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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https://linktr.ee/singe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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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변화하고자 하기 전에, 위기를 들여다보자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9. 7. 1.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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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대변동>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대변동> 표지. ⓒ김영사


 

1998년 퓰리처상 수상작 <총, 균, 쇠>로 유명한 세계적인 석학이자 세계를 이끄는 최고의 지식인으로 우뚝 선 '지리학자' 재레드 다이아몬드, 그의 인생에도 큰 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1950년대 후반 생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따려던 과정에서 실패를 맛보고 과학자로 계속 살 수 있을지 심각한 의문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궁극적으로 학자의 길을 포기하려고 마음먹었는데, 아버지와의 진심 어린 대화로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1980년의 연구 방향 전환과 2000년의 이혼이라는 큰 위기도 있었다고 전한다.

 

그는 예컨대 이런 류의 개인 위기라는 렌즈를 통해 국가 위기를 보는 게 유익하다고 말한다. 국가와 개인이 엄연히 다르다는 걸 아주 잘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역사학자에게는 개인 위기가 더 친숙하고 이해하기도 쉽다는 것, 학자들이 찾아낸 개인 위기 연구 성과 12가지 요인이 국가 위기에서 비롯된 결과들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기본 요인을 찾아내는 출발점이 된다는 것. 연구자로서 연구목적과 방법에 철저하기 위한 방안임과 동시에, 철저히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수준높은 교양서를 집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최신작 <대변동: 위기, 선택, 변화>(김영사)로 몇몇 국가들의 과거와 현재의 위기를 들여다보고 그에 대응한 선택적 변화를 비교했다. 그를 통해 현재와 미래의 위기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했다. 분명, 그가 제시한 국가들의 과거와 현재 위기 면면들이 너무 쉽게 다가오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즉, 익히 들어서 아주 잘 알고 있는 사실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그 사실들 자체에 주목한 게 아니라 사실들에서 도출된 '위기'의 면면들에 주목했다. 나아가 개인 위기와 결을 같이하는, 국가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요인들도 제시했다.

 

12가지로, 다음과 같다. 국가가 위기에 빠졌다는 국민적 합의,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책임의 수용, 해결해야 할 문제를 규정하기 위한 울타리 세우기, 다른 국가의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지원, 문제 해결 방법의 본보기로 삼을 만한 다른 국가의 사례, 국가 정체성, 정직한 자기평가, 역사적으로 과거에 경험한 위기, 실패에 대처하는 방법,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는 능력, 국가의 핵심 가치, 지정학적 제약으로부터의 해방.

 

국가의 위기와 선택과 변화

 

책은 3부, 11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곧 1장인데, 앞에서 언급한 개인 위기를 다룬다. 2부는 2~7장으로, 6개 국가의 과거 위기를 다룬다. 핀란드, 일본, 칠레, 인도네시아, 독일, 오스트레일리아(이상 "호주")가 그 나라들이다. 이들 나라의 과거 위기 양상은 다시 두 나라씩 짝지어져 있다. 3부는 8~11장으로, 일본과 미국 그리고 세계의 현재 위기를 다룬다. 2장부터 11장까지 공통적으로, 장의 마지막에 '위기의 기준틀'이라는 소제목으로 주지한 12가지 요인에 맞춰 국가 위기를 들여다보며 요약·정리한다.

 

2부의 2장부터 차례대로 간략히 들여다보자. 핀란드와 일본은 외부 충격으로 급작스럽게 위기를 맞은 사례다. 1939년 11월 30일 소련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위기를 맞은 핀란드, 엄청난 손실을 입었지만 독립을 유지한다. 이후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핀란드는 독재국가 소련의 신뢰를 얻어 살아남기 위한 외교정책을 추진했다. 지금은 부유한 산업국가가 되었다. 1953년 7월 8일 미국 함대의 출현 이후 일본은 지배 체제가 전복되고 광범위한 변화가 일어난다. 하지만 일본만의 전통적 특징도 보존하였기에 고유한 특징을 지닌 부유한 산업국가로 살아남았다.

 

칠레와 인도네시아는 내부 요인으로 급작스럽게 위기를 맞은 사례다. 1973년 9월 11일 민주적으로 선출된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가 군부 쿠데타로 전복되었다. 이후 쿠데타 지도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는 십 수 년 동안 권좌에 머물렀다. 칠레는 오랜 민주주의 전통을 자랑했지만, 한순간에 가학적 독재 정부로 전락했다. 1965년 10월 1일 인도네시아 쿠데타는 이후 생각지 못하게 흘러갔다. 쿠데타를 진압한 세력이 쿠데타를 지원한 것으로 추정되는 세력을 학살한 것이다. 이후 수십 년 동안 군부 독재가 이어진다.

 

독일과 호주는 제2차 세계대전의 스트레스로 점진적 변화 또는 위기를 맞은 사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나치 유산, 계급 충돌, 동서독 간 정치분할 등의 문제에 시달렸다. 세대 충돌, 지리 제약, 나치 화해 등의 변별적 선택 변화로 위기를 해결했다. 역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호주는 국가 정체성 위기 문제에 시달렸다. 영국과 백인이라는 정체성이 지리와 외교와 국방과 경제와 인구 등과 끊임없이 충돌하면서도 '백호주의(백인호주주의)'를 채택했는데, 결국 선택적 변화로 백호주의를 폐지했다.

 

일본과 미국과 세계가 직면한 문제는 한국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수직낙하한 경제라고 하지만 여전히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 중 하나인 일본, 하지만 일본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인구가 가장 크고 근본적인 문제이고, 아울러 과거사와 정부부채와 자원관리 등도 무시할 수 없는 문제로 보았다. 여전히 비교불가 세계 최강대국 미국, 첨예한 정치적 양극화 현상으로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양극화가 비단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있다는 점이다.

 

나의 경험, 우리나라의 사례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이 책을 통해, '위기'란 긴 간격으로 드물게 일어나는 극적인 변동이라고 말한다. 빈도와 기간과 영향력에 따라 위기를 다르게 정의할 수 있다는 단서를 달고 또 다소 빈번하게 일어났던 작은 전환점 경험을 부인하지도 않지만, 이 책에서 채택한 위기는 빈도와 기간과 영향력 면에서 매우 중대했다. 그가 그동안 많은 저작물들을 내보이면서 추구한 폭넓고 축약적인 방법론을 이번 책에서도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수준 높은 교양입문서로 손색없다.

 

그가 개인 위기에서 출발해 국가 위기로 나아갔듯, 나의 경험을 대조해보고자 한다. 지극한 개인 위기는, 30대 중반인 지금까지 딱히 찾아보기 힘들다. 시간이 좀 더 흐른 시점에서 돌아본다는 가정 하에, 군 제대 후 대학교 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몇 년 동안 복학하지 않았던 20대 중반 또는 10여 년 가까이 2곳의 회사 생활을 하며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주어야겠다는 뼈저린 통감을 하곤 실행에 옮긴 지금 30대 중반이지 않을까 싶다.

 

한편, 사회국가 위기와 개인 위기가 맞물려 닥친 사례는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이 아닐까 싶다. 완연한 어른이 된 후 처음 겪는 미증유의 사태는,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 이후 처음이고 국내 사태로는 처음인 듯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인재(人災), 15년 여 전 1993~1997년까지 이어진 일련의 재앙적 사고들이 떠오른다. 거기엔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등이 있다. 그 종착점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위기 중 하나로 기억될 1997년 12월 3일 'IMF 외환 위기'일 것이다.

 

우린 아직 IMF 외환 위기의 유산에서 완전히 헤어 나오지는 못했다 또는 못했다고 한다.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경제 위기는 이어질 것이기에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제시한 국가 위기 중 칠레와 인도네시아의 내부 요인에 의한 위기 이후 모습이 그리 좋지 않은 것처럼 우리나라가 직면했던 위기가 제대로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핀란드나 일본, 독일이나 호주처럼 확고한 정책 시행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 일본과 미국이 직면한 문제들이 고스란히 지금의 한국에도 통용되는 불행을 안고 있다.

 

우리나라는 근현대사 내내 국권침탈, 남북분단, 6.25전쟁, 쿠데타 등으로 이어지는 국가적 위기를 겪었다. 모두 <대변동>에서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예로 든 국가 위기들에 맞먹는다. 그 결과 위기를 기회의 원조로 삼으며 위기-선택-변화로 이어지는 단계의 일환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위기를 그저 위기로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저자에 따르면, 위기를 위기로 받아들이게 될 때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변화하고자 하기 전에, 위기를 제대로 파악하고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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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ingenv
국가, 대변동, 독일, 미국, 변화, 선택, 위기, 인도네시아, 일본, 재레드 다이아몬드, 칠레, 핀란드, 한국, 호주
  • BlogIcon 여강여호
    2019.07.01 14:31 신고

    짧은 생각이지만 위기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없었지 않았나 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 BlogIcon singenv
      2019.07.01 16:41 신고

      위기는 항상 생기기 마련인데, 위기가 닥칠 때마다 똑같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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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이루는 또 다른 무엇들... 현실이 된 동심 <이웃집 토토로>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9. 6. 12.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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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이웃집 토토로>


영화 <이웃집 토토로> 포스터. ⓒ대원미디어



아내가 아직 여자친구였을 때, 그러니까 20대 중반쯤 아내가 몇 번인가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스무 살 때까진 동물과 얘기를 할 수 있었다고 말이다. 훨씬 어렸을 때는 남들 눈엔 안 보이는 걸 볼 수도 있었다고 한다. 난 어렸을 때도 그런 적이 없었던 것 같아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말이 뜻하는 바를 느끼게 된다. 때론 귀여운 느낌으로, 때론 뼈저리게. 동심을 느낄 때면 행복에 졌지만 절대 돌아갈 수 없는 그때를 생각하면 슬프다. 


이런 생각을 하는 이가 비단 나나 아내뿐만은 아닐 테다. 만화의 천국 일본에서도 굴지의 지브리 스튜디오를 설립해 전 세계 수많은 이들에게 사실적 판타지를 선사한 미야자키 하야오도 그래했나 보다. 50세에 가까운 나이, 1988년에 <이웃집 토토로> 같은 작품을 내놓은 걸 보니. 자그마치 30년이 넘은 이 작품, 작년 30주년을 맞이해 중국에서 리마스터링으로 최초 개봉을 했고 1년도 지나지 않아 한국에서 가져와 재개봉을 했다. 한국에서도 최초 개봉은 2001년으로, 비로소 일본과의 문화 교류가 시작되어 극장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지난 2013년 <바람이 분다>를 마지막으로 장편 애니메이션 2번째 은퇴 선언을 했다가 번복하고 내년쯤 복귀한다고 한다. 그 사이에 국내에 그의 명작들이 재개봉, 최초개봉했다. 2014년 <하울의 움직이는 성> 재개봉, 2015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재개봉, 2017년 <루팡 3세> 최초개봉, 2019년 <이웃집 토토로> <마녀 배달부 키키> 재개봉 등 그야말로 '러시'가 이어졌다. 이밖에도 그의 명작들이 수두룩한 바, 개봉 러시는 계속 이어지지 않을까 싶다. 


토토로


지브리 스튜디오의 마스코트 토토로. 영화 <이웃집 토토로>의 한 장면. ⓒ대원미디어



<이웃집 토토로>는 1960년대부터 활동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원숙한 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하지만, 1985년에 세워진 지브리 스튜디오로서는 불과 4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이었다. 개봉 당시에는 흥행 참패를 면치 못했는데, 오래지 않아 토토로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마스코트가 되어 지금까지 로고로 활동하고 있다. 아울러 지브리 스튜디오와 미야자키 하야오를 대표하는 애니메이션이자 캐릭터로 군림하고 있다. 


1950년대 일본, 사츠키와 메이는 아빠와 함께 도시에서 시골로 이사를 온다. 결핵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엄마가 퇴원하면 좋은 환경에서 지내고자 이사를 온 배경이 있지만, 아이들은 처음 보는 환상적인 환경이 그저 신기하고 재밌을 뿐이다. 다 쓰러져 가는 집에서는 무수히 많은 검댕이들을 발견하고, 숲에서는 그림책에 나오는 토토로들을 발견한다. 


이웃집 할머니는 검댕이의 존재를 안다. 아무도 없는 낡은 집을 먼지투성이로 만드는 존재들. 할머니도 어렸을 땐 보였다며, 아이들에게도 보인 거라 맞장구쳐준다. 아이들은 검댕이가 보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무섭지도 않는다고 한다. 다다음날 사츠키는 학교에 가고 메이는 혼자 놀다가 도토리를 흘리는 꼬마 토토로를 따라 숲으로 들어간다. 


숲에서 큰 토토로를 만나는 메이, 처음 보는 낯설고 큰 괴생명체이지만 전혀 무섭지 않고 그러기는커녕 토토로의 품이 한없이 포근할 뿐이다. 다음 날, 혼자 있기 싫은 메이는 사츠키 학교에 찾아오고 함께 집으로 향한다. 비는 쏟아지고 메이는 꾸벅꾸벅 조는 와중, 큰 토토로가 그들 앞에 모습을 보이는데... 꿈같이 환상적인 경험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더불어 사는 삶의 발로


단순히 아이들 동심의 발로가 아닌, 더불어 사는 삶의 발로이다. 영화 <이웃집 토토로>의 한 장면. ⓒ대원미디어



어른 아닌 아이들의 눈에만 보이고 아이들하고만 얘기를 하는, 오직 아이들만의 환상적인 경험을 다룬 이야기들은 많다. 비단 <이웃집 토토로>를 비롯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이 특출난 게 아닌 것이다. 그런 류의 많은 작품들에선 어른들로 대변되는 '적'이 존재한다. 아이들이 보고 듣고 느끼는 걸 무시하고 부러워하고 없애버리려 하던가 이용하려 하던가. 사건이 일어나고 해결을 하려 하고. 


<이웃집 토토로>에선 적이 없다. 모든 살아 있는 것에는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일본의 토착 사상을 가져와, 그 자장 안에서 어른과 노인도 아이들의 허무맹랑한 생각을 받아들이고 지지해주는 것이다. 아니, 자신들도 어릴 땐 보였고 아이들 눈엔 보이기 마련이라고 오히려 아이들에게 가르쳐준다.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지극히 정상적인 삶의 한 면이라고 말이다. 


토토로는 단순히 아이들만의 동심이 발로된 결과물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큰 틀에서 더불어 사는 삶이 발로된 결과물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세계는 인간 세계나 자연 세계가 아니라 차원을 달리하는 영혼 세계까지 함께 하는 큰 세계다. <이웃집 토토로>의, 현실적이지만 판타지적이기도 한 세계는 앞으로 계속될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관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세계를 이루는 기본과 변칙


세계를 이루는 기본과 변칙을 보여준다. 영화 <이웃집 토토로>의 한 장면. ⓒ대원미디어



<이웃집 토토로>의 세계가 아이들에게 완벽하기만 한 곳은 아니다. 그곳엔 아빠만 있을 뿐 엄마가 없다. 10살 사츠키와 4살 메이에게 물론 아빠도 꼭 필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필요한 존재가 엄마일 수 있다. 근데 엄마가 아파서 거의 볼 수가 없으니 아이들의 마음엔 불안이, 해결할 수 없는 근원적 불안이 항시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불안으로 인한 상처, 그리고 오묘한 세계를 향한 호기심으로 인한 쾌감. 


이 상반된 두 감정은 인간이 가지는 보편적 감정일 테다. 한편, 호기심에는 판타지를 기반으로 한 아이들의 긍정적 경험이 담겨 있다. 그건 세계를 이루는 기본에 해당되는데, 누구나 무엇이든 이 기본을 거치게 되어 있기에 오히려 현실에 가깝다. 반면, 불안에는 현실을 기반으로 한 아이들의 부정적 경험이 담겨 있다. 그건 세계를 이루는 변칙에 해당되는데, 누군가에게 무엇인가에 이 변칙이 들이닥칠지 몰라 오히려 판타지에 가깝다고 하겠다. 영화는 세계를 이루는 기본과 변칙을 아이들의 시선으로 담았다. 


영화를 보고 나면 믿지 않을 수 없다. 이 세계를 이루는 또 다른 무엇들이 있다고 말이다. 그것들은 무섭지 않고 나쁘지도 않으며 그저 우리처럼 살아갈 뿐이라는 걸. 몸과 마음이 풍성해지는 걸 느낀다. 더불어 사는 세상이란 얼마나 든든한가 말이다. 존재 자체로 서로에게 이로울 수 있다는 건, 그 얼마나 꿈만 같은 일인가. 다시 그것들을 볼 수 있는 때로 돌아가고 싶다. 아니, 본 적이 없으니 돌아갈 때도 없겠다. 나이와 상관없이 아직 나에게 오지 않은 것일까. 꿈에서라도 볼 수 있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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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 미야자키 하야오, 세계, 아이, 이웃집 토토로, 일본,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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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연쇄, 연계 폭력에 대항하는 '파괴' <무지개 새>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9. 5. 2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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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독자에게] 메도루마 슌 장편소설 <무지개 새>


메도루마 슌의 <무지개 새> 표지. ⓒ아시아



1995년 9월 4일, 오키나와를 뒤흔든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오키나와에 주둔하는 미 해병대원 2명과 미 해군 1명이 12세 여학생을 납치해 성폭행한 것. 미일지위협정으로 미군 셋의 신병은 인도되지 않는다. 오키나와 미병 소녀 폭행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억눌려 있던 반미, 반기지 감정이 폭발한다. 


이 사건으로 반미군기지 운동이 전개되어 후텐마 기지의 현외 이설이 현실화되는 듯싶었는데, 미봉책으로 남부의 기지를 북부로 옮기는 헤노코 신기지 건설이 강행된다. 오키나와 북부 출신의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메도루마 슌은 작가가 아니라 헤노코 신기지 반대 운동을 삶의 중심에 놓고 있는데, 1995년의 이 사건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이중차별의 정치적 상황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것이리라. 


1995년 전까지 메도루마는 일본과 오키나와에 대한 중단편소설을 주로 썼는데, 1995년 사건 이후로 미군기지에 대한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무지개 새>는 이런 자장 하에서 쓴 메도루마의 첫 장편소설이다. 1998년부터 쓰기 시작해 2006년에 내놓았다. 이 사건은 내년이면 발발 25주년이 되지만, 그로 인해 촉발된 헤노코 신기지 반대 운동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아시아 출판사는 오키나와가 '동양의 하와이'라 불리며 유명 관광지가 되어 가는 지금, 25년 전 충격적 사건을 다시 불러낸 소설 <무지개 새>를 국내에 처음으로 선보였다. 견고하게 연쇄로 발생하는 구조적 폭력에 의한 절망을 오키나와 내외부로 수렴하는 현실을 그린 소설은 전체적으로 '끔찍'하다. 소설 자체는 나무랄 데 없이 쉽게 읽히지만,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분노와 원한을 들어보면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폭력과 미군으로 향하는 분노와 원한


소설의 주인공은 조직폭력배 일원 가쓰야와 그가 관리하는 성노예 미성년자 마유이다. 가쓰야는 마유같은 소녀를 이용해 성매매를 한 남자의 사진을 찍고 그걸 미끼로 돈을 뜯어내 보스 히가에게 상납한다. 어느 날 마유는 매춘 현장에서 자신의 성을 산 남자를 상대로 잔혹하고 엽기적 방식으로 성폭력을 가하곤 몸져 눕는다. 


가쓰야는 마유를 버리고 새로운 성노예를 이용해 돈을 뜯어 상납해야 하지만, 마유를 보살피는 한편 엄마한테 돈을 빌려 상납한다. 하지만 마유가 회복해 다시 일을 시작하지 않는 한 히가에게 들키는 건 시간 문제, 가쓰야가 중학생 때부터 시작된 이 굴레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와중에 오키나와는 미군병사가 북부에서 벌인 소녀 성폭행 사건을 규탄하는 데모가 한창이다. 하지만 마유 같은 이를 구해내진 못한다. 


소설은 폭력과 범죄가 일상화된 현실에서 탈피하려면 절대적 피해자에 의한 파괴밖에는 답이 있을 수 없다고 역설한다. 즉, 다른 누구도 아닌 마유 본인에 의해서 말이다. 마유는 오키나와에 응집된 분노와 원한이라고 해석될 수 있을 듯한대, 그렇다면 가쓰야는 오키나와 자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분노와 원한은 오키나와가 아닌 폭력이라는 추상과 미군이라는 구체로 향한다. 


견고하게 연쇄로 발생하는 구조적 폭력의 오키나와


견고하게 연쇄로 발생하는 구조적 폭력의 추상과 구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파괴'와 '신생(新生)'을 제시한 이 소설, 다분히 현실적으로 오키나와의 진짜 현 상황을 알리고자 하는 목적이다. 하지만 다(多) 층위가 존재하고 각각으로 수렴한다. 이 소설에서 층위라 하면 폭력의 층위를 들 수밖에 없는데, 학교폭력과 성매매 유착 폭력, 전쟁 폭력 등이 그것이다. 


학교폭력의 피해자 가쓰야는 성매매 유착 폭력의 가해자가 된다. 그 피해자인 마유는 학교폭력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이 연계된 폭력은 정점에 서 있는 히가가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 모두도 미군과 일본이라는 공동정범 가해자에 의해 영원히 피해 받을 거대 피해자 집단의 오키나와 일원이다. 이 거시적으로 미시적으로 촘촘히 짜인 구조적 폭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견고하다. 저자가 말하는 파괴의 방식은 참으로 저열하고 또 절망적이지만 다른 방도는 없다. 


메도루마가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이기도 하거니와 소설 속에도 등장하는 오키나와 미병 소녀 폭행 사건은, '1995년 오키나라'라고만 검색해서 찾아볼 수 있는데 한일 월드컵 열기로 뜨겁던 2002년 6월 13일 경기도 양주시에서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은 효선 미선이 '사고'을 떠올리게 한다. 우발적 사고라는 이유로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고 고발된 미군 책임자 여섯은 한미 주둔군지위협정으로 신병이 인도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우리나라에서 촛불집회가 처음으로 시작되었는데, 이후 시민들은 정치적 사회적 문제가 불거질 때면 자발적으로 참여해 비폭력평화시위를 시행했다. 14년 후 촛불집회는 우리나라를 바꿨다. 우리나라는 비폭력 구조로 이루어진 살기 좋은 나라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대사건이었다. 


반면, <무지개 새>에서 비폭력시위나 데모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오키나와 폭력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히가와 가쓰야 일당조차 인지하고 있는 방법이다. 그들은 미군과 일본의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선 '훨씬 더 추악한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식으로 폭력에는 폭력으로 대응한다는 방법은, 사실 무수히 다양한 방식으로 비판과 비난을 받을 수 있다. 또 멋대로 이해해 버려도 할 말은 없다. 그럼에도 그 방법을 고수하고 밀어부치는 이유는 그만큼 간절하기 때문이다. 폭력 근절과 평화의 꿈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저자의 염원이 그만큼 지독한 저항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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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도루마 슌, 무지개 새, 미군, 오키나와, 일본, 파괴, 폭력
  • BlogIcon 여강여호
    2019.05.20 17:17 신고

    소설에서 우리 사회의 현재 모습까지 같이 보이네요...

    • BlogIcon singenv
      2019.05.22 13:20 신고

      섬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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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암담한 일본, 일본 남자의 삶과 죽음 <하나-비>

오래된 리뷰 2018. 10. 2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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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기타노 다케시의 <하나-비>


영화 <하나-비> 포스터. ⓒ우일영상



일본이 낳은 전천후 예능인 기타노 다케시, 그는 1970년대 초 코미디언으로 연예계에 진출해 그야말로 평정하다시피 하고는 1980년대 후반 큰 사건을 치르고 난 후 돌연 영화계로 진출한다. 그 전에도 간간이 영화에 얼굴을 비췄지만, 이번에는 감독과 주연을 맡은 것이다. 물론이라고 해도 될 만큼 처음엔 반응이 별로였지만, 계속해서 감독과 주연을 맡은 좋은 작품들을 내놓아 빛을 보았다. 


그는 1990년대만 7개의 작품을 내놓는다. 직접 감독과 주연을 맡은 작품들 말이다. 주연만 맡은 작품은 물론 더 있다.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기타노 다케시의 작품들은 2000년대 이후일 것이다. 주연을 맡은 <배틀로얄>이라던지, 여지없이 감독과 주연을 맡은 <자토이치>라던지. 아마도 일본 영화가 1998년 말에야 비로소 우리나라에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전의 대다수 작품들은 2000년대에야 들어왔다.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인으로서의 전성기는 1990년대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그의 영화적 특징이 모두, 그리고 조화롭게 섞여 들어가 있는 영화는 <하나-비>가 아닐까. 상이 작품을 선별하는 전부는 아니겠지만 최소한 괜찮은 기준을 세워줄 수 있는 바, 이 작품은 자그마치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여담으로,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들어온 최초의 일본영화이기도 하다. 


기타노 다케시 그 자체


영화 <하나-비>의 한 장면. ⓒ우일영상



야쿠자를 전문적으로 상대하는 형사 콤비 니시(기타노 다케시 분)와 호리베(오스기 렌 분). 딸을 잃고 아내는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 니시, 호리베와 동료 형사들은 니시에게 아내 병문안을 가게 하고 대신 잠복근무를 선다. 하지만 그 사이 호리베는 야쿠자에게 당해 하반신 불구가 되고 아내와 딸에게서 버림 받는다. 


니시는 호리베뿐만 아니라 후배 형사도 잃고 마는데 그의 눈앞에서 호리베를 그렇게 만든 야쿠자의 총에 죽고 만 것이다. 그는 야쿠자를 죽이고 형사를 그만둔다. 호리베에겐 그림 도구를 선물하고 죽은 후배 형사의 아내에겐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정작 자신은 아내 치료비를 마련하려 고리대금업자에게 빌린 돈 때문에 괴롭다. 


아내가 얼마 살지 못할 거라는 의사의 말과 대화도 많이 하고 여행이라도 다녀오는 게 어떠냐는 충고를 따라, 니시는 경찰복을 입고 경찰차를 타서는 은행을 턴다. 돈을 갚고 후배 형사의 아내와 호리베에게 돈으로 추정되는 소포를 보낸다. 그리고는 아내와 단둘이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그에게 야쿠자와 후배 경찰이 차례로 찾아오는데... 


영화 <하나-비>는 영화인 기타노 다케시 그 자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그를 영화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선 이 영화 하나만 봐도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코미디적 재능을 살린 괜찮은 영화도 몇 편 있지만 말이다. 영화는 영화 내적인 요소들의 집합체로서, 영화 외적인 즉 사회적 요소와의 해석 가능성으로서 관람할 수 있다. 


암담한 시공간의 삶의 죽음


영화 <하나-비>의 한 장면. ⓒ우일영상



<하나-비>는 야쿠자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영화답게 폭력 성향이 짙다. 다치고, 불구가 되고, 죽고... 하지만 거기엔, 그 폭력엔 리얼한 과정이 많지 않고 미학이라 부를 만한 장면도 없다. 생략 후 결과만을 간략히 보여주는 미장센의 개념이라고 할까. 폭력은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라고,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폭력이 수단이 되어 영화가 보여주고 싶은 건 삶과 죽음이다. 제목 '하나비'는 우리나라 말로 '꽃불' 즉 불꽃을 뜻하는데, 가운데 하이픈(-)이 들어가 있어 하나(꽃)와 비(불)로 나뉜다. 꽃은, 극 중 호리베가 죽다 살아나 그림을 그릴 때 주로 사용하는 포인트이다. 삶을 뜻하지 않나 싶다. 불은, 극 중 많은 이들을 아프게 하고 죽게 하는 총과 다름 아니다. 죽음을 뜻하지 않나 싶다. 


비-불-총-죽음은 니시의 답답함을 넘어선 삶에의 편안한 침묵이 아닌 죽음과도 같은 침묵과도 맞닿아 있다. 시종 일관 혼자 있든 누구와 함께 있든 거의 침묵으로 일관하는 니시를 롱테이크로 비출 때면 묘한 긴장감이 드는 것이다. 침묵을 깨는 폭력이 찾아와 죽음으로 인도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이 영화는 생각하면 할수록 슬프다. 이야기도, 캐릭터도, 분위기도 아닌 영화에 내재된 삶과 죽음의 대비 아닌 동류적 기미가 슬프다. 모든 걸 잃고 죽고자 했지만 살아서 삶을 보았고, 서서히 모든 걸 잃으며 어쩔 수 없이 죽음의 길을 가는. 영화에서 삶이나 죽음이나 도무지 '괜찮은' 인생의 자장 안에 있는 것 같지가 않다.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진 암담한 시공간의 색채가 지배하는 것이다. 


위기의 일본과 일본 남자


영화 <하나-비>의 한 장면. ⓒ우일영상



영화가 1990년대 후반에 만들어졌고 일본 영화라는 점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즉, 일본의 1990년대 말이다. 세계 경제사에서도 유명한 일본의 버블경제, 그 한가운데다. 1980년대 유례없는 호황을 맞아 제2의 경제대국으로 세계를 호령한 일본, 1990년대 초 한순간에 무너져 이후 10년, 아니 20년간 장기불황에 빠진다. 이 영화가 나온 1997년은 그야말로 암흑기가 아닌가. 


죽음과 다름 아닌 니시나, 삶을 살지만 죽음을 경험한 호리베나, 그들을 아우르는 암담한 시공간이나 1990년대 일본 그 자체 또는 당대 일본의 남자들과 다름 아니다. 개인은커녕 사회, 나라, 세계의 힘으로도 돌이킬 수 없게 된 암담한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일본 남자'로서 할 수 있는 건 '일본 남자답게' 밀어붙이는 게 아닐까. 영화는 니시를 통해 그 자화상을 그린다. 더불어 그와 반대로, '일본 남자답지 않게' 다른 길을 찾는 게 아닐까. 영화는 호리베를 통해 그 자화상도 그린다. 


우리나라도 당시 역사적인 IMF 시대 한가운데 있었지만,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특히 가정을 짊어졌던 가장들이 목숨을 끊었다. 죽음의 행렬은 사회적 조류를 형성하고 색채와 소리를 변형시킨다. 그곳에서도 피어나는 꽃은 슬프다. 한편, 그때 회사에서 나와 아예 다른 길을 찾은 사람들도 많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지만, 와중에도 무언가를 발견한 사람들이 있다. 20년이 지난 지금 많은 '대가'들이 그렇게 탄생했다. 


위기가 닥쳤을 때 옛것을 찾는 건 인간의 전형적인 심리다. 역사는 돌고 돈다는 말, 온고지신 등의 말이 있지 않은가. <하나-비>는 위기의 시대, 전통적인 일본 남자가 행하는 침묵-폭력-죽음의 발악 또는 순응의 이야기다. 영화의 내적인 슬픔과 별개로 영화의 외적인 색채는 마냥 받아들일 수만은 없는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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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노 다케시, 삶, 암담, 위기, 일본, 일본 남자, 죽음, 하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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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찾아 떠날 때 내가 누군지 알게 된다, 영화 <대관람차>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8. 10. 5.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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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대관람차>


영화 <대관람차> 포스터. ⓒ무브먼트



오사카에 출장 온 선박회사 대리 우주(강두 분), 출장 마지막 날 낮에는 덴포산 관람차를 타고 저녁에는 일본 쪽 담당자 스즈키와 저녁을 먹는다. 스즈키와 헤어진 후 술에 취한 채로 핸드폰도 팽개치고는 선배인 과장 대정을 닮은 사람을 보고 무작정 쫓아간다. 우주는 선박 사고로 실종된 대정을 대신해 오사카에 출장을 왔었다. 


자전거 탄 사람을 쫓는 건 역시 무리, 놓치고는 근처의 고즈넉한 바 '피어 34'를 찾아들어간다. 이곳은 '대정'이라는 곳이란다. 익숙한 이름이다. 맥주 한 잔을 걸치고 뻗어버린 우주는 다음 날 깨어난다. 한국으로 돌아갈 비행기 시간을 놓쳐버렸다. 주인장의 말 때문인지 평소 생각 때문인지 대정과의 진지한 대화 때문인지 그저 홧김인지, 우주는 회사를 그만둔다. 무작정 피어 34로 찾아가 대정을 찾을 때까지 지내기로 한다. 


대정은 음악을 하고 싶어 했고 우주는 음악을 했었고 피어 34에서 주인장 스노우의 소개로 만나게 된 하루나는 음악을 하고 있지만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피어 34는 예전엔 공연을 자주 하고 관객도 많았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한 곳이 되었다. 우주는 한편 대정을 찾는 한편, 부인과 함께 음악을 했었지만 동일본 대지진으로 부인을 잃고 음악을 놓아버렸다는 하루나 아버지의 사정을 듣고 공연을 기획하는데... 


오직 한 명을 위한 음악


영화 <대관람차>의 한 장면. ⓒ무브먼트



영화 <대관람차>는 '더 자두'로 익숙한 강두가 처음으로 영화 주연을 맡은 것, 적지 않은 대사의 90% 이상을 일본어로 선보인 것, 일본 오사카 현지 올로케이션, 한국영화인지 일본영화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의 감성, 강두의 목소리로 듣는 루시드폴의 음악 등 독립영화로선 상상하기 힘든 즐길 거리들이 가득하다. 


여기에 한국과 일본 양국의 21세기 가장 큰 비극인 세월호 참사와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누군가를 잃고 남겨진 이들의 아픔을 음악과 노래로 따로 또 같이 위로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음악 영화를 표방하지만 일반적인 음악 영화와 결이 조금 다르다. 


들어줄 이 없는 개인의 음악은 그 영향력이 본인을 포함해 몇몇 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뮤지션들은 보다 많은 이들에게 자신의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물론 그것이 정답이고 그래야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오직 한 명을 위한 음악을 선보이는 데 중점을 둔다. 그 한 명은, 그 한 명이 겪은 아픔은 만인을 대변하는 것이다. 


철학적인 영화


영화 <대관람차>의 한 장면. ⓒ무브먼트



영화를 감상하는 내내 쉽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점점 어려워졌다. 좁은 의미에서 보자면, 음악을 하고 싶어 회사를 때려친 우주의 방황과 나아감과 깨달음을 아픔, 성장, 사랑 등의 키워드와 함께 적절히 접목시킨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철학적이기 그지 없다. 연고 없는 해외에 와서 이런저런 이유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미아가 된 우주, 언어유희적으로 '우주 미아'가 된 그는 더욱이 멘토와 같았던 회사 선배 대정을 찾고자 한다. 하지만 우주는 대정의 실존을 찾는 대신 대정의 꿈을 찾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곧 자신의 실존인 것처럼. 


하루나는 어떨까. 본인은 물론 아버지와 어머니도 모두 음악을 했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황망하게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는 아예 음악을 놔버렸고 하루나는 기타만 칠 뿐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되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음악을 되찾는 게 곧 자신의 음악을 되찾는 것이고 곧 그들의 실존을 되찾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알고 있더라도 그녀로서는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들의 실존을 압도하는 거대한 아픔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기 때문에. 


피어 34와 주인장 스노우의 경우도 이와 비슷한 느낌의 아픔이 있는 것 같다. 피어 34는 한때 수많은 공연과 수많은 관객으로 잘 나갔지만 이제는 동네 단골만 찾는 바가 되었고, 스노우는 멀리 캐나다로 보트를 타고 떠나고 싶지만 보트가 말을 듣지 않는다. 피어 34를 두고 떠날 수 없는 걸까, 피어 34가 떠나지 못하게 하는 걸까.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 가고 싶은가


영화 <대관람차>의 한 장면. ⓒ무브먼트



해야 하는 것보다 하고 싶은 게 힘이 쎄다. 우주는 해야 했던 일을 하는 것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에서 훨씬 더 월등한 능력을 선보인다. 그런 우주 덕분에 하루나와 스노우는 본인들 마음속 깊은 곳에 묵혀두었던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일들과의 끈이, 하루나는 아버지 때문에 끊어져 있었거나 보이지 않았고 스노우는 현실에 안주하고 그러면서도 과거를 향수하는 것 때문에 그러했다. 우주야말로 하루나와 스노우 덕분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그에게 대정이라는 존재는 선구자와 다름 아니었다. 


선구자라는 존재의 부재는 두 가지 극단적인 행동을 수반할 것이다. 적극적으로 찾으면서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그 자리에 다가가려는 수고, 또는 소극적으로 침참하면서 좌절과 자책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고수. 


미아가 되었을 때 비로소 알 수 있는 게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가고 싶은가. 영화는 알려주려 하지 않고 보여주며 보여주려 하지 않고 들려준다. 잘 알아들을 수 있었고 잘 느낄 수 있었고 잘 간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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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두, 꿈, 대관람차, 루시드폴, 미아, 실존, 오사카, 음악, 일본,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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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좀도둑 가족을 통해 들여다본 현대 일본의 수치, 영화 <어느 가족>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8. 7. 3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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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


영화 <어느 가족> 포스터. ⓒ티캐스트



영화감독 누구 좋아하냐고 물을 때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럴 만한 감독이라는 인정과 함께, 내가 그 감독을 좋아할 거라는 예상의 적중이 내포된 끄덕임이다. 고레에다의 영화들은 일상적이고 일관적이고 안정적이고 파격적이다. 그의 영화를 관통하는 건, 일본의 우익화를 극구 비판하는 그의 성향에 빗대어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이 아닌가 싶다. 


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를 좋아하지만 많이 접하진 않았다. 아니, 그의 필모를 들여다볼 때 안 본 게 더 많으니 어디 가서 그의 영화를 잘 안다고 할 입장이 아니다.  물론 앞으로 그의 영화를 빠짐없이 섭렵하려 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알 것 같다. 그리고 감히 다다랐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영화들에.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1995년 <환상의 빛>으로 장편영화 연출에 데뷔하면서부터 세계 유수 영화제가 가장 사랑하는 감독 중 하나가 되었다. 그중에 눈에 띄는 건 단연 칸영화제로, <DISTANCE> <아무도 모른다> <바닷마을 다이어리>가 황금종려상 후보에 올랐었고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심사위원상을 차지했다. 그리고 대망의 2018년 4수 끝에 <어느 가족>으로 '당연히'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좀도둑 가족의 기이한 이야기


영화 <어느 가족>의 한 장면. ⓒ티캐스트



영화 <어느 가족>은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겠는데, 가족 영화다. 그런데 어디에서나 흔히 볼 만한 그런 '어느' 가족의 이야기는 아니고, 일본 원작 영화의 제목인 '만비키(좀도둑) 가족'에서 알 수 있듯 좀도둑질을 하며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다. 일본의 수치를 전 세계 만방에 알렸다는 이유로 일본에서 관람거부 사태에까지 이르렀지만 대대적인 흥행을 이룩한 이 영화, 들여다보자. 


아빠 오사무와 아들 쇼타는 많이 해본 듯한 익숙한 솜씨로 가게를 털고 집으로 향한다. 골목 끝에 자리 잡은 작디 잡은 집에서 할머니 하츠에, 엄마 노부요, 큰딸 아키가 그들을 당연한듯 반긴다. 집으로 오는 길에 밖에 혼자 있는 여자 아이가 측은해보여 데리고 온다. 유리라고 하는 그애를 금방 데려다 주려고 했지만, 집에서 부모들이 싸우며 유리를 낳지 않으려 했다고 소리치는 말을 듣고는 다시 집으로 데리고 온다. 


이 집의 모든 이들이, 즉 가족들 모두가 유리를 반기지만 그들은 이 행동이 엄연한 유괴라는 걸 인지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한편 이 집이 오사무와 쇼타의 좀도둑질로만 연명되진 않는다. 오사무는 일용노동직으로 일하고, 노부요는 세탁공장에서 일하고, 아키는 유흥업소에서 일한다. 그리고 하츠에는 전 남편으로부터 꼬박꼬박 받는 연금으로 이 집이 연명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알고 보니, 구성원 중 혈연으로 이어진 이는 단 한 명도 없는 이 가족, 연금과 좀도둑질로 연명해야 할 운명인 이 가족. 면면과 외양은 단죄해야 마땅한 측면이 다분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순간순간 진심으로 대하는 모습은 이 좀도둑 가족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럼에도 아슬아슬한 이 가족이 어떻게 될지 궁금한 한편, 가슴 졸이며 바라보게 된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영화 <어느 가족>의 한 장면. ⓒ티캐스트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어느 가족>을 통해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여과없이 진지하게 던진다. 물론, 나름의 확고한 답을 같고서. 그의 '가족'에 대한 물음은 2008년 <걸어도 걸어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이후 10년 동안 꾸준히 천착해왔다. 그렇게 얻은 답은 '선택하는 가족'이라는 한마디로 축약할 수 있지 않을까. 


작금의 일본은 어떤가. 살 만 한가. 1990년대 잃어버린 10년을 지나 2000년대 잃어버린 20년까지 지났지만, 2010년대가 되어도 여전히 되찾지 못하고 있다. 결국 일본이 꺼내든 건 일명 '아베노믹스'라 불리는 경기부양책, 화폐가 무제한으로 찍히고 있다. 일어선 건 무너져가던 기업들, 무너진 건 역시 무너져가던 개인들과 개인들이 이룬 가족들. 이들은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 것인가. 


고레에다는 그동안 가족을 말하면서 안으로 안으로 천착해왔다. 가족의 안팎을 함께 구성하는 것들과의 연계를 함께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가족에 대해서 말이다. <어느 가족>에 이르러 밖으로 확대하려 한다. 그래서 우린 이 영화에서 이미 무너지고 해체되어버린 가족, 그 이후의 이야기를 본다. 들여다보면 '돈' 때문일, '진짜' 가족의 폭력으로 버려진 이들의 연대가 이 좀도둑 가족의 실체다. 


'혈연은 천륜이다'라는 가족의 전통적 정의 내지 불문률은 이 영화의 이 가족들에게는 통용되지 않는다. 이들은 비록 그 이유가 잔인할 정도로 현실이성적이지만 서로 간의 필요로 뭉쳤다. 불쌍해서 데려온 유리조차도 '워킹쉐어'라는 이름으로 쇼타에게 좀도둑질을 배우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린 고레에다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고 또 답을 내놓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가족인가? 이런 기이하기 짝이 없는 모습의 공동체를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면, 국가와 사회가 하지 못하는 걸 가족이 한다는 이유로 이들의 '나쁜 짓'들이 정당화된다는 것인가? 반대로 '진짜' 가족에게 버려진 이들이 모여 진짜 가족이 주지 못한 관심과 사랑과 그 무엇을 주었음에도 가족이라고 할 수 없다면, 이보다 못한 진짜 가족들은 모조리 해체되어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버려진 이들을 지킬 이 누구인가


영화 <어느 가족>의 한 장면. ⓒ티캐스트



이 좀도둑 가족의 정의를 심각하게 생각해보며 아울러 생각하게 되는,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게 '버려진 이들'이다. 이 가족에는 가족에게서 버려진 이들이 있다. 하지만 이 가족 자체가 국가와 사회와 기업으로부터 버려졌다는 걸 생각해보아야 한다. 국가와 사회 전체의 동시 마이너스 성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로지 위를 향하고 있는 일본, 저 아래는 쳐다보고 싶지도 않고 쳐다볼 여력도 없다. 


이 가족이 직면한 건, 그 누구한테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 경제적 어려움 즉 최소한의 사회보장망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막막함과 더불어 자신들을 외양으로만 판단하면서 내면과 진실에 대해선 들여다보고 알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하는 데에서 오는 합리적 차별이다. 


우린 여기서 또 한 번 딜레마에 직면한다. 이 기이한 가족를 정의할 때 느꼈던 아득한 혼돈과 이성, 감성 사이를 어지럽게 오가는 딜레마를 말이다. 이들은 유리를 '유괴'한 걸, 부모가 버린 이를 주워왔다고 표현한다. 유추해보면, 유리와 달리 쇼타는 부모가 '유기'한 걸 오사무와 노부요가 주워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은 이 두 경우를 동일선상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쇼타를 이들이 데려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오래지 않아 죽었을 것이다. 유리를 이들이 데려오지 않았다면 부모의 계속된 폭력 밑에서 잘못 컸을 것이다. 적어도 다분히 영화적인 설정 하에서만이라도, 데려오는 게 '인간적'으로 '올바른' 처사가 아니었을까. 어느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어느 누가 이 가족에게 진짜 가족을 운운할 수 있겠는가. 


현실적 웃음과 현실적 막막함이 동시다발적으로 덥치는 이 영화 <어느 가족>, '가족'이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확대해 나가는 '일본' 현실의 주제는 가히 치명적이다.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들은 지금의 나로서는, 아마도 우리로서는 쉽게 답을 내리지 못하는 것들이다. 이 영화는 그 답을 내릴 때까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답을 내리고 나서도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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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고레에다 히로카즈, 어느 가족, 유기, 일본, 좀도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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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전쟁에의 길', 그 사실과 진실은?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8. 2. 1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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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표지 ⓒ서해문집



어느 한 나라의 역사는 결코 그 한 나라의 역사적 맥락 안에서만 흘러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세계사적 역사의 흐름에만 맞물려 혹은 휩쓸려 흘러가지도 않는다. 세계는 모든 나라들 구석구석에 영향을 주고, 반대로 모든 나라들의 내부적 목소리가 세계에 영향을 끼친다. 이는 역사를 대하는 또다른 태도와 일맥상통한다. 


<역사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라는 아주 유명한 구절을 남겼다. 이는 결코 과거, 현재의 한 때만을 빌어 당시 혹은 다른 시대의 역사를 규정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역사는 모든 순간, 모든 곳, 모든 이들과 연관되어 있거니와 연관하여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일본의 저명한 역사가 가토 요코는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서해문집)를 통해 세계사적 흐름과 내부적 목소리가 맞물리고 현재과 과거과 대화하는 역사 해석을 선보인다.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 중심엔 19세기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일본이 나아간 전쟁의 길이 있다. 


저자는 그 일례로 2001년 9.11테러와 1937년 중일전쟁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9.11테러 이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는데, 전쟁에서 이긴다는 자세보다 악독한 범죄자를 잡는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한편 중일전쟁 당시 일본은 전쟁이 아닌 '보상을 위한 군사행동'이라 규정하며 '일종의 토비전'이라 보았다. 즉, 이 두 전쟁을 상대가 나쁜 짓을 했으니까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 무력행사를 마치 경찰이 범인을 검거하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전쟁에 대한 보다 폭넓은 관점과 시각


일본은 메이지 시대에 한반도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1894년 청일전쟁으로 근대 들어 강대국과 처음으로 전쟁을 치르고 정확히 10년 후 1904년 러일전쟁을 치른다. 한편, 러일전쟁의 이면에서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러시아와 맞서면서도 서구 열강을 향해서는 만주의 문호 개방을 위해 러시아와 맞서고 있다고 주장했다. 여하튼 일본은 중화질서에서 벗어났고 서구의 지배에서도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세계1차대전 발발 후 일본은 '영일동맹 협약의 예상할 수 있는 전반적인 이익을 방호한다'는 명목으로 독일에 최후통첩을 하고는 전쟁에 뛰어들어 독일령 산둥반도를 점령한다. 엄연히 같은 연합국이지만, 일본의 행동은 미국과 영국에게 비판을 받았고 그에 따라 일본도 미국과 영국에 반감이 싹텄다. 


1930년대 '만주사변' '상하이사변' '러허작전' 그리고 '중일전쟁'으로까지 이어지는 광폭 행보와 1940년대 중일전쟁이 여전히 계속되는 와중에 선택한 '태평양전쟁'까지, 일본은 외부로는 미국, 영국, 소련이 중국을 원조하며 정치적, 경제적 압박과 내부로는 일면 명확한 이유이지만 또 일면으론 의문스럽기 짝이 없는 이유로 진행된다. 


저자는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까지 일본이 걸어간 전쟁의 길을 일본만의 또는 일본만을 생각하는 관점이 아닌 중국과 서구의 관점까지 추가해 세계사적 통합 관점과 흐름으로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전쟁이 지역 및 사회와 국가에 미친 영향과 변화도 명확하게 밝혀주어 전쟁에 대한 보다 폭넓은 생각에 도움을 준다. 


사실, 그리고 진실을 대하는 자세


역사는 때로 몇몇 인물에 의해 속절없이 흘러가기도 한다. 몇몇 인물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통찰력 있는 의견을 제시해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감탄을 불러 일으킨다. 1930년대 초 만주사변과 상하이사변 직후 급기야 만주국이 탄생한다. 당시 외상인 우치다 야스야는 강경론을 밀어붙이며 '나라를 초토화하는 한이 있어도' 만주 문제 양보는 없다고 선을 그었는데, 그가 생각하기에 국민정부의 대일유화파가 일본과의 직접 협상에 나올 것이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육군이 전격적으로 러허작전에 돌입, 국면은 일본이 어쩔 수 없이 국제연맹에서 탈퇴하는 상황으로까지 진행된다. 


중일전쟁 발발 후 주미 대사가 된 후스의 주장은 탁월하다. 그는 중일전쟁이 시작되기 전 일본의 침공을 예견했는데, 그때 중국이 취해야 할 태도로 극단적 선택을 중용한 것이다. '미국과 소련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중국이 일본과의 전쟁을 정면으로 버티면서 2~3년간 계속 패배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는 '일본의 할복, 할복을 도와주는 중국'이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다. 일본이 자멸의 길을 걷고 있다는 통한의 박력이다. 


책은, 마지막 한 문장으로 수렴된다. 저자의 명확한 식견이 반영된 한 문장은 '비판적인 시각과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는 것, 이 두 가지 자세를 함께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린 역사를 지극히 일방적인 시각 또는 선입관으로 대할 게 아니라 정확한 자료에 입각한 사실, 사실과 사실 사이의 진실 혹은 이면을 두루 살펴야 하는 것이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전쟁에의 길', 특히 섬밖으로 향하는 길에의 애정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남달랐다. 지정학적 특수성인지, 민족적 특수성인지, 정치적 특수성인지, 모든 게 복합적으로 적용된 것인지. 온 세계가 반전으로의 길을 가고자 오랫동안 노력해왔고 더욱이 일본에게는 평화헌법이라는 명확한 반전에의 법이 존재하지만, 일본은 여전히 전쟁 또는 전쟁에 준하는 행동을 대외적으로 허락받고자 분주하다. 


일본 입장에서는 북한이라는 명확한 적, 중국과 러시아라는 사실상의 적을 겨냥한 움직임일테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어찌 이리도 똑같은지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와중에 책에서는 다뤄지지 않다시피 하는 우리나라의 길이 궁금하다. 우리나라가 선택해야 할 건 전쟁 따위도 복속 따위도 아니다, 바로 캐스팅보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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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면에서 절대적인 마스터피스 <아키라>

오래된 리뷰 2018. 2. 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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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아키라>


<아키라> 포스터. ⓒ(주)삼지애니메이션



일본 애니메이션, 일명 '재패니메이션' 하면 <철완 아톰>의 '데즈카 오사무'와 30년 넘게 최고의 영향력 위에서 군림하고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떠오를 것이다. 그들 덕분에 재패니메이션은 그 어떤 문화 콘텐츠와도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아니 그보다 더 위에서 굽어보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하지만, 1980~90년대 재패니메이션의 진정한 중심에는 일명 '사이버 펑크' 장르가 있었다. 너무나도 유명한 것도 모자라 전설이 되어버린 <공각기동대> <에반게리온> <인랑>, 세 작품만으로도 충분하고도 넘친다. 이 세 작품은 1990년대 태생이다. 굳이 명명하자면, 일본의 버블경제 시기에 태어난 작품들. 이들이 보여주는 디스토피아는 현재진행형이었던 것이다. 


반면, 이들보다 거의 10년 가까이 먼저 태어난 시조격의 작품이 있다. <아키라>가 그것이다. 붕괴 조짐은 보였지만, 여전히 사상 최고이자 전 세계 최고의 물질적 토대를 세우고 있던 1980년대 후반 일본에서 만들어졌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디스토피아는 현재만 아니었을 뿐, 과거와 근 미래와 먼 미래까지도 아울렀다. 재패니메이션의 기준이 되었다는 <아키라>는 어떻게, 무엇으로, 왜 진정한 전설이 되었나.


더할나위 없는 완벽한 마스터피스


더할나위 없는 완벽한 마스터피스. <아키라>의 한 장면. ⓒ(주)삼지애니메이션



1988년 제3차 세계대전으로 도쿄는 무너진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2019년, 네오도쿄라는 이름으로 재건되어 첨단을 달리는 도시가 된 도쿄이지만, 안으로는 혼돈 그 자체이다. 그래서일까, 반정부 시위가 극렬하다. 한편 도시는 폭주족의 세상이기도 하다. 테츠오도 그중 하나인데, 사고를 당하고는 누군가에 의해 어딘가로 끌려간다. 


테츠오의 친구이자 폭주족 집단 대장이라 할 수 있는 카네다는 테츠오를 구하고자 하지만 당연히 쉽지 않다. 와중에 반정부 조직 활동에 휩쓸리게 되고 조직원 케이와 함께 테츠오를 구하려는 움직임을 갖는다. 한편 테츠오가 끌려간 곳은 군 직할 연구소로, '아키라'라는 무지막지한 초능력 에너지를 봉인해 놓은 곳이다. 


그곳은 시키시마 대령이 관리하는 곳으로, 오오니시 박사로 하여금 아키라를 비롯한 초능력 에너지들을 제대로 관리해 무너지고 있는 도시를, 사회를 지키고자 한다. 과거 한때 아키라의 폭주로 큰 피해를 본 적이 있기에 그 무시무시한 힘을 잘 알고 있다. 여기에 테츠오가 끌려왔고 그들은 테츠오에게 제2의 아키라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발견했다. 하지만 테츠오는 점점 폭주하게 되는데... 테츠오의 미래는? 도쿄의 미래는?


<아키라>는 여러 면에서 더할나위 없이 완벽한 콘텐츠다. 아니, 애니메이션이자 만화였기에 가능한 완벽함이 있는 만큼 콘텐츠보다 애니메이션이라고 지칭하는 게 맞겠다. 이 작품은 일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동시에, 만화와 애니메이션만이 뽐낼 수 있는 모든 걸 보여준다. 그 자체로 마스터피스이면서도, 이전의 걸작들을 계승하고 이후의 걸작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일본을 설명하는 가장 탁월한 작품


일본을 설명하는 가장 탁월한 작품. <아키라>의 한 장면. ⓒ(주)삼지애니메이션



너무나도 유명한, 하나의 상징이 되어버린 이 작품에 대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싶다. 그럼에도,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위험을 무릎쓰고(?) 최선의 소개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뭐니뭐니 해도 이 작품에서 가장 충격적인 건 일본의 전과 현과 후를 아우른다는 점이다. 일본을 설명하는 가장 탁월한 작품 중 하나가 아닐까. 


20세기 초중 일본은 사실상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다. 크지 않은 섬나라의 불과한 나라에서 분출되는 넘치는 에너지를 밖으로 뿜어내야 했는지, 나라를 이끄는 고위급들이 일반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 였는지, 다양한 이유로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결말은 끔찍하다. <아키라>의 시작과 겹치는 부분이다. 


이후 시간이 흘러 일본은 전후 재건과 호황을 맞이한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은 그 상징과도 같다. <아키라>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주무대가 다름아닌 공사가 한창인 올림픽 경기장이다. 2020년에 올림픽이 치러지는가 보다. 실제로 2020년은 도쿄 올림픽이 예정되어 있다는... 30년의 시간차를 두는 소름끼치는 예언이다. 한편 그와 반대급부의 극렬한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는데, <아키라>에서도 볼 수 있다. 


한편, <아키라>가 당시 현재의 시대상을 녹여낸 건 테츠오의 광기와 폭주의 모습이다. 그는 자격지심이 심한대, 그 욕망이 잘못되게 분출되어 폭주하고 마는 것이다. 일본의 과거가 그러했고, 1980년대 후반 당시도 그러했다. <아키라>는 그것이 결국 한낱 거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렇다고 반정부 조직에 손을 들어주지도 않는다. 모든 것이 허망함으로 귀결되는, 허무주의의 한 단면이 엿보이기도 한다. 


<아키라>의 절대적인 스타일


<아키라>의 절대적 스타일. <아키라>의 한 장면. ⓒ(주)삼지애니메이션



이 정도는 세 발의 피다. <아키라>의 진정한 힘은 위에서 언급한 연출과 이야기보다 작화와 스타일에 있다. 말도 안 되게 세밀한 작화는 1989년부터 연재를 시작한, 장인정신에 빛나는 작화를 자랑하는 <베르세르크>에 비견되지 않을까. 즉,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말이다. 


스타일이야말로 <아키라>를 규정짓는 가장 큰 개념이다. 수많은 <아키라> 이후 사람들이 존경하고 팬을 자처하고 오마주하고 패러디한다. 심지어 사이버펑크의 대표주자들, 일반인들에겐 <아키라>보다 훨씬 유명하다고도 할 수 있는 <공각기동대>나 <에반게리온>도 같은 급일 수 없다. 아류라고 할 순 절대 없지만, '제2의 <아키라>'라고 할 순 있겠다. 아니, 그래야만 할 것이다. 


<아키라>는 '사이버펑크'라는 반체제, 반문화적인 성격을 갖는 문화개념의 원류 중 하나이다. 그렇지 않아도 서브컬쳐로 인식되었던 재패니메이션인데, 거기에 서브 중의 서브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파격을 선보인 것이다. 결과는 모두가 다 아는 압도적인 모습의 발현. 콘텐츠 자체가 갖는 힘 앞에선 어떤 성찬의 미사여구나 불안과 걱정 따위는 필요가 없다. <아키라>는 그저 <아키라>일 뿐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거다. 


이런 작품이 또 나오긴 절대적으로 힘들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바라는 건 다름 아닌 '리메이크'다. <아키라>가 상당 부분 오마주했을 거라 생각되는 영화 <매드 맥스> <블레이드 러너>가 최근에 리메이크되지 않았는가. <공각기동대>처럼 실사로 리메이크하는 건 쉽지 않아 보이지만, 어떤 식으로든 다시 보고 싶다. 재개봉이 아닌 형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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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피스, 버블경제, 사이버펑크, 스타일, 아키라, 일본, 작화, 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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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09 12:30 신고

    헐리웃에서 실사로 제작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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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일본의 핵심, '전쟁 패전 부정' <영속패전론>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7. 9. 4.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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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영속패전론>


<영속패전론> 표지 ⓒ이숲



우리의 역사인식에서 '일본'은 절대 떼려야 뗄 수 없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운명을 바꿀 만한 초유의 전쟁인 임진왜란은 그렇다 치더라도, 19세기말에서 20세기, 나아가 21세기에 이르는 일본에 의한 한반도 침략과 수탈과 망언의 역사는 지겹도록 계속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함없이 말이다. 


그래, 침략과 수탈까지 다 좋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나라들이 침략과 수탈을 자행했다. 그런데 여전히 계속되는 망언의 이유는 무엇인지, 왜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하기 힘든 언행을 반복하는 것인가.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망언들은 이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정도가 되었다. 그래도 궁금하다, 그 메커니즘이. 도대체 왜?


일본의 젊은 정치사상가 시라이 사토시 교수의 <영속패전론>(이숲)은 정녕 허무할 정도로 속시원하게 그 궁금증을 해소해준다. 그건 일본(의 내셔널리즘)의 제2차 세계대전 '패전 부인'에서 시작된다. 저자는 이것이 전후 일본의 핵심이라고 단언한다. 여기엔 '평화와 번영'이라는 전후 일본의 본래 핵심의 종언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미국에의 종속...


일본 왈, '우리는 전쟁에서 패하지 않았다'


이 책은 다분히 학술적인 면모를 풍기는데, 워낙 시원시원하게 그러면서도 꼼꼼한 자료와 논리를 바탕으로 주장을 밀고 나가기에 지루하지 않다. 분명히 어려운 내용인데 어렵다고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재밌다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저자의 주장 흐름이 굉장히 서사적이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2차 대전에서 무참히 패하며 초토화가 되었음에도 이후 일본은 대번영의 길을 걷는다. 그런 한편 비록 겉으로만 일지라도 평화주의를 표방한다. 하지만 1980년대 유례없는 버블 경제 대붕괴를 겪고 90년대 이후 '잃어버린 20년'의 장기침체에 돌입한다. 번영이 사라지니 평화도 사라진다. 기존의 전후가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기조가 자리잡는다. 그 옛날의 '대일본제국', 그리고 영속패전. 


문제는 미국이다. 대일본제국에의 긍정은 곧 미국과의 전쟁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일. 이미 일본 깊숙이 들어와 있는 미국이다. 그래서 일본은 미국에의 종속을 영위하는 대신 자국을 비롯 아시아를 향해 울부짖는 것이다. 자신들은 전쟁에서 패하지 않았다고 말이다. 저자는 말한다. 결국 그 끝에 있는 건 전쟁이라고, 그리고 종국엔 패배하고 말 거라고. 패전 부인은 다시 패전을 부른다는 것, 영속패전이다. 


정녕 깔끔한 논리의 기막힌 결론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단번에 현재 일본의 정치군사적 상황과 앞으로의 방향, 가장 궁금했던 원인과 이유를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지난 2011년 3.11의 의미도 명백해진다. 번영과 평화라는 전후의 확실한 종말로, 어느 누구도 이 대참사에 책임을 지지 않는 모습이 전쟁 패전을 부인하는 모습과 겹쳐진다. 


일본의 패전 부정, 한국의 식민지 부정


저자는 오에 겐자부로가 나카노 시게하루의 표현을 인용한 "우리는 모욕 속에 살고 있다"를 재인용하며 3.11 이후 일본이 놓여 있는 상황을 적확하게 표현했다. 지난 날을 돌아보자. 우리도 2014년 4.16의 대참사를 당했다. 이후 정부의 움직임은 실로 기괴했다. 3.11에 대한 일본의 '무책임'과 상당히 겹친다. 


우린 그로부터 2년반 후에 시민혁명을 이룩하며 4.16 이후로 계속되어온 무책임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그러며 숱하게 당해왔던 모욕을 어느 정도 풀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보라. 저들의 '영속패전'이 그리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지 않는가. 우리네 내셔널리스트들도 똑같이 미국에 종속되어 있으면서 국내에서는 식민지를 부정하고 있지 않은가. 저들이 패전을 부정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저자는 이대로라면 결국 또다시 전쟁이 시작되어 불보듯 뻔한 패전의 길로 나아갈 거라 말하는데, 그걸 그대로 우리의 경우에 이식해볼 수 있다. 일본에 의한, 미국에 의한 식민지가 모두 우리를 위해서라고, 덕분에 우리 삶의 질이 더욱더 향상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바람은 결국 또다시 식민지이다. 그래야 그들은 그들 자리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 이외의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이 나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 얇은 책 한 권으로 속속들이 완벽히 알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명백히' 알 순 있었던 것 같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모두 모욕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정권이 바뀌고 '우린 해냈다!'고 자평한 지 100일이 훌쩍 지났다. 하지만 우리에게 모욕을 준 이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크고 우렁차다. 또다시 모욕 속에서 살지 않기 위해선 명백히 알거니와 속속들이 알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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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이 만든 침묵 속으로 그저 들어가보면 될 일 <사일런스>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7. 3. 1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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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사일런스>


영화계의 거장 마틴 스콜세지가 일본이 낳은 거장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을 스크린으로 옮겼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메인타이틀 픽쳐스



17세기 중반 일본, 천주교 박해가 한창이다. 그 한가운데에서 떨고 있는 페레이라 신부(리암 니슨 분). 그의 표정을 보니 흔들리는 것 같다. 그렇게 그의 소식은 끊겨버렸다. 몇 년이 흘렀다. 페레이라 신부의 제자들인 로드리게스(앤드류 가필드 분)와 가르페(아담 드라이버 분)가 스승의 부정적 소문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자 일본으로 떠난다. 물론 복음 전파의 목적도 있었다. 


페레이라 신부의 부정적 소문은 다름 아닌 '배교'였다. 불교로 개종하고는 일본 여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두 신부는 마카오에서 일본인 안내책 키치지로를 만나 함께 일본으로 향한다. 그들을 맞이한 건 철저히 종교적 신념을 숨기며 살아가는 독실한 천주교도들이었다. 모두 일본인으로, 두 신부를 철저히 숨기며 극진히 대접한다. 두 신부의 복음 전파 목적은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를 두고볼 일본 정부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세계적인 거장 마틴 스콜세지가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이후 3년 만에 <사일런스>로 신작 나들이를 했다. 러닝타임은 20분이나 줄었지만, 묵직함은 족히 20배는 늘었다. 일본이 낳은 거장 엔도 슈사쿠의 1966년작 <침묵>을 원작으로, 스콜세지가 1988년부터 30여 년을 준비했다고 한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저 두 거장이 만든 침묵 속으로 조용히 들어가면 될 일이다. 


'믿음'과 '배신'의 아이콘, 그저 '인간'일 뿐


'믿음'의 로드리게스 신부. 하지만 그는 끝없이 의심한다. 침묵하는 신의 존재를. 그것도 응답의 일종일까. ⓒ메인타이틀 픽쳐스



영화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출현한다. 포르투갈 출신의 두 신부, 그들이 찾고자 하는 페레이라 신부를 제외하면 전부 일본인이다. 모두 독실한 천주교도. 그 중에서도 로드리게스 신부와 키치지로가 극 전체를 이끈다. 절대적 믿음의 아이콘 로드리게스, 배신의 아이콘 키치지로. 


이 둘의 모습은 예수와 베드로 또는 유다를 연상시킨다. 정작 우리가 그들을 통해 보게될 인상 깊은 모습은 '믿음'과 '배신'이 아니다. 로드리게스는 눈앞에 펼쳐지는 지옥에서 믿음 못지 않은 의심을 품는다. '이 고통의 순간에 신은 왜 침묵하십니까.' 키치지로는 오직 살기 위해 몇 번이고 신을 배신하지만 그때마다 로드리게스를 찾아와 고해성사를 한다. '신부님, 용서해 주십시오.' 


그럴 때마다 그들에겐 '인간'의 본능이 선한다. 나 때문에 누군가가 죽는 걸 볼 수 없다. 천주교 박해의 중심에 있는 일본인 총독은 로드리게스는 놔둔 채 일본인 신자들만 죽인다. 그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은 로드리게스의 신의 부정. 즉, 일본인 신자들은 로드리게스 때문에 죽어가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신을 부정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수많은 일본인 신자들 옆에서 간단히 신을 부정하고 살아서 도망치는 키치지로. 그 나름대로 마음 속에선 끊임없는 신을 향한 의지가 불타지만 겉으로는 살기 위해 신을 부정할 뿐이다. 그 누구도 그를 무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죽고 싶은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세상이었다. 삶이 곧 지옥이 그들은 죽어서 천국에 가길 원할 뿐이다. 


믿음과 믿음, 신념과 신념의 가학적 충돌


참으로 무섭다. 종교의 우산 아래에서 믿음과 믿음, 신념과 신념이 충돌하는 모양이. 그 모양새란 게 정말 잔인하다. ⓒ메인타이틀 픽쳐스



로드리게스를 분한 앤드류 가필드의 열연이 돋보인다. 지난 2월 22일에 개봉한 <핵소 고지>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종교에 입각한 기적의 신념을 보여준 데스몬드 의무병을 연기한 그다. 고통과 절망에 빠진 이들 앞에서 데스몬드는 자신 한 몸을 던지는 의지를 선보이고, 로드리게스는 신을 찾아 울부짖으며 기도를 드린다. 


영화는 박해 받는 천주교도의 여러 군상들을 그저 보여준다. 장황한 설명보다 직접적인 행동과 나름의 생각들을 앞세운다. 죽음 앞에서 초연한 이들, 그들은 현세의 지옥보다 사후의 천국을 원한다. 불교 행세를 하는 독실한 신자들, 대다수를 차지하는 그들은 정부의 단속을 피해 자신의 믿음을 이어가고자 한다. 


그리고 키치지로를 위시한 배교·배신과 복귀·믿음을 반복하는 자들. 적어도 완전한 배교·배신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점이 조금 거슬리는 부분인 바, 어떻게 한 명도 완전한 배교·배신을 시행하지 않는 것인지? 키치지로가 가롯 유다를 상징하는 거라면, 그는 회개가 아닌 지극히 인간적인 후회를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베드로를 상징하는 거라면, 후회가 아닌 회개가 맞을 것이다. 이 부분을 애매하게 보여주었기에 조금의 아쉬움이 남는다. 


반면 당시 일본의 국교인 불교에 대해선 로드리게스의 통역관과 총독이 그야말로 장황하게 설명을 가한다. '우리는 우리만의 종교가 있다. 왜 여기에 너네 종교를 퍼트리려 하느냐.' '일본 땅에 천주교를 선교하려는 이기심 때문에 일본인들이 죽어가는데, 그걸 바라느냐.' 등이다. 이 또한 절대적으로 맞는 말인 것 같다. 


믿음과 믿음의 충돌. 단순히 생각하면 선교를 포기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건 종교적 신념에 어긋나는 일.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건 국가적 신념에 어긋나는 일. 불가능하다. 어떤 신념이 옳고 어떤 신념이 그르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 그저 그렇게 사람이 죽어갈 뿐이다. 


의아한 모습들, 그럼에도 침묵에 응답하려는 신앙의 위대함


논란의 요지가 여기저기 산재해 있지만, 신앙인만이 보일 수 있는 모습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위대하다. ⓒ메인타이틀 픽쳐스



천주교 미화 영화로 비춰질 요지가 다분하다. 신의 침묵에 의심을 품고, 신의 침묵을 질타하고, 신을 부정하고 살아남는 것도 괜찮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결국 신은 다 괜찮다고 말한다. 그 모든 게 다 신이 그린 큰 그림 안에 있다. 이 지옥보다 더 한 고통과 절망, 죽음조차도 말이다. 


몇몇 장면들에서는 의아한 모습들이 포착된다. 적어도 기독교 입장에서는 말이다. 예수가 그려진 판은 밟지만 마리아가 그려진 판에는 침을 뱉지 못하고 죽음을 당하는 모습. 일본인 신자들이 신부를 보자 환호하며 그를 마치 신처럼 떠받드는 것 같은 모습. 그리고 오로지 신부를 통해서만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고해성사를 할 수 있는 모습. 


그럼에도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숭고하다. 모든 의구심과 논란을 뒤로 하고, 로드리게스 신부에 집중해보자. 신앙인이 아닌 이도 '신앙'이 같는 위대함을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확히는 신앙을 갖는 '신앙인'의 위대함이라고 해야 할까. 믿음의 근본인 신이 '침묵'함에도 불구하고, 그 침묵에조차 충실히 '응답'하려는 의지 말이다. 침묵에 대한 응답에의 의지는, 그 자체로 '믿음'에 다름 아닌 것이다. 비록 거기에 끝모를 '의심'이 함께 한다고 해도. 


실망하지 않은 대단한 영화, 또 보긴 싫다


참으로 어려운 영화였다. 어느 한 쪽으로만 생각을 치우칠 수 없게 만드는 바, 만든 이들의 숙고와 노력이 각인되어 오래토록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대단한 '의미'를 동반한 반면, 대단한 '재미'는 동반하지 못했다. 완벽한 배경과 연기와 연출에도 불구하고, 기억에 남는 영화가 되진 않을 것 같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영화는, 언제든 다시 보고 영화에 대해 꺼리낌 없이 말하고 계속해 재해석할 수 있는 영화이다. 


실망을 했다는 차원과는 전혀 다르다. 오히려 마틴 스콜세지 감독과 앤드류 가필드에 대한 호감도는 상승했고, 그들의 차기작도 기대된다. 이런 류의 영화를 이 정도로 찍고 연기할 수 있다면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영화에서는 어떤 모습을 선보일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견(一見)을 권하진 못하겠다. 완벽한 연출과 연기와 배경보다 신앙과 종교가 더 많이 다가올 수밖에 없는데, 다름 아닌 그 부분이 거슬릴 요지가 다분하다. 영화를 포함한 모든 콘텐츠엔 '장르'가 존재하지만, 거기에 종교와 신앙이 앞세워지면 모든 것들을 흡수해버린다. 예를 들어 '전쟁 영화'는 엄연히 장르를 구분하는 용어가 아니다. 소재를 나타내는 용어이지만, '전쟁'이 모든 걸 흡수해버린다. 정확히는 액션, 드라마 정도일 것이다. 종교와 신앙도 마찬가지라고 보면 된다. 이 영화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애초에 그걸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상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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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스콜세지, 배신, 불교, 사일런스, 신념, 신앙, 앤드류 가필드, 인간, 일본, 종교, 천주교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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