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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https://linktr.ee/singenv

'가해자'에 해당되는 글 2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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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능이 시킨다, "불편한 건 없애버려" <미스틱 리버> 2020.02.21
  • 옳고 그름을 떠나 사건과 사람을 대하는 다큐멘터리 <아론 에르난데스는 왜 괴물이 되었나?> 2020.01.31
  • 5.18 당시 시민군과 함께 한 모든 이들의 이야기 <김군> 2019.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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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틀게 보여주는,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는 인간 <너는 여기에 없었다> 2018.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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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답게 보여주는 나의 이야기, 현 일본 애니메이션의 정점 <목소리의 형태> 2017.05.17
  • 방법과 방향이 틀린 나치독일 잔해 제거 임무 <랜드 오브 마인> 2017.04.19
  • 왜 공주가 도망쳐야 하나,잘못한 게 없는데... <한공주> 2017.01.25

본능이 시킨다, "불편한 건 없애버려" <미스틱 리버>

오래된 리뷰 2020. 2. 2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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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미스틱 리버>


영화 <미스틱 리버> 포스터. ⓒ 워너브라더스코리아



클린트 이스트우드, 1930년생으로 90세이지만 여전히 최전선에서 종횡무진하는 현역이다.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이미 서른 작품을 연출했고 최근의 <리처드 주얼>까지 80대 2010년대에만 여덟 작품을 내놓았으니 2020년대에도 작업을 계속 이어갈 것 같다. 한편으론 그가 계속 작업하는 게 믿기 힘들지만, 한편으론 그가 더 이상 작품을 내놓지 않는 게 믿기 힘들다. 


50년대 연기 경력을 시작해 연기자로 60~70년대 최고 전성기를 보낸 후 70~80년대 상대적으로 감독으로서 암흑기라고 할 만한 시기를 지난 후 90년대 안정을 찾는다. 2000년대 들어선 왠만한 사람이라면 은퇴할 나이인 70대에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꽃을 피운다. 2010년대에도 이어진 감독으로서의 전성기에 그는 수많은 걸작들을 쏟아냈다. 흥행에도 많은 신경을 쓴 듯 계속해서 차기작을 내놓을 기반을 마련한 것이리라. 


2003년작으로 그의 24번째 작품인 <미스틱 리버>는 영리한 동명 걸작 소설을 원작으로 한 탄탄한 시나리오, 3명의 주인공과 3명의 주연이 빚어내는 연기 앙상블, 묵직하게 형상화되어 가슴 저릿하게 만드는 메시지까지 완벽에 가까운 영화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 영화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후보에도 오르는 등 <용서받지 못한 자> 이후 최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만 굵직한 수상 소식을 전하진 못했고 다음 작품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 공을 돌린다. 대신 숀 펜과 팀 로빈스는 사이좋게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을 비롯 남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을 독식한다. 


세 친구를 평생 따라다니는 운명의 소용돌이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의 작은 동네, 세 친구 지미, 숀, 데이브가 하키 놀이를 하고 있다. 공이 하수구에 빠져 할 게 없는 그들, 지미가 나서서 완성되지 않은 보도블럭에 이름을 써넣는다. 마지막으로 데이브가 이름을 쓰고 있을 때 자신들을 경찰이라고 소개한 낯선 남자 둘이 차를 타고 나타나 그들을 협박한다. 그런 짓을 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 집이 가장 먼 데이브를 차에 태우고 엄마를 보러 가자고 한다. 끌려간 데이브는 그들의 변태짓으로부터 사흘 만에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 이후 그들은 잘 만나지 않았고 그 기억으로 상처를 공유한 채 살아간다. 


시간은 흘러 25년 뒤, 데이브는 결혼해 아이를 낳아 딱히 직업 없이 지내고 있고 지미는 조그마한 가게를 운영하고 있으며 숀은 형사가 되어 있다. 어느 날, 지미의 19살 난 딸 케이티는 남자친구와 다음 날 라스베이거스로 떠날 결심을 하고 마지막으로 친구들과 술집에 가서 논다. 그때 그 술집에 데이브도 있었는데, 새벽 3시쯤에 집에 돌아온 데이브는 피범벅을 한 채 손과 배에 상처가 나 있었다. 그는 아내한테 횡설수설하며 자신이 때린 누군가가 죽었을지 모른다고 한다. 아내는 전전긍긍하며 시간을 보낸다. 


다음 날 동네가 발칵 뒤집힌다. 케이티가 살해당한 채 발견된 것이다. 숀은 파트너와 함께 전력으로 이 사건을 수사하고, 지미는 장례를 치르는 한편 소싯적 건달 친구들을 동원해 자체적으로 사건을 파헤친다. 그런가 하면 데이브의 아내 셀레스트는 데이브가 케이티를 죽였을지 모른다는 의심에서 확신으로 마음이 변해가고 있었다. 급기야 숀의 파트너가 데이브를 용의선상에 올리고 데이브가 거짓말한 게 들통나면서 사건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정황상 데이브가 게이티 살인 사건의 범인이 될 수 없지만, 운명의 소용돌이가 그쪽으로 향하는 것이다. 


피해자에게로 향하는 상처의 낙인


영화는 사건선과 감정선이 점진적으로 고조되는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서사 방식으로 진행된다. 하여 감탄이나 탄식이 터져 나오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조금씩 가슴을 조여오는 묵직함을 느낄 수 있다. 그 묵직함의 중심에는 세 친구의 어릴 때 기억이 자리한다. 하필 데이브여야 했고 데이브로선 평생을 따라다니는 끔찍한 트라우마를 떨쳐낼 수 없게 되었지만 지미와 숀도 기억과 상처를 간직하고 있기에 스스로 인생이 잘 풀리지만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25년 만에 세 친구가 다시 모이게 되니 기억의 구름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미는 데이브를 죽여 미스틱 강에 떠나 보내고 숀은 케이티 살인 사건의 진범을 체포한다. 숀은 지미가 데이브를 죽인 사실을 알지만 지미를 체포하기는커녕 "우리 모두가 그 차를 탄 거야"라며 옹호하기까지 한다. 평생을 괴롭혀왔던 '데이브'라는 상처를 치료해버린 것이다. 영화를 관통하고 지배하다시피 한 케이티 살인 사건은 도구에 불과했다. 


낙인이란 다시 씻기 어려운 불명예스럽고 욕된 판정이나 평판을 이른다. 즉, 만장일치의 다시 없을 나쁜 짓을 해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피해자한테 낙인을 찍는 경우가 허다하다. 가해자에겐 당연하다시피 행해져야 할 낙인이지만, 피해자는 낙인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 아닌가? 


<미스틱 리버>는 낙인이 찍힌 피해자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간접적인 피해를 받은 이들이 가해자가 되는 서늘하고도 안타까운 이야기이다. 가해자는 일찍이 세상에 없기에 남은 피해자들만 풀 수 없는 상처를 간직한 채 살아가는 와중, 직접적인 피해자에게로 화살을 돌리는 것이다. 그러곤 강에 쓸려보내듯 마치 없었던 일처럼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 행동 안에는 "너 때문에 우리들이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어"라는 낙인의 말이 들어가 있다. 당사자를 제외한 그 어디에도 그 누구도 직접적인 피해자를 생각하고 위해주는 곳도 이도 없다. 


인간 본성의 추악한 면모와 왜곡된 비밀


영화는 어릴 때 직간접적인 피해를 당한 세 친구의 심리적 부딪힘을 '안'으로 케이티 살인 사건을 '밖'으로 이중창 형식을 띈다. 뿐만 아니라 안팎을 이어주는 여러 줄기로 영화를 꽉 채운다. 세 친구 각각의 이야기들일 텐데, 그들 각각뿐만 아니라 그들과 연관된 다양한 인물들이 따로 각개전진을 하면서도 같이 엮어들어가는 모양새가 탁월하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하다. 


시작 30여 분만에 세 친구의 어릴 때와 현재 모습과 케이티 살인 사건까지 급전직되는 스토리는 이후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가곤 다시금 달리기 시작한다. 사건의 전말에 다가갈수록 지미의 이면과 옛 일들이 밝혀지는 한편 아무도 관심 없고 모를 데이브의 또 다른 사건과 그때 그 일이 밝혀지는 것이다. 그러곤 거짓말처럼 지미와 숀뿐만 아니라 이 사람 저 사람 모두 데이브를 향해 마수를 뻗는다. 말하진 않아도, 그러는 편이 손쉽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지미와 숀의 행각은 추악하지만 이해하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 역시 간접적 피해자이고 25년 동안 상처를 안은 채 그 때문에 순탄치는 않은 인생을 살아왔다고 자신도 모르는 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이브의 아내와 숀의 파트너와 지미의 건달패들은 왜 그러는가. 그들은 왜 데이브를 보호하고 위해주지 못할 망정 가만 두지 않는가. 


이는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다루진 않지만 인간 본성의 또 다른 추악한 면모이겠다. 불편한 감정을 유발한다고 생각되는 무엇을 눈앞에서 치워버림으로써 시간이 지나면 잊히게끔 만드는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걸 알고 무엇인지 또는 누구인지 안다. 기억이란 게 참으로 간사해서, 그러곤 시간이 흐르면 아무 일 없는 듯 사라지는 것이다. 


보스턴엔 실제로 '미스틱 리버'가 존재한다. 미스틱강과 찰스강이 보스턴만으로 흘러들어 이루는 하구 지역에 보스턴이 발달한 것이다. 미스틱은 보스턴 외곽이라 할 만한 북부 지역에 있기에 여러 면에서 취약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원작에선 중심을 이루는 사회문제의 주요 무대가 미스틱강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면, 영화에선 미스틱강이 또 다른 의미로 쓰인다. 신비롭고 비밀스러움을 뜻하는 'mistic', 그곳엔 얼마나 많은 '데이브'가 비밀을 간직한 채 잠겨 흘러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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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 미스틱 리버, 본성, 불편, 비밀, 숀 펜, 추악, 클린트 이스트우드, 팀 로빈스,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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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고 그름을 떠나 사건과 사람을 대하는 다큐멘터리 <아론 에르난데스는 왜 괴물이 되었나?>

넷플릭스 오리지널 2020. 1. 3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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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킬러 인사이드: 아론 에르난데스는 왜 괴물이 되었나?>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킬러 인사이드: 아론 에르난데스는 왜 괴물이 되었나?> 포스터. ⓒ넷플릭스



아론 에르난데스, 어느새 잊혀진 이름이지만 한때 미국을 뒤흔든 최고의 풋볼 슈퍼스타이자 믿을 수 없는 살인을 저지른 살인자였다. 굳이 과거형을 쓰는 이유는, 그는 지난 2017년 교도소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이라고 해야 할지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법이 바뀌는 큰 변화가 있었다.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는 피고의 항소 결과가 나오기 전에 피고가 사망하면 피고의 혐의가 사라지는 법이 지속되었다가, 아론 에르난데스의 자살 후 바뀌어 피고의 항소 결과가 나오기 전에 피고가 사망해도 피고의 혐의는 계속 남게 되었다. 


그는 어떻게, 왜 슈퍼스타에서 살인자로 추락하게 되었을까. 듣는 순간 생각해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20년도 더 된 그 유명한 'O. J. 심슨 사건' 이후 가장 유명한 혹은 악명 높은 사건의 주인공이지 않을까 싶다. 심슨도 에르난데스와 마찬가지로 최고의 풋볼 슈퍼스타에서 살인용의자로 추락했다. 그런데 희대의 드림팀 변호인단을 꾸려 무죄를 받았고 결국 사건은 미제로 남게 되었다. 다만, 심슨의 경우 은퇴한 지 20년 가까이 된 이후 벌어진 사건이고 에르난데스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을 당시 벌어진 사건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킬러 인사이드: 아론 에르난데스는 왜 괴물이 되었나?>는 아론 에르난데스 살인 사건을 심층적·다각적으로 들여다본다. 제목에서 유추해볼 수 있듯, '아론 에르난데스'라는 사람에 천착해 그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과 피해자에 관계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감없이 들어본다. 하여, 하나의 결론에 이르진 않는 대신 다양하게 생각해볼 거리를 던진다. 복잡다단하다. 


믿을 수 없는 사건의 진원을 찾아서


작품이 우선 건네는 사실은, 그가 평소에 얼마나 잘 웃고 매너 있고 착실하고 서글서글하고 능력 있고 인기가 많은지에 관한 것이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겉으로 드러난 그의 평소 행실에 무수히 많은 칭찬세례를 날린다. 대(對) 대중에게 완벽한 슈퍼스타로서의 모든 면을 갖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된다. 그가 죽였다고 의심되는 대상은, 다름 아닌 그의 처제의 남자친구 오딘 로이드였다. 수많은 증거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를 가리켰다. 


믿을 수 없을 것 같은 사건의 진상 아니 진원을 찾고자 작품은 그의 가정환경부터 들여다본다. 그야말로 '왕'과 다름아니었다는 아버지의 영향 아래에서 에르난데스는 억압된 생활을 이어간다. 그게 뭐 대수랴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밝혀진 사실과 작품에서 증언하는 친구에 따르면 그는 동성을 사랑하는 성소수자였다. 하지만 아버지 때문에, 세상의 이목 때문에, 풋볼선수의 이미지 때문에 숨길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단단한 아버지의 상을 굳건히 따르고 아버지를 롤모델로 삼았는데, 10대 중반에 어처구니 없게 돌아가시고 말았다. 에르난데스에겐 세상이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문제는 이어서 터진다. 어머니가 몇 개월도 되지 않아 에르난데스와 가장 가까운 사촌의 남편과 살림을 차린 것이다. 이 무슨 황당한 경우란 말인가. 에르난데스는 또 한 번의 큰 충격을 받고 어머니와의 반목이 계속된다. 


또 다른 가해자들


물리적 학대 못지 않게(에르난데스는 아버지에게 물리적 학대도 당했다고 한다) 정신적 학대도 한 사람의 어린 시절과 삶 전체를 규정하는 데 절대적 영향을 끼칠 것이다. 에르난데스는 누가 봐도 용서 못할 학대가 아닌, 스스로 억압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어갈 수밖에 없게 만들어 변명도 저항도 할 수 없는 학대를 당했다. 그러면서도 그 대상을 롤모델로 삼았는데, 어느 날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에르난데스는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었고 멀리 플로리다 대학교로 떠난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월등한 신체능력과 출중한 실력, 센스로 이름을 떨치고 졸업하기 전에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에 입단한다. 그의 나이 불과 20살 극초반이었다. 누구도 부러워할 만한 코스를 지났거니와, 그에겐 약혼녀와 아이도 있었으며, 2012년엔 4000만 달러에 달하는 대형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그가 체포된 건 2013년이다. 2년 동안 법정 공방을 이어갔지만, 결국 그에게 1급 살인죄가 판결되고, 절대 석방될 수 없는 종신형으로 평생 감방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최고의 변호사를 고용해 그에게 걸린 또 다른 살인 사건 '보스턴 사건'의 법정 공방을 이어갔고 무죄판결을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감방에서 자살한 사건은 주지한 사실이다. 


그가 살인자로 감방에서 자살하게 되기까지 일련의 사건을 나열해 보면 또 다른 가해자들이 눈에 띈다. 그에게 보이지 않는 정신적 학대를 자행한 아버지와 황당무계한 짓으로 더욱 더 큰 학대를 저지른 어머니도 있겠지만, 가장 큰 건 다름 아닌 '풋볼'이 아닌가 싶다. 그는 육체적 폭력으로 둘러싸인 풋볼로 자신의 성정체성을 완전히 감추려 했거니와, 바로 그 육체적 폭력의 결과로 사후 판정 받은 CTE가 우발적 폭력과 살인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CTE란, 만성 외상성 뇌질환으로 기억상실과 폭력성을 가져온다고 한다. 


이야깃거리 아닌 생각거리를 건네다


사이코패스라든지 소시오패스라든지 감정이 없거나 감정을 컨트롤 할 수 없는 이들의 살인과 에르난데스의 살인은 비슷한 점이 있다. 자신이 행한 폭력과 살인 행위에 별 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이를 두고 선천적이라든지 특수학대가 자행된 가정환경 때문이라든지 하는 원인 규명 노력의 역사는 참으로 오래 되었다. 그래서 비록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버리고 만다. 신선하지 않은 것이다. 


이 작품도 에르난데스의 어린 시절 아픔을 그의 믿기 힘든 이중생활 이면의 주요 원인으로 내세우려 하는 게 보였기에 신선하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었을 테다. 하지만, 풋볼이라는 폭력성 짙은 운동이 더해지면서 원인을 들여다보는 데 입체감을 부여했다. 풋볼 때문에 에르난데스 내면의 모순이 갈라지고 갈등하고 상충된 것이다. 풋볼에 열광하는 이들은 알게 모르게 그에게 끝없이 이어지는 상처를 남겼고, 그의 내면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인기와 명예와 돈을 위해 감독을 비롯한 구단 고위층들은 그를 인간 아닌 도구로 사용했다. 


이 작품이 에르난데스를 도구로 이용할 여지는 충분히 있었다. 그의 사례를 통해 참으로 많은 '이야깃거리'를 던질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대신, 위험해 보이지만 '생각거리'를 건넬 수 있는 만큼 에르난데스를 둘러싼 이야기가 아닌 내면을 들여다보는 작업을 진행한 것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객관적으로 사건과 사람을 대할 수 있었다. 


거기에 작품이 가해자 에르난데스만큼 많이 할애한 대상이 피해자 오딘 로이드이다. 치명적 범죄 사건에서는 언제나 피해자 보다 가해자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마련인데, 이 작품은 피해자를 둘러싼 이야기도 많이 전하고자 했다. 아론 에르난데스라는 본질의 행위는 이해할지 모르겠지만, 아론 에르난데스라는 개인의 행위는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다는 측의 대표이기도 하겠다. 개인적으로도,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부딪힘이다. 과연 내가 그였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면서도, 그와 비슷한 또는 똑같다시피 아니 더 피폐하게 살았을 다른 많은 사람들은 그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는가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옳다 그르다를 규정하기 힘든 생각거리를 던지는 콘텐츠는 언제나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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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당시 시민군과 함께 한 모든 이들의 이야기 <김군>

모모 큐레이터'S PICK 2019. 6. 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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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큐레이터'S PICK] <김군>


영화 <김군> 포스터. ⓒ영화사 풀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손에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다. 정부는 곧바로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부마민주항쟁으로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한 지 불과 열흘도 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그러곤 채 두 달이 지나지 않은 12월 12일 군내부 강경파 집단 하나회가 쿠데타를 일으켜 군을 장악한다. 그들은 민주화 수순으로 가고 있던 정국을 역행시킨다. 


이듬해 5월초 하나회는 본격적으로 움직인다. 정국 장악을 넘어서 집권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학생권과 정치권에선 이 움직임을 경계심 어리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던 차 5월 중순부턴 본격적으로 시위를 진행했고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 10만 명이 집결했다가 해산하기도 했다. 5월 20일에는 임시국회가 예정되어 있어 정치권에서도 호응하는 움직임을 보일 것이었다. 


신군부는 5월 17일 전격적으로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내린다. 5월 18일 광주 지역 대학생들은 이를 반대하는 시위를 일으킨다.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강력하게 진압한다. 하지만 공수부대의 진압은 시위하는 대학생들에게로만 향하지 않았다.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시민들까지 무차별적으로 폭행하고 죽였다. 광주 시민들과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공수부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에게도 폭행을 자행한다. 급기야 5월 21일에는 집단발포가 시행된다. 시민들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무장하고 시민군을 결성해 대치한다. 


제1광수 또는 김군 추적하기


북한 특수군 제1광수인가, 동네청년 시민군 김군인가. 영화 <김군>의 한 장면. ⓒ영화사 풀



5.18 광주 민주화운동 시민군이 결성될 때까지의 대략적 전개 양상이다. 당시 정권의 하수인 언론들은 이들을 두고 불순분자와 고정간첩의 소행으로 몰고 갔다. 30년이 훌쩍 넘은 2016년에는 지만원 씨가 이들을 두고 북한 특수군이라고 지칭하는 화보집을 출간했다. 400여 명의 북한 특수군이 5.18 당시 광주에 침투해 시위와 공수부대 대치를 진두지휘했다는 주장이었다. 지만원은 그들을 두고 제1광수, 제2광수, 제3광수 하는 식으로 이름을 붙였다. 


영화 <김군>은 '제1광수' 추적을 주요 골자로 한다. 5.18 관련 사진자료 곳곳에서 얼굴을 비춘 그를 두고, 지만원은 2010년 평양에서 찍힌 사진 속 김창식 씨라고 주장한다. 손에 지문이 있는 것처럼 얼굴에도 오차 없이 대조할 수 있는 게 존재한다면서. 이에 5.18 관련 단체들은 소송을 내면서 '북한 특수군 광수들'을 찾기 시작해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제1광수는 찾을 수 없었다. 


한편, 영화에선 중반이지만 사실 영화가 시작된 지점인 '주옥' 씨의 기억이 이에 맞선다. 그녀는 5.18 당시 임신을 한 몸으로 시민군들에게 주먹밥을 배급하는 일을 했다. 그녀의 기억 속에 제1광수 아닌 '김군'이 생생하다. 대야에 주먹밥을 담아 트럭 위로 날라주던 그때 보았던 김군, 그는 그녀와 같은 동네에 살던 청년으로 아버지 가게의 단골이기도 한 넝마주이였다. 


영화는 자못 순수한 의도로 제1광수와 김군을 추적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사진을 두고, 누구는 제1광수라는 이름 하에 북한 특수군이라고 주장하고 누구는 김군이라는 이름 하에 동네 청년이라고 기억하는 상황이 이해하기 힘들지 않은가. 5.18 민주화운동을 전제한 게 아니라 제1광수와 김군 간의 진실 찾기를 전제한 것이다. 물론 그 진실이야말로 5.18 민주화운동에 가장 근접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을 테다. 


5.18의 모든 이들 이야기


이 영화는 5.18 당시 시민군과 함께 한 모든 이들의 이야기다. 영화 <김군>의 한 장면. ⓒ영화사 풀



5.18 관련 영화는 실로 많이 만들어졌다. 가해자, 피해자, 외부자 등 다양한 시선으로, 정공법과 스케치 등을 통해 들여다보았다. <박하사탕> <꽃잎> <화려한 휴가> <택시운전사> 등이 대표적이다. 199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꾸준히 관객을 찾아오고 있다. 한편 5.18 다큐멘터리는 그 사안이 사안인 만큼 매해 나오고 있을 테다. 와중에 <김군>은 극장에서 찾아보기 힘든 5.18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5.18 민주화운동이 광주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일주일 정도의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일어난 항쟁이라는 점을 기인해봤을 때, 내년이면 40주년이 됨에도 불구하고 진상이 100% 밝혀지지 않다는 게 기이하다. 사실 다 밝혀진 것이나 다름없지만, 여전히 당시 많은 가해자들은 지금도 유지하고 있는 권력으로 사실과 진실을 오도하고 피해자들은 여전히 힘 없는 소시민으로 사실과 진실을 알릴 역량이 없다. 또한 피해자들은 가해자들뿐만 아니라 '아픈 기억과 경험'과 싸워야 한다. 


<김군>의 '김군 찾기'도 그 연장선상에서 바라볼 수 있겠다. 지만원이 앞장서 벌이는 가해자들의 '진실의 오도'를 바로잡기 위한 지난한 투쟁. 일반 시민을 북한 특수군으로 둔갑시켜버리는 스케일은 그 황당함 만큼이나 크다. 지만원이라는 사람이 왜 그러는지 알고 싶지는 않으나, 그로 인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뀔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 대해선 알고 싶다. 이 영화는 지만원도, 김군도, 지만원이 지목한 광수들도 아닌 5.18 당시 시민군과 함께 한 모든 이들의 이야기이다. 


잘 만든 영화


영화로서도 볼 만하게 잘 만들었다. 영화 <김군>의 한 장면. ⓒ영화사 풀



<김군>은 영화로서 참 잘 만들었다고 본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찾는다는 기본 얼개는 영화를 끝까지 긴장감 어리게 감상할 수 있게 한다. 영화의 중심소재를 기가 막히게 잡은 것이다. 제작진 또한 그 끝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찾는 과정을 오롯이 담았기에 다큐멘터리에서 느끼기 힘든 서스펜스를 선사한다. 김군의 실체를 찾고자 즉 이 영화를 만들고자 만 4년이 걸렸다는데, 찾았는지 찾지 못했는지는 여기서 밝히진 않겠다. 어떤 식으로든 큰 반향을 일으켰으면 좋겠다 싶다. 


소재와 스토리 라인을 따라가다 보니 만나게 되는 5.18 당사자들의 이야기가 자연스럽다. 지난 40여 년 동안 수없이 만나왔던 당사자들은, '당사자들'이기 때문이었지만 이 영화에서는 당사자들의 이야기가 주가 아닌 객에 가깝기에 최소한 보는 이들은 덜 부담스럽다. 부담을 덜 때 슬프고 아프고 고통스러운 기억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게 아닐까. <김군>의 지향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렇다. <김군>은 그 어떤 5.18 콘텐츠보다 5.18에서 먼 곳으로부터 시작했지만 그 어떤 5.18 콘텐츠보다 5.18에 가깝게 다가간 듯 보인다. '제1광수' 또는 '김군'의 사진 한 장이라는 디테일한 소재에서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태생부터가 디테일하니 과정이 디테일한 건 전혀 이상할 게 아니다. 


부디 '진실'을 되찾길 바란다. 이 영화가 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역사의 일부가 되어버린 5.18은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과의 싸움, 즉 진실과의 싸움이 될 공산이 크다. 그 수많은 삶과 죽음을 이용해 하찮은 욕망을 채우려는 이들은 계속 나올 것이다. 그럴 때마다 <김군> 같은 콘텐츠로 훌륭하게 대응해주었으면 한다. 아니, 그래야 한다. 진실의 승리는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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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가해자, 기억, 김군, 시민군, 제1광수, 지만원, 진실,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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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사회파 영화 교과서 <7월 22일>

넷플릭스 오리지널 2019. 3. 15.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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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7월 22일>

영화 <7월 22일> 포스터. ⓒ넷플릭스


폴 그린그래스 감독, 영화를 참 잘 만든다. 리얼리티를 기본 장착하고 사회성 짙은 소재를 가져와 현장감 있게 연출하는 데에는 도가 텄다. 비록 2편부터 참여했지만 할리우드 액션촬영편집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본 시리즈>가 대표작이다. 


정녕 한결 같은 스타일을 20년 가까이 유지하고 있지만, 여전히 수많은 관객을 찾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다분히 상업적이지만 마냥 상업적으로만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게 그의 영화들이다. 그의 최신작 <7월 22일>은 오히려 처음으로 돌아간 듯한 정도이다. 


2011년 7월 22일 노르웨이를 비롯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테러 사건, 동일 인물이 정부 청사에는 폭탄 테러를 노동당정치캠프가 한창이던 우퇴위와섬에는 총기난사 테러를 일으킨 희대의 충격 사건이었다. 


감독은 이 사건의 전말, 특히 사건 이후를 다큐멘터리적인 세심함과 액션 감독다운 긴장감, 현장감 다분한 연출로 불러들였다. 한없이 가슴 아프고 한없이 무서워지는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답을 함께 찾아보자. 


2011년 7월 22일 그날, 노르웨이


2011년 7월 22일, 노르웨이 테러는 전 세계를 경악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영화 <7월 22일>의 한 장면. ⓒ넷플릭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만큼 대략의 줄거리는 찾아보면 누구나 알 것이다. 2011년 7월 22일,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는 경찰제복을 갖춘 채 폭탄을 실은 차를 타고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 위치한 정부청사로 향한다. 곧 폭탄이 터지고 8명이 사망한다. 


그 사이 노동당정치캠프가 열리는 우퇴위와섬으로 향한 그는 무차별로 총기를 난사해 69명을 죽인다. 그러곤 뒤늦게 도달한 특수부대에게 자수해 오슬로로 향한다. 또 다른 공격이 계획되어 있다며 더 이상 이민을 받지 말고 다문화주의를 철폐할 것을 주장한다. 


변호사를 선임하는데, 변호사가 그를 변호하는 주요 방법으로 그가 정신병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한편, 우퇴위와섬 테러에서 총 4발 맞고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빌리야는 가족 그리고 그들을 응원하는 온국민과 함께 테러범에 맞선다. 


한 개인의 목숨이 달린 싸움 그 미시적 문제와 정치적 신념이 복잡미묘하게 오가는 그 거시적 문제가 첨예하게 부딪히는 현장, 치가 떨리게 두려워지기도 하고 저런 악마를 왜 죽이지 않나 치가 떨리기도 하며, 결국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중심을 확고하게 잡아야 하겠구나 생각하게 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시시각각 수많은 생각들이 오갔다. 


사회파 영화의 교과서


사회파 영화의 교과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영화 <7월 22일>의 한 장면. ⓒ넷플릭스


<7월 22일>은 '사회파' 영화의 교과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회성 짙은 실화를 거의 그대로 가져와 리얼리티를 극대화하는 동시에 드라마성 짙은 이야기를 넣어, '큰' 것과 '작은' 것의 균형을 맞추었다. 거시적과 미시적이라고 말을 바꾸어도 틀린 건 아니다. 


아무래도 테러범의 총기난사 장면이 가장 충격적인 리얼리티를 선사한다. 전시상황은커녕 그저 캠프에 와서 즐겁고 알찬 시간을 가지고 있었을 뿐인 이들에게 들어닥친 죽음의 그림자는, 극도의 긴장감을 넘어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경험을 추체험하게 한다. 


더욱 충격적인 건 테러범 브레이비크의 주장이다. 다문화주의에 빠져 나라가 망해가고 있는 와중에 본인은 나라를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고 그 일환으로 테러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라는 궤변. 인간이 인간에게 행할 수 있는 가장 큰 악행을 정치적으로 치환시킬 뿐 아니라,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이 사건의 주체가 되게끔 하려는 수법이다. 


이에 대응하는 노르웨이라는 나라는, 어떻게 보면 매우 이성적이고 인권우선적이며 민주주의적인 것처럼 보인다. 테러범은 변호사도 선임해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정부는 그를 '인간'이자 '시민'으로 대하며 그의 말을 차근차근히 듣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런 '악마'를 어떻게 살려두며 어떻게 그의 말을 듣고 있는 건지 이해를 할 수 없고 이해하기 힘들기도 했다. 


전 세계 최고 선진국다운 시스템을 갖추고 견고하게 쌓아올린 국가대계를 단 한 명의 '미친놈'에게 간파당해 무지막지한 피해를 봤으니, 국가로선 그를 단순히 미친놈이 아닌 '적'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름 아닌 그도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본인을 그렇게 표현한 게 아닐까. 


피해자의 싸움


가해자 아닌 피해자의 싸움도 잊지 않는다. 영화 <7월 22일>의 한 장면. ⓒ넷플릭스


영화는 피해자의 지난한 싸움 또한 잊지 않는다. 영화의 시작부터 가해자와 피해자의 상황을 교차 편집하여 그 자체로 메시지화되고 종국엔 깨달음을 전하는 데 크게 일조한다. 이 사건의 경우를 비추어볼 때, 우리 중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순 없겠지만(없어야 하지만) 피해자가 될 순 있다(이 역시 없어야 하지만). 정치의 일상화를 정치의 범죄화로 치환해서 생각하는 건 근절되어야 한다.


피해자의 싸움은, 테러범에게 총 4발을 맞고 기적적으로 살아난 뒤 육체적 정신적으로 다시 살아나다시피 하는 노력을 뒤따른 후 주체가 되어버린 가해자와 동일선상에 위치해 이 사건의 주체가 되는 게 1차이다. 


2차는 그 이후 극악무도한 범죄자와 억울한 피해자의 어법이 아닌 지극히 정치적이고 상식적인 어법을 구사하려는 테러범에 맞서 다른 어법을 구사하는 것이다. 그건 세계관의 충돌이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가해자는 공포의 대상이자 함께 하늘 아래를 영위할 수 없는 죽이고픈 대상일 것이다. 하지만 빌리야는 인간애와 인류애를 역설한다. 


여기에 '인간애' '인류애'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가해자는 혼자가 된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이 혼자가 아니며 테러는 계속 될 것이라고 했지만, 이젠 그저 '공포'라는 만인이 멀리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게 된다. 더 이상 세계를 뒤흔들 수 없게 된다. 반면 피해자는 모든 이들과 사랑, 우정, 믿음을 함께 하는 만인중일(萬人中一)이 되는 것이다. 세계를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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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2일, 가해자, 노르웨이 테러, 사회파 영화, 폴 그린그래스,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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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할 수 없는 괴물, 무엇이 그 괴물을 만들었나 <몬스터>

오래된 리뷰 2018. 11. 3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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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몬스터>


영화 <몬스터> 포스터. ⓒ무비즈 엔터테인먼트



에일린(샤를리즈 테론 분)은 불우한 가정 환경으로 13살 나이에 창녀가 된다. 그 사실을 안 동생들에게서 쫓겨난 그녀는 고향을 떠나 떠돌며 창녀 생활을 계속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을 돌아보고 삶을 마감할 결정을 한 그녀, 마지막으로 목을 축이러 들어간 바에서 셀비(크리스티나 리치 분)을 만난다. 사랑에 굶주린 에일린과 레즈비언 셀비는 사랑에 빠진다. 


에일린은 달라진 게 없다. 그녀가 가야 할 곳은 여지없이 길 위, 그리고 창녀 생활. 어느 날 에일린은 남자 한 명을 죽인다. 그는 에일린을 묶고 학대와 가학적인 섹스를 행했던 것이다. 이후 에일린은 셀비와 함께 일주일만 함께 하자는 말로 하여 싸구려 모텔을 전전하며 도피 행각을 벌인다. 


도피 행각 도중 문득 깨달은 에일린은 창녀 생활 아닌 일반적인 일자리를 구하고자 한다. 그게 가능하지 않을 것을 안 셀비는 반대하지만 에일린은 바로 시작한다. 하지만 에일린에게 돌아오는 건 매몰찬 거절과 가혹한 냉대뿐. 모욕을 참지 못한 에일린은 다시 창녀 생활로 돌아선다. 


하지만 에일린의 창녀 생활은 이전과 다르다. 온갖 트라우마가 뒤섞여 그녀로 하여금 막다른 곳으로 내몰리게 하여 연속적인 살인과 강도 행각으로 이끈다. 과연 에일린의 삶은 어떤 곳으로 향할까. 에일린과 셀비가 함께 하는 생활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셀비가 에일린의 살인과 강도 행각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떤 행동을 할까. 


미국 최초의 여성 연쇄살인범 실화


미국 최초의 여성 연쇄살인범 에일린 원노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영화 <몬스터>의 한 장면. ⓒ무비즈 엔터테인먼트



영화 <몬스터>는 유명 미드 <안투라지> <킬링>의 시즌 1을 연출하고 영화 <원더 우먼>으로 세계적인 흥행 감독 반열에 오른 대표적 여성 감독 패티 젠킨스의 데뷔작이다. 그녀가 갓 30대에 들어선 때에 선보인 이 영화는 미국 최초의 여성 연쇄살인범 에일린 워노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실제 그녀는 불우하기 짝이 없는 평생을 보냈다. 태어나자마자 엄마는 집을 나가고 아빠는 소아성애를 일삼다 구속된 후 자살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친오빠와 친할아버지에게 학대와 강간을 당했고 14세 때 강간으로 임신을 했지만 기를 수 없어 입양을 보냈다고 한다. 집에서 쫓겨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창녀 생활뿐...


끔찍하고도 끔찍하고도 끔찍한 에일린 워노스의 어린 시절 그리고 이후의 삶, 비록 영화는 불우하고 끔찍한 어린 시절의 그녀를 직접적으로 그려내진 않지만 충분히 상상할 수 있고 그래서 더욱 처참하게 다가온다. 영화의 기저엔, 에일린이 그런 생활을 하고 살인과 강도 행각을 벌이게 된 기저엔, 그 시절 그 삶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녀의 연쇄살인을 옹호하지 않고 보는 우리 또한 그녀의 연쇄살인을 옹호할 수 없는 건 당연하고도 당연하다. 그 어떤 연유로도 살인을 정당화하고 옹호할 수는 없다. 세상에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 많을 테지만, 그 죽어 마땅한 사람을 죽인 사람을 같은 프레임에 넣을 수는 없는 것이다. 


또 다른 가해자들, 몬스터들


그녀되 괴물이었지만, 그녀를 그렇게 만든 수많은 이들도 모두 괴물이 아닐까. 영화 <몬스터>의 한 장면. ⓒ무비즈 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이 프레임을 빗겨간다. 이 프레임이 아닌 다른 프레임으로 그녀를 바라보려 한다. 전자가 에일린을 주체로 놓아 그녀로 하여금 '남혐'을 중심에 놓고 주체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려고 했다고 보는 반면, 후자는 에일린을 주체이자 주체적 가해자 아닌 최소한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말해 인지하게끔 한다. 


그녀가 오직 용서할 수 없는 최악의 악마이자 괴물이었다는 점에'만' 천착하는 것과 그녀가 형용할 수 없는 짓을 당한 최악의 피해자였던 점'도' 인지하는 것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우리 모두 그녀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는 와중에 그녀가 어떤 짓을 당했는지 아는 게 필요한 것이다. 


그녀는 영화 제목대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몬스터'였다.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 앞으로도 절대 부정할 수도 변경될 수도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 또 다른 몬스터들이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영화는 에일린이 아닌 그들, 그녀로 하여금 괴물이 되게끔 한 그들 즉 그녀에게 강간을 하려한 남성들과 사랑을 가장해 그녀에게 계속된 창녀 생활을 중용한 셀비'도' 몬스터가 아니냐고 묻고 있다. 


1992년에 제작된 에일린 워노스에 대한 다큐멘터리 <에일린: 연쇄살인범의 삶과 죽음>은 그들뿐만 아니라 에일린에게 적절한 사랑과 보호를 주지 못한 미국을, 그녀에게 다른 무엇도 아닌 '미국 최초의 여성 연쇄살인범'의 굴레만을 씌운 언론을, 그녀를 어떻게든 연쇄살인범에 합당한 죄를 물어 '정의를 실현'하려는 사법부야말로 몬스터가 아니냐고 묻고 있다. '진짜' 몬스터는 누구인가 묻는 게 아닌, '몬스터'란 무엇인가와 누가 '몬스터'인가 묻는 게 먼저이고 중요하다 하겠다. 


한없이 슬퍼진다


영화를 보고 나면 한없이 슬퍼진다. 영화 <몬스터>의 한 장면. ⓒ무비즈 엔터테인먼트



'난 대스타가 될 줄 알았어. 아니면 그냥 아름다운 여자라도. 그래, 나도 꿈이 많았어. 세월이 지나면서 나는 꿈을 속으로만 간직하게 됐어. 하지만 당시에는 철썩 같이 믿고 살았어.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 언젠가 다 알게 될 거라 생각하면 행복했어. 마릴린 먼로만큼 키워주긴 힘들더라도 날 믿어만 준다면 내 가능성을 봐주고 아름답다 생각해준다면... 그럼 지금과는 모든 것이 다른 새로운 삶과 새로운 세상으로 날 데려가줄 수 있지 않을까.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왔어. 어느 날 다 끝나버렸지.'


영화가 시작되면서 에일린의 과거를 비춘다. 에일린의 내레이션이다. 꿈이 있던 시절, 사랑을 믿었던 시절, 행복을 바랐던 시절... 몬스터들은 그녀를 몬스터의 세상으로 끌고와 그녀로 하여금 다시 없을 몬스터가 되게 만든다. 그럼에도 영화는 몬스터와는 하염없이 다른 곳에 있을 것 같은 사랑과 행복을 말하려 한다. 


끔찍했던 시절의 에일린이지만, 그녀에겐 셀비가 있었다. 셀비와 함께 하는 꿈, 셀비와의 사랑, 셀비와 더불어 사는 행복을 바란 에일린, 인생의 절정이었을까. 마지막 불꽃이었을까. 하지만 셀비라는 또 다른 몬스터는 꿈과 사랑과 행복을 빌미로 에일린으로 하여금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하고 궁지로 몰아넣는다. 


이쯤 되면, 에일린이 희대의 살인마라는 사실은 더 이상 머릿속에 없다. 그저 한없이 슬퍼진다. 무엇이 그녀를, 그를,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회의론에 빠지면 디테일한 면면들을 볼 수 없게 되는 우를 범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이 영화의 힘일까, 이 영화가 주는 영향일까. 그건 긍정적일까, 부정적일까. 그게 무슨 대수랴 싶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만큼은 모든 걸 측은지심으로 바라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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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게 보여주는,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는 인간 <너는 여기에 없었다>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8. 10. 10.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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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너는 여기에 없었다>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 포스터. ⓒ팝엔터테인먼트



살인 청부업자 조(호아킨 피닉스 분)는 수시로 자살 충동에 시달린다. 수시로 시도를 하는데, 봉지로 얼굴을 덮어 숨을 못 쉬게 하거나 칼을 입속으로 넣어 찌르려 하거나 철로에 떨어질 것처럼 자세를 취하기도 한다. 하다 못해 칼로 위험한 장난을 치기도 한다. 모든 건 무표정 위에 어린 복잡한 심정으로 행한다. 


그가 자살 충동에 시달릴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기억들이 있다. 어린 시절인 듯 학대의 기억들, 전쟁인 듯 당한 기억과 행한 기억들, 그리고 오래 되지 않은 가해의 기억들까지 그를 괴롭힌다. 그런 그가 자살을 할 수 없는 건 늙은 어머니의 존재 때문이다. 인정사정없는 살인 청부업자이지만 어머니한테는 다정다감한 하나뿐인 아들이다. 


그에게 의뢰가 들어온다. 차기 주지사로 유력한 상원 의원 알버트가 딸 니나를 찾아달라는 것이다. 지체없이 소굴로 가 니나를 구출한 조, 하지만 머지 않아 알버트가 죽었다는 뉴스를 접하고 곧이어 정체불명의 이들에게 니나를 빼앗긴다. 조는 다시 한 번 니나를 구출하기 위해 길을 나서는데...


차기 거장 과작 감독의 신작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한 장면. ⓒ팝엔터테인먼트



영국 출신의 여성 감독 린 램지는 1999년 장편 데뷔 후 20여 년 동안 4편밖에 내놓지 않은 과작 감독이다. 내놓는 작품마다 비평 면에서 좋은 성과를 보이며 차기 거장의 면모를 발휘하고 있지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와중에 2011년 작 <케빈에 대하여>는 우리나라에서도 큰 화제를 뿌렸다. 사랑할 수 없는 아들과 사랑하기 힘든 엄마의 치명적 심리 스릴러로,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모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비틀기를 시도해 반향을 일으켰다. 


틸다 스윈튼이라는 명배우와 함께 시너지를 냈던 <케빈에 대하여>에 이어 6년 만에 장편 <너는 여기에 없었다>를 들고 온 린 램지 감독은, 이번에는 명배우 호아킨 피닉스를 낙점했다. 그녀는 이번 영화에서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어떤 식으로든 비틀어 내보인다. 


다만, 전작이 관계와 서사의 심리를 중점에 둔 반면 이번에는 개인과 기억의 은유에 중점을 두어 보다 스타일리시해졌지만 다소 난해가 구석이 많을 수 있겠다. 그런 만큼 관객이 해야 할 게 많아졌다. 


폭력에 대하여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한 장면. ⓒ팝엔터테인먼트



기본적 스토리 라인은 여러 영화들을 생각나게 한다. 뤽 베송의 <레옹>, 토니 스콧의 <맨 온 파이어>, 심지어 한국 영화 <아저씨>까지 연상되는 것이다. 암울한 과거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유령 남자가 여 아이를 구하면서 구원된다는 이야기. 하지만 <너는 거기에 없었다>는 이 영화들과 결이 다르다.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와 결이 같다고 할 수 있을까. 남자 주인공이 여자를 구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닌, 여자를 구하는 걸 본인 구원의 상징으로 치환한다. 여자가 구원되는 것도, 여자를 구하는 게 남자를 구원하는 방법의 하나가 되는 것도 된다. 또한 그들의 관계 형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보다, 남자 주인공 내면에 보다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똥파리> <파수꾼>을 비롯한 한국 독립영화의 일면,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는 인간들의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 


조가 니나를 구출하는 장면이 그 한 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다른 영화였으면 얼마나 스타일리시하게 또는 얼마나 잔인하게 죽이는지 신세계적인 액션을 보여주려 하였다면, 이 영화는 망치 하나로 일망타진하는 폭력적인 이야기와 장면을 CCTV 화면과 다분히 편집된 이야기로 보여준다. 영화는 현실에서의 폭력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를 꺼려하고 있다. 


또 다른 한 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조가 괴로워하는 플래시백들이다. 현실의 폭력과 폭력 이후를 보여주는 방식과 정반대로, 극히 짧은 시간 스쳐지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플래시백들이 굉장히 직접적이다. 하지만 이 또한 날 것의 피가 난무하는 폭력보다 폭력 이후만을 보여준다. 상상하게 만드는 폭력이란 얼마나 폭력적인가. 


'여기', 그리고 새로운 시작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한 장면. ⓒ팝엔터테인먼트



조는 폭력의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듯하다. 어머니라는, 삶의 이유이자 폭력의 굴레에서의 쉼터가 있지만 언젠가 사라질 운명이다. 영화는 조의 이유이자 쉼터를 어머니에서 니나로 옮기는데, 그건 과연 죽음일까 부활일까 구원일까. 이 역시 영화는 판단을 감독의 몫도 배우의 몫도 아닌 관객의 몫으로 돌린다. 


이런 류의 영화에서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결국엔 가해자나 피해자나 모두 사라지는 것밖엔 방법이 없다. 누군가한테 죽임을 당하든, 스스로 죽든. 그 지점에서 구원의 양상이 영화마다 제각각인 것이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죽음-부활-구원의 라인을 택한 듯하지만, 아무것도 택하지 않은 ‘새로운 시작’을 택한 것도 같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라는 건 ‘너는 여기에 없어야 한다’로 읽힌다. ‘너’는 조 자신일 수도 있고, 니나일 수도 있고, 어머니일 수도 있다. 심지어 그의 사업 파트너일 수도 있고 그에게 원수진 수많은 이들일 수도 있다. 그를 죽이러 온 이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라는 공간과 시간을 통합하는 철학적 개념이 이 영화를 주되게 관통하기도 한다. 


액션은커녕 말도 거의 없거니와 딱딱 끊기는 OST는 영화를 한없이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게 한다. 다름 아닌 주인공 조의 내면과 기억 속으로. 그러면서 특유의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으니, 이 영화를 보는 이들이라면 그 암담함과 조용한 긴박감을 견뎌내야 한다. 감히 재미있다고 말하진 못하겠지만, 감히 참고 견디며 한 번쯤 보라고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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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폭풍이 전하는 재미와 질문 '누가 진짜 괴물인가' <몬몬몬 몬스터>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8. 8. 1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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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몬몬몬 몬스터>


영화 <몬몬몬 몬스터> 포스터. ⓒ더쿱



'대만영화', 어느새 우리에게도 익숙해졌다. 2000년대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필두로, 2010년대 괜찮은 청춘영화가 우후죽순 우리를 찾아왔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나의 소녀시대>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 등, 우리나라 감성과 맞닿아 있는 대만 감성이 두드러진 작품들이다. 


하지만, '진짜' 대만영화는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대만 출신의 세계적인 감독들과 작품들이 있다. 허우 샤오시엔의 <비정성시>,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 리안 감독의 <결혼 피로연>, 차이밍량의 <애정만세> 등. 이들은 1980~90년대 대만영화의 새로운 시작을 알린 일명 '뉴 웨이브'의 기수들이다. 이들의 감각적이고 예술적인 경향이 지금의 대만영화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비단 대만청춘영화뿐만 아니라. 


최근에 우리를 찾아온 강렬한 영화 <몬몬몬 몬스터> 또한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2010년대 대만청춘영화의 시작을 알린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의 감독이자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의 원작, 각본, 제작을 맡았던 이른바, '대만청춘영화'의 기수 구파도의 신작이다. 젊은 감독의 '청춘' 사랑은 여전하지만,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다채로운 수단과 방법이 이채롭다. 거기엔 청춘은 물론 공포, 스릴러, 코믹까지 있다. 


괴물 같은 인간과 괴물의 한판


영화 <몬몬몬 몬스터>의 한 장면. ⓒ더쿱



린슈웨이는 런하오 일당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거기에 반 친구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동조한다. 심지어 담임 선생님도 피해자 린슈웨이가 아닌 가해자 런하오를 두둔한다. 복도에서 홀로 수업을 듣고 밥을 먹는 왕따이자 아웃 오브 안중인 여자 학생만 그를 위할 뿐이다. 자기처럼 되지 말라고. 하지만 린슈웨이 또한 그녀를 왕따시키는 학생일 테니, 그녀의 위로를 거들떠도 보지 않는 게 당연하다. 


한편 노숙자들과 독거노인들만 사는 곳엔 '괴물 자매'가 산다. 그들은 사람을 잡아먹는데, 어느 날 사냥하러 나왔다고 차에 치이고는 우연히 근처에 있던 런하오 일당에게 붙잡힌다. 그때 거기엔 린슈웨이도 있었다. 그들은 동생 괴물을 자신들의 아지트로 데려와서는 하염없이 괴롭힌다. 린슈웨이가 찾아보니 그 괴물들은 원래 사람이었다. 돈을 노린 누군가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런하오 일당과 언니 괴물은 한판 붙어야 한다. 사람을 잡아먹고 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괴물과 사람을 죽도록 괴롭히면서 사람이었던 괴물을 아무 이유 없이 잡아와 한없이 괴롭히는 사람. 사람으로서 사람을 응원하지만, 사람이니까 괴물을 응원해야 할 것도 같다. 


장르 폭풍이 선사하는 재미


영화 <몬몬몬 몬스터>의 한 장면. ⓒ더쿱



영화 <몬몬몬 몬스터>는 생각지도 못한 재미를 선사한다. 영화로만 느낄 수 있을 쾌감 어린 재미는 물론, '진짜 괴물은 누구인가'를 묻는 은근 철학적 질문으로 재미를 반감시키는 게 아닌 배가시킨다. 우선 재미 요소에는 위에서도 언급한 이 영화의 장르 폭풍이 있다. 청춘, 코믹, 공포, 스릴러 등. 


학교에서 벌어지는 왕따 이야기, 흔히 거기에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야기가 있고 다시 가해자가 되는 피해자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가해자가 된 피해자는 또 다른 피해자를 물색하거나, 간혹 다른 루트로 본래의 가해자에게 피해를 입히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가해자가 된 피해자가 명백한 가해자인 괴물을 상대로 가해자가 된다는 설정이 특이하다. 


괴물이 나오면서 장르는 자연스레 공포와 스릴러로 옮겨간다. 혐오스러운 몰골은 존재 자체로만으로도 공포를 유발하며, 언제 갑자기 튀어나올지 모르는 긴장감 어린 순간들은 스릴러의 세계에 한 발을 들여다놓게 한다. 


구파도 감독의 전매특허인 청춘과 더불어 코믹이 빠질 수 없다. 특히 그가 제작, 원작, 각본을 맡은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의 황당무계한 판타지 코믹이 이 영화에도 살짝살짝 묻어난다. 그런 코믹들이 공인된 청춘 장르는 물론 공포와 스릴러와도 잘 어울리니 더할 나위 없이 잘 빠진 영화가 될 수밖에 없다. 


누가 진짜 괴물인가


영화 <몬몬몬 몬스터>의 한 장면. ⓒ더쿱



런하오 일당은 이 영화의 공공의 적이자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들의 궁극적 원인이다. 왠지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고 싸그리 죽을 것만 같은 느낌을 풍기는 영화에서, 런하오 일당이 린슈웨이를 괴롭히지 않았다면 또 동생 괴물을 납치해오지 않았다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상은 어떨까. 겉 아닌 속은 어떨까. 결국 런하오 일당 또한 언젠가 피해자였을 테고 언젠가 피해자가 될 운명이 아닐까. 그들도 이 강자와 약자가 나뉘어져 있는 거대한 시스템의 약자 측에 속해 더 절대적 약자를 괴롭히고 있는 게 아닐까. 약자들의 세계에서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피눈물 나는 모습들을 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접할 수 있다. 


영화의 시작, 정신지체아와 가게를 꾸려 나가는 노인에게 물세례를 맞은 노숙자는 다른 노숙자와 경찰의 눈을 피해 더 깊숙히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갔다가 괴물 자매에게 잡아먹힌다. 하지만 정작 괴물 자매는 그보다 더 깊숙한 곳에서 박스 하나에 의존한 채 살아간다. 그런 괴물이 런하오 일당에게 잡히고, 런하오 일당은 린슈웨이를 괴롭히는 한편 함께 하는데, 린슈웨이는 다시 가게의 정신지체아를 향해 폭언을 하고... 


'누가 진짜 가해자인가'라는 질문을 넘어, '누가 진짜 괴물인가'를 말하려는 이 영화, 런하오 일당이 어떤 식으로든 '괴물'이라는 건 인정한다. 그렇다면, 린슈웨이는? 그 사이를 오가며 자신하지 못하는 그는, 어찌 보면 정녕 인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리 저리 휘둘리고 끝없이 고민하지만 결정하지 못하는 인간적인 인간. 하지만 그는 명백히 런하오 일당에 동조하고 함께 행동했다. 런하오 일당이 괴물이라면 그도 괴물이 아닌가? 영화가 질문하는 '누가 진짜 괴물인가'의 대상은 런하오 일당이 아닌 린슈웨이다. 그리고 우린 대부분 린슈웨이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렇다면 우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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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보여주는 나의 이야기, 현 일본 애니메이션의 정점 <목소리의 형태>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7. 5. 1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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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목소리의 형태>


<목소리의 형태>는 현재 일본 애니메이션 주류의 한 정점임에 분명하다. ⓒ디스테이션



일본 애니메이션이 굉장히 철학적이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방대하고 집요하다. 선악의 경계를 무너뜨린 대우주 서사시 <건담> 시리즈나 일관되게 자연과 인간의 대결과 화해의 주제를 내놓는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들, 거기에 <공각기동대>를 필두로 하는 사이버 펑크 애니메이션의 철학으로의 집요한 접근이 대표적이다. 


그렇지만 일본 애니메는 미국 그래픽 노블이 선보이는 '작화보다 텍스트'를 추구하진 않는다. 대단히 철학적인 주제로 나아가는 만큼 일본이 자랑하는 극도의 비현실적 '예쁜' 작화와 대중적인 소재를 채택한다. 자칫 조화롭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오래 전부터 그토록 상반된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기에 정립이 되어 있다고 하겠다. 


우린 올해 초에 그 한 정점을 보았다.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이다. 예쁘기 그지 없는 작화와 여기저기에서 많이 봐온 대중적이고 자극적인 소재 안에 범상치 않는 주제를 담았다. 그리고 4개월 만에 찾아온 또 다른 정점 <목소리의 형태>. 홍보는 두 애니메가 비슷한 것처럼 했는데, 이 둘은 완전히 다른 결을 두고 있다. 개인적으로 <목소리의 형태>가 더 좋았던 것 같다. 훨씬 더 나의 일상과 맞닿아 있어 공감이 갔다. 


치기어렸던 학창 시절의 이야기?


따돌림과 괴롭힘은 학창 시절에 으레 겪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디스테이션



쇼야는 고등학생에 불과한 어린 나이이지만 무슨 이유인지 삶의 끈을 놓으려 한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대신 그는 수화학교를 찾아간다. 그리곤 거기서 쇼코를 만난다. 엉겹결에 너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시점은 과거로 가 초등학교 6학년 쇼야의 반으로 쇼코가 전학오는 때다. 쇼코는 귀가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쇼야는 그런 쇼코를 놀린다. 처음에는 그저 장난으로, 나중에는 집단 따돌림으로 발전한다. 그럼에도 쇼코는 그저 미안하다면서 싱글벙글 웃을 뿐이다. 


그런 쇼코의 유일한 친구였던 사하라, 하지만 그녀는 어느 날 사라진다. 그러곤 쇼코도 버티지 못하고 전학을 간다. 곧 쇼야는 이지메 주범으로, 함께 쇼코를 따돌리는 데 앞장섰던 친구들에게 역으로 집단 따돌림을 당한다. 이후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가는 와중에도 이지메 주범이 꼬리표로 달려와 항상 '왕따'로 있는 그다. 그런 와중에 다시 만나게 된 쇼코다. 


쇼야는 쇼코와 친구가 되고자 수화를 배우는 등의 노력을 한다. 하지만 쇼코 곁에 항상 붙어 있는 유즈루라는 친구 때문에 다가가기 쉽지 않다. 아무래도 절친 같다. 그러며 감히 '친구'라는 걸 만들고 싶어 하는데, 그런 그에게 나가츠카가 마음을 연다. 이후 예전에 쇼코를 따돌림하는 데 일조했던 우에노를 만나고, 쇼코의 유일한 친구였던 사하라도 만나며, 이쪽도 저쪽도 아니었던 카와이도 만난다. 과연 쇼야는 친구를 만날 수 있을까? 쇼야와 쇼코는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목소리의 형태>는 얼핏 치기어렸던 학창 시절의 이야기를 담은 듯하다. 머리가 크고 돌이켜보니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라도 지나왔을 그때 그 시절의 안타깝지만 웃으면서 얼버무리며 지나갈 수 있는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저 그렇게만 흘러가면 이 애니메를 볼 이유가 없겠다. 


원죄와 구원의 측면에서 바라보기


가해자라는 원죄, 그리고 속죄로 이어질 구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디스테이션



우린 이 애니메를 원죄와 구원, 존재라는 거창하기까지 한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학창 시절의 치기 어린, '누구나 그땐 그럴 수 있어'라고 넘길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제대로 돌아봐 직시하고 풀 수 있는 건 풀어야 한다. 쇼야가 자살까지 생각하게 된 이지메는 자신이 저지른 이지메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나쁜 짓을 했으니 똑같이 나쁜 짓을 당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말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원죄를 직시하고 당사자에게 용서를 구한다. 그러며 '친구의 자격'이라는 씁쓸한 단어로 구원받으려 한다. 이에 당사자인 쇼코는? 그녀보다 그 주위 사람들이 더 반대한다. 특히 그녀의 어머니는 그가 한때나마 그녀에게 한 짓을 아주 잘 알기에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나라면 어떻게 할까?


난 약한 아이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와 중학교 3학년 때 따돌림이 아닌 괴롭힘을 당했다. 20여 년이 지났어도 생생한 기억들은, 나로 하여금 그를 다시 만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상태에 있게 만든다. 솔직히 모르겠다. 지금 만나면 어떤 복수를 해줄지. 그런 한편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는 오히려 내가 누군가를 괴롭힘이 아닌 따돌린 기억이 어렴풋이 있다. 어떤 식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뭔가를 했던 건 확실하다. 


아마 이 피해자와 가해자로서의 경험들이 뒤죽박죽되어 이후 오랫동안 새로운 사람들을 잘 사귀지 못했었던 것 같다. 극 중 쇼야는 고등학생이 되고 사람들 얼굴을 잘 쳐다보지 못하거니와 얼굴에 'X'표가 달려져 있게 되었는데, 그게 다 그가 저지른 가해자로서의 경험과 그가 당한 피해자로서의 경험이 합쳐져서일 것이다. 애니메이션으로서의 장점을 극대화시키며 애니메이션으로만 구현이 가능한 이 표현은, 쇼야의 복잡한 극도의 심정을 잘 표현해냈다. 


원죄와 존재의 측면에서 바라보기


스스로 생각하기에 태어나지 않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원죄와 그럼에도 세상에 꼭 존재해야 한다는 부정과 합의 이야기다. ⓒ 디스테이션



결국은 쇼코가 쇼야를 용서해줄 줄 안다. 어떤 식으로? 거기엔 원죄와 구원이라는 키워드 외에 '존재'의 키워드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번엔 쇼야가 아닌 쇼코다. 누가 봐도 쇼코는 잘못한 게 없지만, 그녀는 항상 미안하다고 한다. 그건 청각장애인이라는 쇼코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며 자신만 사라지면 모든 것들이 원만할 거라 생각한다. 


이 세상은 피해자가 도망가야 하는 상황이 두루 존재한다. 결은 다르지만, 영화 <한공주>를 보면 한공주는 피해자일 뿐더러 잘못이 없는데 가해자로부터 도망다녀야 한다. 그러며 언제든 존재의 사라짐을 준비한다. 결코 삶의 끈을 놓을 생각은 없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쇼코는 자신을 괴롭힌 당사자였던 쇼야가 수화를 배워와 자신과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말 못할 감동을 느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쇼야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쇼야와 쇼코는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로서의 도식이 아닌, 원죄와 존재 그리고 구원으로서 서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도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 아무리 쇼야의 첫 번째 절친 나가츠카, 쇼코의 수호천사 유즈루가 있다 해도 그들은 서로가 있어야 한다. <목소리의 형태>는 초중반부의 일반적 차원에서 후반부의 철학적 차원으로 넘어가며 이 도식을 직접적으로 내보인다. 생각지도 못한 깨달음을 얻는다. 


한편 우린 이 작품을 통해 아픈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죽을 만큼 아픈 사람들을 말이다. 그런데 아직 세상을 제대로 접하지 못하고 알지 못한 아이들이다. 쇼야의 경우, 어른들이 생각하기에 터무니 없는 이유로 세상을 등지려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바로 그 점이다. 누구나 겪었을 만한 아픈 이야기를 어른이 되면 잘 거들떠 보려 하지 않는다. 그저 '그땐 그럴 수 있어' 하며 넘어가려 할 뿐이다. 그 어느 것 하나 그냥 넘어가면 안 되는 것이다. 들여다보자. 그들이 말하려는 목소리의 형태를. 


세상의 아름다움, 그리고 나의 이야기


<목소리의 형태>는 아름답다,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누구나의 이야기다. 그것으로도 충분한 것 같다. ⓒ디스테이션


<그의 이름은.>의 신카이 마코토가 '빛의 작가'라는 수식어를 얻을 만큼 빛의 섬세함을 일상과 접목시켜 치밀하게 보여주는 데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반면, <목소리의 형태>는 세상을 등질 만큼 심각한 상황에 맞지 않는 것 같은 자연의 신비를 통해 세상의 아름다움을 선보이려 하는 것 같다. 


우린 이 작품에서 아름다운 벚꽃, 귀여운 잉어, 예쁜 다리 밑 개울가 풍경을 수시로 볼 수 있다. 현실은 시궁창인데 보이는 풍경은 이리도 아름다우니 만큼 시궁창 현실을 미화하려는 수작인가 생각하기 쉽지만, 그 일원인 자신의 존재 가치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는 데 크게 일조한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들은 아직 어리다. 


의외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는데, 어느 정도 내 이야기 같다고 느낀 측면도 클 것 같다. 그렇지만 학창 시절의 이런저런 일들, 상당히 심각한 게 분명하지만 '그땐 그럴 수 있지'라며 넘기기 일쑤인 일들은 그야말로 누구나 한 번쯤 겪을 것이기에 나말고도 나처럼 느낀 이들이 많을 줄 안다. 


그 모든 일들이 절대 그저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그렇지만 그 어떤 일도 용서하고 구원받지 못할 건 없다는 것도 말해주고 싶다. 물론 여기엔 단서가 따른다. 다른 누가 끼어들 수 없는 당사자들끼리의 원죄의 대한 속죄와 용서에 따른 구원이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절대 허투루 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도. 이는 비단 학창 시절의 상대적으로 강도가 덜한 일들만이 아니다. 나아가 국가, 인류의 절대적 강도의 일들에도 해당된다. 쇼야가 쇼쿄에게 하는 진심어린 속죄와 사과를 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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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과 방향이 틀린 나치독일 잔해 제거 임무 <랜드 오브 마인>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7. 4. 1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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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랜드 오브 마인>


제2차 세계대전에 수많은 입장들이 존재한다. 전쟁 전, 중, 후에도 마찬가지. <랜드 오브 마인>은 전쟁 후의 어떤 입장이다. ⓒ싸이더스




영화 <랜드 오브 마인>은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만큼, 전쟁영화의 외형을 띠고 있다. 정확히는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영화겠다. 거기엔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는 세상살이의 도식이 존재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직 피해자만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피해자만 양산하는 전쟁 따위를 왜 해야 하는가.


수많은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영화가 미국, 영국, 소련의 손에 만들어졌다. 승전국이자,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입장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패전국이자 가해자인 독일, 일본 입장에서도 만들어졌다. 가해를 정당화하거나 반대로 가해 사실을 공표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진 않는다. 일본은 종종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여 비난 받아왔다. 많은 경우, 진정한 가해자의 손에 피해를 입은 자국민들이나 성숙하기 전에 전쟁에 투입되었던 소년병들을 다루곤 한다.


그렇게, 제2차 세계대전은 수많은 입장들을 대변하는 수많은 콘텐츠를 양산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양산할 것이다. <랜드 오브 마인>은 그동안 종종 보아왔던 독일군 소년병 포로들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다룬다. 그것도 종전 후의 이야기이다. 종전 70년이 지나가는 시기에서, 전쟁 '중'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쟁 '후'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 같다.


전쟁의 잔해를 제거하는 임무를 맡은 소년들


패전국 나치독일, 그들이 전쟁 중에 남긴 치명적인 잔해들을 소년병들이 목숨 걸고 치운다. ⓒ싸이더스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 이듬해 4월에는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한다. 덴마크는 즉시 항복, 독일은 덴마크 서해안 전역에 방어선을 구축한다. 연합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연합군의 상륙은 프랑스였고, 덴마크 서해안 방어선은 종전 후에도 그대로 남는다.


나치독일이 저지른 전쟁의 잔해, 덴마크는 나치독일 포로들에게 지뢰 제거 임무를 맡긴다. 그 중 상당수가 소년병이었다고 하는데, 영화는 다름 아닌 소년병들의 지뢰 제거 임무를 주로 삼는다. 그 어떤 도구도 사용할 수 없는, 맨손과 막대기 하나에 의존한 지뢰 제거. 그야말로 목숨과 바꾼 임무다.


엄청나게 위험한 작업인 만큼 사전 연습부터 철저해야 한다. 사전 연습도 실전처럼, 연습에서도 죽고, 실전에서도 죽어 나간다. 이 임무를 맡은 덴마크군의 칼 상사는 처음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지만, 시간이 갈수록 계속해서 죽어 나갈수록 느낀다. 이 아이들은 전쟁에 투입되어 명백한 죄를 저질렀지만, 지뢰 제거 임무를 맡아야 할 건 최소한 이 아이들은 아니라고.


그렇지만, 그런 생각은 누구한테건 씨알도 안 먹힐 것이다. 그들이 전쟁 중에 저지른 '짓'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그들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로지 명령에 따라 한 행동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들이 저지른 짓을 합당화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의 총탄에 쓰러진 수많은 이들을 생각해서라도.


그런 식의 '방법'과 그런 '방향'은 잘못 되었다


복수를 하는 건 좋다. 승전국이니만큼 어느 정도의 것들은 예상된다. 하지만 명백히 방법과 방향이 틀린 게 존재한다. 이 영화는 그걸 보여준다. ⓒ싸이더스



여기서,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는 없고 그저 고통만 있었다는 식으로 풀어갈 순 없다. 이 나치독일 소년병 포로들이 가해자였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종전 후의 모습만, 그것도 포로가 된 모습만 보여주기 때문에 선량해보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전쟁 중에 그들이 잔악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말 못할 것이다. 미성숙을 앞세워, 잔악한 명령을 그 누구보다 앞서 실행했을지 모를 일이다.


문제는 그들이 아닌 그들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킨 이들의 모습이다. 감독이 의도한 것일 수 있겠는데, 종전 후 나치독일 포로들에게 덴마크군이 보이는 행동은 나치독일이 보여준 잔악함 못지 않았다. 그들의 행동은 '방향'과 '방법'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소년병 포로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면 안 되는 것이었고, 아무런 제대로된 도구 없이 굶어 죽을 듯이 일을 시키면 안 되는 것이었다.


범죄에는, 주범이라는 게 존재한다. 주도하고 기획하고 결정하고 명령을 내리고 책임지고 가장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는 존재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경우, 종전 후 주범 중 상당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전쟁 중에 혹은 내분으로 인해 죽었다. 물론 많은 주범들이 사형 당했다. 그렇지만 그 바로 밑의 이들에겐 아마 정치적일 거라 예상되는 이유로 무죄 판결이 내려지기도 했다.


누구는 주범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내려 잘 살아가고, 누구는 종전 후에도 전쟁 중보다 더 죽음에 직면한 작업을 계속해 나가야 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각각 저지른 짓에 따른 각각의 속죄가 필요할 테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세상은 불공평하니까. 문제는 그렇게 내려온 죄의 무게를, 왜 가장 '인간'에 가까울 이들이 짊어져야 하느냐는 것이다. '악마' 같은 이들이 해결해야 할 사항이 아닌가. 설사 그들이 짊어져야 한다고 쳐도, 그런 식으로라면 얘기가 되지 않는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맞대응하면 똑같이 된다는 건 너무도 당연한 얘기가 아닌가. 더욱이 덴마크는 저항 한 번 하지 않고 곧바로 항복했다.


그들을 인간으로 대해야만, 그들은 뉘우칠 수 있다


마냥 인간적인 차원에서 그들을 인간으로 대해줘야 하는 건 아니다. 그들을 인간으로 대해주어야만, 그들은 스스로를 인간이 아닌 병사라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뉘우칠 수 있다. ⓒ싸이더스



감정적으로 이해는 한다. 누구라도 그 상황이었다면 그렇게 대응했을 것이다. 내 국토와 내 가족를 무참히 짓밟은 이들. 대상의 구체적 물상을 들여다볼 필요도 없이 대상이 속해 있는 집단의 악마성에 분노를 터뜨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게 인간이니까. 그렇지만 그 시간이 지나고 들여다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을 때, 보여야 한다. 용서할 순 없더라도 인정은 해야 한다는 걸.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걸 말이다.


영화는 인간을 보여주려 애쓴다. 아니, 애쓸 필요도 없다. 인간이라 할 수 없는 나치독일이 남긴 잔해를 인간들이 처리하고 있는 것과 다름 없다. 아름다운 해안을 뒤로 하고 무참하게 죽어가는 건 광포에 휩싸인 병사들이 아닌 두려움과 배고픔에 벌벌 떨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인간들 뿐이다. 그들을 그렇게 대하는 순간, 과거는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만약 그들을 포로답게 대했다면 오히려 그들을 인간이 아닌 병사로 생각했을 듯하다. 이런 비인간적인 처사를 통해 그들의 인간성을 발현시키지 않았다면,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계속해서 떠올렸을 것이다. 잘못을 뉘우치던가 계속해서 광기에 휩싸였던가 하는 건 그 이후의 일이겠다. 그것이 오히려 '이쪽'을 위한 길이 아니었을까, 싶다.


매우 힘든 일이었겠지만 이성적으로 대처했다면 방향과 방법을 달리했을 것이고, 그들은 자신의 죄 이상으로 지독했던 전쟁 이후의 기억이 아닌 자신이 저지른 죄를 생각하며 살아갔을 테다. 그들을 병사가 아닌 인간으로 인정하고 인간으로 대할 수밖에 없게 한 파렴치한 짓은 정말 바보 같았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도식을 넘어, 미성숙한 이들에게 저지른 잔혹한 행위의 부당위성을 넘어, 그들도 인간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까지 넘어, 즉 선악의 개념을 넘어 그들에게 행한 행위의 무뇌아적 지점을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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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 랜드 오브 마인, 소년병, 인간, 제2차 세계대전, 지뢰 제거,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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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공주가 도망쳐야 하나,잘못한 게 없는데... <한공주>

오래된 리뷰 2017. 1. 2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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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한공주>


압도적일 게 없을 것 같은 연출로 그 어느 영화보다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었다. 영화가 갖는 소재도 소재이지만, 그 소재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무비꼴라주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어른들에게 둘러싸인 한 소녀, 꾹꾹 눌러왔던 말 한마디를 애써 웃음 띤 얼굴로 내뱉는다. 그런데 이내 그녀는 선생님과 전학 수속을 밟으러 다른 학교를 찾는다. 잘못한 게 없다는 그녀가 떠나는 것이다. 명백한 모순이 아닌가, 이 상황은. 무서워서 피하는 건가, 더러워서 피하는 건가. 아직까진 알 수 없다. 그녀의 앞날을 지켜보는 수밖에. 


그녀의 이름은 '한공주', 하필 공주다. 그녀의 시련은 전 인생에 걸쳐 있다. 부모님은 이혼해서 엄마는 다른 이와 살림을 차렸고 아빠는 일 때문에 몇 달에 한 번 볼까 말까이다. 그래도 알바와 학업을 병행하며 씩씩하게 살아가는 그녀, 편의점 사장 아들, 딸과 친하게 지내며 의지도 되어준다. 이겨낼 수 있을 정도의 시련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전학을 가게 된 공주, 분위기가 전과는 완연히 다르다. 뭔가 얼이 빠진 느낌이랄까. 그녀에게 남은 건 오직 음악뿐인 듯하다. 음악 덕분에 친구도 생긴다 또 수영을 배우는 그녀, 이유가 살고 싶어질 때를 대비해서란다. 뭔가 그 사이에 크나큰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전 학교 담임 선생님 집에서 선생님의 엄마와 지내게 된 공주, 운영하는 마트 일도 도와주며 호감을 얻는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실날 같은 희망을 자신도 모르게 품게 된 공주, 하지만 학교로 찾아온 어른들로부터 도망치는데...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왜 도망쳐야 할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피해자가 도망치는 현실, 이게 현실이다


왜 공주가 도망쳐야 할까, 왜 피해자인 공주가 도망쳐야 하는 것일까, 왜 급기야 공주가 가해자처럼 되어버린 것일까.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무비꼴라주


지난 2014년 4월 17일, 세월호가 침몰된 지 하루 뒤에 개봉한 영화 <한공주>는 국민적인 공분을 사며 뛰어난 연출과 연기에 힘입어 흥행과 비평에 성공했다. 독립영화의 영역을 뛰어넘은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당시 보지 못한 건, 대략의 내용을 알고서 도저히 볼 용기가 나지 않았던 탓이었다. 또한 그동안 생각해왔던 가해자와 피해자의 뒤바뀐 양상을 또 다른 시각으로 완벽하게 보여준 탓이겠다. 


영화는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피해자의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보여주었던 기존의 독립영화론에 일종의 반기를 든다. 그동안 피해자는 세상으로부터 사회로부터 개인으로부터 받은 끔찍한 피해를 '가해자'가 되어 되돌려주려 했다. 아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방도를 찾을 수 없는,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폭력의 뫼비우스 띠. 


이 영화는 어떤가. 공주가 당한 건 끔찍하다 못해 악마적인 행위. 입으로도 손으로도 언급하기 역겨운 43명에 의한 집단 성폭행. 피해자 공주는 어떤가. 홀로 강하게 큰 그녀이지만, 한없이 약한 그녀이기도 하다. 그녀는 가해자가 되기는커녕 도망 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또 다른 가해자들인 가해자들의 부모, 자기 아들 삶을 망가뜨리지 말라는 협박과 호소와 부탁 때문이다. 차라리 공주가 가해자가 되어 그 악마들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무엇을 남길 수 있다면, 그러면 내 마음이 덜 아플 것 같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건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 현실은 이렇다. 


끔찍한 와중에 다가오는 포근하고 아련한 감성


그 와중에 포근하고 아련한 감성을 선보인다는 건 거의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아... 공주가 가엽다. 공주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할 수 있게 도와주고 싶어진다. ⓒ무비꼴라주


이 영화가 대단한 이유는 비단 이것 뿐이 아니다. 마음이 뒤틀리는 공주의 상황을 알게 됨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지극히 감성적으로 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건 공주가 진정 하고 싶었지만 이제 다시는 할 수 없는 '음악'에서 기인된다. 공주가 음악과 함께 일 때 느껴지는 감성은 한없이 포근하고 아련하다. 


이 감성은 <파수꾼>에서 기태가 함께이고 싶었지만 다시는 그럴 수 없는 친구들과의 즐거운 시간, <해에게서 소년에게>에서 시완이 계속되길 원했지만 다시는 그럴 수 없게 된 가족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수남이 열심히 일해서 장만하고 싶었지만 결국 빛으로 사게 된 집과 궤를 같이 한다. 


그렇지만 <한공주>에서 공주가 보여주는 감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바, 그녀가 당한 짓이 그만큼 강렬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극은 극으로밖에 해결하지 못한다는 걸 말하고자 하는 걸까.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엔 아이러니 하게도 공주의 괴로운 모습이 아니라 즐거운 모습이 뇌리에 남는다. 


우린 공주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공주의 괴로움을 뒤로 하고 즐거움을 취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대수롭지도 않게. 그러면서 그녀 안에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괴로움을 조금씩 치료해주면서 말이다. 아마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공주가 전학 간 학교에서 큰 관심을 보이는 은희도 결국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지 않았는가. 이게 현실이라는 말을 다시금 하게 된다. 


'혼자'라는 사실보다 더 잔혹하고 가혹한 게 있을까


공주의 모든 걸 알고 온전히 그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영화에선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그 아픔이 너무도 큰 탓에 나도 휩쓸릴 것 같기 때문일 테다. 그렇지만 현실은... 현실도 마찬가지일 터. 과연 나는? ⓒ무비꼴라주


이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은, 생각해보고 들여다보면 너무나도 잔혹하고 가혹하다. 백도 없고 집도 없고 부모님도 없고 친구도 없는 어린 여고생이 할 수 있는 게 무언가. 뭐라도 해서 희망의 불씨가 있다는 걸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나, 싶은 게 개인적인 바람이다. 하지만 그건 공염불에 불과하지 않나. 실상은 이런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그녀에게는 그녀의 아픔을 가슴 절절히 공감하고 외치고 기억해줄 이가 아무도 없다. 누군가는 다수의 가해자가 한 목소리로 외치는 '개소리'를 듣고 가해자를 옹호하고, 누군가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며, 누군가는 한순간의 망설임으로 그녀를 떠나보낸다. 그녀는 혼자다. 


많고 많은 사람이 사는 이 크나는 세상에 '혼자'라는 사실보다 더 잔혹하고 가혹한 게 있을까. 더욱이 잘못한 게 없는데, 오히려 피해를 당했는데, 누군가에게는 가해자로 인식되기까지 하다니. 숨이 턱턱 막히고 알 수 없는 소름이 덮친다. 가만히 있기가 힘들다. 세상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도 귀찮다. 그저 사라지고 싶다.


그런데, 공주는 수영을 배운다. 다시 살고 싶을까봐, 다시 시작하고 싶을까봐. 그러면 너무 억울하니까. 그녀는 알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마지막을 선택하게 될 거라는 걸. 그때를 대비해 수영을 배운 것이다. 이건 치를 떨지 않을 수 없다.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무너져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를 보고 결심한 게 있다. 받아들이겠다고 말이다. 타의에 의해 세상으로부터 버려져 혼자가 된 이들을 받아들일 것이다. 정녕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한다. 다름 아닌 내가 하고 싶다. 이 영화 <한공주>를 보고 난 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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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 감성, 성폭행, 수영, 음악, 피해자, 한공주, 현실, 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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