예 관심이 가지 않는 게 당연하다. 그렇다면, 스티븐 소더버그는 왜 이 영화를 만들었고 우리는 왜 이 영화를 보고 있는가. 그는 이 영화를 찍는 과정, 보여지는 루트, 소모되는 방향 등을 모두 새롭게 그린 게 아닌가 싶다. 


최소한의 도구와 기술과 자본으로 누구의 입김도 들어가지 않는 영화를 만들고는, 수익에 있어서도 걱정이 없는 채널과 유통 방식을 채택하였거니와, 영화가 소모되는 방식도 이야기가 전혀 중요하지 않은 대신 이야기를 끌고 가는 방법과 메시지가 전부이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는 말하고 있다. '이제 나의 게임이 시작됐어! 우리가 시장을 선도할 수 있어! 시스템을 부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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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 넷플릭스, 높이 나는 새, 돈, 스티븐 소더버그, 시스템, 실험, 직장폐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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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되는 '무명'의 그림을 향한 추악한 욕망 천태만상 <벨벳 버즈소>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9.02.11 08:00



[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벨벳 버즈소>


영화 <벨벳 버즈소> 포스터. ⓒ넷플릭스



제이크 젤렌할, 어느덧 믿고 보는 배우가 된 할리우드 남자 배우다. 일찍이 10대 초반에 할리우드에 진출해 역시 10대부터 여러 영화의 주연을 꿰차고 2000년대 중반 <투모로우>, <브로크백 마운틴>, <조디악> 등을 통해 다재다능함을 인정받았다. 


2010년대부터는 정말 '열일'을 하는 중인데, 2019년까지 10년간 20편에 육박하는 작품에 주연을 맡았다. 한 해 1편에서 4편까지 찍은, 믿을 수 없는 행보인 것이다. 장르 불문, 이미지를 깎아 먹지 않는 와중에 그가 주연을 맡은 영화들은 거의 모두 평균 이상의 합격점을 받았다. 


그중 매우 좋은 평가와 함께 제작비 대비 출중한 흥행성적을 거둔 작품 <나이트 크롤러>가 있다. <리얼 스틸> <본 레거시> 등의 각본으로 유명한 댄 길로이의 연출 데뷔작이었는데, 길을 잃은 언론의 천태만상을 특종과 조작과 진실의 소재로 스릴러 장르에 훌륭하게 버무렸다. 


이후 댄 길로이는 덴젤 워싱턴과 함께 법정 영화를 하나 찍었고 올해 <나이트 크롤러>의 히어로 제이크 질렌할과 함께 <벨벳 버즈소>를 내놓았다. 믿고 보는 조합이 된 그들과 넷플릭스의 만남으로 오래전부터 기대작으로 손꼽아온 이 작품은 35회 선댄스 영화제 프리미어로 선보이기도 하였다. 지난번에는 언론계 이번에는 미술계, 또 어떤 섬뜩함을 선보일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무명의 그림을 향한 다양한 욕망들


영화 <벨벳 버즈소>의 한 장면. ⓒ넷플릭스



미국 마이애미, 미술계에서 가장 막강한 입김을 자랑하는 평론가 모프(제이크 질렌할 분)는 독창성 있는 작품을 찾아헤맨다. 와중에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에이전트 로도라(르네 루소 분)와 비서 조세피나, 로도라가 주력으로 밀고 있는 유명 아티스트 피어스, 로도라가 새롭게 관심을 두고 있는 길거리 출신 담리시, 피어스를 데려오려는 에이전트 돈돈, 미술관에서 일하다가 에이전트로 전업한 그레천, 여기저기 에이전트를 돌고도는 인턴 코코 등 얽히고설킨 관계의 파장이 사방팔방으로 퍼진다. 


조세피나는 로도라에게 사실상 해고를 당한 후 어느 날 같은 건물의 2층 노인이 죽은 걸 발견하고 신고한다. 그러곤 우연히 그의 집으로 들어가는데, 믿을 수 없이 많은 그림들이 사람을 빨아들이는 미스테리한 색체를 띤 채로 있었다. 그녀는 그날로 바로 작업에 착수해 일가친척은 물론 지인도 없는 노인 디즈의 그림을 가져와 모프에게 소개한다. 


모프의 심미안에도 딱 걸려든 디즈의 그림들은 그 즉시 미술계에 파란을 일으킨다. 소식은 일파만파로 퍼져 로도라의 귀에도 들어가고 로도라는 즉시 조세피나를 협박하여 그녀의 밑으로 다시 불러들인다. 대신 조세피나는 이전의 비서급 이상이 된다. 한편, 디즈의 그림들은 스스로 움직이는 괴기스러움을 발산하는데 사람들은 알 도리가 없다. 그저 한없이 빨려들어갈 것처럼 들여다볼 뿐이다. 


이제 미술계의 모든 촉각, 즉 돈의 움직임은 디즈로 향한다. 단, 아티스트인 피어스와 담리시만 제외하고 말이다. 와중에 디즈의 섬뜩한 개인사와 본인의 모든 그림을 폐기하라는 유언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사람이라면 빨려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디즈의 그림들을 향한 다양한 욕망은 끝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불러일으킬 게 분명하다...


미술계 상류층의 천태만상


영화는 현대 미국의 미술계 상류층을 형성하고 있는 다양한 부류들의 천태만상을 보여주며, 예술 아닌 돈에 천착하는 비즈니스적 욕망, 오로지 독창성과 자신의 심미안만으로 미술계를 들었다놨다 하는 아트적 욕망의 추악함을 향해 경고를 날린다. 


그 중심엔 그 누구도 작품은커녕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무명의 '디즈' 그림들이 있지만, 그런 디즈의 그림조차 그것을 둘러싼 욕망들에겐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자신의 욕망을 분출하고 또는 채워줄 수단 말이다. 


그들이 자신을 자신으로 알고, 예술을 예술로 알며, 욕망을 욕망으로 알았다면 디즈의 그림이 위대한 그림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디즈의 그림은 무지막지한 돈으로, 미술계에서 내로라하는 명성으로, 한없이 높아진 심미안을 채워줄 수단으로 보였다. 


비단 미술계뿐만 아닐 것이다. 가지각색의 '계'에서 각계각층의 '욕망'들이 돈과 명성과 지위 등을 매개로 모든 것을 다루고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문학을 다루는 필자는, 종종 아니 자주 아니 항상 문학작품을 대할 때 욕망이 고개를 쳐들곤 한다. 이 작품은 우리 출판사에 얼마의 돈과 명성을 가져다줄 것인가. 그 가치판단의 기준을 어떻게 세워야 하는가. 


예술을 위한 변명 혹은 조언


미술계에 만연한 추악한 욕망의 실체를 들여다보는 데 주력하는 초반과 달리 중후반은 스릴러 아닌 고어 공포로 내달린다. 온갖 욕망에 몸과 마음을 내맡긴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 앞뒤 재지 않고 보여주는 것이다. 때론 섬뜩하기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때론 굉장히 독창적으로. 


초반과 중후반이 확연히 다른 장르를 내보이는 것처럼, <벨벳 버즈소>는 애매모호한 면들이 다수 보인다. 스토리상 별다른 걸 느낄 새가 없이, 캐릭터들의 관계와 그들을 분한 연기 그리고 장면장면의 연출이 극을 이끈다. 또한 앞서 말한 바처럼 스릴러적인 분위기와는 달리 굉장한 고어 공포를 선보이고 딱 한 차례 설명되어진 제목 '벨벳 버즈소'의 의미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로도라의 옛날 펑크 시절 그룹 이름이 벨벳 버즈소였다고 하는데, 그 자체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술과 약으로 쪄든 무정부주의자였던 그 시절이 예술을 향한 순수성의 정확하고 정통한 발로였다고 해석하는 게 맞을 듯하다. 그때도 예술을 향한 욕망이 있었을지언정, 그 사이에 돈, 명성, 지위, 심미안, 이기심 등의 이질적인 요소들이 들어앉아 있지 않았다. 


예술을 팔기보다 소개하고, 예술을 판단하기보다 공부하고, 예술에 가치를 매기기보다 감상하는 게 예술계에 종사한 이들이 해야 할 일이겠다. 굉장히 현실지양적이고 허무맹랑하고 지엽적인 얘기처럼 들리는가? 그렇게 그저 스쳐지나가는 얘기처럼 치부할 것인가? 물론 그래도 좋다. 그렇게 살아가도 좋다. 하지만, 남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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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 근원에 목마른 인간이 들어가다 <서던 리치: 소멸의 땅>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9.02.07 08:00



[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서던 리치: 소멸의 땅>


영화 <서던 리치: 소멸의 땅> 포스터. ⓒ넷플릭스



작은 영화 <엑스 마키나>로 쟁쟁한 후보들을 뒤로 하고 아카데미 시각효과상을 거머쥐었던 알렉스 가랜드 감독, 일찍이 <비치>의 원작자, <28일 후> <네버 렛 미 고> <저지 드레드> 등의 각본가로 장르에 특화되고 장점을 가진 걸로 유명했다. 


그는 <엑스 마키나>로 연출가로서도 본격 시동을 걸며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에 오르고 많은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는 바, 이리 놓고 보니 시각효과와 각본과 연출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이는 장르 전문가라고 할 만하다. 


최근에 내놓은 작품 <서던 리치: 소멸의 땅>에 관심이 쏠리지 않을 도리가 없는 이유다. 이 작품은 북미와 중국에서만 파라마운트가 배급, 나머지 전 세계에는 넷플릭스가 배급하고 제작까지 하였는데 그리하여 감독은 창작의 자유를 보장받았다. 


흥행을 일체 생각하지 않는 창작의 자유 보장은 이 작품에 수없이 포진되어 있는 흥행 요소들을 작품성 요소로 유지 또는 변하게 하였다. 원작의 난해함을 그대로 또는 더욱 심오하게 발전시키는 동시에 시각효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면모를 선보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곳, '쉬머'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곳 '쉬머'로 향하는 5명의 여성 대원. 영화 <서던 리치: 소멸의 땅>의 한 장면. ⓒ넷플릭스


어느 날 하늘에서 무엇인가가 국립공원 근처 등대로 떨어진다. 이후 근방으로 파장의 결계가 쳐지고 점점 커지는 형국이다. '쉬머'라 불리는 그곳에 정부는 비밀리에 3년간 정보 취합 및 조사를 위한 탐사대를 보내고 드론도 띄우지만 돌아오는 건 없었다. 


생물학자이자 세포/암 병리학과 교수 리나(나탈리 포트만 분)는 비밀작전에 투입되었다가 1년간 돌아오지 않는 남편 케인(오스카 아이작 분)으로 힘든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돌아온 케인, 하지만 그는 곧 알 수 없는 내출혈로 쓰러지고 함께 병원으로 가던 도중 군인들에 의해 납치된다. 그들이 끌려간 곳은 쉬머 코앞의 진지 X 구역. 


리나는 케인이 쉬머에서 돌아온 유일한 생존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가 비밀작전에 자진 투입한 이유가 자신이 불륜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7년 군인 경력과 생물/병리학적 지식을 동원해 남편을 살리고자 쉬머로 들어갈 것을 결정한다. 


리더 심리학자, 생물학자, 지질학자, 물리학자, 응급요원의 5명 여성으로 구성된 팀은 당연한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그곳으로 간다. 그러곤 곧 단기기억상실증을 경험하고 상상으로도 구현하기 힘든 돌연변이들을 발견한다. 이 땅의 정체는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과학적 질문


그곳엔 파격적인 복제와 변형과 자멸이 일상인 돌연변이가 있다. 영화 <서던 리치: 소멸의 땅>의 한 장면. ⓒ넷플릭스


영화 <서던 리치: 소멸의 땅>은 호러적인 분위기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과학적 질문을 기반으로 한 고품격 SF이다. <엑스 마키나>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 알렉스 가랜드 감독은, 앞으로도 장르 요소를 앞세워 인간을 탐구할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가 가지는 난해함은 다름 아닌 과학적 질문에서 비롯된다. 제목에서도 암시되어 있듯 영화를 관통하는 단어는 '소멸'인데, 그 반대편 혹은 동일한 층위를 가지는 단어 '복제' '변형' '자멸' 등이 함께 중요하게 거론된다. 


이는 리나가 세포/암 병리학과 교수라는 점과 리더 심리학자인 벤트리스가 암에 걸렸다는 점, 그리고 쉬머가 점점 확대되는 점 등에서 악성종양, 즉 '암'과 연관이 깊은 듯하다. 세포의 변형, 복제로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즉 자멸, 소멸하게 만드는 게 암이라는 질병 아닌가. 


지구에 갑자기 생겨버린 쉬머의 정체를 알고 제거할 방법을 찾고자 하는 건, 인간의 몸에 갑자기 생겨버린 암의 정체를 알고 제거할 방법을 찾고자 하는 모습과 일치한다. 그 모양새를 영화로 옮겨놓은 것이리라. '나'를 소멸에 이르게 하는 것이 다름 아닌 '나'를 이루는 세포의 생성이라니, 아이러니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근원에 목마른 인간, 미지로 들어가다


한편, 돌아오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음에도 그곳으로 향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이유는 무엇일까. '공포'라는 것의 근원에 '미지'가 있다면, 인간은 가장 대면하기 싫은 공포라는 것의 '근원'을 알고자 미지로 들어가는 것일 테다. 인간은 근원에 목 마르다. 


그곳엔 무엇/누가 있을까. 무엇을 이루는 무엇일 있을 테고 누구를 이루는 누군가가 있을 테다. '내'가 그곳에 이르면 다름 아닌 '내'가 있지 않을까. 변형과 복제와 소멸이 이루어지는 그곳에서, '나' 역시 변형과 복제와 소멸 또는 변형이나 복제나 소멸을 이룩할 것이다. 


이쯤 되면, 과학이고 철학이고를 떠나서 그저 답을 얻기 힘든 질문, 되돌아올 뿐인 생각, 형용하기 힘든 설명만 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나는 누구/무엇인가'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왜 사는가'


<엑스 마키나>의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너무나 비현실적인 시각효과와 협소하고 막힌 곳에서 이뤄지는 숨막히는 이야기는, <서던 리치: 소멸의 땅>에 이르러 초현실적이어서 현실적인 시각효과와 광대하고 열린 곳에서 이뤄지는 광활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두 영화는 '인간'에 대한 질문 하나를 공통점으로 둔 채 거의 모든 면에서 정반대의 면모를 보여줌에도 서로가 서로에게 묘한 기시감을 들게 한다. 


비단 같은 감독의 작품이어서만은 아닌, 연장선상에 있는 느낌이어서, 최소 3부작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감독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그때 또 우린 어떤 질문과 맞닥뜨리게 될까. 어떤 현실, 비현실, 초현실적인 시각효과를 맛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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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과학, 근원, 넷플릭스, 돌연변이, 서던 리치: 소멸의 땅, 엑스 마키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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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형 비극이자 악몽이자 재앙 <FYRE: 꿈의 축제에서 악몽의 사기극으로>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9.02.01 08:00



[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FYRE: 꿈의 축제에서 악몽의 사기극으로>


영화 포스터. ⓒ넷플릭스



천재적인 아이디어로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사업가 빌리 맥팔랜드, 그는 '파이어 미디어'라는 이름의 회사로 힙합계의 대부 자 룰과 일치단결, 누구나 유명한 아티스트를 섭외할 수 있는 혁신적 플랫폼 '파이어 앱'을 만든다. 


이제 이 애플리케이션 플랫폼을 홍보해야 하는 시기, 업계 전문가를 위한 페스티벌이나 콘서트를 열자는 의견이 나온다. 빌리는 곧바로 수용하여 진행하는 데 박차를 가하는데, 변질되어 '파이어 페스티벌'로 기획된다. 이 페스티벌로 말할 것 같으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모델, 아티스트, 인플루언서들을 바하마의 아름다운 섬으로 초대해 사상 초유의 파티를 열자는 것이었다. 


빌리와 자를 위시한 파이어 측은 대대적인 사전 홍보를 실시한다. 세계적인 모델들과 페스티벌이 진행될 현지를 배경으로 광고 촬영을 하여 인플루언서들과 합작해 SNS를 광란으로 몰아넣는다. 자연스레 언론이 이에 발을 맞추고 결국 페스티벌에 관심 있는 일반 대중이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들어놓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대급 페스티벌의 진행은 예측 불가능한 방향 아니, 빌리를 제외하곤 누구나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 방향은 다름 아닌 파멸, 사전 홍보대로 절대 이뤄질 수 없는 방향이다. 점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지만, 광기와 무지로 무장한 수장인 빌리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다. '꿈의 축제'는 '악몽의 사기극'으로 변하는 중이다. 애초에 꿈의 축제 따위는 없었던 것일까. 


최고의 축제에서 시작된 최악의 사기극


최고의 축제로 기획된 'FYRE'는 최악의 사기극으로 끝난다. 한 개인의 무지와 광기가 이 시대의 비극, 악몽, 재앙을 불러일으켰다. 비단 그뿐만은 아닐 것이다... 영화 의 한 장면. ⓒ넷플릭스



결론부터 말하면, 빌리 맥팔랜드는 지난해 10월 감옥에 갔다. 이 파이어 페스티벌로 체포되었다가 보석금을 주고 풀려난 사이에 비슷한 사기극을 또 펼쳤기 때문이다. 그는 거짓말쟁이이자 소시오패스이자 사기꾼이다. 하지만 그는 전도유망한 젊은 사업가였다. 


<FYRE: 꿈의 축제에서 악몽의 사기극으로>(이하 'FYRE')에서 빌리의 자세한 행적을 엿볼 순 없다. 그는 왜 그런 선택을 했고 계속 밀고 나간 것인지 말이다. 비슷한 시기에 Hulu에서 공개한 <FYRE Fraud>에서 빌리에 대한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FYRE>는 파이어 페스티벌이 축제에서 사기극으로 변모한 전말을 자세히 파헤친다. '빌리'라는 한 개인보다 '인플루언서'로 대표되는 이 시대, 이 사회의 표상에 더 천착하는 모습이다. 


무지와 광기


축제, 좋아하고 열광하고 참여하고 싶어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필자도 참여는 물론 진행의 일원으로 참여도 해보았다. 참석하는 이들로 하여금 좋아하고 열광하고 참여하고 싶게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안다. 그에 맞게 준비하는 건 더 어렵다. 


빌리는 페스티벌을 좋아하고 열광하지만 준비는커녕 진행해본 적도 없다. 그들과 함께 하는 직원들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뭘 좋아하는지 뭐에 열광하는지 잘 알지만 실현에 옮기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닌가. 첫 번째로, 자신이 무지한지 모르는 게 잘못이었다. 


준비하고 진행에 착수하면 알 수 있다. 화려하기 그지 없었던 사전 홍보가 매우 과도하고 과장되었다는 것을. 그때 바로 사과하고 시정하면 큰 문제 없이 축제를 이뤄낼 수 있다. 물론, 애초에 기대했던 만큼의 '꿈의 축제'가 되진 못할 테지만. 


그렇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무조건 불가능을 가능케 하라는 주문과 함께 불가능한 게 불보듯 뻔하면서도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리듯 자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식의 진행은 실패와 파멸을 불러올 뿐이다. 그 사이사이 수많은 분기점, 분수에 맞는 축제를 이뤄낼 수 있는 기회들을 날려버린 건 돌이킬 수 없다. 두 번째로, 통제할 수 없는 광기가 잘못이었다. 


비극, 악몽, 재앙의 사기극


빌리는 사기꾼임에 분명하지만, 이 시대와 사회를 정확히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은 가졌다. 일면 천재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인플루언서 마케팅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모은 이 축제는 그 자체로 비극이자 악몽이자 재앙이다. 


일플루언서란 SNS계의 셀럽이라 할 만한대, 수십만 명 이상의 구독자를 보유하여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자들을 지칭한다. 그들도 현대인이 아니, 사람이 가지는 '선망'을 이용하여 유명해진 사람들일진대 빌리가 읽어낸 게 바로 그 점이다. 


오프라인 아닌 온라인에서는 '그 사람'의 겉모습만 볼 수 있다. 그 사람은 겉모습 따위야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다. 실제야 어떻든, 잘 지내는 것처럼, 잘 나가는 것처럼, 잘 사는 것처럼. 그 포장의 기술에 사람들은 부러워하고 열광하고 따라하고 같이 하고 싶어 한다. 


파이어 페스티벌에 세계적인 모델, 아티스트, 인플루언서들이 총집합한다는데 어찌 참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페스티벌은, 모두 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반드시 있을 인플루언서의 허상이 단지 매우 매우 커진 양상일 따름이다. 정녕 매우 놀라운 사기극이지만,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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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영화'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적절한 킬링타임용 영화 <동물세계>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9.01.30 08:00



[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동물세계>


영화 <동물세계> 포스터. ⓒ넷플릭스



중국영화는 종 잡을 수 없다. 전 세계적으로 이름 높은 명감독에 전 세계 영화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 즐비한 한편, 엄청난 자본을 쏟아부어 많든 시덥잖은 '국뽕' 영화도 부지기수이다. 그런가 하면, 말도 안 되게 촌스럽고 우악스러운 영화와 장르별 최신을 달리는 영화가 공존한다. 


좋게 해석하면, 형용할 수 없는 '다양성'이 중국 문화 콘텐츠를 견인하고 있는 것이니 부럽기도 하다. 지금은 중국영화도 자본에 잠식되어 '보고 싶은 영화'들이 다양하게 즐비하는 게 아닌 '봐야 하는 영화'들이 잠식하는 양상이지만, 여전히 다른 나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최근 몇 년 새 '쌈빡한' 아시아 장르 영화들 몇 편을 괜찮게 보았다. 태국의 <배드 지니어스>라든지, 대만의 <몬몬몬 몬스터>라든지. 보는 재미와 느끼는 재미가 한껏이었다. 그런데, 중국의 장르 영화에서는 그런 걸 느끼지 못했다. 비할 데 없는 다양성을 갖춘 나라임에도. 


중국을 대표하는 화려하기 그지 없는 장르 영화이지만 볼 만한 것이 아닌 <몽키킹> <화피> 시리즈는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와중에, <먼 훗날 우리>처럼 중국에서 적절한 성공을 거두고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소개된 <동물세계>가 소소하게나마 눈에 띈다. 


도박의 수렁에 빠지다


게임장에서 광대 아르바이트를 하며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엄마의 병원 치료비를 벌고 있는 정 카이쓰(리이펑 분), 다름 아닌 그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류(저우둥위 분)가 여자친구이다. 그는 정신질환 환자이기도 한데, 어릴 적 괴한들의 습격으로 아빠가 자취를 감출 때 보았던 광대 애니메이션의 영향으로 종종 망상에 빠지곤 하는 것이다. 광대가 되어 괴물로 변한 사람들을 물리치는. 


어느 날, 친한 친구 리준이 찾아온다. 그는 부동산업을 하는데 카이쓰에게 600만 위안(약 10억 원)을 벌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었다. 단, 600만 위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조건. 처음에는 귓등으로도 안 들었던 카이쓰는, 병원 치료비도 없어 복도로 쫓겨난 엄마를 보고 마음을 바꾼다. 엄마가 남긴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는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역시 리준은 카이쓰를 속인 것이었다. 본인의 빛은 물론 리준의 빛까지 얹혀진 상황, 카이쓰는 리준을 사주한 조직으로 끌려가 수장 앤더슨(마이클 더글라스 분)에게 제안을 받는다. '운명'호라는 배에 타서 세계 각국에서 끌려온 사람들과 가위바위보 카드 게임을 하여 생존하면 빛을 탕감해준다는 제안. 잘 하면 돈을 벌 수도 있지만, 생존하지 못하면 더할 나위 없는 비극을 맛볼 수 있다는.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엔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카이쓰, 운명호에 입성해 가위바위보 게임을 시작한다. 


'중국영화'에서 벗어나려는 시도


'중국영화'라는 선입견과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가 엿보인다. 적절한 킬링타임용 액션 도박 영화이다. 영화 <동물세계>의 한 장면. ⓒ넷플릭스



<동물세계>는 일본의 메가히트 만화 <도박묵시록 카이지>를 원작으로 하는 액션 도박 영화이다. 만화의 1부에 해당하는 배에서의 가위바위보 카드 게임을 옮긴 듯한데, 원작을 몰라도 보는 데 전혀 무리함이 없다. 


메가히트작이니 만큼 일본에서도 영화로 충실히 옮겨졌는데, 여러 면에서 차라리 매우 많이 각색한 이 영화가 낫다. 다른 건 둘째 치고 볼 거리 측면에선 이 영화는 '중국영화'를 벗어났다. 아니, 벗어나려는 시도를 나름 괜찮게 수행했다. 


세상의 중심이 중국이라고 수천 년 동안 생각해온 만큼 모든 콘텐츠의 중국화는 당연한 것인데, 이 영화에서 중국스러움을 찾아보기 힘들다. 할리우드의 웬만한 킬링타임 액션 영화 정도로 봐줄 만한 수준인 것이다. 


아울러, 확실히 중국 장르 영화는 일본을 앞질렀다. 일본스러움이 세계 콘텐츠를 호령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일본 내에서도 보는 사람 없는 괴랄한 영화들을 종종 내놓는 일본이다. 반면, 중국은 세계적인 영화 시장으로 급부상했거니와 할리우드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하면서 콘텐츠가 많이 세계화되었다. <동물세계>는 중국 장르 영화 과도기의 현재이자 미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적절한 킬링타임용 영화


영화는 현존 중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두 배우인 리이펑과 저우둥위 그리고 세계적인 대배우 마이클 더글라스와 함께 하여 시각적인 볼 거리와 함께 캐릭터적인 볼 거리도 선사한다. 세 명 모두 툭툭 튀지도 않고 영화에 묻히지도 않게 무난했다. 


더불어, '가위바위보'라는 누구나 잘 알지만 누구도 잘 한다고 말하기 어려운 게임을 가지고 수싸움을 펼치는 게 지루하지 않고 은근 재밌다. 원작을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치밀한 심리전이 나오지는 않아 아쉬운 점이 없지 않아 있지만 큰 무리는 없다. 


도박꾼들의 세계가 동물세계와 다를 바 없다는 비유의 부재, 약육강식 세계에서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는 주인공 신념의 약함, 또 다른 게임이 있을 것 같은 느낌 등이 후속편을 기대케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다방면에서 뭔가 부족하다고 느낀 건 연출자의 의도일까 능력일까. 


액션과 캐릭터와 도박에의 적절한 볼 거리, 도박 수싸움과 생각할 거리를 찾게 만드는 적절함 등 이 영화는 적절한 킬링타임용이다. 그래서 더욱 중국 장르 영화의 미래를 기대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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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도박, 도박묵시록 카이지, 동물세계, 중국영화, 킬링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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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무게 잡지 말고, 웃기려면 제대로 웃깁시다! <극한직업>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9.01.28 08:00



[리뷰] <극한직업>


영화 <극한직업> 포스터. ⓒCJ엔터테인먼트



'이병헌' 감독은 2008년 <과속스캔들> 각색 작업으로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뒤 쉼없이 일에 매진해왔다. 코미디를 기반으로 한 드라마에 특화된 그는, 영화와 방송을 넘나들며 각색뿐만 아니라 각본, 감독, 제작에 이어 직접 출연도 했다. 


<힘내세요, 병헌씨>라는 저조 섞인 짠하고 웃긴 코미디 드라마 독립영화로 장편 데뷔 후 <스물>로 크게 히트했다. 하지만 그도 소포모어 징크스는 피해가지 못했는지, <바람 바람 바람>으로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크게 좋지 못했다. 


그의 '결'이 아닌 '길'은 장진 감독이 생각나게 한다. 장진 감독처럼 확고한 작가주의로 '사단'을 형성할 것 같진 않지만, 꾸준히 코미디 드라마 장르를 추구하며 다양한 웃음을 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연출한 작품을 내놓았다. 2010년대 초중반 그야말로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로 급성장했지만, 이후 지금까지 내놓는 작품마다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쓰디쓴 맛만 보고 있는 류승룡이 단단히 벼르며 재기를 노린 작품 <극한직업>이다. 아주 잘 빠진 코미디 액션 영화로, 이병헌 감독과 류승룡 배우의 재기는 따놓은 당상처럼 보인다. 


잠복이냐, 치킨이냐


잠복근무냐, 치킨판매냐. 그것이 문제로다. 영화 <극한직업>의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옆동네 강력반에서 마약사범 검거까지 하는 마당에 중간책 하나 제대로 잡지 못하는 마포경찰서 마약반, 고반장(류승룡 분)을 필두로 어리바리한 듯 5명은 해체 위기에서 고반장의 후배인 강력반 최과장의 비밀 제안을 받고 최후가 될지 모를 작업에 나선다. 


국제 마약 조직에서 마약을 국내에 밀반입한다는 정황을 포착한 것. 고반장, 장형사(이하늬 분), 마형사(진선규 분), 영호(이동휘 분), 재훈(공명 분)은 파리 날리는 치킨집에서 잠복수사를 시작한다. 한데, 치킨집이 곧 문을 닫는다고 한다. 마땅한 잠복처를 찾지 못한 그들은 고반장의 퇴직금을 털어 치킨집을 인수한다. 


24시간 잠복수사 풀가동의 거점을 마련한 마약반, 그런데 파리만 날리던 치킨집에 하루에 10팀이 넘는 손님이 오는 게 아닌가. 문을 닫거나, 오는 손님을 계속 돌려보내면 더 눈에 띌 터, 그들은 직접 치킨을 만들어 팔기로 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 마형사가 부모님께서 오랫동안 해오신 수원왕갈비 소스로 만든 치킨이 대박이 나 맛집이 된 것이다. 


잠복근무는커녕 몰려오는 손님들 덕분에 한없이 바쁘기만 한 마약반이다. 잠복근무를 하려고 치킨을 파는 건지, 치킨을 팔려고 잠복근무를 하는 건지. 너무 바빠서 아무 생각이 없는 그들, 그러던 어느 날 잠복근무에서도 치킨판매에서도 비상이 걸린다.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 그리고, 그들은 잠복근무를 계속할 것인가 치킨판매를 계속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웃음을 위한 영화의 모든 것


순도 100% 웃음을 위한 코미디, 코미디를 위해 영화는 모든 것을 건다. 영화 <극한직업>의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원활한 잠복근무를 위해 치킨집을 인수했다가 대박이 난다는, '이게 뭐야'라는 말과 함께 슬쩍 웃음이 지어지는 참신한 소재를 앞세운 영화 <극한직업>. 정녕 영화의 모든 것이 웃음을 주려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작정하고 웃긴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걸 제대로 알게 해주는 이 영화는, 쓸데없이 또는 어설프게 무게 잡고 시선을 끌기 위해 웃기려 했던 요즘 한국영화에게 던지는 일침이다. '너무 무게 잡지 말고, 웃기려면 제대로 웃깁시다.'


그야말로 대놓고 코미디에 올인하는 건 사실 많은 걸 포기하는 것이다. 요즘 한국영화에 '메시지' 하나 제대로 넣지 않은 게 없지 않은가. 사회, 개인, 가정, 학교, 회사 등 장르 불문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고 유추하게 하고 질문, 대답하게 한다. 


반면, 이 영화는 '치킨'으로 대변되는 서민의 애환조차 코미디로 희석시켜 버린다. 자칫 눈살 찌푸리게 할 수 있는 부분들을 '오직 코미디'로 돌파해 버린다. 대사와 캐릭터와 장면장면들에서 장르를 짬뽕시키고 파설괴시켜 버리는 것이다. 


웃음뿐만 아니라, 진지함과 액션


경찰과 마약조직의 이야기다 보니 진지함과 액션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데, 상당히 괜찮다. 영화 <극한직업>의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킬링타임용'이라 함은, 할 것도 없는데 시간 때우기 적당한 영화 없나 할 때 알맞은 영화를 말한다. 이 영화는 그런 점에서 100% 일치하는데, '시간 때우기'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왜냐, 시간이 가는 게 야속할 정도로 쉼없이 웃기고 나도 모르게 웃기고 예측 가능과 예측 불가능을 막론하고 마구잡이로 웃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 웃음의 융단폭격을 날리는 와중 나름의 진지함과 액션이라는 괜찮은 무기를 장착하고 있다. 진지함을 권총 정도의 강력함과 정확도로 날린다고 한다면, 액션은 저격총 정도의 강력함과 정확도로 날린다. 즉, 액션은 생각 외로 볼 만하다. 


완벽한 영화가 아닌 바에야, 스토리에 수많은 구멍들과 쉼표들이 있다. 아니, 어쩌면 그것들이 있어야 완벽한 영화라 하겠다. 숨 돌릴 타이밍이 있어야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극한직업>은 어떤 구멍이나 쉼표를 찾기 힘들다. 그것들을 모조리 코미디로 채워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후반에 이르러서는 웃음 동력이 조금 떨어지는 감이 있다. 그런가 싶더니 밀도와 타격감과 정확도 높은 액션이 그 빈 자리를 채우는 게 아닌가. 


흥행전선 이상 없이 설날 연휴를 관통해 2월달도 접수할 것으로 보인다. 1000만 명 돌파도 꿈은 아닐 듯한대, 류승룡 배우로서는 재기는 물론 <광해, 왕이 된 남자> <7번방의 선물> <명량>에 이어 또다시 1000만 영화 주연 신화를 쓸지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힘을 빼니 대박을 친 영화 속 수원왕갈비통닭처럼, 류승룡 배우도 힘을 빼니 좋은 결과가 따라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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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직업, 류승룡, 마약, 이병헌, 잠복근무, 치킨, 코미디
  • BlogIcon 미우 
    2019.01.28 10:15 신고

    완전 꿀잼이었죠

    • BlogIcon singenv
      2019.01.28 10:16 신고

      진짜 꿀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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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불호가 갈릴, 혁신적 인터랙티브 방식의 영화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9.01.25 08:00



[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


영화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 포스터. ⓒ넷플릭스



<하우스 오브 카드> <기묘한 이야기> 등과 함께 넷플릭스 전성시대를 열어젖히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드라마 <블랙 미러>, 시즌 4까지 나온 현재 1, 2는 영국 channel 4를 통해 방영되었고 3, 4는 넷플릭스를 통해 방영되었다. 


미디어와 정보기술의 부정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춘 SF 옴니버니 드라마 시리즈인 이 작품은, 시즌 3의 네 번째와 시즌 4의 첫 번째가 2017년과 2018년 연속으로 에미상 TV영화 부문 작품상을 수상할 정도로 뛰어난 작품성을 자랑한다. 


2011년 처음 공개된 <블랙 미러>는 2년, 3년, 1년마다 다음 시즌을 공개했는데 시즌 5는 다시 시즌 4 이후 최소 2년 이후인 올해 또는 내년에 공개될 것 같다. 그 공백을 메우려는지 시즌 2와 3 사이인 2014년 말에 화이트 크리스마스 스페셜 단편을 공개한 적이 있고, 이번 2018년 말엔 영화를 공개했다.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가 그것이다. 


우선, 이 작품은 드라마 <블랙 미러>를 전혀 알지 못하더라도 아무런 문제 없이 감상할 수 있다. <블랙 미러> 시리즈가 애초에 옴니버스식으로 서로 연관 없는 단편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띄고 있기도 하거니와, 이 영화가 드라마 <블랙 미러>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어린 프로그래머의 게임화 작업


때는 1984년 6월 미국, 엄마 없이 아빠하고만 사는 어린 프로그래머 스테판 버틀러는 제롬 F. 데이비스라는 작가가 쓴 인터랙티브 판타지 게임 소설 <밴더스내치>를 게임화하고자 한다. 그는 잘 나가는 신흥 게임회사 터커 소프트를 찾아간다. 


사장 모함 터커와 현존 최고의 프로그래머이자 터커 소프트 수석 프로그래머 콜린 리트먼을 만나 자신의 뜻을 전하는 스테판, 그들은 이 혁신적이고 흥미로운 인터랙티브 게임에 관심을 갖고 그 자리에서 게임화를 수락한다. 


스테판은 이 방대하고 촘촘한 스토리가 모조리 머릿속에 있다고 하며 혼자서 작업을 완료해 납기일에 맞추겠다고 하며 집으로 와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한다. 와중에도 어린 시절 엄마와 관련된 충격적 기억으로 상담을 다니기도 한다. 


작업이 뜻대로 되지 않아 힘들어 하고 있던 어느 날엔 길에서 콜린을 만나 그의 집으로 함께 간다. 콜린은 스테판에게 마약을 권하며 그것이 작업을 도와줄거라 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설파한다. 시간은 구조물이며 잘못된 선택을 했다면 죽고 다른 선택을 하러 돌아갈 수 있다, 누구도 자신의 자유의지로 살지 못한다, 거울을 통해 다른 차원으로 갈 수 있다, 정부는 음식에 약을 넣고 사람들을 감시한다 등. 


이후 스테판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조종을 당하고 있다고 믿게 되며 모든 걸 의심하기 시작한다. 상담사가 주는 약, 아버지가 잠가놓은 문. 그런가 하면 작업 도중 자신도 모르게 컴퓨터를 부수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되는데...


혁신적 '인터랙티브'


시청자가 영화의 주요 길목에서 직접 선택한다는 '인터랙티브' 방식, 정녕 신선하고 혁신적이다. 영화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의 한 장면. ⓒ넷플릭스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나뉠 게 분명하다. 우선, 영화 내적으론 볼 만한 것도 생각할 만한 것도 없다. 스토리, 사건, 캐릭터 그 어느 면에서도 봐줄 만한 게 없다. 완전히 다른 곳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는 '넷플릭스'가 내놓은 지극히 실험적인 이벤트성 영화이다. 이 사실을 반드시 숙지하고 영화를 봐야 한다. 그리고 절대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넷플릭스'를 통해 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즐길 수 없다. 


영화가 초점을 맞춘 건 '인터랙티브'다. 영화의 외적 방식과 내적 주제 모두와 관련이 있다. 영화 속 주요 소재인 게임북 <밴더스내치>의 게임화와 일맥상통하는데, 제공자인 넷플릭스와 사용자인 시청자들의 상호 소통을 기반으로 하는 콘텐츠이다. 즉, 사용자의 직접적인 참여 선택에 따라 영화의 주요 스토리라인이 바뀌며 자연스레 결말까지 바뀐다. 


어릴 때 종종 했던 인터랙티브 게임북이나 "그래, 결심했어!"로 유명한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코너 'TV인생극장'이 생각나게 하는 이 콘텐츠는, 사용자가 직접 참여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다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창작자와 제공자만의 고유한 전유물인 '신'이 되는 경험을 사용자도 일정 정도 이상으로 공유할 수 있다는 건 참으로 여러 면에서 혁신적이다. 


미디어와 정보기술적 질문들


이 영화를 내적 아닌 위와 같은 외적 요소에 초점을 맞추고 감상하면 일찍이 해본 적 없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면, 우린 영화 콘텐츠 방식의 신세계를 경험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극중 콜린이 설파하는 말들 중, '시간은 구조물이며 잘못된 선택을 했다면 죽고 다른 선택을 하러 돌아갈 수 있다, 누구도 자신의 자유의지로 살지 못한다'는 생각은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이자 상당한 철학을 함유하고 있는 명제이기도 하다. 시간과 차원에 관한 관한 과학적, 자유의지에 관한 정치적 질문과 그에 대한 하나의 정답이기도 하다. 


이 모든 철학, 과학, 정치적 질문을 현대로 옮기면 드라마 <블랙 미러>의 주요 소재이자 주제인 미디어와 정보기술적 질문으로 이어진다. 우리의 삶은 미디어에 의해 지배 당하고 정보기술은 시간을 구조화하여 수많은 선택지를 주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자유자재로 왕래할 수 있게 한다. 그런 반석 위에 이 영화는 실험적이지만, 이벤트성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영화는 러닝타임이 제시되어 있지 않다. 다만, 확인한 정보에 따르면 평균 러닝타임은 90여 분이고 사용자의 선택에 따라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러닝타임이 될 수 있고 두 시간이 넘을 수도 있다. 제공된 총 러닝타임은 다섯 시간이 넘는다 하고, 공식적인 엔딩만 다섯 가지라고 하며, 비공식적 엔딩은 열 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필자는 외적 방식에 한껏 기대감을 갖고 영화를 보았고 60% 정도 만족을 했다. 최초의 엔딩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에 보았는데, 중간의 중요 분기점으로부터 다양하게 퍼지는 내용과 결말을 몇 개 더 보는 데도 몇 십 분 정도 걸렸을 뿐이다. 짧고 굵게 신선한 경험을 해보았는데 전혀 후회는 없고 앞으로 보다 괜찮은 인터랙티브 영상 콘텐츠들에 대한 기대감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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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흔적을 따라서... <임정로드 4000km>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9.01.21 12:20



[서평] <임정로드 4000km>


<임정로드 4000km> 표지 ⓒ필로소픽



2019년 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국가적으로 아주 중요한 한 해이다. 대한제국 고종 황제 승하 100주년, 3.1운동 100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의열단 결정 100주년... 대한민국 근현대사 100년을 좌우할 큰 일들이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1919년에 일어났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100년 전 세계사적으로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나치가 결성되었고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었고 코민테른이 설립되었고 5.4운동이 있었고 중국 국민당이 결성되었다. 1919년은 그야말로 근현대 세계사의 분기점이었다. 


이중에서도 3.1운동 100주년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은 2019년 우리나라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의제라 하겠다. 지난 2006년 서울대 이영훈 교수가 <동아일보>에 '우리도 건국절을 만들자'라는 칼럽을 기고하며 공론화되기 시작한 '건국절 논쟁', 1948년 8월 15일 민주독립국가 대한민국 재건일을 건국일로 보는 견해이다. 


견해는 견해일 뿐이라지만, 견해가 주장이 되어 어느 공고한 권력층에 받아들여지곤 사실이자 진실인 것처럼 탈바꿈해버린 면모가 심히 불편하고 걱정스럽다. 하지만, 대한민국 헌법 제10호에 '3월 1일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명시되어 있는 만큼 사실 논란은 논란에서 그칠 뿐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잘 모른다. 아니, 거의 모른다. 김구, 안창호, 이승만 등의 아주 유명한 몇몇 독립운동가들의 면면과 상하이, 충칭 등에 위치해 있었다는 것 정도만 알 뿐이다. 조금 찾아보니 나온다. 임시정부 위치가 상하이부터 서울까지 9번 바뀌었다는 것, 국가 원수가 대통령, 국무령, 주석 체제로 바뀌었다는 것 등의 사실이. 


따라가보고 싶어지고 눈시울이 붉어지며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체험


2019년 대한민국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수많은 기획들이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지난해 8월 <오마이뉴스> 오마이 TV에서는 '로드다큐 임정'이라는 기획물을 선보였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 발자취를 좇아 6000km 이상 달린 이 다큐가 책으로 나왔다. <임정로드 4000km>(필로소픽), 책을 온전히 읽으면 직접 따라가보고 싶어지고 눈시울이 붉어지며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체험을 할 것이다. 


따라가보고 싶어지는 건, 이 책이 투철하게 임정로드 가이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오직 1919년부터 1945년까지 임정의 이동경로를 따라가며 QR코드에 공용지도를 넣어두어 쉽게 따라갈 수 있게 하였다. 여기가 어디인지, 어떻게 가는지 자세하게 알려주고 주의사항과 팁을 전하는 모양새를 취한다. 


눈시울이 붉어지는 건, 이 책이 전하는 임정투사 흔적의 기막힌 현재 모습 때문이다. 서울에 있는 효창원, 본래 왕가의 무덤이었던 이곳을 일제는 강제로 이장했고 효창공원으로 탈바꿈시키고는 골프장을 지어버린다. 해방 후 김구 선생은 세 의사와 세 임정 요인의 유해를 이곳으로 모시는데, 김구 선생이 돌아가시곤 이승만 정권은 묘역 입구에 효창운동장을 짓고 박정희 정권은 골프장 공사를 시도했다가 반대로 무산되어 반공투사위령탑을 세웠다. 이 애국지사들의 성지를 우린 잘 모른다. 이밖에도 수많은 임정투사 흔적들이 현재 표식 하나 없이 방치되어 있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체험을 하는 건, 이 책 곳곳에 소개되는 임정투사들의 기백과 용기 때문이다. 윤봉길 의사, 1932년 4월 29일 홍커우 의거를 일으켜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역사를 바꾸었다. 의거가 성공하든 성공하지 못하든 자신은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위기에 처한 독립운동을 하나로 모으고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며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한 사실상 유일 계책이었다. 그 전, 김구 선생과 마지막 식사를 함께 하고 서로 시계를 교환했던 장소로 유명한 곳이 상하이 원창리 13호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임정투사들


모든 임정투사, 애국지사들의 흔적을 살피고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하고 싶다. 그러긴 힘드니 만큼, 이 책 <임정로드 4000km>를 직접 읽을 것을 추천드리며 여기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임정투사 흔적의 기막힌 현대 모습과 임정투사들의 기백과 용기 사례를 소개해보겠다. 


임정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 예관 신규식 선생은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육군 출신의 그는 을사늑약과 경술국치 때 불의에 항거하기 위해 두 번이나 자살 기도를 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다. 그럼에도 망국을 피할 수 없었고 중국 상하이로 망명, 중국 혁명가들과 친분을 쌓고 한국 독립운동가와 잡지 발간 등 활동을 이어갔다. 한국과 중국 독립운동의 가교 역할을 한 것이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는 데 구심점이 되어 법무총장, 외무총장, 국무총리에까지 올랐고 정식 외교사절로 중국의 국부 쑨원의 광동 호법정부를 방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상하이 시절 거주했던 상하이 남창로 100농 5호 2층 단칸방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반면, 건너편 집에 살던 중국 공산당 창시자 천두슈 선생은 확실한 표식으로 기리고 있다. 


백범 김구 선생과 더불어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태산북두 약산 김원봉 장군, 그는 김구 선생보다 현상금이 컸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지금 가치로 320억 원이 넘는 금액. 하지만 우린 그를 여전히 잘 모른다. 그동안 수십 년 동안 의도적으로 그의 존재를 숨겨왔다. 그는 의열단을 창설하고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세웠으며, 조선의용대를 창설해 총대장을 맡았다. 이후 조선민족혁명당의 총서기도 맡았고,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된 뒤에는 광복군 부사령관을 역임했으며, 임시정부에서는 군무부장을 맡았다. 하지만 그도 갑작스레 찾아온 해방을 맞아 추스리기 힘들었고, 김구 선생에 이어 2진으로 귀국한다. 해방된 조국, 상상을 초월하는 현실, 1947년 여운형 선생이 피살당하고 김원봉 장군은 '남로당이 주도한 파업에 연루됐다'는 죄목으로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에 끌려가 얻어맞고 1948년 스스로 북으로 넘어갔으며 1949년에는 김구 선생이 피살당한다. 그 사이 1948년 대한민국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것이다. 


여기는 중국 아닌 대만, 목숨을 바쳐가며 일제 왕족을 처단했지만 이름도 몰랐던 청년이 있다. '조명하', 그는 1928년 5월 14일 대만 타이중에서 단도 한 자루를 던져 의거에 성공했다. 일본에서 어렵게 공부하다가 상하이 임정에 투신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중간 기착지인 대만에 들렀는데 여비가 없어 상점에서 잠시 일했다. 그때 일왕의 장인이자 당시 육군 대장이었던 구니노미야 구니요시가 온다는 소식을 접했고 중국인에게 칼 쓰는 법을 연마했다. 그야말로 혈혈단신, 독을 바른 칼 한 자루로 그를 처단했다. 현장에서 사망하지 않았던 구니노미야는 이듬해 1월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조명하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의거 5개월 뒤 타이베이 형무소에서 사망했다. 


개인적으로, 생일이 8월 29일이다. 8월 29일은, 다름 아닌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제로 병탄한 날이다. 해방을 맞이한 8월 15일 만큼 의미를 두어야 하는 날이지만, 역사를 좋아하고 잘 안다고 자부하는 필자임에도 비교적 최근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무도 35년의 일제 강점기, 그 시작점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지 않았고 당연히 알려주지도 않았다. 2019년은 주지했다시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큰 족적이 되는 해인 것이다. 그럴수록 잊혀졌던 인물과 흔적, 잊고 싶던 사건, 잊을 수밖에 없었던 시기를 잘 살펴봐야 하겠다. 부디 2019년을 계기로 진정한 대한민국 역사 바로 세우기를 실천했으면 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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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김구, 김원봉, 대한민국 100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규식, 윤봉길, 임정로드 4000km, 조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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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다시, 사랑이라고 말하는 러브 스토리 <먼 훗날 우리>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9.01.14 12:15



[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먼 훗날 우리>


영화 <먼 훗날 우리> 포스터. ⓒ넷플릭스



2007년 춘절, 고향으로 귀향하는 기차 안에서 처음 만나 친구가 된 린젠칭(징보란 분)과 팡샤오샤오(저우둥위 분), 알고 보니 같은 동네에 살고 있던 그들은 베이징에서 함께 지내며 꿈을 키운다. 린젠칭은 게임 개발자의 꿈을 키우는 반면, 팡샤오샤오는 잘 나가는 베이징 남자와 결혼할 때까지는 그저 먹고 사는 데만 치중할 뿐이다. 


린젠칭은 팡샤오샤오를 좋아한다. 팡도 린을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 그들은 연인으로 발전한다. 그렇게 시작되는 다시 없을 열정적이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하지만 그들의 현실은 너무나도 팍팍하다. 


언제 꿈을 이룰지 알 수 없지만, 꿈을 이루기 노력하는 한편 현실을 살아가려고 발버둥 쳐야 하는 린. 팡은 그런 린을 응원하며 그저 먹고 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계속할 뿐이다. 그들의 사랑은 삐걱대기 시작한다. 


영화는 동시에 10년이 흐른 후 린과 팡이 우연히 베이징행 비행기에서 만나는 장면을 보여준다. 담담히 서로를 응시하며 조용히 대화를 이어가는 두 사람, 분위기로 봐서 그들은 헤어졌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들에게 어떤 일이 닥쳤던 것일까. 


중국 멜로의 대세이자 현재


이 영화는 단연코 중국 멜로의 현재이자 대세이다. 영화 <먼 훗날 우리>의 한 장면. ⓒ넷플릭스



영화 <먼 훗날 우리>는 중국 현지에서 신드롬에 가까운 흥행성적을 내고는 북미와 한국엔 넷플릭스로 공개되었었다. 중국 대세 배우들인 징보란과 저우둥위가 함께 한 청춘 감성 멜로로, 대만 출신의 만능 엔터테이너 류뤄잉의 첫 연출작이다. 


류뤄잉을 간단히나마 소개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녀는 수많은 상을 휩쓴 영화배우, 대박 음반을 낸 가수, 10권이 넘는 책을 낸 작가, 그리고 이젠 영화감독이기도 하다. 이밖에 작사와 작곡도 하고 뮤지컬도 하고 다양한 사회활동도 한다. 


그런 감독의 작품이다 보니 영화도 지루하지 않고 빠르고 다채롭게 진행될 것 같고, 다방면의 이야깃거리들이 한데 잘 뭉칠 것 같다. 정통 멜로에 한 발만 걸치고 다양한 이야기들이 펼쳐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대 했던 것을 훨씬 웃도는 만듦새를 보여주었다. 단연코 이 영화는 중국 멜로의 현재이자 대세이고, 당분간 '중국 멜로' 하면 이 영화를 떠올릴 듯하다. 재미와 감동의 두 마리 토끼를 잡았고, 현재의 청춘을 보여주는 데도 성공했다. 


첫사랑 지침서


첫사랑 지침서 <건축학개론>을 생각나게 하는 외관을 지녔다. 영화 <먼 훗날 우리>의 한 장면. ⓒ넷플릭스



영화는 우리나라의 첫사랑 지침서 <건축학개론>을 생각나게 하는 외관을 보인다. '그때 우린 왜 그랬을까' '그때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의 우린 달라졌을까' 하는 덧없지만 할 수밖에 없는 질문들. 정처없다. 


보다 깊이 들어가보면, 밖으로만 도는 팡을 향한 린의 일편단심과 그 일편단심의 소소하고 디테일한 면면들이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호감인지 사랑인지 모를 미묘함이 웃음 아닌 미소를 짓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란 게 또 그럴 수밖에 없다'라고, 누군가는 말하게 만들고 또 그 말이 맞을 때가 있는 법. 사실, 팡이야말로 린을 계속 사랑해오지 않았을까. 그러지 않고는 그들의 연애와 사랑의 모습들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울 수 있겠는가. 


팍팍한 현실이라는 벽 또는 핑계는 그들로 하여금 아니 팡 아닌 린으로 하여금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마치, 운명 같다.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건, 운명 같다. 영화는 이 운명의 거시적 관점을 현재의 시점에서 풀어내고, 이 사랑의 미시적 관점을 과거들의 시점에서 풀어낸다. 우린 영화의 시작부터 결말을 다 알고 있지만 과정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누구나의 과거, 현재, 미래가 빠짐없이 녹아 있기에.


결국, 다시, 사랑.


중국 청춘들의 현실을 들여다보는 데 사랑과 연애를 수단으로 사용한 것 같지만, 결국 다시 사랑이라고 말한다. 영화 <먼 훗날 우리>의 한 장면. ⓒ넷플릭스



중국은 이제 명실상부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지만, 실상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운 과도기라고 할 수 있다. 중앙 통제의 공산주의 국가라고는 하지만, 세계 최고의 빈부격차를 '자랑'하는 나라가 아닌가. 성공을 위해서라면 도시에서의 집도 절도 없는 생활을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린과 팡의 베이징 나날들이야말로 그 자체이다. 


영화는 중국이, 중국 청춘들이 처한 현실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정공법을 택하면서, 사랑과 연애를 표나지 않게 어우르는 데 성공한다. 이 영화가 명작의 면모를 갖추었다는 게 바로 그 부분인데, 홍콩 반환기의 혼란과 10년 동안의 사랑을 절묘하고 절절하게 그린 20여 년 전 진가신 감독의 <첨밀밀>과 궤를 같이 한다. <건축학개론>보단 <첨밀밀>이 연상된다. 


그런 면에서 <먼 훗날 우리>는 단순명쾌한 영화는 아니다.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시골 청춘의 도시 상경기 또는 성장기 그리고 회상기인 건 맞지만, 영화를 온전히 품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개인 아픔, 사회 현실, 시대 정신까지 차례대로 두루두루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랑과 인생이 그들만의 것이 아닌 게 가슴 아프다. 그렇다고 다른 무엇의 것이라고 한다면 더욱 가슴 아프다. 


단순히 개인과 개인의 사랑에서 오는 아픔과 슬픔이라면 공감에의 '치유'가 가능했을 텐데, 이 영화의 사랑이 낳은 아픔과 슬픔은 끼어드는 것들이 너무 많고 일개 개인으로선 어찌 해볼 수 없는 것들이라 형용하기 힘든 감정을 유발시킨다. 하지만 영화는, 그럼에도 사랑이라면 다 이길 수 있고 이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다시, 사랑이라고 말하니 이 영화는 러브 스토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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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공간, 하나의 세계, 하나의 우주를 둘러보는 것 <인 디 아일>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9.01.11 08:00



[리뷰] <인 디 아일>


영화 <인 디 아일> 포스터. ⓒM&M 인터내셔널



난 '마트'와 인연이 깊다. 아빠와 엄마가 조그마한 슈퍼를 운영해 10대를 온전히 보냈고, 20대 중반에는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가 현지 대형 마트에서 야간 청소를 해봤고 이후 한인 마트에서 반 년 이상 일했으며, 20대 후반에는 편의점에서 주말 야간 알바로 일 년을 일했다. 


누구보다 마트를 잘 안다고 할 순 없겠지만, 마트의 앞뒤상하좌우를 왠만큼 안다고 할 순 있을 것 같다. 매장과 창고를 오갔고 돈이 오고 가는 것도 관리했으고 마트의 시작과 끝을 지켰으며 닫고 열 때까지의 시간도 알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니 수많은 사건들이 생기고 수많은 사연이 있는 그곳 마트, 생각 외로 고객들 간의 또는 직원과 고객 간의 일보다 직원들 간의 일과 사연이 많다. 그곳, 그들, 그일을 들여다보는 건 하나의 공간, 하나의 세계, 하나의 우주를 둘러보는 것과 같다. 


독일에서 건너와 이동진 평론가의 시네마톡 버프를 받고 개봉에 성공해 '이동진의 2018년 외국영화 베스트 10'에 올라가며 보다 많은 관객들에게 알려진 <인 디 아일>은, 대형마트에서 일하게 된 신입 남직원이 선배 여직원과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영화는 이 표면 위아래로 다채롭고 다층적인 이야기를 함유하고 있다. 


대형마트 신입직원의 사랑과 성장


대형마트에 취작한 신입직원의 사랑과 성장이라는 외형을 띈다. 영화 <인 디 아일>의 한 장면. ⓒM&M 인터내셔널



창고형 대형마트 음료 파트에 취직하게 된 크리스티안(프란츠 로고스키 분)은 내성적이고 말이 없지만 일을 배우고 함에 있어 적극적으로 임한다. 상반신 전체를 아우르는 문신을 감춘 채 혼자 사는 집과 마트를 오갈 뿐인 그, 한편에선 사수의 가르침을 받고 한편에선 어느 여직원과 사랑에 빠진다. 


음료 파트 수장 브루노(피터 쿠스 분)는 자상하게 크리스티안을 지도한다. 과거 통일 전 동독의 트럭 기사였다던 그는 이젠 작은 지게차를 몰고 있을 뿐이지만, 푸념이나 불만 없이 그저 그때를 그리워할 뿐 크리스티안에게 지도함에 있어 그보다 더 정확하고 친절할 수가 없다. 그도 혼자 산다. 


크리스티안이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진 여직원은 마리온(산드라 휠러 분)이다. 그녀는 마트 직원 모두에게 좋은 인상인데, 크리스티안에게도 마찬가지다. 크리스티안에게 또 다른, 아니 진정한 출근 이유가 된 그녀이지만, 그녀에겐 비밀이 있는 것 같다. 


비밀은 마리온뿐만 아니라 크리스티안에게도, 브루노에게도 있는 듯하다. 물론 크리스티안을 제외한 모든 마트 직원들이 알고 있는, 말할 수 있는 비밀이다. 크리스티안은 마리온과의 사랑을 잘 키워나갈까, 그는 이곳에서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잔잔한 와중, 과거의 사건들


지극히 잔잔하지만, 결코 잔잔하지 않은 과거를 들여다보는 건 여간 곤혹스럽지 않다. 영화 <인 디 아일>의 한 장면. ⓒM&M 인터내셔널



이 영화, 참 잔잔하다. 잔잔함의 종류와 수위가 영화가 영화 같지 않게 한다.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시피 한대, 와중에 크리스티안과 마리온의 사랑이 가장 큰 일이고 크리스티안과 브루노의 지게차 연수와 크리스티안과 전(前) 친구들의 만남 등이 주요한 일이다. 


진짜 사건은 그들의 과거에 있다고, 있었다고 하겠다. 크리스티안의 문신과 예사롭지 않은 친구들, 브루노의 통일 전 동독 시절 트럭 운전 얘기, 크리스티안만 빼고는 모두 아는 마리온과 그녀의 남편 얘기. 


잔잔할 뿐더러 누구나 지녔음직한 비밀 또는 사연이어서 별 다를 게 없을 이들의 과거는, 지루할 듯한 영화에 은근히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다. 배경음악 한 점 없이 진행되는 와중, 예상치 못한 그러나 굉장히 좋은 적재적소 배경음악이 한 몫을 하지 않았나 싶다. 


아무도 없는 퇴근 후 대형마트 통로를 지게차만 돌아다니는 첫 장면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 대형마트 노동자들의 야간작업 장면은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 고객들이 북적북적 돌아다니는 장면은 행진곡들로 채운다. 그런가 하면, 지극히 현대적인 음악들도 어울리지 않을 듯하지만 굉장한 어울림으로 함께 한다. 


독일 통일 이야기


독일 통일 이야기가 자연스레 나온다. 동독과 네오나치 등. 영화 <인 디 아일>의 한 장면. ⓒM&M 인터내셔널



영화 저변에, 표면 아래에, 이면에 깔려 있는 정서는 독일 통일 이야기가 크게 작용한다. 독일 통일은 축복받아 마땅하지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합치는 아니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에 포섭되는 과정에서 혼란과 희생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공산주의 동독 노동자의 경우 자본주의의 치열한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바, 영화는 브루노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크리스티안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크리스티안의 경우 네오 나치로 보아지는 친구들이 있어 예측할 수 있다. 


또한, 이념을 떠나서 또는 이념적으로 동독은 경쟁 아닌 협력과 협동과 공동체를 지향했을 것이다. 영화에서의 대형마트는 그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데, 크리스티안이 마리온을 사랑하게 되자 모두들 너무 나서지 않으면서도 걱정해주고 모습과 크리스티안이 신입으로 힘들어하면서도 뭔가 해보려 하자 응원해주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모습들이 이 잔잔하고 자칫 지루하며 어떨 때는 딱딱하고 차가울 수 있는 분위기를 일순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어느덧 크리스티안을 응원하고, 마리온을 걱정하며, 브루노를 우러러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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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마트, 독일통일, 동독, 사랑, 성장, 인 디 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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