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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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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회 현실 단면을 담아내 표현한 한국영화의 한 전형 <부당거래> 2019.09.29
  • 1994년을 들여다보며 독립영화의 한계를 넘어 성장, 관계, 붕괴를 말하다 <벌새> 2019.09.02
  • 가족들 간의 미스터리한 불안을 들여다보다 <누구나 아는 비밀> 2019.08.09
  • 연극톤의 재미있는 웰메이드 블랙 코미디 <완벽한 타인> 2018.11.08
  • 조각난 관계들을 포옹으로 형성시켜라, 영화 <오 루시!> 2018.07.11
  • 어른아이에게 덧씌워진 비극과 불행, 영화 <홈> 2018.07.05
  • '가족'은 다시 쓰여져야 한다, 소설 <고령화 가족> 2018.06.11
  • 빛나는 순간들을 위한 관계, 상실, 성장의 하모니 <빛나는> 2017.12.20
  • 기억은 사라질 거지만 기억하고 싶다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2017.11.15
  • 어른이 무시하는 아이들의 '관계'와 '권력'의 세상 <우리들> 2017.09.08

한국사회 현실 단면을 담아내 표현한 한국영화의 한 전형 <부당거래>

오래된 리뷰 2019. 9. 29. 08:00



[오래된 리뷰] <부당거래>


영화 <부당거래> 포스터. ⓒCJ엔터테인먼트



2000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화려하게 데뷔한 류승완 감독, 2000년대 내내 자그마치 6편이나 스타일 확실한 영화를 연출하며 '류승완표 영화 스타일'을 확실히 한다. 하지만 이 시기 나온 작품들이 적어도 흥행에서는 애매했던지라 류승완 감독의 연출 인생에서 확실한 발돋움을 하진 못했다고 평할 수 있겠다. 2010년대 들어서 비로소 획기적인 발돋움을 할 수 있었다. 


2000년대 류승완표 영화 스타일은 액션과 코미디가 주를 이룬다. 크게 탈피하지 않은 건, 스타일을 정립하기 위함일 수도 있고 나름의 성과를 얻고 있었기에 탈피할 이유가 없었을 수도 있으며 '알'을 까고 나오는 게 힘든 만큼 자신의 스타일을 탈피하기가 힘들었을 수도 있다. 2010년작 <부당거래>는 류승완 감독이 지난 10년간 정립한 스타일을 어느 정도 유지하는 차원에서 성공적으로 탈피한 작품이다. 


<부당거래>는 류승완 감독 개인 필모뿐만 아니라 한국 영화계의 사회파 범죄 영화를 한 단계 진일보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다. 현실감 투철하고 탄탄한 각본과 찰진 대사로 무장한 캐릭터들, 그리고 거시적 관계 구도와 미시적 표현들이 유기적으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들어 맞았다. 한국사회 현실 단면을 담아내 표현한 한국영화의 한 전형이라 하겠다. 


대국민 조작 사건의 전말


어린이 연쇄 살인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니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 수사를 종용한다. 와중에 유력 용의자가 경찰의 손에 사망하자 경찰은 어떻게든 범인을 잡아와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이에 광역수사대 에이스 최철기가 투입된다. 그는 경찰대 출신이 아니었고 뒤가 구렸으며 팀 형사들이 뇌물을 받은 전력도 있어 일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경찰 윗선에선 일처리가 확실하지만 뒤탈도 없는 최철기 투입이었고, 최철기 입장에선 어쩔 수 없이 낚였으나 위로 올라가기 위한 유일한 방편이기도 했다. 


최철기는 가짜 범인 이동석을 골라선 은밀히 연결되어 있는 조폭 출신 해동건설 대표 장석구를 시켜 엮어들어가는 데 뒤탈없게끔 한다. 처음엔 거절했던 장석구이지만 태경그룹 회장 김양수에게 큰 공사 건을 뺏길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받아들인다. 한편 검사 주양은 스폰을 해주는 김양수 회장의 비리사건을 두 번이나 주도한 최철기를 주시하기 시작한다. '검찰' 주앙은 '경찰' 최철기의 자신만만함에 부아가 치미는 한편, 최철기가 조작한 가짜 범인 이동석을 넘겨 받는다. 


와중에 장석구는 김양수를 청부살인하고 함께 골프를 치던 주양의 사진을 찍어 최철기와 주양에게 보낸다. 장석구가 최철기 편인 듯 사실 최철기와 주양을 쥐고 흔드는 모양새를 취하는 동시에, 최철기와 주양의 관계가 극단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최철기로선 장석구도 모자라 주양까지 상대해야 하는 판이 된 것이다. 사건이 이상하게 꼬인다. 이 대국민 조작의 끝은 어떤 모습일까. 


내리권력의 견고함


<부당거래> 속 대국민 조작은 윗선에서 시작된다. 나라의 수장 대통령의 압박 퍼포먼스(영화 속 모티브가 되는 대통령은 이명박이다)를 보고는 경찰청장 이하 경찰 고위급들에서 시작된 조작의 흐름이 선을 타고 아래로 내려와 해당 사건과는 무관한 금치산자까지 가닿는 것이다. 극중 최철기 반장부턴 엄연한 선이 그어지는 게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한편으론 지극히 영화적인 설정이다. 


그런가 하면 주양 검사는 영화의 주요 맥락에서 한 발자국 떨어진 인물이다. 어린이 연쇄 살인 사건 범인 조작 중 최절기, 장석구와 닿아 있는 김양수가 스폰을 서는 검사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의도치 않게 해당 사건을 맡게 된 것이고. 그렇지만 그야말로 자신도 모르게 이 사건의 핵심으로 떠오른다. 검찰의 검사라는 권력에 장인어른 백까지 가진 완전집합체이기 때문이다. 하필 그를 잘못 건드린 겁 없고 백도 없는 최철기. 


영화에 '나쁜놈' 아닌 사람을 눈 씻고 찾아봐도 찾기 힘들다. 주요 3인방 최철기, 주양, 장석구는 물론 모든 인물이 앞뒤 할 것 없이 구린 구석이 있다. 다만, 더 나쁜 것 같은 짓을 일삼는 이들은 출신성분이 하찮은 이들과 가진 것 없이 올라와 더 오르고 싶은 이들이다. 그들은 출신 빵빵하고 가진 것 많은 이들이 내려준 동아줄 하나에 주렁주렁 매달려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는 척 경계한다. 


그러니, 영화는 꼬이고 꼬인 관계 속 명확한 선에 의한 관계 구성도를 보이는 것이다. 위와 아래. 하여 우린 비교적 쉽게 용서받지 못할 자를 선별해낼 수 있다. 하지만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도 위는 견고하고 아래는 무너지는 영화 속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차라리 모르고 지나쳤을 걸 하는 자괴감이 든다. 내리폭력이라는 사슬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끊어낼 수 있지만, 내리권력이라는 사슬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보다 견고해진다. 


모자람 없이 적절하다


영화는 주지한 거시적 관계 구도에서 오는 현실적이면서도 영화적 흥미 요소 이외에도 우리를 흥분시킬 만한 구성 요소들이 참으로 많다. "검찰이 경찰을 불편하게 하면 안 되지! 아주 큰 실수를 할 뻔 했어 내가"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남자가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지. 어깨 쭉 펴!" 등 영화 한 편에 나올 만한 질과 양을 뛰어넘는 명대사의 향연이 눈부시다. 또한 명대사들이 하나같이 한국사회를 시사하고 있다는 게 절절하다. 


한편 한국사회의 지옥도를 디테일하게 표현한 장면들도 눈에 띈다. 너무나 현실적이라 코미디적 요소가 깔려 있다고 느낄 만한대, 비가 엄청나게 쏟아붇고 있는 와중에 가게 안에서 반장과 국장이 독대하고 팀 식구들은 밖에서 비를 맞으며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나 엄청난 백을 등에 엎고 빅이슈 건을 맡게 된 주양 검사가 일이 잘 풀리지 않자 동료 검사들이 겉으론 덕담을 건네고 실제론 비웃는 장면 등이 그러하다. 


류승완 감독 스타일에서 성공적으로 탈피했다곤 하지만 '액션'에 있어서는 고수했다고 본다. 중반과 후반 최철기가 주도한 길지 않은 1 대 1 액션신은 매우 현실감 넘친다. 화려함, 빠름, 현란함은 쏙 빼고 단단함, 단백함, 투박함, 정확함 등을 투여했다. 오로지 몸과 몸이 부딪혀 자아낸 액션으로, 액션에도 감정이입이 될 수 있구나 하는 깨달음까지 받는다. 


전체적으로 모자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넘치지도 않았다. 적재적소에 굳더더기 없이 알맞은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연출, 연기, 각본이 서로를 침범하지 안으면서도 서로를 바라본 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했다. 완벽할 순 없겠지만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잡았다는 걸 두고 <부당거래>를 내세워도 크게 밑보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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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권력, 류승완, 범죄, 부당거래, 조작, 한국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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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을 들여다보며 독립영화의 한계를 넘어 성장, 관계, 붕괴를 말하다 <벌새>

모모 큐레이터'S PICK 2019. 9. 2. 08:00



[모모 큐레이터'S PICK] <벌새>


영화 <벌새> 포스터. ⓒ 엣나인필름



1994년 서울, 은희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중학교 2학년생이다. 학교 성적은 별로, 한문학원 단짝친구 지숙과 키스 한 남자친구 지완과 자기가 좋다고 쫓아다니는 학교 후배 유리가 있다. 떡집을 하는 아빠와 엄마, 학교회장을 하며 서울대를 목표로 하는 오빠 대훈, 아빠한테 매일같이 혼나면서도 밖으로 도는 언니 수희와 함께 산다. 


아빠는 가부장적이고, 엄마는 별다른 힘을 못 쓰며, 오빠는 은희를 부려먹는 한편 마음에 안 들면 때리고, 언니는 집안일에 무관심하다. 은희는 학교 안팎에서 집 안팎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는다. 만나고 헤어지고, 싸우고 화해하고, 좋게 지내다가도 대척한다. 한편 귀밑에 무언가 만져지기에 병원에 갔더니 혹이란다. 검사를 했더니 심상치 않다는 결과가 나왔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은희 앞에 한문학원에 새로온 선생님 영지가 의미깊게 다가온다. 은희는 온화하면서도 삶에 있어 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영지에게 기댄다. 


1994년은 여러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예고된 채로 혹은 불쑥 찾아왔다. 미국에서 월드컵이 열렸고, 북한의 김일성이 사망했으며,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은희와 은희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은 그 대규모 이벤트에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가 하면 1994년만의 팬시적 감성도 엿보인다. 지금은 없어진 또는 다른 비슷한 것으로 대체된 노래방, 삐삐, 트램펄린장 등은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다. 


1994년 단면, 2019년 국면


영화 <벌새>는 주인공 은희를 통해 들여다보는 1994년 한국의 단면이자 25년이 지난 2019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국면이기도 하다. 전 세계 유수 영화제들에서 25관왕을 달성하며 10여 년 전 <똥파리>가 달성한 38관왕의 위업을 다시 생각나게 하는 영화로, <우리집>과 더불어 2019년 대표 독립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극장 개봉 한참 전부터 여기저기에서 영화제 수상 소식이 들려왔는데, 그때부터 이미 오매불망 볼 날을 기다리며 기대에 한껏 부풀어 올랐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던데, <벌새>는 개인적으로 큰 기대를 훨씬 넘어서는 완전체에 가까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필자가 보아온 한국 독립영화들 중 <용서받지 못한 자> <똥파리> <파수꾼> <한공주> 등과 더불어 수위권에 속하는 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는 분명 훨씬 길었던 분량을 편집하여 이 정도로 줄인 것으로 생각된다. 거의 모든 시퀀스 사이에 공간이 존재했고 그래서 일면 불친절해보였지만 덕분에 오히려 영화가 풍성하고 확장되는 느낌을 주었다. 소품이 아닌 스케일 큰 대작이라는 느낌마저 주었던 것이다. 지극히 보편적이고 또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지극히 특별하고 또 정치사회적인 이야기였다. 


성장, 관계, 붕괴


이 영화는 한마디로 규정하기 힘들다는 장점이자 단점을 지니고 있다. 은희의 '성장'을 주요 테마로 다루었다고도 할 수 있을 테고, '관계'라는 꽤나 추상적인 개념을 서사의 중심으로 두었다고도 할 수 있을 테며, '성수대교 붕괴'라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사건 중 하나가 영화의 가장 중요한 소재로 작용해 주제까지 어우르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테다. 


이밖에도 영화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것들이 있을 테고 어느 것을 중심에 두고 영화를 보든 틀린 건 없을 테지만, 필자는 이중 '관계'를 중점적으로 보았다. <벌새>는 은희가 주인공이고 나아가 은희가 사실상 원탑이라고 할 수 있을 테며 은희 1인칭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그녀가 겪는 일들이 결국엔 관계에 있어 맺고 끊음 또는 연결과 단절의 계속됨이라고 하는 데 무리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은희의 성장도 바로 이 관계의 연결과 단절의 깨달음에 있다고 생각하며, 성수대교 붕괴라는 사건의 외연과 내연도 연결과 단절의 상징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궁극적으로, 1994년을 무 자르듯 하여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지만 그 자체로 25년이 지난 지금과 이어지고 있는 걸 볼 때 연결과 단절은 <벌새>라는 영화를 구성하는 가장 큰 축이 아닐까 싶다. 


영화가 여타 영화처럼 롤러코스터 식의 온도차를 보이지 않고 여러 면에서 시종일관 잔잔한 파도 정도의 높낮이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누구나의 인생도 롤러코스터가 아닌 잔잔한 파도의 연속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 그저 1994년 여중생 2학년의 한때를 빌려 왔을 뿐 하고 싶은 이야기는 누구나의 한때와 인생이 아닐까. 


그밖에 이야기들


<벌새>라는 영화 특유의 분위기는 두 배우의 연기가 크게 작용했다. 은희 역으로 분한 박지후 배우는 10대 중반에 불과한 나이임에도 기본적으로 성숙함이 담긴 연기를 내보였다. 얼굴만 클로즈업할 때는 몇 살인지 나이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의 농익은 표정 연기를 펼치면서도, 전신 풀샷을 잡을 때는 중학교 2학년생 그 나이 때 그대로의 연기 아닌 연기를 펼쳤다. 덕분에 보는 이로 하여금 다채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영지로 분한 김새벽 배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녀를 잘 모르는 이도 어디서 많이 본 듯하다고 한 그녀는, 지난 2011년에 데뷔한 한국 독립영화의 대들보다. 내년이면 10년차가 되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수 있는 경력인데, 독립영화만의 카리스마를 만들어 체득해 뿜어내고 있다. 영화에서는 그야말로 은희가 유일무이하게 믿고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어른이다. 왠지 실제의 그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영화의 영어 제목은 <벌새>가 아닌 <벌새 둥지>다. 벌새가 은희라면, 한국에서는 은희에게 초점이 맞춰질 테고 영어권 외국에서는 은희가 찾아 돌아가려는 집에 초점이 맞춰질지 모른다. 개인적으로 은희에게 초점이 맞춰진 <벌새>가 조금은 더 알맞은 것 같지만, 보다 조금 더 풍부하고 다채로운 해석으로 영화를 감상하길 원한다면 <벌새 둥지>라는 제목을 유념하는 것도 괜찮은 듯싶다. 


한 이야기가 많은 영화 <벌새> 못지 않게 <벌새>에 대해서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하고 싶지만, 이도저도 아닐 것 같고 또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여 이만 줄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은 지난 한국 독립영화들이 천착한 궤, 이를 테면 '개인' '사회' '폭력' 등을 이어가면서도 그것들이 모두 '그들'만이 아닌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메시지를 처음 전했다는 의미를 남겼다는 걸 전한다. 당연히 호불호가 있을 테지만, 적어도 보고 나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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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관계, 독립영화, 둥지, 모모 큐레이터, 벌새, 붕괴, 성장,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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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 간의 미스터리한 불안을 들여다보다 <누구나 아는 비밀>

모모 큐레이터'S PICK 2019. 8. 9. 08:00



[모모 큐레이터'S PICK] <누구나 아는 비밀>


영화 <누구나 아는 비밀> 포스터 ⓒ 오드 AUD , 티캐스트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먼 아르헨티나에서 스페인 고향을 찾은 라우라(페넬로페 크루즈 분)와 그녀의 큰딸, 작은아들. 남편 알레한드로는 바빠서 오지 못했다고 한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과 정겨운 회포를 풀고 마을 사람들과도 인사를 나눈다. 그러곤 온 동네가 들썩일 결혼식을 올린다. 중요한 건 밤새도록 계속되는 뒤풀이 파티, 지치지도 않는지 새벽에 폭우가 내리고 정전이 되어서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라우라는 딸이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된다. 패닉 상태에 빠진 그녀를 도와, 평소 가족 같이 대하는 파코(하비에르 바르뎀 분)를 중심으로 가족들이 나선다. 그는 라우라의 오랜 친구이자 과거 지극히 사랑한 연인이었다. 본격적으로 찾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통의 문자가 날아든다. 딸을 살리고 싶으면 경찰에 신고하지 말고 거액의 돈을 지불하라고 말이다. 똑같은 문자가 파코의 부인 베아에게도 날아든다. 


결혼식이라는 경사로 모인 가족들이 손녀이자 딸이자 조카의 납치라는 흉사에 삐걱거린다. 면식범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으니, 결혼식 파티에 초대된 사람들 중 하나라는 얘기와 진배 없다는 것. 가족들까지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미묘하고 조용한 긴장감 아래 가족들은 서로를 의심하면서 누구나 알지만 쉬쉬했던 비밀들을 하나둘씩 끄집어낸다.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 페넬로페 크루즈와 하비에르 바르뎀


영화 <누구나 아는 비밀>의 한 장면 ⓒ 오드 AUD , 티캐스트



영화 <누구나 아는 비밀>은 이란 태생으로 프랑스, 스페인 등까지 활동 범위를 넓히고 있는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의 최신작이다. 이 작품을 그의 필모 중 가장 태작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 2003년부터 시작되어 2~3년을 주기로 계속 이어지고 있는 그의 장편 연출작들의 면면이 지극히 화려하기 때문이다. 미스터리 서스펜스를 기반으로 한 드라마 스토리텔링의 거장으로, 이란을 대표하게 된 지는 오래되었고 세계 영화계에서도 손꼽히는 감독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누구나 아는 비밀>에 시선이 모아지는 이유는, 사건과 주제에 걸쳐 있는 상대적으로 약간의 진부함을 씻어주고도 남을 캐스팅에 있다. 스페인을 넘어 전 세계 영화계에서도 손꼽히는 두 남녀 배우이자 부부, 페넬로페 크루즈와 하비에르 바르뎀이 그들이다. 사이좋게 칸영화제, 미국 아카데미, 영국 아카데미, 고야상, 유럽영화상 등에서 주조연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다.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여섯 편에 함께 출연해 왔으니, 개개인의 연기력과 부부로서의 합이 맞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010년 결혼한 그들은 사이좋게 대표작이라 할 만한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를 비롯, 페넬로페 크루즈는 <귀향>이 하비에르 바르뎀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대표작이다. 비록 2010년대 들어 전성기가 지났다는 평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좋은 연기를 펼치고 있는 그들이다. 


애매한 영화의 결


영화 <누구나 아는 비밀>의 한 장면 ⓒ 오드 AUD , 티캐스트



영화의 주요 사건은 라우라의 딸 이레네의 납치이다. 그런데 시작하고 1/4 시점에 이르기까지 전혀 낌새를 느끼거나 찾을 수 없다. 이 작은 마을의 풍광이 편안하고 라우라 동생 결혼식 전중후의 면면이 풍성하며 사람들 간의 관계 형성이 모자람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 어떤 부정적인 요소가 끼어 있다고 생각하기 힘들다. 바로 그 점을 영화는 노린 듯하다. 급반전의 서스펜스.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의 필모를 들여다보면 공통분모들이 눈에 띈다. 앞서 주지했듯 그가 천착해온 장르는 '미스터리'인데, 소재는 '가족'이고 분위기는 '불안'이다. <누구나 아는 비밀>도 정확히 그 연장선상에 있다. 앞부분 30분 가량의 편안하고 한편 화려한 분위기는, 곧이어 들이닥칠 가족 간의 미스터리한 불안을 위한 반전적 준비였던 것이다.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폭발적 에너지를 응축해 놓고 있는 듯한.


공간적 배경이 모든 게 긴밀할 수밖에 없는 작은 마을이고, 주인공들이 정열적인 라틴계의 대가족 일원이며, 시간적 배경이 그 모든 게 긍정적으로 폭발하는 결혼식이라는 점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모든 게 감독이 전하려 하는 스토리텔링에 철저히 짜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참으로 친절하고 쉽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물 흐르듯 흐르는 이야기를 보고 듣고 느끼면 되는 것이다. 


다만, 이 영화의 겉모양이 상투적이라고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당연히 그 이면을 들여다봐야 하고 그래야 제 맛을 느끼겠지만, 겉으로만 봤을 땐 이보다 더 막장이라고 느낄 만큼 파격적이지도 않고 우디 앨런 식의 유머러스한 인장이 빛날 정도로 새겨져 있는 한편 사회비판적이기도 한 본격 막장의 결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그렇다면 이 영화엔 무엇이 있을까. 


가장 가깝고 가장 불안한 가족


영화 <누구나 아는 비밀>의 한 장면 ⓒ 오드 AUD , 티캐스트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의 인장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건 분명하다. 앞서 말했듯, 미스터리와 가족과 불안의 삼 박자가 어우러져 있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아가 우리에게 전하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을진대, 인간 내면 또는 본성의 부정적 면모 정도가 아닐까 싶다. 보다 구체적으로 나아갈 수 없는 건, 영화가 그 정도였다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누구나 아는 비밀>의 주요 사건인 이레네의 납치 후 가족들이 벌이는 일련의 행동들, 즉 서로를 의심하고 비밀을 폭로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서로 모르는 사람 하나 없는 작은 마을에 하필 결혼식 중이라니. 모두 당연히 범인이 '내'가 아니니 '너'일 수밖에. 너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생각하다 보면 누구나 알지만 쉬쉬 하고 있던 비밀을 끄집어 내어 짜 맞추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은 관계를 형성하지 않을 수 없다.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꽃 피우기 때문이다. 반면, 관계 속에서 상대와 자신 할 것 없이 파멸을 맛 보기도 한다. 상대와 자신, 즉 '우리'가 비슷한 파멸을 공존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묻어버리기도 한다. 그것이 우리를 위하고 우리의 관계를 지속 시켜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걸 안다. 그렇게 또 다른 폭발을 다음으로 미룬다. 


이 영화는 인간 관계에 있어 가장 첨예하게 가깝고 그래서 가장 불안한 '가족'의 모습을 다뤘다. "가까울수록 멀리하라"는 말이 있다.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는 천륜이 내렸기에 선택할 수 없다. 하여, 항상 그 자리에 영원불멸의 형태로 자리 잡아 있다. 하지만 가족은 결코 천륜이 내린 것도 아니고 항상 그 자리에 있지도 않다. 신중한 선택으로 그 자리에 있게 된 것이고 언제든 변한다. 최소한 때론 한 발 정도는 물러서 가족을 대할 때 보다 건강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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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관계, 누구나 아는 비밀, 막장, 모모 큐레이터, 미스터리, 불안, 아쉬가르 파라디, 페넬로페 크루즈, 하비에르 바르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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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톤의 재미있는 웰메이드 블랙 코미디 <완벽한 타인>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8. 11. 8. 08:00



[리뷰] <완벽한 타인>


영화 <완벽한 타인> 포스터. ⓒ롯데엔터테인먼트



성형외과 의사 석호(조진웅 분)와 정신과 의사 예진(김지수 분)은 속도위반으로 낳은 딸이 스무 살이 되면서 빚어진 남자친구 문제로 소소한 갈등을 보인다. 그럼에도 그들은 석호의 40년 지기 친구들을 초대해 집들이를 성공적으로 치러야만 한다. 


왁자지껄, 화기애애, 7명이서 너나 없이 한 마디씩 한다. 와중에 석호는 우리들 사이에 비밀은 없다며 우정을 자랑하고, 예진은 믿을 수 없다며 게임을 제안한다. 지금부터 7명 모두 각자의 전화, 문자, SNS, 이메일을 여과없이 공개·공유하자는 것. 꺼림칙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부인 속옷도 간섭하는 보수의 화신 변호사 태수(유해진 분)와 세 아이들과 시어머니 그리고 남편 태수까지 모시고 사는 와중에도 문학적 감수성을 유지하는 수현(염정아 분) 부부.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잘 나가는 사업가로 딱 봐도 바람둥이의 강한 캐릭터 준모(이서진 분)와 준모만 바라보며 준모를 한없이 믿는 세경(송하윤 분) 부부. 그리고 이혼 후 새로운 여자친구를 사귀고 있지만 보여주지 않으려는 영배(윤경호 분)까지. 


40년 지기의 화기애애한 식탁이 불안하다. 어느 누구에게도 비밀은 있다지만, 그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지만, 막상 내보이는 건 그것도 비밀이 없을 것 같은 비밀이 없어야 하는 친구들한테 내보이는 건 파국에의 전조나 다름 아니다. 이 집들이의 끝이 벌써부터 섬뜩하고 서늘하게 궁금하다. 


웰메이드 블랙 코미디


영화 <완벽한 타인>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비밀을 공개하고 공유하는 방법은 다름 아닌 핸드폰, 왠지 비밀이 없어도 비밀이 생길 것 같다. 영화 <완벽한 타인>은 한정된 공간에서 최소한의 인원 사이에 최대한의 비밀이 퍼지는 연극톤의 웰메이드 블랙 코미디이다. 


영화를 단계를 밟아간다. 밝은 것도 밝은 거지만 이제는 한 가닥씩 하는 삶을 살게 된 그들 삶의 겉은 화려해 보인다. 특히 성형외과와 정신과 의사 부부인 석호와 예진 부부는 딸의 소소한 사정 말고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집들이가 시작되며 몇몇만 알아차릴 수 있는 금이 가는 느낌이 다음 단계이다. 집들이 선물,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친구들 아내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뼈 있는 한 마디들이 소소한 '빠직'들을 형성한다. 


핸드폰을 공개하면서 비록 한 단계를 넘어갈 뿐이지만 그 폭이 전에 없이 커진 느낌이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말을 이런 걸 두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정작 크나큰 암초는 미지의 그 다음 단계에 있었다. 


서사 단계와 메시지 단계


영화 <완벽한 타인>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는 말한다. 40년 지기는 물론이고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사이도 '타인'이라고 말이다. 그것도 '완벽한' 타인. 사실 완벽한 비밀은 없다. 비밀은 반드시 누군가와 공유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그 비밀이 나와 가장 긴밀한 관계에 있는 이와 공유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완벽한 타인>는 서사 단계에 빚대어 메시지의 단계도 이어진다. 양파 껍질을 벗기든. 서사 단계보다 메시지의 단계가 이 영화를 향한 평과 흥행을 좌우하는 요소일 터, 얼마나 흥미를 끌고 얼마나 긴장 어리고 얼마나 기대에 미칠 것인가. 


처음에는 단연 핸드폰으로 대변되는 현대사회 현대인의 지극히 '비밀스러운' 개인주의이다. 핸드폰 하나에 나의 모든 것들이 들어 있는 이 세태, 가면을 쓸 수밖에 없게 만드는 핸드폰, 불안을 유지하고 불만을 직조하고 불쾌가 오간다.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의 단계는 핸드폰에서 끝나지 않는다. 여러 지극히 사적인 비밀의 줄기가 각지로 퍼져나간다. 여기서 호불호가 갈릴 만하다. 그 줄기들이 주체가 되어 서사를 이끌게 되면 불호가 될 요량이 크고, 객체가 되어 서사를 뒷받침하게 되면 호가 될 요량이 큰 것이다. 


아주 재미있는 영화


영화 <완벽한 타인>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를 볼 때는 느끼지 못했다. 어느새 그 줄기들이 주체가 되어 서사를 이끌고 있구나 하는 걸 어렴풋이 느끼기만 했을 뿐, 각자의 사정들이 주는 긴장감과 재미가 쏠쏠해서 자세하게 느끼고 분석할 새가 없었다. 혼자 봤으면 그럴 새가 있었겠지만, 영화관에서 많은 관객들과 함께 보니 분위기에 쏠린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하겠다. 


마지막 반전, 비록 티나게 특정 영화에서 대놓고 그대로 가져온 클리셰가 심히 걸리긴 하지만 꽤나 탁월한 선택이었다. 덕분에 영화 중반 이후의 서사와 메시지의 따로 노는 자못 어설픈 느낌이 한순간 풀어졌다. 비단 탁월한 선택이 영화의 탁월함으로 이어지진 않았을지언정 최소한의 짜임새를 선사한 것이다. 


하지만,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막장의 아우라는 '역시'라는 생각을 비껴가지 못한다. 여기서 영화는 또 한 번의 위기를 맞이할 수 있는데, 그 아우라가 거대하게 느껴지면 영화는 그저 그런 막장 코미디가 될 것이고 그 아우라가 그저 영화가 말하는 수많은 메시지 중의 하나이거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게 느껴지면 영화는 웰메이드 블랙 코미디가 되는 것이다. 


참으로 여러 면에서 경계에 서 있는 이 영화, 개인적으로 경계를 오가는 미묘함 자체가 긴장감과 재미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선 이 영화이 맞이하는 여러 위기들이 의미가 없어진다. 막장이든 웰메이드이든, 사적인 비밀들의 줄기가 객체가 되든 주체가 되든. <완벽한 타인>을 본 대부분의 관객들은 거기에 천착하게 될 것이고, 고로 영화를 아주 재미있게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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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메시지, 블랙코미디, 비밀, 서사, 연극톤, 완벽한 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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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난 관계들을 포옹으로 형성시켜라, 영화 <오 루시!>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8. 7. 11. 12:30



[리뷰] <오 루시!>


영화 <오 루시!> 포스터. ⓒ엣나인필름



일본 도쿄, 평범한 회사에 다니는 중년 여성 세츠코(테라지마 시노부 분)는 조카 미카(쿠츠나 시오리 분)의 부탁으로 영어 회화 교실을 다니게 된다. 일단 무료체험을 하겠다고 나선 길, 수상하기 짝이 없는 학원 내부의 한 교실로 안내된 세츠코는 그곳에서 선생님 존(조쉬 하트넷 분)을 만난다. 


그는 미국식 영어를 알려주겠다고 하며 별 거 없는 영어와 함께 과장된 몸짓과 포옹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녀는 루시(lucy)라는 영어이름으로 불린다. 금발머리 가발과 함께. 가발을 돌려주러 갔을 때 다케시(야쿠쇼 코지 분) 즉, 톰을 만난다. 존에게 영어를 배우러 온 그였다. 루시는 그때 존과 깊은 포옹을 하고 남다른 기분을 느낀다. 사랑?


정식으로 등록하러 갔을 때 존은 떠나고 없었다.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미카와 함께 미국으로 떠나버린 것이다. 세츠코가 대신 수업을 듣는 대신 내준 60만 엔을 들고서. 그 사실을 안 미카의 엄마이자 세츠코의 언니 아야코(미나미 카호 분)는 세츠코에게 60만 엔을 돌려주고, 이를 다시 세츠코가 아야코에게 돌려주려 하면서 미카가 있는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가겠다고 한다. 아야코가 동행한다. 이 동상이몽 여정의 끝은?


신인 감독과 베테랑 배우들


영화 <오 루시!>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영화 <오 루시!>는 일본의 젊은 신인 감독 히라야나기 아츠코가 자신이 만든 단편 <오 루시!>를 장편으로 발전시킨 작품이다.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좋은 퍼포먼스를 선보인 단편의 장편영화화에 일본 최고 베테랑 배우들과 할리우드 스타가 합류했다. 일본을 넘어 세계적인 명배우 반열에 오른 테라지마 시노부와 야쿠쇼 코지, 일본 내 명배우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는 미나미 카호, 말이 필요 없는 조쉬 하트넷까지. 


초짜 감독의 그냥저냥 멜로 로맨스 영화에 이런 배우들이 모여들리 없다. 이 영화에는 분명 뭔가가 있는 것이다. 그게 뭘까? 섬뜩한 지하철 투신 자살 사건으로 시작하는 영화, 가족 간에 회사동료 간에 친구 간에 일절 관계가 형성되지 않아 보이는 세츠코, 고작 포옹 한 번에 미국까지 날아가는 세츠코, 언니에게 남자친구를 뺏긴 세츠코. 


세츠코의 기이한 면면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퍼즐 맞추듯 해보면 뭔가가 보일 듯하다. 영화 시작에서 보이는 투신 자살 사건이 비단 그 한 번으로 그치지는 않는다는 점은 사회적 병리 현상의 일면을 보이는 것 같고, 세츠코의 면면은 다름 아닌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흔하다면 흔한 병리자를 보여주는 것 같다. 심지어 이 영화가 겉으로 내보이는 멜로 로맨스 즉, 세츠코의 사랑조차 이 병리의 일환 같다. 결정적으로, 세츠코라는 자아와 루시라는 자아의 분리. 


개인적으로 들여다봐야 하는 1인 가구의 폐해


영화 <오 루시!>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1인 가구는 더 이상 특별한 현상 내지 양상이 아니다. 이미 전 인구에서 30%에 육박했고 머지 않아 1/3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그 비율은 더 높아질 것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이 모습은 '문제'인가. 문제라고 하면 문제다. 의료발달로 수명은 점점 늘 것인데 반해 결혼과 출산은 점점 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적으로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들여다보면 얘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문제를 문제라고 하기 전에 다른 의미로 힘들어 하고 아파하는 개개인의 문제를 먼저 해결할 필요도 있다. <오 루시!>는 사회적 아닌 개인적으로 1인 가구의 폐해를 들여다보고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한다. 


혼삶을 사는 이가 모두 세츠코 같은 건 아닐 것이다. 그들 대다수가 다양한 관계 속에서 다양한 형식으로 연대하며 살아간다. 삶의 형식이 둘 이상이 아닌 혼자일 뿐이다. 와중에 혼삶의 객체적 문제가 드러난다. 1인 가구가 지닌 병리적 모습을 고스란히 떠안은 이, '사회적' 인간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 자신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느끼는 이, 최악의 경우 자신의 삶을 누군가가 빼앗아 갔다고 느끼는 이. 


세츠코의 경우, 가장 크게 다가오거니와 원초적인 사건이자 병리적 모습의 원인은 남자친구를 빼앗아간 언니 아야코와 미카의 존재다. 그녀는 그 때문에 자신의 삶을 빼앗겼다고 느끼고 지금의 삶이 의미 없다고 느끼며 자연스레 이 사회에 적응할 필요를 못 느낀다. 이는 비록 이유도 현상도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관계들의 집합체


영화 <오 루시!>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세츠코가 존을 사랑하게 된 또는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저 존의 다가옴이었다. 존이 다가와서 포옹을 했고 세츠코는 느껴보지 못한 특별한 편안함과 만족감을 느꼈다.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면 '사랑'이라 자신있게 말하리라. 그런데 세츠코라는 사람이 사람과의 소통이 불능한 상태이기에, 관계에 있어 최상에 위치한 '사랑'을 한순간에 느끼는 게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건 사랑이 아닌 병리적 모습의 또 다른 모습이다.


특히 이 영화에서 존은 세츠코의 남자친구를 빼앗아 결혼한 아야코의 딸과 함께 도망친 사람이 아닌가. 세츠코에게 한처럼 남아 있는 그 일에 대비해볼 때, 존에 대한 사랑의 모습은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인 갈망과 집착과는 완연히 다른 복수의 일면일 수 있다. 세츠코에게 남아 있는 사람과의 관계 형상이란 딱 거기까지인 것이다. 


경제위기 시대의 현대사회적 병리 현상으로 1인 가구가 된 게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1인 가구의 혼삶을 살게 된 것처럼 보이는 세츠코의 이야기는, 그 면면이 혼삶의 병리적 모습을 띄고 있기에 복합적으로 보여지고 다가온다. 뭔가 알 만한 그림이 그려질 듯한 퍼즐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외롭고 초조하고 기이하고 단순하고 아슬아슬한 관계들의 집합체일 뿐이다. 


반면 영화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단순명쾌하다. 뜬금없어 보이지만 충분한 효과를 보인다. 진심 어린 포옹. 내 몸의 절반과 상대방 몸의 절반을 오롯이 맞대는 행위. 거기엔 사람 대 사람으로 이어지는, 사람과 사람이 주고 받는 모든 것들이 있다. 그 자체로 이겨낼 수 없는 병리를 초월한 관계 형성이다. 분리되어버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자아도 그렇게 서로를 인정하고 또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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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가구, 개인, 관계, 병리, 사랑, 사회, 오 루시!, 포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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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아이에게 덧씌워진 비극과 불행, 영화 <홈>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8. 7. 5. 08:00



[리뷰] <홈>


영화 <홈> 포스터. ⓒ리틀빅픽처스



열네 살 준호는 축구를 좋아하는 평범한 중학생이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괴롭힘을 당하고 집에서는 그리 예쁨을 받진 못하는 것 같다. 준호에게는 어린 동생 성호가 있다. 귀엽고 똘망똘망한 동생을 돌볼 때면 이런저런 시름을 잃는다. 아빠는 없는 듯하고 엄마 선미는 있다. 보험일에 치여 집안을 잘 돌보지 못한다. 


그런 엄마마저도 준호와 성호의 눈앞에서 교통사고로 의식이 없다. 그녀와 함께 사고를 당한 이는 그녀가 바람핀 유부남 강원재의 부인이다. 원재는 보살펴줄 이 없는 성호를 딸 지영이 있는 자기 집으로 데려간다. 성호는 준호와 성호의 엄마와 강원재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이다. 준호의 아버지는 따로 있다.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준호다. 선미는 상태가 좋지 않고, 원재는 준호를 보살필 법적 의무는 없다. 심적 의무는 더욱 없어보인다. 하지만, 성호의 성화에 못이기는 척 당분간만 함께 살고자 한다. 점점 가족의 형태를 띄어가는 그들이지만, 선미만 세상을 떠나고 강원재의 부인은 살아날 기미를 보이며 더 이상 영위해나갈 수 없을 것 같다. 원재는 어떤 판단을 내릴까, 준호의 앞날은 어떨까. 


독립영화 제작사 아토ATO의 야심작


영화 <홈>의 한 장면. ⓒ리틀빅픽처스



영화 <홈>은 지난 2016년 <우리들>과 2017년 <용순>에 이은 관계&성장 3부작의 마지막이다. 한국 최고의 독립영화 제작사로 우뚝 서고 있는 '광화문시네마'와는 다른 시선의 독립영화를 내놓고 있는 '아토ATO'의 세 번째 야심작이기도 하다. 아토ATO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 동창끼리 합심해 만든 광화문시네마처럼,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기획 전공 출신 프로듀서들이 모여 만든 제작사라고 한다. 


김종우 감독은 이 영화 이전의 두 단편을 통해 끔찍한 상황에 처한 이들의 이야기를 내보였다. 소외된 이들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 한국 독립영화 계보에서 가장 특출난 이야기를 양산해내는 소재와 주제가 바로 소외이다. <홈> 또한 끔찍한 상황에 처한 소외된 이의 이야기일 것이다. 


주지했다시피 아토ATO가 내놓은 작품들은 모두 관계와 성장을 주요 테마로 내세웠다. <홈>도 그 범주 안에 있는데, <우리들>이 '권력'을 <용순>이 '심리'를 또 하나의 주요 테마에 상정한 것처럼 <홈>은 '가족'을 또 하나의 주요 테마에 상정했다. <우리들>이 대대적인 성공을, 그에 반해 <용순>에 실패에 가까운 퍼포먼스를 선보였는데, <홈>은 어떨까? 


아이들과 어른들


영화 <홈>의 한 장면. ⓒ리틀빅픽처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대표작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구절은 다음과 같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그래서 가족이나 가정을 콘텐츠화시켜 보여줄 때는 행복이 아닌 불행으로 점철된 이야기를 만드는가 보다. 


영화 <홈>은 열네 살 준호가 주인공으로 그의 순수한 두 동생들과 함께 천진난만한 세계를 구축하며 더할 나위 없는 행복한 가정을 영위하려 한다. 엄마 선미의 무관심에 가까운 행태에도 성호를 잘 보살펴온 준호다. 그런 그에게 우유부단하지만 착한 면이 있는 원재, 그리고 동생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충분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그렇게 만든 어른들의 세계는 그야말로 막장이다. 선미는 결혼해 준호를 낳았고 바람을 펴 원재와의 사이에서 성호를 낳았고 원재는 부인과의 사이에서 지영을 낳았다. 준호의 아빠는 떠났고 선미 혼자 준호와 성호를 키우는 와중 원재의 부인이 찾아와 함께 어디론가 가는 도중 동반 교통사고가 나 의식불명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원재와 준호와 성호와 지영은 한 가족을 이룰 수 있을까? 영화의 제목이 'house' 아닌 'home'이라는 점에 어떤 방점이 찍히는 것일까? 단순한 객체로서의 '집'이 아닌 가족이 사는 주체로서의 '집' 말이다. 막장과 천진난만함 사이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준호가 아닌, 이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이 둘 사이를 잇는 유일한 끈으로서의 준호가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런 가족도, 이런 집도 있는 법이다. 


관계와 가족


영화 <홈>의 한 장면. ⓒ리틀빅픽처스



어른들과 아이들, 가족과 가족, 학교와 집, 준호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맴돌 뿐이다. 열네 살이라는 어른도 아닌 아이도 아닌 나이, 죽어가는 엄마 선미 하나로 이어질 뿐인 가족의 끈, 자기를 괴롭히는 친구들이 있는 학교와 자기가 보살펴야 하는 동생들이 있는 집. 그 경계에서 준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별로 없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관계'란 준호라는 경계인이 겪는 사면초가 상황에서의 끔찍한 관계 형성인 것이고,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관계 외의 또 다른 메인 테마인 '가족'은 막장이라는 지반 위에 또는 막장 뒤에 숨겨진 천진난만함에 있다. 


찰리 채플린이 말했던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이 가족의, 이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은 분명 희극처럼 보일 수 있다. 보기만 해도 웃음꽃이 피어나는 모습이 희극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다. 희극의 장본인인 이 아이들이야말로 비극의 씨앗인 것이다.


비극의 씨앗이 두루두루 잉태한 불행한 가족, 하지만 이 가족은 겉으로는 또는 멀리서 보면 희극이자 행복이다. 희극이자 행복은 천진난만의 아이들의 것이어야 하고, 비극과 불행은 막장의 어른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 경계에 있는 준호라고 하지만, 최소한 그에게 어른들이 비극과 불행의 끄트머리에라도 경험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건 그가 조금이라도 감당해야 할 몫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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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관계, 불행, 비극, 성장, 아이, 아토ATO, 어른, 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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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다시 쓰여져야 한다, 소설 <고령화 가족>

지나간 책 다시읽기 2018. 6. 11. 08:00



[지나간 책 다시읽기] 천명관 소설가의 <고령화 가족>


소설 <고령화 가족> 표지 ⓒ문학동네



쫄딱 망한 영화감독에 아내와 이혼한 후 혼자 사는 마흔여덟의 중년 남자 '나'는 죽기보다 싫은 일을 감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칠순이 넘는 엄마 집에 얹혀살게 된 것. 칠순이 넘은 엄마는 별말 없이 나를 받아 주었고 이후에도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나를 챙겨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엄마는 그 연세에도 화장품을 팔러 밖으로 부지런히 돌아다닌다. 아버지는 교통사고를 당해 돌아가셨다.  


엄마 집에는 쉰두 살이 된 형 '오한모', 일명 '오함마'가 얹혀살고 있었다. 그는 백이십 킬로그램, 폭력과 강간, 사기와 절도로 얼룩진 전과 5범의 변태성욕자, 정신불구의 거대한 괴물... 한마디로 인간망종이다. 교도소를 오가고 사업을 말아먹은 후 엄마 집에 삼 년째 눌어붙어 있다. 얼마 안 가 셋째 미연이까지 딸 민경이를 데리고 엄마 집에 들어왔다. 개 같은 인간인 두 번째 남편이 툭하면 술을 처먹고 들어와 개 패듯 하여 집을 나와버렸다는 것이다. 


몇십 년만에 다시 모인 삼 남매는 평균 나이 사십구 세에 칠순 넘은 엄마 집에 얹혀살게 되었다. 굳이 속을 들여다볼 필요도 없이 이미 콩가루 집안임에 분명해 보이는 이 집안, 그 와중에도 나는 믿기 힘들고 믿기 싫은 집안의 과거사와 속사정을 하나하나 알게 된다. 이놈의 집구석... 안 그래도 밑바닥인 나를 어둠의 심연까지 밀어넣는구나... 우리 삼 남매와 엄마 그리고 민경이는 어떻게 될까? 어떻게 해야 할까?


이야기꾼 천명관


소설 <고령화 가족>(문학동네)은 이 시대 대표적 이야기꾼 천명관 작가가 지난 2010년에 두 번째로 내놓은 장편소설이다.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서른 줄에 이르러 영화판에 뛰어들었고 몇몇 시나리오는 영화화되었지만 마흔 줄까지 메가폰을 잡지 못해 문학판으로 와 지금에 이른 천명관 작가의 파란만장 인생이 담겨 있는 듯하다. 


사실 <고령화 가족> 이후에 내놓은 소설들, 특히 장편소설들 <나의 삼촌 브루스 리>(예담)나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예담)에도 그만의 향기가 진하게 풍긴다. 영화판과 문학판을 오가며 어느 한 곳에 온전히 발 붙이지 못하는 그의 애환 또는 속성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것이다. 공통적으로 밑바닥 인생을 그리고 있고 말이다. 


그는 그 스스로도 말하듯 문학에서 인정 받았지만 영화에 적을 두고 싶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그의 소설들에서는 문학 아닌 영화쪽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그것도 아주 노골적인 대중영화. 그의 소설은 너무너무 재밌고 너무너무 잘 읽힌다. 더불어 진한 페이소스를 느낄 수 있다. 


이 소설은 소소할 수 있는 누구나의 가족 이야기이지만, 웃지 않고 못 배길 요소들이 곳곳에 깔려 있지만, 개인의 인생이나 사회를 관통하는 감당못할 메시지가 담겨져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서 선뜻 '아끼는' 소설이라고 말하기 힘들 수 있지만, 다름 아닌 천명관의 소설이기에 '아껴 읽는' 소설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 


막장 가족


소설은 '막장' 가족의 의미와 '밑바닥' 인생들을 말하고 있을 테다. '가족'과 '인생'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을 이루는 가장 큰 개념들이다. 그래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공을 들인다. 하지만 제대로 꾸려 나가기가 가장 힘들기도 하다. 가족과 인생은 필연적으로 이 '세상'과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이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막장이 되어버린, 아니 이미 되어버렸던 이 가족은 다시 모이받니 콩가루가 되어버린다. 도무지 답이 없는 구제불능의 이 가족이지만, 주요 구성원 삼 남매는 쉽게 저버리지 못한다. 그래도 이 세상에 나를 받아줄 곳은 여기 뿐이라서. 그리고 쉽게 저버리지 않는다. 그래도 이 세상에서 이들을 받아줄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 


가족의 의미가 더 이상 혈연에 의한 천륜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기대는 데 있지 않다. 가족에 있어 '관계'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에서 보이는 막장 콩가루 가족의 모습은 혈연에 의한 천륜이 아닌 관계로 비춰지기에 충분하다. 거기엔 서로에 대한 의무와 책임보다 차라리 서로에 대한 노력과 학습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물론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상황 연출이 선행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작가가 메시지를 그런 식으로 전달한 것일 테다. 


밑바닥 인생


일본의 나오키상 수상자 나카지마 교코의 장편소설 <어쩌다 대가족, 오늘만은 무사히!>(예담)를 보면 사회에서 낙오된 밑바닥 인생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 대가족을 이뤄 살게 되는데, <고령화 가족> 또한 얼핏 비슷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의 가족은, 가족의 구성원들은 마냥 받아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나갈 때 나간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세상에 둘도 없는 따뜻한 보금자리도 아니거니와, 한 번 발 디디면 절대 나갈 수 없는 감옥 같은 곳도 아니다. 어찌 보면 굉장히 이성적이다 못해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들의 집합소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가족은 다시 쓰여져야 한다.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이 소설은 그런 메시지를 한 축에 놓고 천명관 작가만의 세계관을 구축하는 주요한 키워드인 '밑바닥 인생'을 한 축에 놓아 나아간다. 이 '비정상적인' 이들이 아니었다면 사실은 비정상적일 수 있는 작금의 '정상적인' 가족의 행태에 따끔한 일침을 놓지 못했을 것이 자명하다. 참으로 건들기 힘든 부분을 이토록 예리하면서도 수려하게 돌리도 돌려서 말할 수 있는 작가의 능력에 정녕 감탄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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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고령화 가족, 관계, 밑바닥 인생, 비정상, 천명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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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순간들을 위한 관계, 상실, 성장의 하모니 <빛나는>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7. 12. 20. 08:00



[리뷰] 가와세 나오미의 <빛나는>


일본이 자랑스럽게 내놓는 거장 '가와세 나오미'의 최신작 <빛나는>. ⓒ그린나래미디어(주)



장편 연출 데뷔 20주년, 세계 유수의 영화제들이 열광하는 일본 최고의 감독 중 하나 '가와세 나오미'는 그 명성에 비해 우리나라에선 비교적 최근에 대중적으로 유명해졌다. 그녀는 장편 데뷔와 동시에 칸영화제와 로테르담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세계에 이름을 알렸는데, 이후로도 그녀만의 확고한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다. 


<너를 보내는 숲>은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고,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도 개봉해 많은 인기를 얻어 비로소 가와세 나오미라는 이름을 알린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와 <앙: 단팥 인생 이야기> 또한 칸영화제는 물론 수많은 유수 영화제에 초청되는 영광을 누렸다. 얼마전 개봉한 <빛나는> 또한 마찬가지다. 


가와세 나오미의 영화들은 하나같이 지극한 해석이 필요하다. 그 행간과 자간을 읽어낼 수 없거나 읽어내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그 자체로 결코 스무스하고 재미있게 또 거리낌 없이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호불호가 갈린다는 말이다. <앙>과 <빛나는>에 와서는 그런 상대적으로 소소한 단점들도 해소한 느낌이다. 완벽에 가까워졌달까.


앞을 볼 수 없는 이들을 위한 영화 음성 해설


시각장애인을 위한 영화 음성 해설을 쓰는 작가와 시각장애인의 만남이라는 흥미로운 소재가 눈에 띈다. 감독은 무엇을 끄집어낼 것인가. ⓒ그린나래미디어(주)



미사코(미사키 아야메 분)는 앞을 볼 수 없는 이들을 위한 영화 음성 해설을 만드는 작가이다. 주기적으로 시각장애인 모니터링단과 함께 해설 감수 모임을 하는데, 초보 작가에 불과한 미사코에게 날카로운 지적들이 향한다. 특히 과거 유명 사진작가였다가 이젠 거의 시력을 잃은 나카모리(나가세 마사토시 분)가 예리하다. 


나카모리의 지적에 동조하지 못하는 미사코는 반발하지만, 다른 이들은 나카모리의 의견에 동조하고 미사코는 여지없이 수용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다. 그녀는 새삼 앞을 볼 수 없는 이들을 위한 해설의 어려움을 느끼며, 그들의 상상력이 최대한 발현되면서도 자신의 주관이 그 상상력을 방해하지 않도록 균형의 어려운 길을 간다. 


그녀는 도움을 받기 위해 이해하기 위해 나카모리의 집을 찾아간다. 우연히 마주치기도 한다. 그러며 차츰 알게 된다. 그가 말한 것들이 어떤 의미인지를, 그가 처한 상황이 어떠한지를. 그녀로선 상상하기 힘든 실체를 눈앞에서 목격하고 이해하고 부정하고 반발하고 상처받고 다시 이해하고 깨닫는 과정을 겪는다. 


영화는 아픈 이들의 연대를 말하고자 한다. '관계'다. 잃어버리는 순간의 허망함과 두려움과 슬픔과 분노를 말하고자 한다. '상실'이다. 지적당해 수긍하고 부정당해 반발하고 큰 실수로 쫓겨나고 절치부심해 일어나고 결국 궁극적인 이해로의 길을 말하고자 한다. '성장'이다. 


관계, 상실, 성장의 하모니


영화는 관계와 상실과 성장이라는 추상적 개념들을 잘 풀어낸다. ⓒ그린나래미디어(주)



나카모리는 영화 초반 아주 약소하지만 시력이 남아 있다. 미사코에게 더 예리하고 날카로운 지적을 해줄 수 있다. 그러나 급속도로 나빠져 시력을 잃을 지경이 된다. 그는 미사코가 자신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미사코에게도 비슷한 아픔이 있다. 아빠는 없고 엄마는 없는 아빠가 돌아올 거라 믿는다. 그녀는 아빠를 그리워하며 엄마를 보살피는 게 쉽지 않다. 나카모리와 미사코는 연대의 끈이 존재한다.


말도 안 되는 비교일지 모르나, 원래부터 시력이 없던 이와 시력을 잃어가는 이의 상실감은 차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정도일 것이다. 눈이 심장만큼의 중요성을 띠는 사진작가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그 두려운 상실감은 상상불가다. 미사코는 어떤가. 그녀는 자신의 사상 중심, 희망에의 찬가를 부정당한다. 그 부정에의 상실감 또한 평생 짊어져야 할 트라우마로서 당사자만 알 수 있는 상상불가의 영역이다.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 안에서 밖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성장의 길은 아니다. 내가 다른 이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 밖에서 안으로 천착해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 또한 성장의 길이라 할 수 있다. 미사코는 수없이 부정당하면서도 밖으로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안으로 들어갔다. 반면 시력을 잃어가는 나카모리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안전한 성장의 길이라 할 수 있지만, 밖으로 나가 미사코에게로 나아가려 한다. 


빛나는 순간들


영화를 보면, 우리에게도 참으로 빛나는 순간들이 있었지 싶은 생각이 들게 한다. ⓒ그린나래미디어(주)



관계, 상실, 성장 등의 추상적 소재들은 <빛나는>에서 그야말로 메시지와 캐릭터를 빛나게 해준다. 심오하면서도 보편적인 삶의 면면을 우리에게 내보이게 해준다. 다만, 이해하기 힘든 스토리상 맥락의 불친절함이 곳곳에 눈에 띈다. 끊임없이 유추하고 해석하고 생각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힘들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마냥 아름답다. 옛날 어느 때, 어느 순간을 그리게 되고 현재의 이 순간을 붙잡고 싶어지며 미래의 그때 그 순간을 기다리게 한다. 빛은 우리가 살아 있을 동안 영원히 존재할 것이지만, 그래서 우린 그 존재의 고마움을 모른다. 더이상 앞을 볼 수 없게된 이들에게 빛은 가장 그리운 존재일 것이다. 


빛이 우리는 비출 때의 그 순간을, 그 순간을 아름답게 잡아내는 건 너무나도 힘든 일이다. 그만큼 그건 숭고한 일이고 반드시 해내고 싶은 일이다. 영화는 그 무엇보다 빛을 잡아 기록해두고 싶은 열망의 집합체이다. 영화에서 몇 번이고 언급되는 대사 "눈앞에서 사라져버리는 것만큼 아름다운 건 없어"는 여러 가지 면에서 중의적이지만, 가장 해당되는 건 다름아닌 '빛'일 것이다. 


가만히, 현실의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고, 떠올려보자. 머릿속에 남아 있는 순간들을, 그 잔영들을. 흐릿하기도, 또렷하기도, 잔잔하기도, 화려하기도, 아름답기도, 슬프기도... 그 빛나는 순간들을 떠올리자. 그리고 반드시 다시 지금으로 돌아오자. 거기에도 역시 빛나는 순간들이 있을 거다. 나란 존재는 그렇게 나아간다. 우리 모두 그렇게 나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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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사라질 거지만 기억하고 싶다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7. 11. 15. 08:00



[리뷰]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단조로운 내레이션에 숨은 어려운 삶에의 철학이 돋보이는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싸이더스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아버지조차 말도 못 할 아기 시절에 돌아가신 할머니를 내가 기억할리는 없다. 그런 할머니가 나는 익숙하고 그런 할머니의 형상이 그려지는 건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었을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아버지한테 전해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그렇게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


하지만, 그 기억들이 모두 정확할리 만무하다. 머릿속 어딘가엔 정확한 기억이 있지만 능력 상 꺼내지 못하는 것이든, 애초에 걸러서 기억하거나 어느 한 순간 또는 마지막 순간만 기억하는 것이든, 원본의 기억이 아닌 편집본의 기억이라는 것이다. 마치 역사와 같지 않은가. 사실도출에의 노력을 추구하지만, 영원히 그렇게는 불가능하다.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은 기억의 취사선택과 기억의 이어짐이라는 다분히 추상적인 주제를 가장 앞에 둔다. 여기에 역시 추상적이기 짝이 없는 관계라든지, 가족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하는 주제를 따르게 한다. 하지만,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의 순간을 눈앞에 실증적으로 불러내는 인간 형상 홀로그램이, 이 잔잔한 이야기에 심심한 파동을 일으켜 많은 주제들의 추상이 형상화된다.


인간 홀로그램


인간 형상의 홀로그램에 기억을 심어 마치 그때 그 사람과 얘기하는 듯한 느낌. 이 영화의 주요 볼거리다. ⓒ싸이더스



여든다섯의 할머니 마조리(로이스 스미스 분) 곁에는, 원하면 언제든지 불러낼 수 있는 홀로그램이 있다. '그'는 15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 월터(존 햄 분)의 젊은 시절 모습을 하고 있다. 기억을 심어주면 영원히 그 기억을 그대로 간직할 그는, 기억을 되살리거나 기억을 공유하며 마음을 달래주는 친구 또는 대체자로서 완벽한 존재다. 


그런 그를 마조리의 딸 테스(지나 데이비스 분)는 싫어한다. 자신보다 그를 더 찾고 그에게 더 의지하는 엄마가 싫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간 아닌 존재가 인간을 아주 잘 대체하고 있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반면, 테스의 남편 존(팀 로빈스 분)은 적극 찬성하는 쪽이다. 다른 모든 걸 제쳐두고 마조리의 상태를 호전시키는 데 아주 좋은 친구가 아닌가. 그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렇게 잃어버린 형상들과 기억들 때문에 괴로웠던 마조리의 마지막 나날들은 다분히 월터의 홀로그램 덕분에 치유받는다. 월터의 형상이 눈앞에 있고 월터와 함께 했던 화려한 젊은날의 기억 또한 되살릴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월터에게 날조된 기억, 사실이지만 기분 좋은 기억과 사실이 아닌 기분 좋은 기억을 심어준 덕분이다. 기억하기 싫은, 기억에서 지워버린 기억은 아예 심어주지 않았다. 예를 들어, 마조리가 세계 8위의 테니스 선수 대신 월터를 선택했다고 거짓말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들 데미안에 대한 기억은 아예 전해주지 않으려 한다. 


이 영화의 핵심, 기억


인간 형상 홀로그램이 이 영화의 주요 볼거리라면, 기억과 관계는 이 영화의 핵심 주제이다. ⓒ싸이더스



영화는 연극을 원작으로 한 만큼 굉장히 정적이다. 90% 이상의 장면이 그들이 기거하는 집안이며, 역시 90% 이상의 장면이 그들 중 2인 또는 3인의 대화이다. 그들의 대화가 즉 영화이기에, 대화를 깊숙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서 우린 '기억' '관계' 등의 핵심 주제를 찾아 엿볼 수 있다. 


존은 기억이란 뇌 안의 퇴적층과 같아서 기억하지 못할 뿐 거기에 있다고 말한다. 어떤 식으로든 꺼내어 되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홀로그램 월터의 존재를 옹호하며, 그로 하여금 마조리의 기억을 되살리게 하거나 마조리의 기억 한 부분을 차지하게 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치겠다. 


반면 테스는 기억이란 우물이나 서랍장 같은 게 아니라고 말한다. 무언가를 기억할 때는 기억 그 자체가 아니라 기억한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복사본의 복사본처럼 계속 희미해질 뿐 절대 생생해지거나 선명해지지 않는다. 이는 홀로그램 월터의 존재가 마조리 기억을 되살리거나 생생하게 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그녀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아마도, 테스의 주장 또는 이론이 맞을 것이다. 기억은 점점 쇠퇴해 언젠가는 소실할 거라는 건 누구나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모두들 몸소 실천하고 있다. 하지만, 심정적으로 존의 말을 믿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서랍장에 기억을 보관하고 언제든 꺼내 눈앞에 놓고 싶단 말이다. 인류가 낳은 최고 천재 아인슈타인도 그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관계, 그리고 기억


모든 건 기억에서 비롯된다. ⓒ싸이더스



관계는 기억과 함께 한다. 기억들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기억이 사라지면 관계 또한 사라진다. 마조리로부터 받은 한없이 작은 사랑, 마조리로부터 받은 적이 없다시피한 사랑의 기억으로 괴로워하는 테스이지만 마조리는 모른다.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일방적인 기억이 아닌 서로 간의 기억이야말로 사실상 그(그녀)와 나의 전부다. 


시간을 어김없이 흐르고, 기억은 쇠퇴하여 사라지고, 생명은 죽어 자연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누군가에 대한 기억은 계속 남아 있다. 영화에서 홀로그램이 상징하는 건 바로 그 누군가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이다. 이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영화가 좀 더 힘을 실어주는 주장이, 앞서 테스가 아닌 존의 말에 있다는 걸 증명한다. 


누군가에 대한 기억은 그동안 글, 그림, 사진, 영상 등으로 전해져왔다. 이젠 홀로그램이 가능해진 시대, 그 누군가를 눈앞에 데려와 함께 기억을 직접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미래형 SF적 요소가 있지만 SF영화라 칭할 수 없다. 인류는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기억, 기록을 남기는 데 전력을 다한다. 


비단 월터 홀로그램만 존재하진 않을 것이다. 마조리, 존, 테스의 홀로그램이 다른 산 사람을 위해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 와중에 '나에겐 많은 시간이 있으니까'라고 말하는 월터 홀로그램과 '얼마나 좋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다니'라고 말하는 마조리 인간, 그리고 마조리 홀로그램의 한 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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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무시하는 아이들의 '관계'와 '권력'의 세상 <우리들>

오래된 리뷰 2017. 9. 8. 08:00



[오래된 리뷰] 윤가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 <우리들>


여러 수작 단편을 쏟아내고는 멋진 장편 데뷔작 <우리들>을 들고온 윤가은 감독이다. ⓒ엣나인필름



두 명이서 가위바위보를 해 함께 하고 싶은 한 명씩을 데려와 편을 가르는 방법을 택한 어느 체육 시간 피구 게임, 선이는 어느 쪽에서도 선택받지 못한 최후의 일인이 되었다. 왕따는 아닌 듯하지만 눈에 띄지 않는 외톨이인 듯하다. 키도 크고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리더십도 있는 보라는 그런 선이를 이용해 먹기도 한다. 


보라의 부탁으로 방학식 날에 홀로 남아 반 전체를 청소하는 선이, 전학을 왔다는 지아를 우연히 마주친다. 보라의 치졸한 속임수 때문에 다리 위에서 실의에 빠져 있는 선이, 다리를 지나던 지아와 우연히 마주친다. 둘은 금새 친해지고 선이는 보라를 주려던 수제팔찌를 지아에게 준다. 둘은 생애 다시 없을 것만 같은 방학 한때를 보낸다. 


지아의 부모님은 지아가 초등학교 1학년일 때 이혼을 하셨다. 그 때문인지 선이가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리며 살가운 시간을 갖는 모습을 본 후 왠지 모를 적대감이 생기는 지아다. 그래도 그건 금새 풀었다. 하지만 지아가 영어학원을 다니고, 그곳에 다른 누구도 아닌 보라가 있었고, 개학을 하며 지아가 정식으로 전학을 오게 되며, 선이와 지아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진다. 지아는 선이를 본 척도 않고 보라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다. 이후 선이와 지아와 보라의 물고 물리는 관계가 계속되는데...


어른들이 무시했던, 아이들의 무시무시한 세상


누구나 지나왔을 어린 시절, 여러모로 '무시무시'했던 그때를 어린이 되고서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엣나인필름



2016년 최고의 수작 중 하나라 할 만한 영화 <우리들>. <손님> <콩나물> 등으로 단편영화계에 신기원을 이룩한 윤가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독립예술영화계에선 거물로 통할 만한 '엣나인필름'이 배급을 맡아 온전한 '독립영화'라고 할 순 없을 것 같지만, 대신 '예술영화'로 포지션하여 다양성영화의 훌륭한 계류라고 보면 될 것이다. 


윤 감독은 앞선 두 대표 단편에서 어른이 되기 전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뤘는데, <우리들>로 그 재능과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무시하곤 한다. 한없이 동물에 가까운 본성을 지닌, 아직 이성적 존재 인간이 덜 된, 생각 따윈 없고 본능을 따를 뿐인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찌들대로 찌들고 죄질대로 진 어른 세상의 해법이 무지의 순수한 아이들에게 있다고까지 한다. 


하지만 우린 이 영화에서 아이들의 치명적 관계 유착과 되물림, 권력에의 의지와 빌붙음을 목격할 수 있다. 그야말로 어른들의 세상, 그중에서도 지독하기 그지 없는 막장 인간들의 관계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을 말이다. 차라리 어른들의 세상이 더 유치한 것 같은 이유는, 그만큼 아이들의 세상을 무시했다는 방증이겠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미소를 불러온다. 특히 영화에서 선이에게 특별한 깨달음을 안기는 선이의 남동생, 어리디어린 윤이는 너무나도 귀여워 '보는 맛'이 날 정도이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어른들이 아이들을 무시한 것처럼 선이는 자신보다 어린 윤이를 무시했다. 영화는 올려다보는 깨달음이 아닌 내려다보는 깨달음이라는 신선한 깨달음을 선사한다. 


예리하고 섬세하고 긴장감 있게 파고드는 '관계'


영화 <우리들>의 첫 번째 주요 키워드는 '관계'다. ⓒ엣나인필름



'관계'라는 미묘하기 짝이 없는 건 아이들이고 어른이고 평생을 가도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한다. 어떤 관계가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 올바른 것인지, 바르지 못한 것인지, 괜찮은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은 오랫동안 다양한 방법으로 그나마 괜찮은 관계가 무엇인지 모색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콘텐츠는 관계의, 관계에 의한, 관계를 위한 것이다. <우리들> 또한, 아니 <우리들>야말로 '관계'를 예리하고 섬세하고 긴장감 있게 파고드는데, 지극히 아이들의 시선과 생각과 행동으로 볼 수 있다는 메리트가 크게 다가온다. 빈 곳 없이 잘 표현해낸 주인공 아이들의 노력 덕분이겠다. 


2011년 최고작 <파수꾼>이 떠오르는 건 다름 아닌 관계에 대한 천착 때문이다. 다만 <파수꾼>이 '관계'가 주인공에 다름 아니었다면, <우리들>은 관계에 있는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필히 비극이 찾아올 수밖에 없는 <파수꾼>, 반면 희극에의 희망이 있는 <우리들>. 개인적으로 손이 가는 영화는 앞엣것이다. 


생애 다시 없을 한때를 보낸 이들에게 파국이 찾아오는 건 한순간이고 그 이유도 하찮기 그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한 번 틀어진 관계를 다시 잇는 건 너무나도 어렵다. 그런데, 그러면 누구랑 노나? 친구가 가장 소중할 때에 말이다. 매일 가장 친한 친구랑 티격태격하며 자주 맞고 다니지만, 그 친구가 아니면 누구랑 노냐는 윤이의 말이 가슴 깊숙히 와 닿는다. 


문제면 문제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누군가는 먼저 다가가야 한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는가. 관계가 틀어짐에 있어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동등하게 피해를 입혔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반드시라고 할 만큼 한 명이 자신을 굽히고 다가가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지는 게 이기는 거다' 따위의 깨달음을 알 것 같진 않고, 아이들이 그런 깨달음을 알아야 할 이유도 없다. 


또 하나의 키워드 '권력'


영화 <우리들>의 두 번째 주요 키워드는 '권력'이다. ⓒ엣나인필름



'관계'와 함께 <우리들>의 중요한 키워드는 '권력'이겠다. 관계가 선이와 지아를 천착하는 거라면, 권력은 보라를 중심으로 역시 선이와 지아를 천착하는 것이겠다. 앞서 주지했듯 보라는 한 마디로 모든 걸 가진 아이다. 그리고 모든 걸 가져야만 하는 아이다. 그녀에게 존재감 없는 외톨이 선이는 '아웃 오브 안중'이다. 그럼에도 선이는 보라와 보라가 이끄는 소그룹을 선망한다. 


와중에 방학 중 선이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개학해 정식으로 전학을 오게 된 지아, 선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많은 걸 숨기고 거짓말로 점철한 채 영어학원을 다니며 친해진 보라와 함께 한다. 아니, 보라가 지아를 자신의 그룹에 끼워준 것이겠다. 지아가 숨기고 거짓말을 한 것 중에는, 전 학교에서 왕따였다는 것과 엄마가 영국에 계신다는 것과 영국에 가봤다는 것 등이었다. 


선이는 그 모든 걸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폭로한다. 첩첩산중으로, 보라는 이미 자신의 영원한 공부 1등 자리를 뺏어간 지아와 격렬히 대치 중이었다. 자연스레 보라와 선이가 한패가 되고 지아가 외톨이가 되는 형국으로 권력이동이 실시된다. 관계 못지 않게 권력의 속성이란 게 참으로 하찮고 한순간이다. 그런 중에 인간이 인간다움을 지킬 요량이 많지 않다. 선이, 지아, 보라 중 누가 가능할까. 


영화에서 선이가 자신과 지아에게 물들여준 봉숭아물, 보라의 매니큐어를 따라한 지아의 매니큐어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관계와 권력의 모든 것을 설명한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건 선이와 지아가 함께 한 봉숭아물일까, 보라와 보라를 따라한 지아의 매니큐어일까. 나는 '당연히' 권력과 관계를 응원한다. 선이와 지아가 함께 한 봉숭아물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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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책하다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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