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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세상 모든 게 소년을 가해자로 몰아넣다 <해에게서 소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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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해에게서 소년에게>



영화 <해에게서 소년에게> 포스터 ⓒ디씨드


사이비 종교에 빠져 집이 풍비박산 난다. 오랜 시간 형의 병수발을 하다가 엄마가 사이비 종교에 빠져 버린 것이다. 아빠는 빚쟁이에 쫓겨 집을 나가고, 엄마는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다. 형도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렇게 시완은 철저히 혼자가 되고, 복수할 일념으로 전도사 승영이 지내고 있는 PC방으로 찾아간다. 그곳은 엄마와 알고 지내던 신도 진숙이 운영하고 있었다. 


시완은 칼로 전도사 승영을, 자신의 집안을 풍비박산 나게 한 장본인인 사이비 종교 전도사 승영을 찌르려 한다. 하지만 어디 쉽겠는가. 외려 그들은 점점 친해진다. 승영이 예의 따듯한 미소와 말로 시완을 대한다. 어딜 봐도 사이비 종교 전도사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더불어 진숙의 딸 민희도 시완을 스스럼 없이 대한다. 시완은 승영을 형이라 부르기 시작하고, 민희에게는 환한 미소로 대하기 시작한다. 


깊은 아픔을 간직한 소년의 성장기?


영화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깊은 아픔을 간직한 한 소년이 그 아픔의 원인과 함께 '공동체'를, '새로운 가족'을 형성해 가는 과정을 담은 듯 보인다.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들끼리 모여 가족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넘어서, 원수와도 같은 사람과도 가족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는 듯 보인다. 


중반까지 이 영화의 중심에 그런 물음이 있었고, 영화는 그 물음에 'Yes'라는 답을 보낸다. 그렇게 그들은 가족이 되어 가고 있었다. 거기에 사이비 종교와 죽음이라는 암울한 그림자가 끼어들 자리는 없어 보였다. 승영과 시완과 민희는 운동장에서 함께 놀고,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한 방에서 각자 할 일을 했다. 



영화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한 장면 ⓒ디씨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가족의 모습을 탁월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새로운 가족에겐 혈연이나 그에 맞는 역할보다 '관계'가 중요하다. 이들이 함께 하는 가족은 역할보다 관계가 우선이다. 자연스레 소통이 이뤄지고 서로에 대한 배려와 절제가 앞선다. 그러는 한편 미성년자로서 보호 받아야 할 대상인 시완을 챙겨준다. 승영은 시완의 형이 되고 보호자가 된다. 진숙은 시완의 어머니가 된다. 민희는 시완의 친구이자 남매가 된다. 이건 역할이라기 보다 관계의 이상적 모습이다. 


어른들의 일방적 처사, 소년을 압박하다


그런데 영화는 급반전 된다. 쓰러져 가는 교회를 다시 살려보자는 진숙과 목사의 성화에 전도사 승영은 목사가 되기로 하고 부흥을 결심한다. 그러며 시완에게 간증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시완에게는 가장 잊고 싶은, 집안을 풍비박산 시킨 주체를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것도 모자라 그 주체와 함께 하라는 요구였다. 그야말로 간악한 처사였다. 


그것도 모자라 진숙의 포악한 남편이 그들을 괴롭힌다. 평소에도 술만 마시면 폭력을 휘두르곤 했는데, 어디서 사기를 당하고 온 뒤 폭력의 수위가 높아진다. 이를 말리다가 시완은 실수를 하고 이 사건은 시완에게 결정적 타격을 입히고 만다. 시완은 그들을 지키고자 그랬는데, 그들은 시완을 지킬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 새로운 가족의 탄생은 그렇게 어른들의 일방적 처사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영화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한 장면 ⓒ디씨드



영화는 시종일관 어둡기 짝이 없다. 채도를 낮춘 듯한 화면에서, 도무지 희망을 찾을 수 없다. 쨍쨍한 햇볕과 푸른 하늘마저도 뿌옇다. 그건 이들이 함께 해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그런 장면에서 더욱 선명한 대비를 이뤘던 것이다. 그 끝이 결코 좋지 않을 것이라는 걸 예견하고 있는 듯하다. 사이비 종교의 부흥은 관심 밖이다. 시완은 어떻게 될까. 그게 궁금할 뿐이다. 


소재의 한계와 보편적 주제


사이비 종교, 빛쟁이, 자살, 죽음, 가출, 원수와의 공동체 등. 이 영화에서 우리가 쉽사리 공유, 공감할 만한 것들이 별로 없다. 있는 듯 하면서도 별로 없다. 주요 공간이 사이비 종교 기도원이자 PC방이라는 정도? 그것마저도 마냥 PC방이 아닌 점에서 공유, 공감할 만하지 못하다. 이 영화의 소재가 갖는 한계다. 


반면 이 영화의 주제가 갖는 한계는, 보편적이라고 까지 할 수는 없겠지만 소재보다 훨씬 넓다. 도대체 아이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가? 아무 잘못도 없는 아이들은, 왜 그토록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인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는가, 하는 질문마저 하게 만든다. 사회적 안전망이 턱없이 부족한 이 나라에서, 역시 세상살이에 힘든 어른들로 인해, 아이들은 가해자로의 길을 가고 있다. 세상 모든 것들이 그들을 그 길로 몰아넣고 있다. 



영화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한 장면 ⓒ디씨드



이 굴레를 벗어나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영화는 가르쳐 주지 못한다. 다만 보여줄 뿐이다. 보여주는 것 만으로도 큰 용기와 깊은 자기 반성이 필요하다. 이 불편한 영화는 그렇게 내 마음 속에 남아 용기와 자기 반성의 깊이를 더해줄 것이다. 그게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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