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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https://linktr.ee/singenv

'죽음'에 해당되는 글 43건

제목 날짜
  • '삶'이라는 거대한 벽, 풀리지 않는 문제에서 깨내 볼 영화 <소울> 2021.01.22
  • 이집트 고왕국 사제, 그 화려한 무덤과 평범한 삶의 비밀 <사카라 무덤의 비밀> 2020.11.11
  • 어린 딸을 냉동 보존하기로 한 어느 과학자 가족의 사연 <희망을 얼리다> 2020.10.21
  • 대만 계엄령 시대의 지옥 같은 학교를 공포로 빗대다 <반교: 디텐션> 2020.08.27
  • 우리를 보다 인간답게 하는 반려동물의 죽음에 관하여 <우리 개가 무지개다리를 건넌다면> 2020.07.22
  • 따로 또 같이 삶을 헤쳐나가는 가족, 공동체의 연대 목소리 <조금씩, 천천히 안녕> 2020.06.23
  • 자살로 생을 마친 가족의 추모와 치유를 위한 여정 <이블린> 2019.09.17
  • 벨기에의 아름다운 도시 브뤼주의 킬러들 <킬러들의 도시> 2019.09.14
  • 기적같은 탈출이 곧 죽음보다 힘든 삶에의 투쟁 <12번째 솔저> 2019.05.01
  • 죽음, 고독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절규'의 화가 <뭉크> 2019.04.29

'삶'이라는 거대한 벽, 풀리지 않는 문제에서 깨내 볼 영화 <소울>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21. 1. 22.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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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소울>


애니메이션 영화 <소울> 포스터.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2010년대 들어서 예전만 못하다는 말을 듣고 있는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그도 그럴 것이 <카 2> <카 3> <몬스터 대학교> <굿 다이노> 등이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좋지 못한 평가를 받은 것이다. 그동안 픽사가 쌓아올린 업적을 향한 기대치에 못 미치는 결과물을 내놓았기 때문일 텐데, 픽사라는 회사의 흔들리는 내부 사정도 무시하진 못할 테다. 픽사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디즈니의 위기 탈출에 절대적인 공을 세웠던 존 라세터가 성 추문으로 쫓겨났거니와, 그에 앞서 임금 스캔들에 연류되어 홍역을 치른 픽사였다. 


2015년 <인사이드 아웃>과 2017년 <코코>가 '역대 최고'라는 수식어를 얻으며 픽사에게 다시 명성을 안겼고, 2018년 <인크레더블 2>와 2019년 <토이스토리 4>가 나란히 속편으로 월드와이드 10억 달러를 넘기는 수익을 안겼다. 그리고 2020년 코로나 시대의 한 가운데에서 어김없이 우리를 다시 찾아온 픽사는 <소울>을 선사했다. 디즈니는 북미에서 디즈니+로 공개할 수밖에 없었고, 아직 디즈니+가 들어오지 않은 국내에서는 극장 개봉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존 라세터가 연출한 <토이스토리>의 원안을 만들었고, 픽사의 황금라인이라고 해도 무방한 <몬스터 주식회사> <업> <인사이드 아웃>을 연출한 피트 닥터 감독의 최신작인 만큼 100%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상상력'을 전할까? 그 상상력엔 어떤 현실이 있을까? 픽사로 한정해, 최초로 사람을 주인공으로 했던 작품이 <인크레더블>(2004)이었고 최초로 여성을 주인공으로 했던 작품이 <메리다와 마법의 숲>(2012)이었다면 <소울>(2020)은 최초로 흑인을 주인공을 한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 8년의 차가 있는 바, 2028년에는 어떤 '픽사 최초'가 선보일지 궁금하다.


살고 싶은 영혼 조, 살기 싫은 영혼 22호


뉴욕시의 한 중학교에서 시간제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재즈 음악가 조 가드너, 그에게 좋지만 좋지만은 않은 소식이 날아든다. 학교에서 그를 정식 교사로 채용하겠다는 것, 하지만 그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지 교사로 평생 일하긴 싫다. 물론 그의 가족은 축하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와중, 유명 재즈 음악가인 도로시 윌리엄스의 밴드에서 연락이 온다. 그가 가르쳤던 아이가 커서 드러머로 있는 밴드였는데, 중학교 교사라는 타이틀에 처음엔 실망했던 도로시가 그의 피아노 실력을 보고는 바로 함께하자고 한다. 


꿈에나 그렸던 제안을 받으니 날아갈 것 같은 기분, 기분에 정신이 팔려 위험천만한 뉴욕 한복판을 아무 생각 없이 거닐다가, 맨홀에 빠져 버린다. 알 수 없는 몸의 형태로 알 수 없는 공간에서 깨어난 조, 이내 그는 자신이 '머나먼 저세상'으로 가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 한순간 죽음으로 가는 걸 받아들일 수 없는 조는, 도망치다가 '태어나기 전 세상'으로 가게 된다. 몇 번이고 지구로 가고자 해 보지만 실패하고, '유 세미나'라는 곳으로 향한다. 새로운 영혼들이 지구에서 태어날 요건을 충족하도록 교육시키는 곳이었다. 


얼떨결에 노벨상을 수상한 심리학자의 영혼의 이름표를 갖게 된 조는, 새로운 영혼의 멘토가 되어 그로 하여금 지구로 갈 마지막 하나의 열정 '불꽃'을 채우게 한 다음 '지구 통행증'을 가로 채 지구로 가려는 수작을 꾸민다. 그런데 하필 그가 멘토로 함께 하게 된 이는, 22호로서 지난 수천 년간 지구로 가길 거부한 영혼이었다. 함께 이런저런 구역에서 이런저런 일을 겪은 둘은, 지구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구역에서 역시 지구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이들을 만나 우연히 코마 상태에 있던 조와 누군가의 고양이로 빙의된다. 문제는, 조의 영혼이 고양이로 빙의되고 22호가 조로 빙의된 것이었다. 과연, 조는 도로시의 밴드에서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을까? 22호는?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 거지?


<소울>은 비주얼, 메시지, 음악에 상상력, 유머, 열린 태도 등 그야말로 영상 매체 중 애니메이션이 도달할 수 있는 최대치에 도달한 면모를 과시한다. 러닝타임은 평균치인 2시간에 턱 없이 부족한 1시간 40분밖에 되지 않지만,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건 많다 못해 넘칠 정도이다. 그러다 보니, '성인'을 위한 애니메이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수준이 되었고 '아이'들이 보기엔 상당히 어렵지 않나 싶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메시지'일 텐데, 이 영화가 보여 주는 여러 가지 사항 중에 하필 메시지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니 더욱 어렵게 비춘다. 


재즈를 삶의 이유라며 남을 설득할 수 있는 자기확신과 실력을 가진 조 가드너는, 하필 '꿈'을 이룬 순간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다. 모두가 삶의 안정 대신 꿈이라는 삶의 이유를 찾아 나서라고 하는데, 조는 이 얼마나 안성맞춤인가. 그를 응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앞에 살고 싶은 이유를 모르는 영혼이 나타났고 함께 우여곡절을 겪으며 '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삶의 이유가 될 수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조로서는, 얼토당토 말도 되지 않는 삶의 이유인 것이다. 우리는 그런 그들을 보며, '아직 세상을 잘 모르네, 제대로 된 꿈을 꿔 봐'라고 할 것이다. 


이 영화는 통념과 시대정신을 바꿀 만한 인사이트로 지금 세대와 다가올 세대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어떻게 살아야 맞는 거지'라는 생각은 더 이상 통념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 거지'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해진 정답은 없으며, 각자의 자신이 찾은 해답으로 살아가면 될 테다. 조 가드너로선 오직 재즈에만 몰두, 몰입, 과몰입하는 것만이 삶의 이유일 필요는 없고, 22호 영혼으로선 일상의 아무것도 아닐 순간순간이 아름답게 보이며 삶의 이유가 될 수 있다. 


다만, 영화는 일련의 유려한 서사로 자연스럽고 이해하기 편하게 삶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보여 주고 있지는 못하다. 영화를 크게 나눈다고 했을 때, 챕터가 바뀌는 부분이 그리 매끄럽진 않다. 우연에 기댄 게 자주 보인다. 대신 태어나기 전의 세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같은 저세상 상상력과 뉴욕의 길거리를 함께 관통하고 있는 것 같은 현실 상상력이 아우러져, 애니메이션이어야만 할 수 있는 포스를 뿜어 낸다. 상당히 어렵지만 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부여 한 것이리라.


누군가에겐 '인생 영화'


제목 '소울'엔 두 가지 중의적 의미가 있을 테다. 영혼을 뜻하는 '소울'과 재즈 음악가를 포함한 음악가가 지녀야 할 정신과 애정과 신념을 일컬는 '소울'이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두 배경, 조 가드너와 22호가 영혼으로서 존재하는 '태어나기 전 세상'과 조 가드너와 22호의 영혼이 각각 고양이와 조 가드너로 빙의한 '뉴욕시'의 현실에 맞닿아 있다. 그렇지만,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에서의 '소울'은 또 다른 무엇에 다다른다. 주지한, 영혼으로서의 소울이 지향하는 게 음악가의 정신, 애정, 신념으로서의 소울에 있다면 영화는 나아가 '지금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나로서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토대를 먼저 세우고 난 뒤 소울로서의 소울로 향하면 좋지 않을까 하고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다. 


하여,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삶에 직접적으로 실천하기란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말이다. 그동안 교육받고 경험하고 실천하며 헤쳐 왔던 삶의 이중, 삼중의 역설을 뒤로하고 한 발 더 나아가야 하니 말이다. 그래서 '열린 태도'야말로 이 영화를 볼 때 핵심 중 핵심 키워드라 할 만하다. 아무 생각 말고 영화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며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반드시 다시 한 번 보며 정립된 생각으로 대응해 보면 좋을 테다. 살아오면서 느꼈던 '뭔가 하나 빠진 느낌'을 채울 절호의 기회일지 모른다. 


'소울'이라는 단어의 한자어 '疏鬱'이 가진 의미를 생각해 본다. '소통할 소' '답답할 울'의 두 글자로, '답답한 마음을 풀어헤친다'는 의미를 갖는다. <소울>을 다 보고 나면, 누군가는 반드시 답답한 마음이 풀어지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나는 어떻게?' '나는 왜?'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는 둥실둥실 떠다니는 물음들을 어느 정도 해소하게 해 주는 힘이 있는 애니메이션이었다. 해소해 주진 못해도, 공감과 위로를 건네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너만 그런 고민을 하는 게 아냐, 우리 모두 같은 고민으로 힘들어 하지. 내 생각을 한 번 들어 볼래?' 하는 것 같다. 누군가에겐 '인생 영화'로 등극할 만하다. 삶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면 언제든 꺼내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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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뉴욕, 삶, 상상력, 소울, 영혼, 인생영화, 재즈, 죽음, 피트 닥터, 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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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고왕국 사제, 그 화려한 무덤과 평범한 삶의 비밀 <사카라 무덤의 비밀>

넷플릭스 오리지널 2020. 11. 1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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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사카라 무덤의 비밀>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사카라 무덤의 비밀> 포스터. ⓒ넷플릭스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남서쪽에 위치한 '사카라 네크로폴리스(고대 묘지)', 기자와 다슈르 등과 함께 이집트 고왕국의 피라미드 소재지로 유명하다. 이들이 모두 포함된 고왕국 시대 수도 '멤피스'의 피라미드 지역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잘 알려져 있는데, 단연코 지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명이기도 하다. 배워서 익히 알고 있는 4대 문명(황하,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중 하나다. 


사카라에는 수많은 유물이 있지만, 지상에서 가장 규묘가 큰 최초의 석조 피라미드가 가장 유명하다. 자그마치 4600여 년 전 이집트 고왕국 제3왕조 조세르왕의 묘지 말이다. 이 피라미드는, 이후 기자 지역에 건립되었던 피라미드들의 원형이기도 하다. 그곳엔 발견되지 않은 유물들이 여전히 많다고 알려져, 현재도 조사·발굴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지난 2018년 말경 근래 수십 년 동안의 발견을 압도할 만한 발견이 이루어져 전 세계를 놀라게 했는데, 이집트 고왕국 제5왕조 왕실 사제였던 '와흐티에'의 묘로 추정되는 피라미드 무덤이었다. 4400년 동안 발굴·도굴의 흔적 없이 아주 잘 보관되었다고 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사카라 무덤의 비밀>에서 그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와흐티에의 무덤은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할까. 


와흐티에 무덤, 큰 의미를 가진 발견


와흐티에 무덤을 찾은 후 가장 먼저 할 일은 '해석'이었다. 전문가도 결코 쉽게 알아낼 수 없는 수천 년 전 상형문자를 해독하고, 함께 그려진 그림들 그리고 함께 있는 조각상들과 맞춰 봐야 한다. 완벽한 해석일 수 없이 합리적인 추측을 해야 하기에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다. 그 사이 발굴자들은 또 다른 무덤을 찾아 작업을 계속한다. 해독이 끝나면 갱도를 파기 시작할 텐데, 그곳에 유골이 묻혀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 조그마한 발굴단에 현실적인 문제가 들이닥친다. 라마단이 시작되는 6주 후에는 발굴 자금이 바닥나게 되는 것이다. 그때까지 작업을 끝마쳐야 하고, 이후 시즌을 이어가기 위해 또 다른 거대 발견을 이뤄내야 한다. 자잘하지만 의미 있는 발굴을 이어가는 와중, 다수의 고양이 미라를 확보한다. 그런데 그중에 유독 크고 또 얼굴 부분에 얼굴 그림이 그려져 있는 미라가 있었다. 


전문가를 통해 정밀하게 알아보니 고양이가 아니라 '새끼 사자'라는 게 아닌가. 적어도 사카라 피라미드에선 최초의 발견으로, 이집트 고왕국 시대의 문화, 경제, 종교를 새롭게 정립할 수 있는 의미를 가지는 유물인 것이다. 그들은 야생동물과도 교감을 나눴고 야생동물을 신께 제물로 바치기도 했을 테다. 그동안엔 합리적인 가설에 불과했지만 이 발견으로 사실에 한 발짝 더 가까이 간 것이리라. 와흐티에 무덤과 함께 크나큰 의미를 가진 발견으로 칭송받을 만하다. 


너무나도 비극적인 일가족의 최후


몇 개월의 기다림 끝에, 문자 해독이 끝나고 안전검사가 통과되고 묘실 갱도를 발굴하기 시작한다. 라마단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었다. 4개의 갱도 중 우선 2개를 파기로 한다. 시작부터 아주 안 좋은 소식이 들린다. 2번 갱도가 가로세로 1m의 넓이를 자랑하지만 깊이는 불과 60cm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나온 게 거의 없었다. 반면 1번 갱도는 상당히 아래까지 파 들어 갔는데, 심히 가슴 아픈 것들이 발견된다. 


다름 아닌 아이의 유골이 발견된 것이다. 그것도 세 아이, 유골을 맞춰 유추해 보니 동시에 죽어서 묻혔던 것으로 나온다. 묘실의 글, 그림, 조각상 들을 해독한 결과 와흐티에 본인과 함께 어머니와 아내와 네 아이(여자 아이 1, 남자 아이 3)가 묻혔다고 나왔으니, 세 남자 아이의 유골일 것이다. 신과 왕을 잇고 왕과 백성을 잇는 최고위 관리인 사제였던 와흐티에도 아이들의 죽음 앞에선 무력했던 것일까. 얼마나 가슴 아팠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발굴자들의 심정도 다를 바 없다고 한다. 


3번 갱도에서도 3명 분의 유골이 나온다. 모두 여성으로, 와흐티에 어머니와 부인과 딸로 추정된다. 눕혀져 있지 않고 수직으로 묻힌 것으로 보아 급하게 묻은 게 아닌가 추측할 수 있다고 한다. 1번과 3번 갱도에서 발견된 유골들을 통해 강한 의구심이 도출된다. 한꺼번에 죽어 묻힌 걸까? 마지막 4번 갱도에서 와흐티에 본인의 유골이 나온다. 그의 유골까지 모두 모아놓고 가설을 도출해 본 결과, 말라리아 전염으로 일가족이 몰살하지 않았을까 싶다는 것이다. 이집트 역사를 뒤흔들 발견인 동시에, 너무나도 비극적인 고위급 일가족의 최후이다. 


삶은 같은 방향으로 지속된다


앞서 글과 그림과 조각상을 해석하여 알 수 없는 일차적 비밀이 드러났었다. 사실 이 무덤은 와흐티에 본인의 묘가 아니라 와흐티에 형제의 묘라는 것. 즉, 와흐티에가 형제의 묘를 가로챘다는 것이다. 뒤이어 갱도에서 발견된 유골들을 해석하여 합리적 가설에 의한 이차적 비밀이 드러난다. 와흐티에 가족이 말라리아로 한꺼번에 몰살했을 거라는 것. 그렇다면, 와흐티에는 어쩔 수 없이 형제의 묘를 가로챈 것일까? 몰살한 가족들을 급하게 매장하기 위해서? 전문가들도 그것까진 알 수 없는 듯하다. 


사실 와흐티에 무덤 발견은 당시 이집트는 물론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아주 중요한 발견이니 말이다. 하여, 검색창에 '와흐티에'라고만 쳐도 수많은 기사가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당연히 단편적으로만 알 수 있을 뿐 자세한 이야기는 알 수 없다. 이 다큐멘터리로 비로소 자세한 뒷이야기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여러 모습이 엿보인다. 발굴의 진짜 모습, 4400년을 잇는 동질성, 현세와 내세의 비동질성 등. 


'고고학'이라고 하면, 거창하고 세련되고 우아한 모양새가 상상된다.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에서 보이는 모양새는 정반대에 가까웠다. 몇몇의 전문가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기술자와 일용노동자였던 것. 책임자들은 위대한 발견뿐만 아니라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의 생계를 위해 발굴을 계속하길 원한다. 위대한 발견이 그 자체로 열렬한 박수를 가져오지만, 발굴 작업을 계속할 수 있게 해 주기에 열렬한 박수로 이어지는 것이다.


수천 년 전을 가로지르는 동질성도 특별하게 다가온다. 고고학자라면 잘 알 텐데, 수천 년 전에도 지금과 같은 곳에서 별로 다르지 않은 일을 하며 먹고 살았다는 것이다. 문명이 발달하고 사람들은 달라진 생각과 보다 훨씬 편안해진 혜택을 받고 살아가는 듯하지만, 궁극적으론 다를 게 없다. 삶은 같은 방향으로 지속되어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말로만 듣던, '현세보다 내세를 중요하게 여긴 이집트인'의 실체도 알 수 있다. 현세에선 지금의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다가, 내세에도 현세의 모든 걸 그대로 가져갈 수 있다고 믿었기에 그런 무덤을 만들어, 현실 아닌 꿈을 표현한 것이다. 반면, 우리가 직접적으로 보는 건 사막에서 발굴되는 화려한 무덤이다. 그들의 실체는 아주 '평범'했을 테다. 지금 여기의 우리가 생각하는 그 '평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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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갱도, 사카라 무덤의 비밀, 삶, 와흐티에, 유골, 이집트 고왕국, 죽음, 평범, 화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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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딸을 냉동 보존하기로 한 어느 과학자 가족의 사연 <희망을 얼리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2020. 10. 2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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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희망을 얼리다: 환생을 향하여>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희망을 얼리다> 포스터. ⓒ넷플릭스



불과 얼마전인 2020년 5월, 국내 첫 '냉동인간'이 나왔다. 러시아 모스크바에 본사를 둔 '크리오러스'와 국내에 냉동인간 서비스를 론칭한 '크리오아시아'라는 업체를 통해 체세포 보존 형태가 아닌 전신 냉동 보존 형태였다. 해당자는 경기도에 사는 80대 여성으로, 숨진 직후 영하 20도로 냉동해 러시아 모스크바로 급파했다고 한다. 국내에는 아직 냉동인간 보존에 대한 법적·행정적 근거가 마련되지 않아, 러시아로 보내 그곳에서 전신 냉동 보존 처리가 시행되었다. 1억 원 이상의 돈이 들었다고 한다. 


5년 전인 2015년, 태국의 어느 과학자 가족이 크나큰 결단을 내린다. 정확히는 가족의 가장 사하똔 박사의 결단으로, 뇌암으로 죽은 2살 배기 딸 아인즈를 전신 냉동 보존하기로 한 것이다. 태국 굴지의 대학인 쭐라롱꼰 대학의 연구원으로 재직 중인 사하똔 박사는, 과학자의 시선과 딸을 보낼 수 없는 마음과 진보하는 과학의 미래를 믿으며 가족을 설득하고 주위의 반대를 무릎쓰며 전 세계 언론의 집중포화를 견딘 채 진행한다. 아시아에선 최초이고, 전 세계에서 가장 어린 나이의 사례라고 한다. 


아인즈를 전신 냉동 보존하기로 한 태국 과학자 가족의 이야기가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희망을 얼리다: 환생을 향하여>로 만들어졌다. 아시아 최초이자 전 세계에서 가장 어린 나이의 사례일 뿐만 아니라 불교가 약 95%를 차지하는 절대 불교 국가인 태국에서 행한 냉동인간 이야기이기 때문에 대대적으로 이슈화되었을 것이고, 다큐멘터리까지 만들어진 게 아닌가 싶다. 채 한시간 반도 안 되는 러닝타임으로 짧다면 짧을 작품은, 굉장히 과학적인 동시에 굉장히 뭉클하고 생각도 많이 하게 한다. 


낯설지만은 않은 '냉동인간'


냉동인간은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다. 수많은 매체에서, 수십 년 전부터 익히 봐 왔던 설정이기 때문이다. 최근 기억나는 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대표 캐릭터 '캡틴 아메리카'로 그 자신이 빙하에 갇혔다가 살아돌아왔고 빌런 '윈터 솔저'가 70여 년간 냉동과 해동을 거치며 암살자로 쓰였다. 그런가 하면, 1979년 시작된 <에일리언> 시리즈에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우주 여행 시 승무원들은 냉동수면이 필수적이다. 


실제로 넘어와, 세계 최초의 냉동인간은 자그마치 55여 년 전인 1967년 암으로 숨진 캘리포니아대 심리학과 교수이자 생물냉동학재단 설립자 제임스 베드포드였다. 그의 인체는 미국 애리조나주에 있는 알코르 생명연장재단에 보관되어 있다. '알코르'는 1972년 설립된 재단으로 <희망을 얼리다>에서 사하똔 박사가 딸 아인즈의 전신 냉동 보존을 맡긴 곳이기도 하다. 


현재 기술에서 전신 냉동 보존은,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말 그대로 전신을 있는 그대로 냉동 보존하는 것이 아니다. 장기를 모두 제거하고 피를 모두 뽑아낸 뒤 부동액으로 채워넣은 방법이다. 하여, 지금으로선 보존은 할지언정 되살릴 방법은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먼 미래에는 방법을 찾을 수도 있을 터, 사하똔 박사가 거는 기대는 지금이 아닌 미래에 있다. 과학은 계속 진보할 것이라는 믿음 아래. 


'과학자'의 시선으로 봐 주었으면...


시신을 '처리'하는 방법은 계속 변화해 왔다. 나라와 부족의 문화에 따라 다르기도 하다. 우리나라만 해도 묘지 매장이 당연했지만, 화장 후 재를 뿌리기도 하고 이제는 봉안당에 안치시키는 게 익숙해졌다. 작품을 보며, 머지 않아 냉동 보존이 시신을 모시는 주요 방법의 하나라 자리잡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지금으로선 2억 원이 넘는 금액을 지불해야 하는 부담이 있지만, 먼훗날 언젠가 다시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투자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충분히 할 만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본인 또한 '과학자'의 시선으로 생각하고 보게 된다고 하고, 본인의 이야기를 '과학자' 또는 '과학자 가족'의 시선으로 봐 주었으면 한다는 사하똔 박사와 가족들. 감정을 싹 거두고 이성적으로만 다가가면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냉동인간 보존. 그렇지만, 어떻게 감정 없이 이성적으로만 바라볼 수 있을까.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 사하똔 박사의 아내를 보고 있자면 말이다. 


그녀는 말한다, 냉동인간 보존술에 대해 지식이 전무하더라도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남편의 과학자적인 시선과 과학에의 믿음(물론 그 또한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이 있을 것이다)과 달리 아내가 냉동인간 보존을 대하는 것에는 아이를 한없이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이 투영되어 있다. 이성과 감성의 슬프고도 고귀한 조화이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영화를 보면 빌런으로서의 '미친 과학자'가 종종 나온다. 엄청난 지식과 빙퉁그러진 신념 그리고 가슴 아픈 사연이 뒤섞여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힘을 지니게 된 과학자 말이다. 이 작품에서 사하똔 박사의 첫째 아들 매트릭스가 아빠를 '미친 과학자'라고 칭하는 게 그리 위화감이 들지 않는 이유다. 이를테면, 딸의 암세포를 가져와 배양해 치료약을 만들려고 하는 행동 말이다. 과학을 향한 맹목적인 믿음과 딸을 향한 끔찍한 사랑이 빚어 낸, 출중한 실력을 지닌 과학자의 미친 이야기. 다행이도(?), 그는 거기서 멈췄다. 


인생에서 그만큼의 사랑을 해 본 적이 없다는 매트릭스, 즉 오랜 시간 혼자였다가 생긴 여동생 아인즈를 향한 사랑이 그녀의 죽음으로 과학적 동기가 되어 아빠를 뒤이어 과학자가 되기로 했다고 한다. 살아생전 아인즈를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과학적이지만 한편 종교적이면서도 미신적인 믿음. 그야말로 아빠의 이성과 엄마의 감성을 조화롭게 이어받았다. 


신기하다, 불교는 내세를 믿을진대 이들 과학자 가족 또한 내세를 믿는 불교신자이다. 즉, 영혼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육체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거나 불필요한 게 아닌가? 그들에게 집중포화식으로 쏟아진 질문, '아인즈의 영혼이 쉴 수 없게 막는 것 아니냐' '아인즈의 영혼을 가둔 게 아니냐'에 어떻게 답할 수 있겠는가. 사하똔 박사는 아이의 영혼을 가둔 게 아니라고, 아이를 보낼 수 없었을 뿐이라고, 아이에게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고 답한다. 맞는 답인지, 올바른 답인지 알 순 없다, 판단할 수도 없다. 


'죽음'을 거스를 수 없고 거슬러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자 말로 당사자에겐 씨알도 안 먹힐 공산이 크다. 당사자와 관계자에게 죽음은 슬픔과 아픔의 끝이다. 죽음과 멀리 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지 않을까. 작품 속 아인즈처럼 세상을 제대로 살아보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했다면 말이다. 사하똔 박사와 가족들을 윤리적·종교적으로 비난할 순 있을지언정, 개인적으로 판단할 수 없거니와 인간적으로 위로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그라면? 아인즈를 냉동인간 보존하지 않을 거라 장담하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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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과학자, 냉동 보존, 냉동인간, 부모, 사랑, 알코르, 이성, 죽음, 태국, 희망을 얼리다: 환생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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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계엄령 시대의 지옥 같은 학교를 공포로 빗대다 <반교: 디텐션>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20. 8. 27.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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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반교: 디텐션>


영화 <반교: 디텐션> 포스터. ⓒ찬란/(주)팝엔터테인먼트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거의 매년 꾸준히 관객을 찾았다. 비록, 평단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관객으로부터 많은 인기를 받은 작품은 찾기 힘들지만 말이다. 그 시작은 1990년대이다. 최초는 아니지만 시작점에서 유명한 건 <모탈 컴뱃> 시리즈가 있을 테고, 2000년대 들어 <툼 레이더> 시리즈와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가 있을 테다. 이중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는 15여 년간 6탄까지 나오며 나름의 인기를 끌었다. 2010년대 들어 <페르시아의 왕자> <잉그리버드 더 무비>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 <명탐정 피카츄> 등이 쏟아져 나왔다. 


2020년대를 시작하는 올해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는데, 2월의 <수퍼 소닉>이 그 작품이다. '전설'이라고 이름 붙여도 충분한 게임 원작을 바탕으로 했지만, 내부 시사에서 반려 당해 다시 만들다 시피 하여 뒤늦게 개봉했지만 역대 게임 원작 영화 중 최고의 흥행을 올리는 등 파란만장한 제작·개봉 역사를 자랑(?)한다. 한편, 이번 8월에도 명작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 <반교: 디텐션>이 찾아왔다. 흔히 접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대만 게임을 원작으로, 대만에서 실사화했다.  


영화 <반교: 디텐션>은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었고, 대만의 흑역사라고 할 만한 20세기 계엄령 시대를 배경으로 하며, 무엇보다 공포 장르이다. 2019년 제56회 금마장 영화제에서 5관왕을 차지하며 <아호, 나의 아들>과 양분하다시피 했기로서니, 신인 감독의 작품으로 쾌거를 이룩한 것이리라. 그런가 하면 제22회 타이베이 영화제에서는 대상과 최우수영화상을 비롯해 6개 부문을 석권했다. 개봉 직후 대만 박스오피스 1위는 물론 2019년 개봉한 대만영화 중 흥행 1위를 기록했다고 하니, 대만 영화계를 뒤짚어 놓은 게 확실하다. 


비 내리는 지옥 같은 학교,,, 탈출할 수 있을까


비가 매섭게 내리는 밤, 텅비고 음산한 교실에서 잠이 깬 팡루이신은 영문을 모른 채 헤매다가 한 학년 후배 웨이충팅과 마주친다. 그들은얼 촛불 하나에 의지한 채 선생님과 친구들을 찾아 나선다. 얼굴 없는 여학생과 마주치기도 하고, 끔찍한 장면들이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는데, 거대한 유령의 모습을 한 경찰이 간첩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죽여 버렸다. 


간신히 유령에게서 도망친 팡루이신과 웨이충팅, 여전히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지 못한 채 헤맨다. 밖은 매섭게 내리는 비 때문에 홍수가 나 학교에서 탈출하긴 요원하니, 어떡하든 학교 안에서 버티며 사람들을 찾아야 했다. 그들 앞에 나타나는 친구들 덕분에 그들은 하나하나 기억을 되찾지만, 생각하기 싫은 기억들 뿐이다. 이건 현실이 아닌 꿈, 악몽이 분명하다. 


때는 1962년 서슬 퍼런 계엄령이 한창인 때 대만의 취화고급중학교, 장 교사와 인 교사는 웨이충팅을 비롯한 몇몇 학생들과 지하 독서부를 이끌고 있다. 그들은 정부로부터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는 서적을 몰래 들여 공부했는데, 누군가의 밀고로 한순간에 와해되어 모조리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된 것이다. 정황상 팡루이신과 웨이충팅이 연류된 것으로 보이는데... 팡루이신과 웨이충팅은 지옥 같은 학교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그런가 하면, 지하 독서부가 와해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밀고자는 누구일까? 


대만 계엄령 시대의 아픔과 슬픔


영화 <반교: 디텐션>은 악몽의 공포와 그보다 더한 현실의 공포를 따로 또 같이 적절하게 보여 주며 대만 계엄령 시대의 아픔과 슬픔을 자연스레 그려 낸 수작이라 할 만하다. 다만, 일반적인 호러 영화를 대할 때 바라게 되는 심장까지 쫄깃한 공포를 만끽하긴 힘들다. 눈에 보이는 공포의 요소보다 현실 상황의 공포와 마음을 어지럽히는 공포가 훨씬 더 공포스러운 시대와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말이다. 


1962년이라고 하면, 비단 대만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냉전 시대의 한 가운데에서 대다수 일반 국민들이 피해를 봤다. 정부를 비롯 위정자·권력자들은 공산주의 세력 또는 자본주의 세력에 대한 대항을 빌미로 독재를 펼치곤 했다. 대만의 경우, 1949년 말 공산당과의 국공내전에서 패한 국민당이 대만으로 본거지를 옮기면서 국민당 일당 독재가 시작되고 전국적으로 살벌하고도 강력한 반(反) 공산화·민주화 정책을 펼쳤다. 같은 해 5월부터 계엄령이 실시되었는데 자그마치 87년까지 40여 년간 계속되었다. 


이와 같은 시대에, 학생은 가장 살펴봐야 하는 대상 중 하나이다. 삶의 기조가 형성되는 시기이기에, 학교의 방침과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크게 달라지기 마련이다. 정부는 계엄령을 바탕으로 용공분자와 간첩으로 의심되는 이들을 붙잡아 손쉽게 죽일 수 있었다. 그저 금지 서적을 몰래 들여와 공부한 죄밖에 없는 독서부 멤버들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들 입장에서 금지 서적이란 보다 넓은 세상에의 순수한 앎을 의미할 수 있겠지만, 정부 입장에서 금지 서적이란 곧 친(親) 공산화·민주화를 의미했다.


그 어떤 공포보다 삶을 옥죄고 죽음을 생각하게 한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이제 막 10대 중반을 지나가는 학생들은 삶이란 게 무엇인지 채 제대로 알기도 전에 죽음의 공포부터 먼저 알아야 했으니, 그 알 수 없고 손도 닿지 않는 공포란 상상하기 힘든 무엇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영화를 보며 호러 영화에서 흔히 가 닿기 힘든 종류의 생각이 스멀스멀 끝없이 올라왔다. 


현실과 악몽을 오가는, 빠져나가기 힘든 공포


영화는 현실과 악몽(이라고 생각되는)을 오가는데, 현실은 상당히 밝은 반면 악몽은 말할 수 없이 기괴하다. 이는 주인공 팡루이신의 상태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바, 현실에서의 로맨스가 어느 정도 빛을 발하고 있는 반면 그의 의식은 황폐하기 이를 데 없다는 반증이다. 이 영화의 공포가, 현실이 주는 죽음에의 공포와 함께 주인공 팡루이신의 피폐하기 이를 데 없는 내면을 비추는 악몽 속 공포의 두 축으로 이루어져 비할 바 없이 탄탄해 보이는 이유이다. 빠져나가기 힘든 이중, 삼중의 공포. 


그런가 하면, 영화는 공포를 유발하기까지 또 공포 이후에도 계속되는 아픔과 슬픔을 다루었다. 공포는 나를 해치고 누군가를 해치게 한다는 명제를 대입해 보면, 계엄령 공포 정치가 계속될 때 국민들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아픔을 겪고 슬픔까지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에서 지하 독서부가 누군가의 밀고로 와해되고 잡혀 가고 또 죽음을 면치 못하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밀고자 또한 피해자일 뿐이다. 


이 아수라장에서 살아남을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살아남는 자가 있다면, 아픔과 슬픔을 오롯이 짊어지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또한 죽고 없는 수많은 이의 삶도 짊어져야 할 것이다. 비록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그때 그 시절 공포의 근원은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또 다른 공포들이 우리를 짓누른다. 인간은 정녕 공포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것인가. 아픔과 슬픔을 짊어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인가. 영화는 거기에까지 생각이 가 닿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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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보다 인간답게 하는 반려동물의 죽음에 관하여 <우리 개가 무지개다리를 건넌다면>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20. 7. 2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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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도서 리뷰] <우리 개가 무지개다리를 건넌다면>


<우리 개가 무지개다리를 건넌다면> 표지. ⓒ유노북스



지난 1월, 세종시의 어느 가정에서 고양이 한 마리를 분양받았다. 아내와 함께 오랜 시간 동안 고양이를 데려오기 위해 알아보았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다가, 운명의 아이를 발견해 아내가 직접 먼 길을 다녀온 것이었다. 암컷으로, 복 복에 기쁠 희로 '복희'라 이름짓고 한 가족이 되었다. 아내는 살아오며 반려동물을 길렀는데, 나로서는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금붕어나 거북이 정도만 길러왔으니 말이다.


처음엔 아이를 제대로 만지기는커녕 쳐다보지도 못했다. 강아지라면 그나마 친근하겠지만 고양이라면 그렇지 못한 탓일까. 이후 조금씩 다가갔고 아이도 조금씩 다가온다는 걸 느꼈다. 나도 아내도 복희도 적응 기간이 필요했을까, 힘든 기간이 있었다. 우리가 자야 할 때 복희는 잠들지 않고 복희가 잘 때 우리는 깨어 있기로서니, 바이오리듬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맞춰갔다. 


이제는 복희의 '골골송'을 들으며 잠들고 복희가 아침 먹고 싶다고 우는 소리에 잠에서 깬다. 새롭게 정립된 일상에서 인생에서 처음 느끼는 행복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새로운 걱정이 생기고 말았다. 의학이 발전함에 따라 사람뿐만 아니라 반려동물의 수명도 늘어났는데, 집고양이의 경우 15~20년을 산다고 한다. 그럼에도 사람보단 훨씬 수명이 짧은 건 당연지사, 한 가족이 되면서 마지막을 준비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물론 아직은 먼 이야기이지만, 복희와의 마지막을 생각하면 가슴을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끼곤 한다. 


반려동물의 마지막을 지켜본다는 것


생각만 해도 가슴 아픈 반려동물의 죽음, '펫로스'라고 한다. 이와 관련해 '펫로스 증후군'이라 하여, 가족처럼 사랑하는 반려동물이 죽은 후 겪는 상실감과 우울감 증세를 일컬는다. 반려인 1000만 가구 시대, 몇 년 전부터 펫로스 관련된 책이 꾸준히 출간되고 있다. 개인의 경험을 살린 슬프고 아련한 이야기 또는 펫로스 후 실용적인 대처 방법이 주를 이루는 와중에, <우리 개가 무지개다리를 건넌다면>(유노북스)이라는 책이 출간되어 이목을 끈다. 저자의 이력과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작용하지 않는가 싶다. 


제프리 마송, 프로이트 정신분석 학계의 논란적이면서 세계적인 권위자였다가 일약 모든 걸 내려놓고 동물의 감정 세계로 눈을 돌렸다. 관련 서적을 다수 출간하고 200만 부 이상을 팔아 국제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동물의 정서적 삶에 관한 세계적 권위자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마지막을 향해 가는 반려견 벤지를 대하는 와중에 '반려동물의 죽음'에 관한 책을 쓰게 된 것이다. 반려인이라면, 그가 마주한 반려동물과의 마지막을 함께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에겐 다른 종의 동물과 유대감을 느끼고 싶다는 깊고 오래된 열망이 있다. 일종의 본능 같은 것일까, 동물을 대함에 있어 가축->애완동물->반려동물->가족으로 변하는 과정이 당연하게 보이기도 한다. 나아가 생명체들은 죽음이 다가온 순간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고 한다. 말로 설명하거나 묘사하긴 어렵지만, 반려동물의 마지막을 지켜본 이라면 알 것이라 말한다. 


<우리 개가 무지개다리를 건넌다면>은 마지막을 지켜본다는 것, 다름 아닌 반려동물의 마지막을 지켜본다는 것에 관한 책이다. 왜 우리는 마지막을 지켜볼 뿐인가? 그들의 죽음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가? 저자는 반려동물과의 마지막 순간뿐만 아니라, 반려동물과의 삶과 반려동물을 떠나보내고 난 후의 삶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말한다. 


반려동물과 함께한 시간, 반려동물을 떠나보낸 후


반려동물과의 마지막을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그때 '슬픔'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온전히 느낀다는 것 자체가, 그들의 죽음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여전히 많은 이가 반려동물의 죽음 앞에서 부모나 자식의 죽음만큼 또는 그보다 더한 슬픔을 보이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슬픔을 느끼는 스스로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반려인들도 많다. 저자는, 충분히 마음 놓고 슬퍼하라고 말한다. 반려동물도 사람만큼 소중할 수 있고, 사람보다 더 소중할 수도 있다. 이 책은 그 사실을 전제함에 있어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그러기 위해선 반려동물 살아생전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소중히 생각하고 여겨야 한다. 반려동물은 더 이상 우리 인간만을 향하지 않는다,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 스스로 태어나 살아갈 의미가 있고 우리에게로 와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저자가 평생에 걸쳐 주장해 온 '동물에게도 존재하는 감정'이 이를 뒷받침한다 하겠다. 그들과 함께할 때, 그들의 마지막을 함께할 때, 우리 인간도 비로소 인간다워진다. 그들 덕분에 온전히 사랑을 느끼고 슬픔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려동물을 떠나보내고 난 후 느끼는 상실감과 우울감과 고통의 '펫로스 증후군'에 함몰되지 말고, 충분히 슬퍼하되 그들의 죽음을 기리고 애도하며 그들이 남긴 선물을 기념하고 간직하라고 말한다. 저자는 지속적인 선행을 베푸는 것이야말로 사랑하는 반려동물을 기리는 가장 좋은 일인 것 같다고 한다. 여러 방법과 방식으로 사람과 동물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헌신하는 것 말이다. 


사실, 죽음과 죽음이 남긴 슬픔과 고통은 절대로 다른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다. 하여, 책으로 말해본들 책을 통해 위로를 받아본들 소용 없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 책이 유익하고 또 필요한 건 수많은 사례와 함께 동물 중심의 이론이 주는 합리적 편안함 때문이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걸 반려동물도 똑같이 또는 더 강렬하게 보고 듣고 느낀다는 걸 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할 테다. 언젠가 눈앞으로 다가올 마지막 순간에도 함께 느끼는 감정의 기반 위에서 오롯이 서로만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개가 무지개다리를 건넌다면 - 10점
제프리 마송 지음, 서종민 옮김/유노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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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감정, 반려동물, 우리 개가 무지개다리를 건넌다면, 인간, 죽음, 펫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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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또 같이 삶을 헤쳐나가는 가족, 공동체의 연대 목소리 <조금씩, 천천히 안녕>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20. 6. 2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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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조금씩, 천천히 안녕>


영화 <조금씩, 천천히 안녕> 포스터. ⓒ디스테이션



'가족영화'의 전형성을 탈피하는 건 정말 어렵다. 특히, 가족의 중요성이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과 연관되어 있는 동양에선 더욱 그렇다. 공통적으로, 가족구성원 중 한 명의 큰 일로 인해 가족이 다시 모이지만 이런저런 우여곡절 생기며 결국 남는 건 가족밖에 없다는 식으로 끝난다. 다만, 한중일로 대표되는 동양의 가족영화는 각국마다 특징이 있다. 결합 상태에서의 해체 후 재결합, 해체 상태에서의 결합, 해체와 결합이라는 상태의 고찰 등이다. 개인적으로 한국은 너무 신파적이고, 일본은 너무 정석적이며, 중국이나 대만이 가장 볼 만하다. 


그럼에도, 일본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동양적 가족영화의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뭐라 규정짓기 힘든, 굳이 말하자면 '고레에다 히로카즈'식 가족영화라고 할 수밖에 없다. 여기, '포스트 고레에다 히로카즈'로 불리는 나카노 료타 감독이 있다. 2013년 <캡처링 대디>, 2016년 <행복 목욕탕>, 그리고 2019년 <조금씩, 천천히 안녕>의 세 작품으로 말이다. 단 세 작품뿐이지만, 연출력이 일취월장하고 있다. 


어릴 때 집을 떠난 아빠가 병에 걸려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엄마로부터 아빠의 마지막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오라는 미션을 받은 자매의 성장 여정기 <캡처링 대디>, 아내가 시한부 인생이 되어 가출한 남편한테 가업인 목욕탕을 잇게 하고 딸은 홀로 서게 하며 비밀까지 밝히며 고구분투를 다룬 <행복 목욕탕>. '죽음' '가족' '막장' 키워드가 눈에 띈다. <조금씩, 천천히 안녕>도 비슷한 맥락일까. 


아버지와의 마지막을 조금씩, 천천히 준비하다


아버지의 70세 생일에 맞춰 어머니는 두 딸 마리와 후미를 부른다. 마리는 연구원 남편, 아들과 함께 미국에서 살고 있고 후미는 아버지의 바람이었던 선생님을 뒤로 하고 음식 장사를 하고자 음식점에서 일하고 있다. 그런데, 막상 두 딸이 집에 오니 아버지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 어머니의 말을 들어 보니, '치매'라는 것이었다. 당장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교장 선생님 출신의 아버지는, 정신이 오가는 상황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뇌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퇴화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마리는 아들과 함께 잠시나마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 고향을 찾고 후미는 푸드트럭 장사를 시작했지만 장사가 잘 되지 않아 속상한 찰나에 뜻밖에도 아버지께 칭찬을 받는다. 


속절없이 가는 시간을 붙잡을 수 없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버지가 무너지는 속도도 가파른 것이다. 가족들은 각자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와중에도 아버지와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함께하려 하지만, 쉽지 않다. 점점 더 가족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건 물론 스스로의 몸도 가누기 힘들어지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감당하기 어렵다. 그래도 가족들은, 천천히나마 단단하게 아버지와의 마지막을 준비한다. 


가족의 소중함과 위대함


영화 <조금씩, 천천히 안녕>은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 '치매' 즉 알츠하이머병의 과정과 깊은 연관이 있다. 급성으로 병이 진행되거나 한순간에 절명하여 제대로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헤어지는 게 아니라, 인지하듯 하지 않듯 조금씩 기억을 잃어가며 천천히 인사를 나누는 것이다. 얼핏 괜찮다고 다행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상 그만큼 무시무시하고 안타까운 게 아니다. 


하여, 이 영화의 관건은 무시무시하고 안타깝기까지 한 치매의 과정 그리고 치매와의 전쟁 양상을 얼마나 유려하게 풀어내는가에 있겠다. 구성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좋지 않게 변해가는 아버지의 상태와 좋게 변해가는 두 딸의 상태가 묘하게 대조되기 때문이다. 그 경계에서, 대조가 대조로 끝나지 않고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테다. 자칫하면, 전형적인 일본 가족영화로만 끝나 버릴 수도 있다. 


어쩔 수 없었을 텐데, 영화에서 최소한의 전형성은 가져가되 중심을 잡으려 한 티가 역력하다. 좋게만 변해가야 할 두 딸이, 오히려 좋지 않게만 변해가는 아버지한테 도움을 받는 또는 도움을 받으려는 구도를 형성한 것이다. 아버지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그 존재 자체만으로 가족들에게 큰 힘이 된다. 비단, 그건 아버지뿐만 아니겠지만 말이다. 가족의 소중함과 위대함을 새삼 다시 깨닫게 되는 순간들이다. 


각자의 삶을 헤쳐나가는 가족구성원


이 영화가 좋았던 건, 가족구성원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보여 주려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가족구성원들은 엄연히 한 개인으로 각각의 삶을 살아가기에, 가족이 가장 중요한 일부분임엔 분명하겠지만 전부는 아닌 것이다. 두 딸 마리와 후미는, 녹록치 않지만 최선을 다해 각자의 삶을 헤쳐나간다. 아버지의 옆은 어머니가 단단하게 지키고 있다. 


각자의 삶에서 힘들어 하고 상처받고 외로워진 영혼을 가족의 품에서 위로받고 치유받고 힘을 얻는 모습이, 오버스럽지 않기에 오히려 굉장히 와닿고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극도의 감정이입이 가능하게 한다. 한편으론, 이 시대에 실제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모습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물론 그걸 큰 위화감 없이 그려낸 것만으로도 영화를 칭찬하기에 충분하다. 


가족의 해체가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선 가족이 아니라 공동체의 와해와 붕괴가 현실화될 위기이다. 말뿐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연대'의 목소리와 가깝다.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는 느낌으로. 그 시작은 '가족'일 수밖에 없다. 멀리 돌고 돌아,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연대가 시작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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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공동체, 나카노 료타, 소중, 연대, 위대, 조금씩 천천히 안녕,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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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로 생을 마친 가족의 추모와 치유를 위한 여정 <이블린>

넷플릭스 오리지널 2019. 9. 1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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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이블린>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이블린> ⓒ넷플릭스



단편 다큐멘터리 <화이트 헬맷: 시리아 민방위대>로 2017 아카데미 단편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한 올랜도 폰 아인지델 감독, 그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그동안 자신을 밀어붙이며 분쟁 지역에서 작업을 계속해왔다고 한다. 그런 그도 차마 꺼내지 못한 주제가 동생 이블린이다. 이블린은 13년 전(영화를 제작한 2018년 기준) 우울증으로 자살했다. 


올랜도는 이름을 말하는 것조차 고통인 그 이름 이블린과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를 혼자, 지인, 가족들과 어쩔 수 없을 때를 제외하곤 일절 피했다고 한다. 걷는 걸 좋아했던 이블린, 올랜도는 동생들 그웨니와 로빈 그리고 다른 가족들, 지인들과 걸으면서 그동안 외면했던 진실을 마주보기로 한다. 그동안 일절 피하고, 피하지 못했을 때도 경계를 넘진 못했던 이블린 이야기와 진실 말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이블린>은 올랜도 폰 아인지델 감독이 주연으로도 출연해 살아남은 사람들과 함께 오래전에 죽은 동생 이블린이라는 산을 넘고 극복하는 이야기이다. 작품은 시작과 동시에 주요 소재와 주제와 내용을 모두 밝히며 관객으로 하여금 최대한 빨리 감정을 이입할 수 있게 하였다. 하여 감정을 이입해 그들과 함께 여정을 떠나는 듯할 것이다. 


엄마와 함께


이블린의 생일이었던 날 시작된 5주 동안의 영국 횡단, 그 중심엔 첫째 올랜도와 셋째 그웨니와 넷째 로빈 그리고 둘째 이블린이 있다. 그들은 걷는 걸 좋아했던 이블린 살아생전 함께 갔었던 길을 다시 걷는다. 여정은 스코틀랜드에서 엄마 베타와 함께 시작된다. 베타는 80년대 후반부터 혼자 아이 넷을 키웠다고 한다. 나름 열심히 키웠지만, 이블린이 조현병이라는 판명을 받고 자살하게 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가장 힘들었을 그녀와 가장 먼저 여정을 시작하는 건 당연하다. 


베타는 이블린이 죽은 날로 돌아간다. 그동안 입밖으로 꺼내기는 커녕 생각조차 하기 싫었던 그때 그곳의 이야기를 말이다. 그러하기에 이 작품이 들여다보려는 원천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엄마의 이야기라면 다를 수 있지 않을까. 태풍의 눈은 고요한 것처럼, 오히려 두려움의 중심엔 두려움이 없지 않을까. 하지만 역시 듣기만 편하지 않다. 애써 담담한 듯 말하는 엄마의 이야기에 어떠한 대꾸도 할 수 없다. 과연 진실을 마주하면 치유가 되는 것인가. 


아빠와 함께


엄마와의 종주를 끝마친 삼 남매는 아빠 안드레아스와 그의 부인 조안나를 만난다. 이블린을 포함해 사 남매가 어렸을 때부터 같이 살지 않게 된 아빠와 이블린을 추모하는 여정을 떠나는 게 그리 어울려 보이진 않는다. 그들과 그의 기억은 많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그들은 이블린을 추억하면서 서로를 향한 거리를 확인하고 좁히려 노력한다. 공통의 누군가를 추억하는 건, 그때를 함께 한 사람과 장소와 시간을 되새기는 행위이기도 하다. 오직 그를 향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빠 안드레아스도 엄마 베타처럼 이블린의 죽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자신을 탓한다. 그러며 역시 이블린이 죽은 날로 돌아간다. 삼 남매로선 한없이 가슴 미어지고 무너지는 이야기를 그저 듣고 있을 수밖에 없다. 첫째 올랜도는 피해왔던 이야기, 셋째 그웨니는 피하고 싶지만 맴돌았던 이야기, 넷째 로빈은 알고 싶던 이야기, 보았던 모두와 듣고 있는 모두를 슬프게 하는 이야기. 정신병이라는 낙인과 싸우기 위해 계속 얘기를 해야 하고, 자살과 죽음에 대해서도 역시 계속 얘기해야 한다. 궁극적 치유를 위해서, 아니 조금씩 나아가기 위해서. 


지인들과 함께


가족들과의 종주 이후 삼 남매는 잉글랜드에서 지인들과 만난다. 그들은 이블린 생전 단짝 친구들로 삼 남매와도 친하다. 그들이야말로 가족들로선 알기 힘들 수 있는 이블린의 진짜 모습을 잘 알고 봐왔던 이들일 것이다. 정작 그들은 이블린의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생각한 자신들이 정작 이블린의 중요한 무엇을 놓쳤다고 생각한다. 역시 자신들을 책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블린의 죽음에 엄마와 아빠 그리고 가족들 모두 자유롭지 못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필요가 있는 것처럼 그들 또한 그래야 한다. 기억하고 추억하고 얘기하며 살아가야 한다. 


시선은 점점 올랜도를 향한다. 가족들에게 질문하고 얘기를 듣고 울음을 받아주기만 한 올랜도는, 정작 자신의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그걸 정확하게 간파한 지인 레온은 감정을 억누르지 말고 받아들이곤 내보이라고 충고한다.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아프다는 걸 잘 알지만 말이다. 내가 아닌 이블린을 위한 길이라는 것도 잘 안다. 이제는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때를 생각하고 그를 추억하고 직접 얘기해야 한다. 


다시 스코틀랜드 그리고 다시 잉글랜드. 삼 남매는 다른 누구도 아닌 삼 남매끼리의 시간을 갖는다. 여정의 마지막은 그들 스스로 얘기하는 시간이다. 비로소 깨달은 게 아닐까. 다른 이들과 함께 하며 그들에게 기대어 치유를 하려던 게 아니었을까. 본인의 치유는 다른 이의 도움을 받되 결국엔 본인이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추모와 치유의 여정


삼 남매의 여정은 추모와 치유의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치유'가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그웨니는 말한다, 이블린이 여전히 머리에서 맴돌아 떠나지 않는다고. 고통이나 상처가 줄어들지는 않는다고. 로빈은 말한다, 이블린의 인생과 힘들었던 기억에 대해 얘기한다고 해서 고통이 덜하진 않는다고. 하지만 이블린에 대해 생각하거나 얘기하는 건 쉬워진다고. 


그들의 여정에 가족들과 지인들만 함께 했던 건 아니다. 지나가는 사람들 중 그들에게 관심을 가진 이들이 있는데, 하나같이 '죽음'을 관통하고 함께하며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누군가를 생각하고 얘기하며 더불어 이블린을 생각하고 얘기한다. 이 여정 이전까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아예 지워버렸던 것들을.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기억이 있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생각하고 얘기하면 고통만이 함께 온몸을 사로잡을 그 기억들. 하지만, 어느 대화를 통해 그 고통이 말끔히 사라진 사례가 있다. 고통스럽기 그지 없지만 그때 그곳으로 몇 번이고 돌아가 그 사람 혹은 그 상황을 계속해서 정면으로 맞대면하는 것. 이왕이면 누군가와 함께. 제3자라도 나를 이해해주는 이라면 좋다. 


죽음을 대하는 데 있어 진정한 치유는 없을지 모른다. 치유를 바라는 게 사치일지 모른다. 남은 사람에겐 나를 향한 치유의 권리가 아닌 그(들)를 향한 기억의 의무만이 있을지 모른다. 정답은 없지만, 오히려 기억 자체가 치유로 치환될지 모르겠다. 기억의 고통이 공허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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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의 아름다운 도시 브뤼주의 킬러들 <킬러들의 도시>

오래된 리뷰 2019. 9. 1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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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킬러들의 도시>(In Bruges)


영화 <킬러들의 도시> 포스터. ⓒ(주)시너지하우스



자신만의 독특하고도 완고한 세계를 구축한 영화감독들이 있다. 일일이 열거하긴 힘들고, 다만 그런 감독들의 영화를 보면서 자라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거장의 반열에 오른 이를 우린 잘 안다. 그 이름, 쿠엔틴 타란티노. 여기 제2의 쿠엔틴 타란티노라 부를 만한 이가 있다. 마틴 맥도나 감독이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영화광이었고 희곡작가를 거쳐 영화감독이 되었다. 


그의 작품을 잘 모르겠지만, 사실 잘 안다. 작년 골든글러브와 아카데미 시상식을 화려하게 수놓은 작품 <쓰리 빌보드> 말이다. 완벽에 가까운 블랙코미디로, 마틴 맥도나 감독 자신만의 세계를 완벽하게 구축·구현·구사했다. 우린 그저 감탄하고 넋 놓은 채 감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작품이 비단 그뿐 아닐 것이다. 들여다보니, 장편영화로는 2편이 더 있고 자그마치 아카데미 최우수 단편영화상을 탄 데뷔 단편영화도 있다. 


그중 장편영화 데뷔작 <킬러들의 도시>는 앞으로 마틴 맥도나 감독이 펼쳐 선보일 유일무이한 영화 세계의 시작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희곡계에서 유례없이 크나큰 성공을 거두고 영화계로 넘어와 만든 첫 장편영화라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겠다. 이보다 더 기대할 수 없을 만큼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상황에서 만들어낸 작품이라는 것이다. 기대에 부응했을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중적이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부응했다.


벨기에 브뤼주의 킬러들


아름다운 중세건물이 많은 관광도시 벨기에 브뤼주, 30대인 듯한 남자 한 명과 40대인 듯한 남자 한 명이 도착한다. 40대 남자 켄(브렌단 글리슨 분)은 도시를 즐기지만 30대 남자 레이(콜린 파렐 분)는 도시를 즐기지 못한다. 알고 보니 그들은 영국에서 대주교를 암살하고 도망친 청부살인집단의 킬러들이다. 보스 해리(랄프 파인즈 분)가 2주 동안 브뤼주에 있으면서 다음 명령을 기다리라고 했던 것이다. 


켄은 도시의 아름다움에 취해 느긋하게 관광을 계속하는 반면, 레이는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 채 안절부절 못 하며 갈팡질팡 자리를 잡지 못하는 것 같다. 와중에 레이는 정체불명 비밀에 싸인 네덜란드 여인 클로이와 만남을 가진다. 알고 보니 레이는 대주교를 죽이는 과정에서 아이를 죽이는 실수 혹은 용서받지 못할 짓을 벌였다. 조직 내 철칙에서 아이 살인은 곧 죽음을 의미했고, 레이 본인에게도 돌이킬 수도 용서받을 수도 없는 죄를 의미했다. 


켄과 레이의 브뤼주 2주 관광은 해리가 내린 관대한 명령이었던 것이다. 켄에게 시켜 레이를 죽이기 전에 아름답기 그지없는 브뤼주를 최대한 즐기게끔 계획을 짰던 바, 조직의 철칙 아닌 스스로의 신념으로 괴로워하는 레이가 도시를 즐길리는 만무하다. 레이, 켄, 해리에게 어떤 결말이 닥칠 것인가? 레이는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운명이고, 레이가 죽지 않으면 켄도 죽어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책임은 또 해리에게 있다. 


킬러들의 킬 이후의 이야기


종종 겪는 처참함인데, 이 영화의 한국어 제목을 집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킬러들의 도시'라니 제목에 낚인 관객들도 많았을 거라 짐작된다. 브뤼주가 '도시'라는 단어에 어울릴 것도 만무하지만, 마치 킬러들이 속속 모여들어 피 터지는 액션을 펼칠 것 같은 느낌을 풍겨야 하는 이유가 뭘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원제인 'In Bruges'에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그 아름다움과 선명히 대비되는 킬러 둘의 처연한 상황. 


더불어, 화끈한 한국어 제목 때문에 이 영화를 보다 더 지루하게 느끼고 액션이나 스릴러 면에서 뭔가 더 있을 것처럼 생각했을 관객들도 많았을 것이다. 여기서 생각나는 유명한 한국어 제목의 영화가 생각난다. 우디 앨런의 'Vicky Cristina Barcelona'가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로 둔갑한 사례이다. 전자는 범죄 드라마가 액션 스릴러로 둔갑했고, 후자는 낭만 로맨스가 더러운 불륜으로 둔갑했다. 


각설하고, 영화는 엄연히 킬러들이 주인공이지만 킬러들은 냉혹하거나 비열하기는커녕 순수한듯 나사가 빠진 듯 휘청거리는 느낌이다. 으레 그렇듯 거시적으로 총격신다운 총격신도 나오지 않고 미시적으로 캐릭터들에 천착한다. 영화는 눈썹으로도 느낄 수 있는 캐릭터의 현재 심정과 점차 변해 가는 심정을 예리하고 섬세하게 포착한다. 


여기서 우린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착하다고. 이 영화가 바라보는 시선이 착하다고 말이다. 킬러들은 사람을 죽이는 간악하기 그지 없는 일을 하지만 그저 일로만 할 뿐 그 이면 또는 이상은 선하다는 것이다. 아니, 선할 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하여 영화는 킬러들이 죽인 이야기가 아니라 죽이고 난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다. 


산적한 죽음


영화엔 죽음이 산적해 있다. 킬러들이 주인공인 만큼 당연하다면 당연할 텐데, 배경이 브뤼주라는 점에서 당연하다고만은 할 수 없다. 벨기에 브뤼주가 아닌 범죄 영화에서 주요 배경으로 종종 등장하는 미국 LA였다면 별 반발심 없이 당연했을 테다. 브뤼주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어질 이 암살집단의 살인을 끊어내는 장소로 제격인 듯하다. 영화는 종국엔 그런 식으로 흘러간다. 


그런가 하면 브뤼주는 해리가 켄에게 명한 레이의 죽음 직전 평화로운 2주를 영위하기에도 제격인 장소이다. 죽음 자체는 평화로울지 모르나 죽음 직전이 평화로운 건 어불성설이 아닌가 싶긴 하지만, 죽음 직전의 평화라는 아이러니를 표현하고 설명하기에 이 장소가 제격이라는 생각에 이의를 달 순 없을 듯하다. 


마틴 맥도나 감독의 세 장편영화가 모두 '범죄, 코미디, 드라마' 장르인 건 우연이 아니다. 그 시작인 <킬러들의 도시>도 정확히 그 장르에 속하며, 그 중심엔 '블랙코미디'가 자리하고 있다. 범죄에는 한 발 정도만 걸쳐 있고 사실은 다분히 인간에 천착한 드라마인 것이다. 인간 이야기를 깊이 있게 다루는 건 매우매우 어렵다. 모든 사람이 다 다를진대, 고루 공감을 얻으면서도 특별함을 선사해야 하니 말이다. 


<킬러들의 도시>는 아름다운 중세풍 도시에 온 인간적인 킬러들을 내세워 보편과 특별을 두루 선사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이 그곳에 오게 된 경위와 그곳에서 겪는 소소한 일상을 보고 있노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것이다. 희한하게 아니면 의도한 대로 영화를 보고 나니 벨기에 브뤼주를 가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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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맥도나, 브뤼주, 블랙 코미디, 제목, 죽음, 킬러, 킬러들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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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같은 탈출이 곧 죽음보다 힘든 삶에의 투쟁 <12번째 솔저>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9. 5. 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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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12번째 솔저>


영화 <12번째 솔저> 포스터. ⓒ엣나인필름



제2차 세계대전은 현대 세계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다. '절대적'이라고 표현해도 과하지 않을 만큼 영향을 끼쳤다. 비록 선진으로 나아가던 유럽이 야만으로 빠지게 되어 충격을 받은 건 제1차 세계대전 때였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더 큰 전쟁이 일어난 건 5대양 6개주 56개 이상의 나라들 모두에게 헤어나올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내년이면 종전 75주년, 참으로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이 전쟁에 관한 콘텐츠는 여전히 다양하게 소개되고 있다. 영화도 물론이다. 매해 여러 나라에서 몇 편씩은 만드는 것 같다. 그동안 미국을 위시해 주요 참전국이었던 독일, 러시아, 일본, 영국, 프랑스, 중국 등의 이야기를 참으로 많이 들어왔다. 특히, 미국과 미국을 상대했던 독일과 일본의 전쟁은 정말 다양한 시선을 선보여왔다. 


최근 들어서는 조금 다른 전쟁영화들이 찾아왔다. 2017년에 나온 전쟁영화를 표방한 '재난' 영화 <덩케르크>와 종전 후 연합국 측인 덴마크군이 독일군 소년 포로로 하여금 지뢰를 제거하게 한 실화를 다룬 <랜드 오브 마인> 같은 영화들이 그 예다. 올해에도 전혀 접해보지 못했던 제2차 세계대전의 이야기가 영화로 나왔다. 당시 노르웨이군의 실화를 다룬 <12번째 솔저>다. 이 영화는 전쟁영화를 표방한 '탈출기'다. 


탈출을 상상할 수 없는 탈출


도무지 탈출을 상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탈출을 시도한다. 영화 <12번째 솔저>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1940년 초반 독일은 노르웨이를 침공해 점령해버린다. 영국에서 독일 항공기지 파괴 임무를 띤 노르웨이군 12명이 급파된다. '마틴 레드 작전'이다. 하지만 접선책 정보 미갱신으로 엉뚱한 사람과 접선을 하는 바람에 노출되어 그들은 배를 폭파시키고 탈출한다. 지상으로 가지만 그곳엔 이미 독일군이 진을 치고 있었고, 현장에서 1명이 죽고 10명이 잡힌다. 1명만 간신히 살아남는다. 


살아남은 1명 얀 볼스루드는 초반 탈출 시도 직후 총에 맞아 엄지발가락이 날아간다. 그럼에도 필사의 탈출을 시도, 첫 위기를 간신히 넘긴다. 그를 쫓는 독일군 대령도 그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추운 노르웨이 땅에서, 엄지발가락이 날아가버린 상태로, 얼음물을 몇 Km나 건너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또 다른 독일군 대령 커트 스테이지는 상식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노르웨이인으로 남보다 더 투철하게 충성하거니와 노르웨이에서의 노르웨이인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이보다 더 춥고 추운 만큼 치열하고 치열한 만큼 안타까운 탈출을 상상할 수 없는 탈출이 시작된다. 얀은 스웨덴을 거쳐 영국으로 돌아가는 게 목적이다. 처음엔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탈출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그, 가는 길마다 그의 탈출을 돕는 노르웨이인들이 있다. 그들은 그의 탈출을 도우며 희망 없는 현실에서 기적을 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얀의 탈출기는 점점 더 삶보다 죽음을 택하고 싶을 정도로 가혹해진다. 


죽음보다 힘든 삶에의 투쟁


그의 탈출은 곧 삶에의 투쟁이다. 죽음보다 힘든. 영화 <12번째 솔저>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영화 <12번째 솔저>는 한 인간의 죽음보다 힘든 삶에의 투쟁을 그린다. 제2차 세계대전 한복판의 겨울 노르웨이 설원을 배경으로 끔찍한 부상을 당한 채 자연과 싸우고 적군에게 쫓기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게 특이점이다. 지난 3월 말에 개봉했던 매즈 미켈슨 주연의 <아틱>이 생각나게 하는데, 그 영화에서 주인공은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위함으로써 기적을 바라는 마음을 온몸으로 표출했다면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살아남는 것이 그 자체로 기적이기에 온몸으로 탈출을 감행했다. 


노르웨이는 오랫동안 덴마크와 스웨덴의 지배를 받아왔던 바, 20세기 초에 독립을 하지만 반 세기도 지나지 않아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나라를 빼앗긴다. 이에 영국으로 탈출해 망명 정부를 세우고 독일군에 대한 격렬한 저항운동을 시행한다. '마틴 레드 작전'은 그 시작점과도 같은 것으로, 최후의 1인 얀 볼스루드가 살아돌아오는 기적을 연출함으로써 크나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영화는, 그러나 노르웨이 '국뽕'에 심취한 시선이나 행동이 주가 아니다. 물론, 독일군에게 피해를 주기 위해 목숨을 내버리다시피 하며 작전에 투입되는 이들의 영웅적인 행동은 다분히 '국가'가 제일 앞에 나올 수밖에 없게 한다. 반면 얀 볼스루드는 국가보다 11명의 '전우'다.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려면 살아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살아돌아가게 돕는 노르웨이인들 역시 국가보다 '기적에의 희망'이다. 희망 없는 현실을 버티고 미래를 그릴 수 있는 기적 말이다. 


전쟁영화답지 않은, 미시적이고 세밀한 


영화는 '전쟁영화'답지 않게 미시적이고 세밀하다. 영화 <12번째 솔저>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영화는 여타 전쟁영화와는 다르게 거시적 스펙타클이나 총체적 액션이 나오지 않는다. 지극히 미시적이고 세밀하다. 얀의 탈출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북극에 가까운 추운 곳 노르웨이의 겨울, 부상 당한 채로 쫓기는 이를 보고 있노라면, 같은 인간으로 그저 응원하게 된다. 제발 붙잡히지 말라고, 제발 죽지 말라고, 제발 살아남아 탈출하라고. 


삶은, 죽음에 가까워졌을 때 죽음에 직면했을 때 죽음을 목도했을 때 비로소 그 온전한 힘을 발하게 되는 것 같다. 그저 눈을 감으면, 몸에 힘을 풀면, 생각을 접으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을, 절대 포기하지 않고 다시 눈을 뜨고는 몸에 힘을 불어넣고 생각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한다. 전쟁에서 이긴다는 막연한 목표 이상의, 인간으로서 계속 살아가야겠다는 숭고한 목표가 생겨난다. 


그런 면에서 다분히 전쟁을 연상시키는 제목의 이 영화 <12번째 솔저>는 굉장하다. 삶에의 충만한 에너지로 가득하다. 제목만 보고 치워버리지 말고 오히려 꼭 끌어안았으면 한다. 그 삶에의 투쟁이 주는 육체적 고통이 상상을 초월하지만, 그래서 얼굴이 찌푸려지고 뒷덜미에 소름이 끼치고 머리카락이 바짝 서고 모골까지 송연해지겠지만, 사실 그게 우리의 삶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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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번째 솔저, 노르웨이, 마틴 레드 작전, 삶, 제2차 세계대전, 죽음,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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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고독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절규'의 화가 <뭉크>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9. 4. 29.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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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뭉크>


<뭉크> 표지. ⓒ아르테



에드바르 뭉크, 우리에겐 전 세계 최고의 미술품 중 하나인 <절규>의 화가로 잘 알려져 있다. 이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뭉크는 몰라도 <절규>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2012년 소더비 경매를 통해 당시 역대 최고가인 약 1400억 원에 판매되면서 예술적 평가는 최고점을 찍었고, 인터넷 검색만 해봐도 이 그림 하나로 셀 수 없이 많은 패러디가 양산되는 걸로 보아 대중적 평가 역시 최고점을 찍었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건 <절규>이지 결코 뭉크는 아니다. <절규>가 아닌 뭉크를 상상해보았는가? 아니, 뭉크가 언제적 사람이고 어디에서 태어나 어디에서 활동하며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한가? 단언컨대, '아니오'라는 대답이 주를 이룰 것이다. 필자부터, 뭉크가 노르웨이의 국민화가이고, 노르웨이는 물론 독일 베를린과 프랑스 파리 등에서 활동했다는 것, 평생 독신으로 살아왔다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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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표현주의 미술의 선구자'라는 타이틀과 본인 삶에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죽음, 불안, 고독' 등의 주제에 깊이 천착했다는 것과 생전 그와 관련된 유명한 사건이 있었고 사후 그의 작품과 관련된 유명한 사건이 있었다는 정도는 얼핏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거의 동시대에 활동했던 빈센트 반 고흐나 한 세대 후에 활동한 파블로 피카소처럼 그 이름만으로도 누구나 알 정도는 아닌 것이다. 


이번 기회에 에드바르 뭉크에 대해 수박 겉 핥기 정도만이라도 알아보고자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뭉크>를 펴들었다. <모차르트>에 이어 시리즈 8번째로 나온 책으로, 거장의 삶과 예술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진다. 시리즈 차기작으로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나온다는데, '음악'의 모차르트와 '미술'의 뭉크와 '문학'의 가와바타 야스나리까지 서평으로 소개해볼 예정이다. 


예술가적 키워드들


<뭉크>를 통해 들여다본 뭉크의 삶은 그야말로 흔히 생각하는 '예술가적' 키워드들로 가득 차 있다시피 하다. 다섯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열세 살 때 누이 소피에가 요절했으며 20대 파리 유학 시절엔 아버지까지 사망했거니와 그 자신 어린 시절부터 몸이 좋지 않았기에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다. 그의 그림 주요 모티브가 삶과 죽음이었다. 


아버지로부터 정신병을 유전적으로 물려받았다고 생각하며 근원적인 '불안'에 시달렸다. 평생 독신이었던 그에게 '외로움'은 자연스레 따라오는 키워드였을 텐데, 그런 그에게도 '사랑'의 시절이 있었다. 밀리, 율, 툴라가 그들인데, 뭉크는 그들과의 사랑 덕분에 다양한 자극을 받으면서도 그들과의 이별로 외로움과 상실감에 빠져 더욱 침잠하고 '고독'해졌다. 


예술가 하면 으레 따라 생각하게 되는 이런 종류의 정신이상적 키워드들은, 뭉크의 삶뿐만 아니라 작품에도 고스란히 투영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공포, 불안, 죽음, 외로움, 고독 등이 태반을 이룬다. 동시에 그의 작품 활동에 가장 큰 원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하여,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예술 절정기에 해당하는 작품들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하겠다. 


노르웨이에서 거주하기도 하는 저자의 말에 따르면, 노르웨이라는 나라의 자연이 주는 거부할 수 없는 사색과 고독도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긴긴 겨울이 지나면 봄과 여름과 가을이 순식간에 찾아오고 다시 겨울이 찾아온다고 한다. 그래서 노르웨이인들은 짧은 여름을 최대한 즐긴다고 하는데, 그 방법이 자연 속에 고립되어 사색과 고독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고 한다. 노르웨이인 DNA에 내재되어 있는 게 아닐까. 역시 노르웨이인 뭉크도 자의 반 타의 반 고독을 즐기는 한편 고독과 싸웠던 게 아닐까 싶다. 


뭉크의 삶과 예술


화가로서의 뭉크는, 당대 화단과 정반대에 있다시피 한 길을 갔다. 노르웨이는 자신의 길을 가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베를린과 파리에서 주로 활동하였는데, 평단으로부터 수없이 많이 혹평의 융단폭격을 당했다. 초기에 살짝 주춤했을 뿐 이후에는 오히려 그걸 즐겼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럴수록 뭉크는 이단아로 더욱 유명해졌고 뭉크 또한 그런 식으로 자신만의 길을 가는 한편 유명해지길 바랐다. 그런 일환으로, 뭉크는 노르웨이에선 크리스티아니아 보헤미안 그룹에, 베를린에서는 검은 새끼 돼지 그룹에 참여하여 기존 사회와 문화에 대한 비판의식을 함께 했다. 


그런가 하면 뭉크를 흔히 표현주의 화가로 수식하는데, 저자는 표현주의라는 현대 미술 운동에 결정적인 초석을 놓았다는 게 정확하다고 평가한다. 그의 대표작 <절규>를 놓고 수많은 '주의'들이 달라붙었는데, 독일 낭만주의, 상징주의, 종합주의 또는 나비파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 중 어느 사조와도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바, 자신의 경험을 형과 색의 왜곡을 통해 시각화한 뭉크의 그림들은 오히려 당시 새로운 움직임을 갈구하던 독일의 젊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뭉크는 시대를 앞서 갔던 진정한 선구자였던 것이다. 


<절규>와 더불어 뭉크를 대표하는 작품은 <생의 프리즈>라는 연작이다. 1900년대 초 재기를 꿈꾸며 베를린으로 돌아온 뭉크는 오래전부터 구상한 '생명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인간의 인생'의 주제를 그림으로 표현해낸다. '뭉크의 노트'를 통해 <생의 프리즈>가 탄생하게 된 과정을 살짝 들여다보자. "나는 그 그림들을 모아보았을 때, 각각의 그림들이 내용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그림들이 전시되자 그림들 사이에서 하나의 울림이 터져 나왔고, 그림들이 따로따로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것은 교향곡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생의 프리즈'를 그리게 되었다."


뭉크에게도 인생 제2막이 찾아온다. 노르웨이 아닌 외국을 전전하며 유럽에서 대가의 반열에 오른 뭉크는, 예술가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며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지만 건강과 정신의 모든 측면에서 무너져내렸다. 그러던 차 40대 중반에 접어든 1909년 노르웨이로 돌아와 정착하게 된다. 방황과 불안, 갈등과 피폐의 젊은 시절을 보내고 중년을 맞이한 예술가에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안정과 정착이 필요했던 때였던 것이다. 뭉크 스스로도 그렇게 판단했던 게 분명하다. 


제2막 인생에서도 여전히 고독했고 죽는 그 순간까지도 고독했던 뭉크, 그의 삶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우울해지기도 하지만 공감 어린 동질감 또한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현대인의 고질적인 병이 불안과 우울이 아닌가. 반대로 말해 불안과 우울이야말로 현대인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뭉크의 그림이야말로 현대인에게 가장 적확하게 다가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뭉크의 그림에 나오는 인물이 곧 나이고, 그림을 온전히 채우는 배경과 분위기 또한 곧 나의 일상과 머릿속이며, 그림을 그린 뭉크의 삶이 나의 삶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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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ingenv
고독, 노르웨이, 뭉크, 미술, 불안, 생의 프리즈, 예술, 절규, 죽음, 표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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