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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https://linktr.ee/singenv

'제2차 세계대전'에 해당되는 글 24건

제목 날짜
  • 이 영화가 위대한 발견을 그리는 법 <더 디그> 2021.02.17
  • 추천하면서도 비추천하는 제2차 세계대전 배경 시리즈 <더 리버레이터>(2) 2020.11.27
  • <나비효과> 감독이 보여주는 반전 밀리터리 호러 <고스트 오브 워> 2020.09.11
  • 21세기의 공간과 제2차 세계대전의 시간이 실존 차원에서 엇갈린다 <트랜짓> 2020.08.19
  • 나치 독일 핵심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암살 작전 막전막후 <철의 심장을 가진 남자>(1) 2020.08.14
  • 오랜만에 보는 단백하고 멋스러운 정통 전쟁 영화 <그레이하운드> 2020.07.31
  • 제2차 세계대전으로 빵 터지게 만드는 <토르> 감독의 비결 <조조 래빗> 2020.03.04
  • 기적같은 탈출이 곧 죽음보다 힘든 삶에의 투쟁 <12번째 솔저> 2019.05.01
  • 식탁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의 주요 길목길목들 <역사는 식탁에서 이루어진다> 2018.12.03
  • 제2차 세계대전 영화의 완벽한 교과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 2018.11.02

이 영화가 위대한 발견을 그리는 법 <더 디그>

넷플릭스 오리지널 2021. 2. 17.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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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더 디그>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더 디그> 포스터. ⓒ넷플릭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영국의 서퍽 주 입스위치, 젊은 미망인 이디스 프리티는 어린 아들 로버트와 함께 대저택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녀는 사유지에 있는 둔덕 아래에 뭔가 있을 거란 확실한 느낌을 갖고, 고고학자이지만 스스로를 발굴가라고 소개하는 배질 브라운을 고용한다. 그는 비록 정식교육을 받진 못했지만 선대부터 살아온 서퍽을 꿰고 있으며 독학으로 지독하게 쌓아올린 지식과 아주 어렸을 때부터 현장에서 쌓아올린 경험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전쟁 준비로 모조리 불려가는 와중에, 적은 인력과 비용과 시간 속에서 작업에 뛰어든 배질은 머지않아 큰 발견이 될 전초를 발굴한다. 다름 아닌 배를 발굴해 낸 것, 곧 입스위치 박물관과 대영 박물관에서 달라 붙는다. 박물관 측에서 몇 명이 와서 작업에 참여하고, 이디스는 사촌 로리를 불러 작업에 합세하게 한다. 아무리 사유지라고 해도 국가적 유물인 만큼 주인 이디스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는데, 최초 발굴자 배질에게 크나큰 공을 돌리기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이디스는 심장에 돌이킬 수 없는 질환이 생기고, 배질은 자부심과 돈과 열정의 경계에서 흔들리며, 로버트는 아픈 이디스에 슬퍼하며 배질을 따른다. 그런가 하면, 로리와 박물관 측에서 참여한 작업자 중 유일한 여자 페기는 알 수 없는 로맨스 관계에 빠지는 듯하다. 과연, 이들은 안팎의 난관을 넘어 영국 역사상 최대의 발견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발견을 이룩해 낼 수 있을까?

 

지금, 이 영화가 울림을 주는 이유

 

영화 <더 디그>는 앵글로 색슨 유물 발굴의 실화를 다룬 존 프레스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스위스 출신으로 호주에서 배우와 감독을 역임하는 젊은 감독 사이몬 스톤이 연출했다. 주연으로는, <쉰들러 리스트> <잉글리시 페이션트> 그리고 <해리포터> 시리즈의 '볼드모트' 등으로 잘 알려진 랄프 파인즈와 <드라이브> <위대한 개츠비> 등으로 잘 알려진 캐리 멀리건이 열연했다. 

 

탄탄한 원작, 역시 탄탄한 캐스팅으로 괜찮은 외형을 꾸린 영화는 사실 그보다 더 빛나는 걸 우리에게 선사한다. 한 컷 한 컷이 작품과 다를 바 없을 정도의 카메라 워킹, 영화의 상당 부분이 내부 아닌 외부의 뻥 뚫리고 광활한 대지임에도 어색하지 않은 조명, 그리고 전쟁 직전의 암울한 상황에서도 인류 역사의 숭고함을 위해 꿋꿋하게 나아가는 분위기를 한껏 살리는 음악까지 손색이 없다. 

 

은은하고 잔잔하게 시대와 조우하고 개인끼리 연대하며 시공간을 한순간에 뛰어넘어 지금 여기 우리 앞에 나타난 1500년 전 유물의 존재가 전쟁 직전의 암울함을 상쇄시키고도 남는다. 21세기도 한참 지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지 100년 되는 해를 향해 가는 지금에 이 영화가 울림을 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화려하고 웅장하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위대한 발견의 막전막후

 

영화에서 발견하게 되는 앵글로 색슨 유물의 존재는 '암흑시대'라고 일컬는 시대와 맞닿는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476년 이후 시작되어 십자군이 득세할 때까지 500여 년간 계속된 '중세 초기'를 가리키는데, 그때의 기록이나 유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문화와 예술은 물론 주화도 없었을 거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영화에서처럼 1939년 영국에서 6세기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 발견된 것이다. 가히 역사적 가치가 드높은 전무후무하고 위대한 발견이라고 한다. 

 

그런데 영화는 '역사적 가치가 드높은 전무후무하고 위대한 발견'의 과정과 결과를 메인에 두지 않는다. 위대한 발견의 막전막후를 두고 관계자들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충분히 스펙터클하고 긴장감 있고 흥미진진하게 꾸며 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또한 위대한 발견의 과정과 결과 그 자체에 천착해 '이 유물이 얼마나 대단한지, 이 유물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에 자세하게 풀어 내어 지식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는 방향을 가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다. 

 

<더 디그>가 지향한 건 유물이 아닌 '사람'이다, 사람들 간의 관계가 아닌 '연대'이다. 입스위치 박물관과 대영 박물관의 압박에도 직접 택했던 배질을 끝까지 믿어 주는 이디스, 위대한 발견의 소명도 있지만 이디스의 믿음에 흔들리는 열정을 다잡는 배질, 금지된 사랑의 영역에 들어섰지만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 하나로 조심스럽게 나아가는 로리와 페기, 그리고 하늘과 우주를 동경하며 엄마 이디스를 지켜 주고 싶은 마음과 고고학자 배질을 존경하는 마음이 가닿으며 이어지길 바라는 로버트까지 캐릭터들이 혼자 튀거나 나대지 않고 유기적으로 서로 잔잔하고 은은하게 이어지는 면면이 크게 와닿는다. 

 

호기심, 감성, 응어리

 

제목 속 'dig'는 '땅을 파내다' 또는 '발굴' 등의 뜻을 지닌다. 예견된 전쟁이 터지기 직전의 일촉즉발 상황에서도 고대의 유물을 반드시 발굴해야 하는 이유가, 함축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이 다가왔기 때문에 오히려 옛것의 의미가 부각된다. 지금 이 땅의 모든 인간이 사라질 먼 미래에도 여전히 존재해 과거와 현재를 전해 줄 유물을 있는 그대로 발굴해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것, 모든 걸 앗아갈 수 있는 전쟁에 대항하는 유일무이할 방법이 아닌가. 

 

영화 속 실존 인물의 캐릭터들이 전하는 메시지와 감독이 영화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일맥상통한다. 장면 하나하나를 허투루하지 않는 장인정신의 카메라 워킹이 인상적인데, 특히 광활한 대지의 순간순간을 카메라로 모두 잡고 싶은 열정이 보이는 듯하다. 그 열정을 뒷받침하고자 자연광이 철저하게 투영된 장면만을 보여 주려는 듯했고, 완벽에 가까운 장면을 영상으로 보여 줄 때 감동을 극대화시키고자 그에 걸맞는 음악을 입혔다. 때론 호기심을 자극하고, 때론 감성을 자극하고, 때론 저 밑바닥의 응어리를 자극한다. 

 

위대한 발견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을 제외하곤 특별한 이야기나 특출 난 인물이나 특수한 상황이 드러나지 않는다. 위대한 발견조차도 영화의 메인으로 드러나지 않으니 더더욱 특별한 걸 찾기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의 여운이 오래 지속되는 건 특별한 걸 특별하다고 강조하거나 떠벌리지 않는 용기 덕분일 테다. 특별하고 위대한 건 그 자체로 빛나며 알아봐 주지 않겠는가. 이 특별한 영화가 그럴 테고, 이 영화가 전하는 위대한 발견이 그럴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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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더 디그, 발견, 사람, 실화, 암흑시대, 앵글로 색슨 유물, 연대, 제2차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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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하면서도 비추천하는 제2차 세계대전 배경 시리즈 <더 리버레이터>

넷플릭스 오리지널 2020. 11. 27.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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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더 리버레이터: 500일의 오디세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리버레이터: 500일의 오디세이> 포스터. ⓒ넷플릭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3년, 미국 오클라호마 소재의 한 부대가 이탈리아 시칠리아에 상륙해 나치가 점령한 유럽을 관통하는 혹독한 여정을 시작한다. '선더버즈'로 불린 이 부대는 멕시코계 미국인, 아메리카 원주민, 카우보이로 구성되었는데, 그들은 정작 미국 본토에선 같은 바에서 어울려 술도 마실 수 없었다. 하지만, 전쟁 중엔 서로의 목숨을 내맡기고 구하는 형용하기 힘든 전우애로 똘똘 뭉쳤다. 


2년 전 오클라호마 포트 실, '해결사'라 불리는 스파크스 소위는 J중대를 맡게 된다. J중대의 J는 'jail'의 J였다. 즉, 군대 내 교도소에 있는 군인들을 한데 모아 훈련시켜 전쟁에 나설 수 있게 하라는 것이었다. 스파크스는 과거는 물론 인종도 상관하지 않고 차별 없이 오직 실력으로만 판단할 것을 천명하며 문제아들을 한데 모아 출중한 실력자들로 길러낸다. 그리고 1943년 이탈리아 시칠리아에 상륙해 500일 동안 나치 점령 하의 유럽을 관통하며 무훈을 올리게 되는 것이다. 


스파크스는 전투 중 크지만 목숨에 지장은 없는 '100만 불짜리 부상'을 입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지만, 무단 탈영을 하여 부대원들이 있는 최전방으로 향한다. 하지만, 필사적인 독일군에 맞선 안치오 전투에서 대부분의 부대원을 잃고 절망한다. 'E중대'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병사들을 모아 다시 일어서는 스파크스, 꿀맛 같은 휴식과 지옥 같은 임무가 그들을 기다리는데... 스파크스와 부대원들은 과연 무사히 기나긴 여정을 마칠 수 있을까?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결합


넷플릭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시리즈 <더 리버레이터: 500일의 오디세이>(이하, '더 리버레이터')는 알렉스 커쇼의 동명 논픽션을 원작으로 한 제2차 세계대전 밀리터리물이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특이한 외형이 눈에 띄는데, 실사인 듯 애니메이션인 듯 한눈에 구분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계속 눈이 가는 게, 장점이 될 수도 단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트리오스코프 스튜디오'의 특허기술이라고 하는데,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결합한 로토스코핑 기법으로 실사로 촬영 후 애니메이션 랜더링을 입힌 것이라고 한다. 전쟁물이라서 더욱 그런 것 같은데, 마치 게임을 보는 듯한 느낌이라고 하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가장 유명한 FPS게임인 <콜 오브 듀티> 시리즈가 연상된다. 


후술하겠지만, 스토리나 메시지 들이 생각보다 현찮은 반면 보고 즐기는 맛이 나쁘지 않다. 전쟁 영화를 즐겨 봤던 이들에겐 꽤 괜찮은 선물 같은 콘텐츠라고 할 만하다. 필자 또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전쟁 영화를 많이 봐 와서 왠만큼 색다르지 않는 이상 큰 감흥을 받진 못하는데, 이 작품은 확실히 남다름을 자랑했다.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게 아닌가도 싶다. 


허술하고 아쉬운 부분들


작품이 내보이고자 하는 건 의외로 허술하다. '의외'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작품 초반 '미국에선 같은 바에서 어울려 술도 마실 수 없는' 인종들이자 범죄 관련의 문제가 다분한 이들을 한데 모아 캐릭터성 확실하고 메시지도 확실한 부대를 만들지만 정작 큰 활약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캐릭터성 확실한 이들의 개성을 제대로 내보이지도 못했고 말이다. 허술하기도 하지만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전쟁 '영화'가 아닌 '시리즈'로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미드 <밴드 오브 브라더스>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데, <밴드 오브 브라더스>가 제목 그대로 전우애를 중심에 두고는 전장을 함께 보냈던 이들의 고충이 절절하게 드러나는 반면 이 작품은 그러지 못했다. '그런 것처럼' 보이게 시작했음에도 말이다. 역시 허술하기도 하지만 아쉬운 부분이겠다. 


대신, 작품은 전우애로 가득 찬 신념을 두른 채 자신의 목숨보다 부대원들의 목숨을 더 소중히 여기는 스파크스의 인간애 어린 고충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전쟁을 다룸에 있어 '영웅' 이야기가 얼마나 위험하고 또 하찮은지 수많은 전쟁 콘텐츠로 잘 알고 있는 필자로선, 이런 류의 이야기와 메시지는 성에 차지 않는 게 사실이다. 원래 8부작으로 기획된 것이 제작과정에서 4부작으로 줄여졌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스토리나 캐릭터나 메시지나 스케일 등의 면에서 '수박 겉 핥기' 정도로 다루고 보여 주는 게 너무 눈에 띄었다. 


평이하게 괜찮은 부분들


그런가 하면,  비(非) 밀리터리물 팬의 입장에선 <더 리버레이터>가 평이하게 잘 만들어진 작품일 테다. 한 에피소드 당 45분 정도의 4부작으로 길다면 길지만 시리즈로선 짧은 편인 러닝타임으로, 영웅적 개인의 여정을 중심에 두고 소규모와 대규모 전투를 오가는 액션과 실패, 좌절, 성공이 이어지는 서사와 아군과 적군을 가로지르는 감동 어린 전우애와 전쟁의 비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전쟁의 이유를 고찰하는 장면이 성실하게 배치되어 있다. 


전쟁을 다루는 실사 콘텐츠가 어쩔 수 없이 보여줘야 할 잔인한 장면들이 이 작품에선 상당히 중화되어 있기로서니 전쟁 액션에 바라는 기대에 못 미치지도 않으니, 전쟁 콘텐츠 초심자들에겐 안성맞춤인 작품이라 하겠다. 평론적으론 호평이나 혹평을 논할 가치가 없다고 해도 무방하나, 대중적으론 이만큼 볼 만한 작품도 없지 않나 싶다. 그러니, 한편으론 비추천하면서도 한편으론 추천한다. 


전쟁 콘텐츠가 매해 꾸준히 우리를 찾아오는 건, 전쟁의 무용성이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거기에서 영웅적 이야기를 끄집어 내려 한다고 해도 말이다. 결국, 전쟁은 정녕 모두를 고통으로 밀어 넣는 게 아닌가. 이 작품을 보고서도 부디 궁극적으론 그런 깨달음을 얻어 가길 바란다. 하지만, 전쟁의 무용성 말고도 무용한 전쟁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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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버레이터: 500일의 오디세이, 실사, 애니메이션, 영웅, 전우애, 전쟁 콘텐츠, 전투, 제2차 세계대전, 캐릭터
  • BlogIcon 결정해주는 남자
    2020.11.27 18:02 신고

    구독과 하트 누르고 갑니다
    맞구독 부탁드립니다 자주 관심 가질게용 ㅎ

    • BlogIcon singenv
      2020.11.27 19:40 신고

      감사합니다! 맞구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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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효과> 감독이 보여주는 반전 밀리터리 호러 <고스트 오브 워>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20. 9. 1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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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고스트 오브 워>


영화 <고스트 오브 워> 포스터. ⓒTHE픽쳐스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나치 독일 점령 하의 프랑스, 크리스와 4명의 미 육군 병사가 전초기지를 향해 간다. 가는 길에 소수의 독일군을 일망타진하고 피난 가는 유대인 모녀에게 온정도 베푼다. 드디어 도착한 전초기지, 으리으리한 대저택으로 나치가 프랑스 귀족에게서 빼앗았다가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전쟁 상황에서 편안해 보이는 그곳, 하지만 기존의 교대 병사들은 이들에게 기지를 넘기고 황급히 가 버린다. 


석연치 않았지만 그러려니 하고 저택을 수색한다. 각기 다른 곳을 둘러 보던 그들, 뭔가 으스스하다. 유령인지 뭔지 모를 형체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한다. 누군가가 알 수 없는 말을 무섭게 전하기도 한다. 설상가상으로 5명에 불과한 그들에게 50명에 달하는 독일군이 올 거라는 소식을 듣는다. 그들은 떠나야 하나 지켜야 하나 고심하다가, 떠나면 군법회의에 회부될 거니와 이곳을 지키는 게 그들의 의무이자 위에서 떨어진 명령이기에 지킬 것을 다짐한다. 


5명이 따로 또 같이 50여 명의 독일군을 방어한다. 그런데 몇몇 독일군이 유령에 의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게 아닌가. 각각 다른 모습을 목격한 대원들, 알고 보니 독일군이 죽어간 모습이 이 저택의 주인인 프랑스 귀족 가족이 독일군에게 죽은 모습과 동일하다는 것이었다. 이 저택엔 진정 유령이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크리스 일행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떠나야 하는가, 지켜야 하는가, 애도해야 하는가. 


<나비효과> 감독의 영국판 <알 포인트>?


영화 <고스트 오브 워>는 <데스티네이션 2>와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4>의 각본을 쓰고 그 유명한 <나비 효과>로 전 세계를 사로잡았던 에릭 브레스 감독의 실로 오랜만의 복귀작이다. 직전 작업한 작품이 2009년작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4> 각본이니 자그마치 10년이 넘은 것이다. 이 작품이 너무나도 별로였기에, 오랫동안 활동을 하지 못했던 게 아닌가 싶다. 


한편, <고스트 오브 워>는 전쟁이 한창인 때에 저택을 기반으로 한 기지 내에서 일어나는 호러라는 점에서 많은 이에게 기시감을 전한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하면 바로 <알 포인트>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공교롭게도 <나비 효과>가 개봉한 2004년에 개봉한 국내 최고의 밀리터리 공포물 말이다. 베트남 전쟁에의 비판과 극강의 공포를 내세운 분위기와 스토리가 어우러져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 영화는 어떨까. 어떤 이야기를 내세우고 어떤 메시지를 함의하며 어떤 분위기를 전할까. 그에 대한 기대감은 분명히 존재한다. 충분히 즐길 만한 구석도 있을 테지만, 단편적인 이야기로만 우리를 끌고 가진 않을 거라는 걸 말이다. 입체적인 이야기와 긴장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분위기 그리고 충격적인 반전을 동반한 메시지로 중무장했을 테다. 다만, 그것들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 것인지 들여다볼 필요는 있다. 


2000년대 반전 영화의 묘미가 되살아나다


영화는 꽤나 단출하다. 5명의 대원들이 저택에서 일어나는 불가사의하고 일면 믿을 수 없는 현상에 휩싸이며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데, 보다 보면 공포를 대하는 그들의 행동에서 이상한 모습이 눈에 띈다. 공포에 벌벌 떨어도 이상하지 않은 현상에 마주하고서도 상대적으로 큰 동요를 하지 않는 것이다. 전쟁을 겪으며 그보다 더한 공포와 충격을 경험해 왔기에 신경이 무뎌진 것일까 하는 추측을 해 본다. 


그런가 하면, 중간에 대원 중 한 명의 말마따나 그들은 몇날 며칠 밥을 먹지 않는다. 물론 영화적 설정 상 밥을 먹거나 잠을 자거나 볼일을 보는 등의 행위는 충분히 생략할 수 있는데 그래서 별 의구심 없이 지나가기 마련인데, 굳이 언급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 대반전의 순간이 오면 주마등 스치듯 깨달을 테지만, 그 말을 했을 때는 의구심과 불안이 함께 자리 잡아 묘한 긴장감이 알게 모르게 서려 있다. 


전체적으로 상당한 재미와 흥미를 전한다. 2000년대 반전 영화의 묘미를 한껏 살린 느낌이다. 하여,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을 지우기 힘든 것이다. <알 포인트>에의 기시감과 다른, 요즘 느낌이 아닌 옛 것의 느낌에 동반하는 기시감일 테다. 그래서 익숙한 듯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지만, 다 본 후 남는 게 별로 없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영화가 함의하는 메시지의 괜찮은 질에 비해서 말이다. 안타깝다고 해야 할까. 


재미만큼 설득력이 있을까?


제2차 세계대전이 배경이니 만큼 나치 독일과 유대인에 얽히지 않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영화는 당연한 듯 그렇게 흘러간다. 독일군에 처참하게 짓밟히고 죽임을 당한 유대인 그리고 그들을 숨겨줬다가 봉변을 당한 프랑스 귀족 가족, 그들 사이에서 미군이 취해야 할 스탠스는 명백하다. 영화 초반에 나오는 바, 독일군을 죽이고 유대인에게 온정을 베푼다. 


그런데, 그게 전부일까? 전부라면 식상하기 짝이 없는 영화가 될 요량이 다분하다. 절대 그럴리가 없다. 뭔가가 더 있을 테다. 생각이 가 닿기 쉬운 건, <알 포인트>처럼 대원들이 직접적으로 따로 또 같이 사건에 개입되어 있다는 얼개다. 즉, 독일군이 유대인과 프랑스 귀족을 죽이는 데 있어 대원들이 연류되어 있다는 것 말이다. 그들은 그 사실을 은폐하거나 기억에서 지워진 게 아닐까. 분위기상 그럴 것 같진 않다. 


그렇다면, 감독의 대반전을 기다리고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분명 뭔가가 있는데 명백하게 알기 힘드니 말이다. 끝을 본 입장에서, 충격적이라기보다 탄성이 나오는 쪽이라 말하고 싶다. 어떤 식으로든 일차원적 생각에서 한 발 더 나아갔고 장르조차 파괴하는 신기를 보여 주었다. 확실한 재미를 보장하지만, 얼마만큼 설득력이 있을지는 보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혹시 설득력이 부족하다면, 부디 부족한 설득력이 부족한 재미로 이어지지 않길 바란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설득력도 충분하다면 금상첨화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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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공간과 제2차 세계대전의 시간이 실존 차원에서 엇갈린다 <트랜짓>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20. 8. 1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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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트랜짓>


영화 <트랜짓> 포스터. ⓒ엠엔엠인터내셔널



나치독일이 프랑스 파리로 진군하자 마르세유로 탈출을 시도하는 게오르그, 그는 탈출 직전 지인의 제안으로 유명한 작가 바이델에게 아내가 보낸 편지와 멕시코 영사관으로부터 온 비자허가서를 전하고자 한다. 바이델이 머무는 호텔을 찾아갔지만, 그는 마지막 작품의 원고만 남긴 채 자살한 후였다. 게오르그는 한쪽 다리를 잃은 친구와 함께 몰래 기차를 타고 탈출한다. 마르세유에 도착한 그들, 하지만 친구는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고 게오르그만 홀로 마르세유에 발을 디딘다. 


친구의 집으로 가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하고는, 친구의 아들과 종종 시간을 보낸다. 그러며 멕시코 영사관으로 가서는 바이델의 원고를 전하는데, 영사가 게오르그를 바이델로 오인해 그에게 비자와 승선표까지 준다. 뿐만 아니라, 바이델의 아내 마리가 매일같이 영사관에 들러 남편을 찾는다는 사실을 전해주며 그녀의 비자와 승선표도 함께 준다. 


게오르그는 우연히 만난 여인에게 끌리고, 여러 장소에서 계속 그녀와 마주치는데, 다름 아닌 그녀가 마리였다. 어느 날, 친구의 아들이 아파 소아과 의사를 찾아 가는데 그곳에 마리가 있었다. 의사 리처드의 고민을 들어주다 마리와도 엮이게 되는 게오르그, 마리는 떠나고자 남편을 찾았고 리처드는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데 마리 때문에 머무는 중이며 게오르그 또한 바이델로 둔갑해 얼마든지 떠날 수 있지만 마리 때문에 고민 중이다. 더군다나 그에겐 마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는 마리의 비자와 승선표가 있으니... 떠날 것인가, 머물 것인가. 


독일을 대표하는 감독과 배우들


독일에서 건너 온 영화 <트랜짓>은 프랑스 남부 항구도시 마르세유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군상의 실존적 딜레마를 다룬 작품이다. 아울러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듯하지만 장소는 명백히 현대라는 점에서 비춰 볼 때, 난민 문제를 우회적으로 또 정면으로 바라보고자 했다는 걸 추측할 수 있겠다.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감독 크리스티안 펫졸드의 <바바라>에 이은 두 번째 국내 개봉작이다. 


이 작품의 두 주인공 게오르그와 마리는 독일을 대표하는 젊은 배우들이 분해 나름의 익숙함을 선사했다. <인 디 아일> <해피엔드>로 얼굴을 알린 프란츠 로고스키가 게오르그로 분했는데, 특유의 건조한 듯 밋밋한 듯 선한 듯 믿음이 가는 듯 매력적인 연기로 극을 이끌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한없이 많은 고민을 끌어안은 캐릭터를 잘 보여 주었다. 이 작품 이후에 테렌스 맬릭의 <히든 라이프>와 크리스티안 펫졸드의 <운디네>에도 얼굴을 비추며, 거장이 찾는 배우도 거듭나고 있다. 


마리로 분한 폴라 비어는 우리에게 더욱더 익숙하다. 그녀는 1995년생으로 채 서른이 되지 않았지만, 진정으로 예술영화 거장들이 찾는 페르소나 또는 뮤즈라고 할 만하다. 프랑소와 오종의 <프란츠>,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의 <작가 미상>, 그리고 크리스티안 펫졸드의 <트랜짓>과 <운디네>까지 모두 주인공을 맡았다. 작품에서 그녀는 시종일관 이해하기 힘든 캐릭터로 분해, 활기를 불어넣고 입체감을 부여했다. 그녀가 없었으면, <트랜짓>은 상당히 단조롭고 지루하기까지 한 작품이었을 수도 있었다. 


21세기의 공간, 제2차 세계대전의 시간


영화 <트랜짓>은 독일 출신의 작가 안나 제거스의 1944년작 자전적 소설 <통과비자>를 원작으로 한다. 원작을 번역 출간한 창비에 따르면, 제거스는 동독 최고의 작가이자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반파시즘 망명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라고 한다. 실제로 그녀는 영화 속 게오르그처럼 나치 정권이 수립되자 파리로 망명했고, 이후 여러 나라를 거쳐 멕시코로 망명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 독일로 귀국했다. 


주지했듯, 이 영화에는 명명백백한 특이점이 존재한다. 공간적으로는 21세기를 배경으로 하지만, 시간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전쟁 자체에 포커스를 맞추지 않고, 떠나려는 자와 떠나야 하는 자와 떠나지 못하는 자들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그때가 아닌 지금의 난민 문제를 짚고자 하는 게 눈에 띈다. 


아직까지는 독일군이 진군해 오지 않은 마르세유, 다양한 인종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모여 들어 다양한 직업을 형성한 채 하루빨리 떠나기를 바라며 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으로 떠나는 건 상당히 요원하다. 생존이 걸린 문제라고 해도 말이다. 그들 중 태반은 떠나지 못할 경우 독일군에게 잡혀 꼼짝 없이 죽을 판이다. 


지금도 하등 다를 바 없다. 난민이라는 게 인종, 종교, 정치, 사상적 차이에 따른 박해를 피해 다른 지방이나 나라로 탈출 및 망명을 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바, 그들 대부분은 떠나지 못할 경우 꼼짝 없이 죽을 판이다. 하지만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선뜻 그들을 받아 주지 못하는 상황, 인도적 차원과 정치·경제적 차원이 끊임없이 부딪히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애꿎은 사람들만 피해를 본다.


생존의 문제 넘어 실존의 차원까지


주인공을 둘러싼 군상들의 모습을 통한 생존의 문제와 함께, 영화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통해 실존의 차원도 다룬다. 떠나려는 자와 남으려는 자, 떠나야 하는 자와 남아야 하는 자, 떠나고 싶은 자와 남고 싶은 자... 생존의 문제에선 생각할 것도 없이 무조건 떠나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이 담길 때 무조건이란 없다. 생존도 사랑에 앞서지 않는 것이다. 실존의 영역에선 사랑만이 있고 생존 따윈 없을 수 있다. 


게오르그는 목숨을 걸고 파리에서 탈출해 마르세유에 왔고 우연히 얻은 천우의 기회로 멕시코에 갈 수 있게 되었지만, 마리를 본 순간 대수롭지 않아졌다. 그로서는 어느 순간 그녀와 함께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리처드도 비슷하다. 모든 걸 마련해 두었고 떠나기만 하면 되는데, 그녀를 만나 떠나지 못하게 되었다. 심지어 그녀가 오직 남편만을 찾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마리는 리처드에게도 게오르그에게도 마음을 주지만, 자신의 비자와 승선표를 갖고 있는 남편 바이델만 찾을 뿐이다. 


지독한 사랑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평상시가 아닌 목숨이 오가는 전시를 배경으로 하기에 실존 이야기에 가깝다. 생존과 실존 중 무엇을 택해야 하는가, 무엇을 택할 수 있겠는가. 게오르그와 리처드는 실존을 택했지만, 마리는 사실상 생존을 택했다. 하여, 영화는 마리를 '나쁜 년'으로 비추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또는, 생존보다 실존을 더 우위에 두고는 실존의 영역에서 고민하는 두 남자의 수단으로 마리를 두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여성 캐릭터를 이런 식으로밖에 활용하지 못하는가에 대해서는 비판 받을 여지가 있겠다. 


그럼에도 <트랜짓>이 수작의 반열에 오르지 못할 이유는 없다.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오가고, 생존과 실존의 문제를 제시하며, 현재의 난민 문제와 사랑의 관계를 유려하게 펼쳐 보이는 데 막힘이 없다. 다양한 해석의 여지는 영화를 보는 재미를 한껏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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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난민, 마르세유, 사랑, 생존, 실존, 안나 제거스, 제2차 세계대전, 크리스티안 펫졸드, 트랜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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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 핵심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암살 작전 막전막후 <철의 심장을 가진 남자>

오래된 리뷰 2020. 8. 1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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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철의 심장을 가진 남자>


영화 <철의 심장을 가진 남자> 포스터. ⓒ찬란



제2차 세계대전의 핵심 나치 전범, 히틀러를 비롯해 괴벨스, 괴링, 힘러, 헤스, 카이텔, 하이드리히, 보어만, 항케, 아이히만, 칼텐브루너, 뮐러 등 이름을 아는 이만 나열해도 일일이 세기 힘들 정도이다. 당연히 그들을 향한 암살 시도 또한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성공률은 한없이 0%로 수렴된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도 있듯, 완벽한 계획과 실행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했던 것이다. 


와중에 제2차 세계대전 유일의 핵심 나치 암살을 성공시킨 적이 있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로, 국제형사경찰기구(현재의 인터폴) 6대 총재이자 국가보안본부 초대 본부장이자 게슈타포 2대 국장으로 있던 그가 1941년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즉 체코의 2대 총독으로 부임해서는 이듬해 암살 작전 성공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홀로코스트 총책임자 힘러 아래에서 홀로코스트를 계획하여 실무 책임자 아이히만을 통해 실행에 옮기게끔 한 장본인이며 게슈타포의 악명을 친히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암살 작전은 '유인원 작전'이라 이름 붙여졌는데, 특히 영화로 많이 만들어졌다. 암살 성공 이듬해 <사형집행인도 죽는다>를 비롯 70년대 <새벽의 7인>과 2010년대 <앤트로포이드(유인원)>까지 말이다. 소설로는 <HHhH>가 있는데, 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 <철의 심장을 가진 남자>가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하이드리히 암살 작전 관련 콘텐츠라 하겠다. 개인적으로 소설 <HHhH>를 봤는데, 영화 <철의 심장을 가진 남자>가 훨씬 좋았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암살 작전의 전말


해군 장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무도회장에서 리나를 만나 좋은 관계를 이어가며 약혼하기에 이른다. 그녀는 몰락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 가문을 일으키고자 혈안이 되어 있다. 하지만 하이드리히의 전 여자친구가 군에 고발하여 하이드리히는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강제로 예편당한 것이다. 실의에 빠져 있던 그를 구해낸 건 다름 아닌 리나, 그녀는 가문을 일으키려는 수단으로 나치를 선택했고, 인맥으로 최고의 수뇌부 힘러를 하이드리히에게 소개해 준다. 하이드리히는 곧 실력을 발휘해 힘러의 최측근이자 나치 정보부의 핵심이 된다. 


자기를 알아준 나치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악행을 저지르는 그, 그가 가는 길엔 죽은 사람들에게서 흘러나온 피만 있을 뿐이었다. 한편, 승승장구하는 하이드리히의 곁엔 그런 하이드리히와 같이 있고 싶은 아내 리나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간곡한 바람과 달리 하이드리히는 점점 더 바빠지고 점점 더 멀리 갈 뿐이었다. 하이드리히는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총독으로 부임해 프라하로 향한다. 


더 높이 올라갈 수 없는 악명의 종착점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총독직을 마치면, 그는 더 높이 올라갈 참이었다. 영국에 망명해 있던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정부에서 결단을 내린다. 하이드리히를 암살하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 군인을 선별해서 급파한다. 현지 연결책들과 지내며 작전을 짜고 세세한 계획을 통해 실행에 옮긴다. 하이드리히를 암살하는 데 성공한 이들... 하지만, 과연 그들은 무사할 수 있을까? 그들을 도와준 현지 연결책들의 운명은? 


하이드리히가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과 그 이후


영화 <철의 심장을 가진 남자>는 크게 2가지 이야기를 품고 있다. 평범한 군인이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나치 괴물이 되는 과정, 체코슬로바키아 결사단의 하이드리히 암살 작전 과정과 이후. 우선 하이드리히를 들여다본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영화는 유인원 작전에 천착한 <새벽의 7인>과 <앤트로포이드>와는 결이 다르다. 하이드리히에게 보다 천착했다고 볼 수 있겠다. 


본인의 생각으로는 억울하기 짝이 없게 예편 당한 하이드리히, 그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없을 때 아내 리나를 통해 나치가 손을 내민다. 그의 실력을 높이 사 주고는, 충성를 다하고 적을 없애기만 하면 부와 명예와 권력을 약속한다. 제1차 세계대전 패배 후 나라 안팎으로 시달리며 유럽 최빈국 신세를 면치 못했던 독일(바이마르 공화국)에게 희망의 신앙을 주입시키며 어쨌든 나라를 일으킨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하는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수렁에 빠진 나라 전체에 먹힌 수법이, 수렁에 빠진 일개 개인에겐 먹혀 들지 않을리 만무했다. 


완장이란 게 그렇게 무섭다. 계급이나 직급만을 말하는 게 아닌,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나아가면 개인의 실력이 극대화되면서 조직에도 좋은 것에서 끝나겠지만, 부정적으로 나아가면 개인과 조직 밖으로 무시무시한 힘을 분출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전쟁이 이런 식으로 일어났다. 


영화는 하이드리히가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과 괴물이 된 후 일상적으로 자행하는 악행과 더불어 지극한 일상까지 일목요연하고 깔끔하게 나열한다. 군더더기가 없으니 지루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종종 다큐멘터리를 방불케 하는 잔인한 장면들이 실제적으로 나와 소름끼치게 한다. 와중에 얼굴 표정은 물론 자세와 분위기와 아우라까지 변해 가는 하이드리히를 연기한 제이슨 클락이 압권 중 압권이다. '진짜'의 느낌이 물씬 풍겨졌는데, 그의 연기만 감상하는 것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하다. 


하이드리히 암살 결사단의 이야기


2부 격인 후반부가 시작되며 영국에 망명 중인 체코슬로바키아 군인들이 등장한다. 분위기부터가 완전히 다른데, 밝고 활기차고 명랑하기까지 하다. 나라를 빼앗기고 전쟁에서 기약 없이 지고 있지만, 결국 이기고야 말 거라는 걸 분위기만 봐도 알 수 있다. 전반부의 하이드리히 부분에서는, 비록 모든 게 완벽에 가깝게 승리를 향하고 있음에도 한없이 우중충하고 우울하고 어두웠다. 


결사단이 프라하로 급파되고 나서는 긴박하고 비장해진다. 결사단 개개인의 목숨은 물론, 체코슬로바키아뿐만 아니라 연합국 나아가 전 세계의 명운까지 그들 손에 달려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작전 아닌가. 홀로코스트의 핵심 중 핵심이자 나치 정보부의 핵심 중 핵심인 하이드리히를 암살하는 건, 영향력이 어마어마한 것이다. 전쟁 전체의 양상까지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역사적으로 잘 알려져 있듯, 하이드리히는 암살되고 결사단은 필사의 대항 끝에 모두 죽고 만다. 밀고한 배신자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세세히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다시 보는 이유는, '잊지 말자'라는 메시지도 있겠지만 영화적 재미의 요소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나치 독일 군인)을 죽이는 걸 보는 데 있어 마음의 흔들림이 없는 몇 안 되는 경우이지 않은가. 실제로는 어땠을지 잘 모르지만, 영화에서 결사단은 참으로 많은 나치 독일 군인들을 죽인다. 그 쾌감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는 결사단의 최후에서 느껴지는 비장함은 마음을 울린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다큐멘터리적 요소를 상당히 넣었기로서니 액션에서조차 건조한 느낌이 많았다. 쾌감이나 비장함이 영화적 재미로까지 이어지진 않았다는 것이다. 시대를 잘 풀어내고, 배경도 완벽에 가깝고, 연기는 완벽했으며, 마음과 감정을 들었다놨다 했음에도 영화가 흥행에서 성공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만 이 영화 <철의 심장을 가진 남자>를 추천한다, 추천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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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사단, 괴물, 나치독일, 제2차 세계대전, 철의 심장을 가진 남자, 하이드리히 암살 작전

  • 2020.08.14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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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보는 단백하고 멋스러운 정통 전쟁 영화 <그레이하운드>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20. 7. 3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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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그레이하운드>


영화 <그레이하운드> 포스터. ⓒ애플 TV+



톰 행크스 하면, 드라마와 로맨스 장르에 특화된 반듯하면서도 어리숙한 이미지를 생각한다. 최전성기인 90년대를 그런 이미지로 화려하게 수놓았다. 물론 대표 연기파 배우 답게 다양한 면모를 선보였는데, 21세기 들어서는 보다 다양하고 풍부해졌다. 그럼에도 전혀 녹슬지 않은 연기력과 흥행력을 과시했고 과시하고 있으며 과시할 거라 생각된다. 


그에게 전쟁물은 특별하면 특별했지 이런저런 영화 장르 중 하나로 치부되진 않을 것이다. 그의 전설적인 필모 중에서도 특출난 <포레스트 검프>는 1/3 정도는 전쟁물이고, 그의 정극 필모의 시작점과 같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도 있으며, 역대급 미드 중 하나로 손꼽히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는 그가 제작과 감독과 각본과 기획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2020년 실로 오랜만에 전쟁물로 돌아온 그가 제작과 각본과 주연으로 활약한 영화 <그레이하운드>가 우리를 찾아왔다. 코로나 19의 여파로 극장 개봉을 포기하고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돌렸으며, 치열한 각축전 끝에 애플 TV+가 배급권을 확보했다. 전 세계 영화계에 찾아온 새로운 시대에 빠르게 발맞춘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어떤 내용의 영화일지 들여다보자. 


제2차 세계대전 대서양 수송선단 호위


1941년 말 일본제국의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은 선전포고 후 제2차 세계대전에 본격적으로 발을 디딘다. 태평양에서는 일제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대서양을 통해 유럽으로 군수물자와 병력을 실어날랐다. 당연히 호송이 필요했는데 나치독일의 악명 높은 U보트가 무시무시한 전략과 전술과 화력으로 수송선단을 격침하려 했기 때문이다. 


어니스트 크라우스 중령(톰 행크스 분)은 플레처급 구축함 '그레이하운드'의 신임 함장으로 출전해 영국으로 향하는 수송선단의 호위를 맡게 되었다. 출항 직전, 애인에게 청혼하지만 거절 당하고 만다. 출항 직후, U보트 탐지 및 공격을 맡았던 수상기가 항속거리 문제로 돌아가고 만다. 기다렸다는 듯 U보트의 수송선단 및 구축함 습격이 시작된다. 


크라우스 함장의 첫 지휘를 부하들이 100% 믿지는 못하는 눈치다. 하지만, 바다 위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에 믿어야 하는 건 오직 함장의 판단과 선택뿐이다. 그는 적재적소에 부하들을 배치하고 적절한 판단을 내리며 자기 한 몸 아끼지 않고 불철주야 뛰어다니는 등 최선을 다한다. 과연 그의 구축함은 무사히 영국으로 향할 수 있을까? 그가 호위하는 수송선단은 무사할 수 있을까?


해전 영화의 마스터피스


<그레이하운드>는 이제껏 나온 많은 메이저급 전쟁영화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전투 자체에 집중한 영화이다. 영화 극초반, 출항 직전의 크라우스 중령을 잠깐 비추며 그의 자못 자애롭기까지 한 성향을 보여주고자 한 것 외엔 순도 100%에 가까운 전투 영상을 선보인다. 전쟁 영화를 좋아하는 이는 물론이고 숨 돌릴 틈 없는 긴박감을 선호하는 이에게도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해전을 배경으로 하다 보니 일반 전쟁 영화와 또 다른 결이 보이는데, 무수히 많은 전문 용어이다. 해군 관련 용어에 해전 관련 용어까지 더해지니 거짓말 조금 보태서 대사의 절반 이상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오히려 그랬기에 장면장면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좋게 해석해 본다. 물론, 거기엔 톰 행크스의 순간순간 미묘하지만 깊숙이 와 닿는 감정의 변화가 있다. 


신임 함장이지만 직급으론 최선임인 듯 그레이하운드뿐만 아니라 호위전단 전체를 진두지휘할 때의 고심, 목숨이 촌각에 달린 듯했을 때 부하들이 그에게 보내는 신뢰와 불신의 오묘함을 대할 때의 난감함, 죽음이 멀지 않게 느껴질 때 문득문득 떠오르는 애인의 모습, 한순간에 산화해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배들을 보고 느끼는 막연함 등 그때 그 감정을 정확히 겉으로 드러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받아들이고 현장의 실체까지 느낄 수 있게 하는 건 톰 행크스만의 능력이라 하겠다. 


전장에서의 극한직업 다큐멘터리


전쟁 영화에 으레 따라오는 철학적 묘미나 신파적 감동이나 인물들간의 갈등이나 국가적 가르침 등이 전혀 들어 있지 않아 매우 좋았다. 말하고자 하는 게, 보여주고자 하는 게 다른 데 있지 않고 해전 현장에서 실물나게 뛰어다니는 함장의 모습에 있다는 것도 매우 좋았다. 마치 '극한 직업'이라든지 '다큐멘터리 3일'이라든지, 재밌고 알차지만 내용은 매우 빡센 단백한 일상 다큐멘터리 한 편을 본 느낌이었다. 


상업 영화에 왠 일상 다큐멘터리냐고 누가 보겠냐고 할 분도 계시겠지만, 앞뒤로 어설프게 늘어지고는 하이라이트 부분만 집중해 현장 상황이 아닌 상황을 헤쳐나가는 인물의 좌충우돌이 중심이 되는 액션을 찍어놓곤 전쟁 영화라고 하는 것보단 훨씬 퀄리티 높은 전쟁 영화라고 말할 수 있겠다. 막상 전쟁에 나가면 철학이고 감동이고 뭐가 있겠나. 죽지 않고 살아남고자 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니는 사람들밖에 더 있겠나. 이 영화는 바로 그 점을 노리고 그 점만을 공략한 것이다. 


여전한 톰 행크스와 타깃 시청자가 정확하여 간결하고 정갈한 연출 스타일이 좋은 시너지를 일으켜 볼 만한 전쟁 영화가 탄생했다. 개인적으로 수많은 전쟁 영화를 봐왔고 지난 수년간 더 이상 볼 이유를 찾지 못했는데, 간간히 새로운 스타일의 전쟁 영화들이 출현하여 재밌게 보고 있다. 이 영화 덕분에 요즘 전쟁 영화라면 으레 덮어놓고 보지 않는 생각을 조금은 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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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하운드, 극한직업, 전투 현장, 제2차 세계대전, 톰 행크스, 해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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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으로 빵 터지게 만드는 <토르> 감독의 비결 <조조 래빗>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20. 3. 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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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명작 리뷰] <조조 래빗>


영화 <조조 래빗> 포스터.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지난 2011년 처음 선보인 마블의 슈퍼히어로 <토르> 시리즈는 빛나지 못하는 캐릭터만큼 흥행에서도 상대적으로 좋지 못했다. 이야기와 액션과 유머 어느 하나 방점을 찍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랬던 <토르>가 2017년 세 번째만에 빛을 발한다.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재밌어도 너무 재밌는 영화를 내놓더니 시리즈 최고의 흥행을 수립했다. 2021년 개봉 예정인 시리즈 네 번째 영화도 맡을 것으로 보인다. 


왜 <토르> 얘기를 꺼냈나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중요한 건 <토르>가 아니라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이다. 그는 10대도 되기 전부터 연극활동을 시작해 독학으로 연출을 배워선 2004년 단편으로 데뷔해 유수의 영화제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다. 이후 단편과 장편 연출 및 각본, 본인 연출작 및 블록버스터 주조연으로 꾸준히 줄기차게 모습을 보였다. 


2017년 <토르: 라그나로크> 감독으로 낙점되어 시리즈 최고의 모양새를 만들어냈다. 2019년엔 연출, 제작, 각본, 주연까지 도맡은 <조조 래빗>으로 제44회 토론토영화제에서 관객상, 제73회 영국아카데미에서 각색상, 제92회 미국아카데미에서 각색상을 수상했다. 미국아카데미에선 작품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눈에 띄는 건, 주연급 조연으로 활약한 스칼렛 요한슨이 주요 영화제들에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는데 <결혼 이야기>로 역대급 연기를 선보이며 여우주연상 후보에도 함께 올랐다는 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무관의 제왕으로 남았다. 


히틀러와 친구가 되고 싶은 소년, 조조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 독일, 조조는 아돌프 히틀러를 숭배하며 그와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소년이다. 조조는 독일 소년단에 입단해 나치 독일의 최전선 요인으로 다시 태어나고자 한다. 하지만 토끼 한 마리를 죽이지 못해 겁쟁이로 낙인 찍히더니 급기야 '조조 래빗'이라는 별명까지 얻는다. 의기소침해 있던 그에게 어김없이 히틀러가 나타나더니 용기를 불어넣는다. 호기롭게 선생에게서 수류탄을 뺏어들고 달려나가 던지려는데 본인 앞에 떨어뜨리고 만다. 왼쪽 몸 전체에 흉한 상처를 입은 조조, 독일 소년단으로 활동도 하지 못하게 된다. 


다리도 절게 된 조조는 집에서 근신하다가 위층의 낌새를 눈치 챈다. 위층 비밀 장소에 몇 살 많은 소녀 엘사가 살고 있었던 것. 알고 보니 그녀는 조조의 엄마 로지가 목숨을 걸고 몰래 숨겨 주고 있는 유대인이었다. 조조에게 유대인이란 사람이 아닌 존재, 몇 번이고 이런저런 칼을 들고 그녀를 쫓아내고자 하지만 그때마다 오히려 당하고 만다. 그러는 사이 조조의 굳건한 사상은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다. 


한편, 로지는 아들 조조와 정반대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고 있다. 그녀는 아들의 사상과 활동이 심히 걱정되지만 막무가내로 무작정 뒤집으려 하지 않는다. 아직 어린 아이에 불과한 조조를 이해하고 그의 눈높이에 맞춰 전쟁의 폐해와 자유의 소중함과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 등을 자연스럽게 설파한다. 그런 와중에 조조와 로지는 위기에 봉착하고 로지에겐 큰일이 닥치는데... '조조 래빗'은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을까?


제2차 세계대전을 풍자하다


<조조 래빗>은 내외견 상 많은 영화를 연상시킨다. 색감을 보면 웨스 앤더슨 작품들이 떠오르는데, 아이들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2013년작 <문라이즈 킹덤>이 와닿았다. 그런가 하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악의 소용돌이를 재밌고 활기차기까지 하게 풍자했다는 점에서 쿠엔틴 타란티노의 2009년작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 떠오른다. 한 편의 슬프고 환상적인 동화 혹은 우화를 본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로베르트 베니니의 1999년작 <인생은 아름다워>에 가닿기도 한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을 환상적으로 색감 어리고 활기차게 풍자한 동화라는 것이다. 거기에 타이카 와이티티 특유의 유머가 잔뜩 들어가 재미까지 보장한다. 때문에 호불호는 확실히 갈릴 듯하다. 2차 대전이라는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악의 전쟁과 아돌프 히틀러라는 악마와 가장 가깝다는 최악의 독재자를 이리도 가볍게 심지어 귀엽게 묘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견이 충분히 있을 만하다. 


한편, 최악을 최악으로 전쟁을 전쟁으로 독재자를 독재자로만 묘사하는 건 최악의 전쟁을 일으킨 최악의 독재자가 바라는 것일지 모른다. 오히려 그것들을 하염없이 가볍게 묘사할 때 비로소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이고, 그것들을 향한 진정하고도 제대로 된 비판을 가할 수 있는 게 아닌가도 싶다. 아이들을 전쟁의 도구로 이용했다는 점을 직간접적으로 보여 주는 모습이 이를 방증한다. 


조조의 성장과 두 여인의 교육 방식


영화는 조조의 성장이 핵심이다. 그의 성장에 지극한 영향을 끼치는 두 여인이 있는데, 엄마 로지와 유대인 엘사다. 로지의 교육 방식은 모범이 될 만하다. 그 아무리 무조건 고쳐져야 할 질병 같은 사상임에도, 일방적으로 주입하며 매몰차게 바꾸려 하지 않고 철저히 눈높이를 맞춰 피교육자의 입장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우여곡절이 많을지라도 언젠가 반드시 변하지 않을까. 


엘사의 경우 상당히 파괴적이다. 조조의 유대인에 대한 생각과 사상과 행동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극단적이기에, 극단과 극단은 통한다는 방식으로 그를 대하는 것이다. 완전히 반대되는 모양새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순간적으로 반복해 시행하면 머리나 마음보다 몸이 반응하는 법이다. 로지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식과 엘사의 몸을 움직이는 방식이 대립하는 듯하지만 조화를 이룬다. 


무엇보다 받아들이는 조조가 중요할 것이다. 그가 히틀러를 상상 속에서 친구로 불러들이는 건, 어린 아이라면 가질 만한 우상에의 로망과 다름 아닐지 모른다. 조조에게 히틀러는 독일은 물론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예인 내지 아이돌이지 않았을까. 그는 히틀러'를' 숭배하는 게 아니라 히틀러'가' 또는 히틀러'처럼' 되고 싶었다. 어떠한 정치적 사명감도 없었다. 하여, 로지와 엘사의 정치적 메시지를 쏙 뺀 교육 방식이 정확히 통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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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성장, 제2차 세계대전, 조조 래빗, 타이카 와이티티, 풍자, 히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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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같은 탈출이 곧 죽음보다 힘든 삶에의 투쟁 <12번째 솔저>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9. 5. 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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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12번째 솔저>


영화 <12번째 솔저> 포스터. ⓒ엣나인필름



제2차 세계대전은 현대 세계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다. '절대적'이라고 표현해도 과하지 않을 만큼 영향을 끼쳤다. 비록 선진으로 나아가던 유럽이 야만으로 빠지게 되어 충격을 받은 건 제1차 세계대전 때였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더 큰 전쟁이 일어난 건 5대양 6개주 56개 이상의 나라들 모두에게 헤어나올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내년이면 종전 75주년, 참으로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이 전쟁에 관한 콘텐츠는 여전히 다양하게 소개되고 있다. 영화도 물론이다. 매해 여러 나라에서 몇 편씩은 만드는 것 같다. 그동안 미국을 위시해 주요 참전국이었던 독일, 러시아, 일본, 영국, 프랑스, 중국 등의 이야기를 참으로 많이 들어왔다. 특히, 미국과 미국을 상대했던 독일과 일본의 전쟁은 정말 다양한 시선을 선보여왔다. 


최근 들어서는 조금 다른 전쟁영화들이 찾아왔다. 2017년에 나온 전쟁영화를 표방한 '재난' 영화 <덩케르크>와 종전 후 연합국 측인 덴마크군이 독일군 소년 포로로 하여금 지뢰를 제거하게 한 실화를 다룬 <랜드 오브 마인> 같은 영화들이 그 예다. 올해에도 전혀 접해보지 못했던 제2차 세계대전의 이야기가 영화로 나왔다. 당시 노르웨이군의 실화를 다룬 <12번째 솔저>다. 이 영화는 전쟁영화를 표방한 '탈출기'다. 


탈출을 상상할 수 없는 탈출


도무지 탈출을 상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탈출을 시도한다. 영화 <12번째 솔저>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1940년 초반 독일은 노르웨이를 침공해 점령해버린다. 영국에서 독일 항공기지 파괴 임무를 띤 노르웨이군 12명이 급파된다. '마틴 레드 작전'이다. 하지만 접선책 정보 미갱신으로 엉뚱한 사람과 접선을 하는 바람에 노출되어 그들은 배를 폭파시키고 탈출한다. 지상으로 가지만 그곳엔 이미 독일군이 진을 치고 있었고, 현장에서 1명이 죽고 10명이 잡힌다. 1명만 간신히 살아남는다. 


살아남은 1명 얀 볼스루드는 초반 탈출 시도 직후 총에 맞아 엄지발가락이 날아간다. 그럼에도 필사의 탈출을 시도, 첫 위기를 간신히 넘긴다. 그를 쫓는 독일군 대령도 그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추운 노르웨이 땅에서, 엄지발가락이 날아가버린 상태로, 얼음물을 몇 Km나 건너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또 다른 독일군 대령 커트 스테이지는 상식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노르웨이인으로 남보다 더 투철하게 충성하거니와 노르웨이에서의 노르웨이인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이보다 더 춥고 추운 만큼 치열하고 치열한 만큼 안타까운 탈출을 상상할 수 없는 탈출이 시작된다. 얀은 스웨덴을 거쳐 영국으로 돌아가는 게 목적이다. 처음엔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탈출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그, 가는 길마다 그의 탈출을 돕는 노르웨이인들이 있다. 그들은 그의 탈출을 도우며 희망 없는 현실에서 기적을 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얀의 탈출기는 점점 더 삶보다 죽음을 택하고 싶을 정도로 가혹해진다. 


죽음보다 힘든 삶에의 투쟁


그의 탈출은 곧 삶에의 투쟁이다. 죽음보다 힘든. 영화 <12번째 솔저>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영화 <12번째 솔저>는 한 인간의 죽음보다 힘든 삶에의 투쟁을 그린다. 제2차 세계대전 한복판의 겨울 노르웨이 설원을 배경으로 끔찍한 부상을 당한 채 자연과 싸우고 적군에게 쫓기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게 특이점이다. 지난 3월 말에 개봉했던 매즈 미켈슨 주연의 <아틱>이 생각나게 하는데, 그 영화에서 주인공은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위함으로써 기적을 바라는 마음을 온몸으로 표출했다면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살아남는 것이 그 자체로 기적이기에 온몸으로 탈출을 감행했다. 


노르웨이는 오랫동안 덴마크와 스웨덴의 지배를 받아왔던 바, 20세기 초에 독립을 하지만 반 세기도 지나지 않아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나라를 빼앗긴다. 이에 영국으로 탈출해 망명 정부를 세우고 독일군에 대한 격렬한 저항운동을 시행한다. '마틴 레드 작전'은 그 시작점과도 같은 것으로, 최후의 1인 얀 볼스루드가 살아돌아오는 기적을 연출함으로써 크나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영화는, 그러나 노르웨이 '국뽕'에 심취한 시선이나 행동이 주가 아니다. 물론, 독일군에게 피해를 주기 위해 목숨을 내버리다시피 하며 작전에 투입되는 이들의 영웅적인 행동은 다분히 '국가'가 제일 앞에 나올 수밖에 없게 한다. 반면 얀 볼스루드는 국가보다 11명의 '전우'다.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려면 살아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살아돌아가게 돕는 노르웨이인들 역시 국가보다 '기적에의 희망'이다. 희망 없는 현실을 버티고 미래를 그릴 수 있는 기적 말이다. 


전쟁영화답지 않은, 미시적이고 세밀한 


영화는 '전쟁영화'답지 않게 미시적이고 세밀하다. 영화 <12번째 솔저>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영화는 여타 전쟁영화와는 다르게 거시적 스펙타클이나 총체적 액션이 나오지 않는다. 지극히 미시적이고 세밀하다. 얀의 탈출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북극에 가까운 추운 곳 노르웨이의 겨울, 부상 당한 채로 쫓기는 이를 보고 있노라면, 같은 인간으로 그저 응원하게 된다. 제발 붙잡히지 말라고, 제발 죽지 말라고, 제발 살아남아 탈출하라고. 


삶은, 죽음에 가까워졌을 때 죽음에 직면했을 때 죽음을 목도했을 때 비로소 그 온전한 힘을 발하게 되는 것 같다. 그저 눈을 감으면, 몸에 힘을 풀면, 생각을 접으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을, 절대 포기하지 않고 다시 눈을 뜨고는 몸에 힘을 불어넣고 생각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한다. 전쟁에서 이긴다는 막연한 목표 이상의, 인간으로서 계속 살아가야겠다는 숭고한 목표가 생겨난다. 


그런 면에서 다분히 전쟁을 연상시키는 제목의 이 영화 <12번째 솔저>는 굉장하다. 삶에의 충만한 에너지로 가득하다. 제목만 보고 치워버리지 말고 오히려 꼭 끌어안았으면 한다. 그 삶에의 투쟁이 주는 육체적 고통이 상상을 초월하지만, 그래서 얼굴이 찌푸려지고 뒷덜미에 소름이 끼치고 머리카락이 바짝 서고 모골까지 송연해지겠지만, 사실 그게 우리의 삶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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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번째 솔저, 노르웨이, 마틴 레드 작전, 삶, 제2차 세계대전, 죽음,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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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의 주요 길목길목들 <역사는 식탁에서 이루어진다>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8. 12. 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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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역사는 식탁에서 이루어진다>


<역사는 식탁에서 이루어진다> 표지 ⓒ시트롱마카롱



얼마전 회사에서 중요한 의사결정이 있었다. 시작과 끝은 어김없이 식탁이다. 우리 회사 대표님만의 특징인지는 모르겠으나 점심 시간엔 밥을 함께 하며, 저녁 시간엔 술을 함께 하며 그렇게 결정된다. 회사가 오래 살아남아 역사라고 칭할 만한 게 만들어진다면, 주요 길목길목마다 역사가 식탁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식탁에서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들이자 고로 가장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의식주 중 없으면 절대적으로 안 되는 게 바로 '식'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얼 왜 어떻게 하든 인간은 먹어야 한다. 의도하지 않았든 의도했든 인간의 역사 속에 먹는 거야말로 가장 깊게 아로새겨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며 훑어본다. 아내와의 결혼 전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상견례를 했던 식사 시간, 군입대를 몇 시간 앞두고 마지막으로 부모님과 함께 한 식사 시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는 와중의 점심 시간, 초중고등학교를 마친 졸업식 부모님과의 점심 시간들, 기억날리는 없지만 행복했을 돌잔치 시간...


하찮을 나의 역사조차 중요할 때면 어김없이 식탁이, 요리가 함께 했다. 앞으로도 어김없이 그러하여 나의 역사적 역사는 언제나 요리와 식탁과 함께 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하찮지 않을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한 요리와 식탁이 궁금해진다. 인류의 역사적 순간과 함께 한 요리 50가지를 소개한다는 책 <역사는 식탁에서 이루어진다>(시트롱마카롱)를 들여다보면 궁금증이 한껏 풀리지 않을까 싶다. 


식탁에서 이뤄진 역사들


샌드위치의 탄생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1718년 출생한 샌드위치 4대 백작 존 몬태규는 당대 많은 귀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카드 게임 마니아였다. 그는 몇 시간 동안 테이블에 앉아 게임에 집중하곤 해서 어떤 이유에서든 자리에서 일어나기 싫어했는데, 그 때문에 빵 두 장 사이에 찬 고기와 치지를 넣은 음식을 고안했다고 한다. 그러자 같이 카드를 하던 사람들이 '우리에게도 샌드위치와 같은 것을 달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정말 싫지만, 종종 하는 게 '회의를 겸한 식사' 또는 '식사를 겸한 회의'이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이 퍼졌다. 기존의 왕조 시대에서는 출판, 보도 등의 여론 소통 방식이 정권에 통제를 받았지만, 이젠 공개 연회에서 자유롭게 토론하고 생각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선동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변한 세상에 따른 자연스러운 모습이기도 하다. 연회와 식사모임은 여러 계에서 중요한 현상으로 자리잡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에 대항하는 세계 3대 강국 러시아, 영국, 미국엔 스탈린, 처칠, 루스벨트(트루먼)의 수장이 있었다. 이들은 공고한 동맹을 위해, 세계 균형을 위해, 자기 나라를 위해 만나곤 했다. 루스벨트가 주최한 만찬은 항상 기억에 남을 만한 요소가 없었던 반면, 처칠이 주최한 만찬은 개성 있는 우아함으로 기억된다. 그가 제공한 메뉴에는 회담 현지 분위기를 고려한 현지 음식들과 상대의 입맛을 고려한 상대 고향 특산물들이 있었다. 한편 스탈린의 메뉴에는 그의 독불장군식 눈치 있는 안하무인 캐릭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1950년대 록의 제왕이자 로큰롤의 왕 엘비스 프레슬리가 1964년 첫 번째 미국 공연을 필두로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시전한 비틀즈를 초대한다. 때는 1965년, 늦은 시간 젊은 4인조는 엘비스의 집으로 가 노래를 함께 연주하고 부른다. 곧 출출해진 그들이지만 늦은 시간에 할 수 있는 요리가 많지는 않은 법, 요리사가 그들에게 해준 건 베이컨으로 말아 구운 닭 간, 미트볼, 미모사 에그, 게, 햄과 콜드컷, 치즈, 과일 등이다. 그야말로 시골 역 간이식당에서나 나올 법한 메뉴였다. 


'식탁의 역사' '역사의 식탁'과 어울리는 회담들


여기 46년의 시간을 두고 묘하게 겹치는 두 모습이 있다. 그야말로 '식탁의 역사' 또는 '역사의 식탁'에 가장 어울리는 모습들이다. 하나는 1972년 2월 21일 중국의 자금성 앞 톈안먼 광장의 인민대회당, 하나는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평화의집. 프랑스에서 2016년에 나온 이 책에는 당연히 앞엣것은 소개되었지만 뒤엣것은 소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두 회담은 분명 시공간을 초월해 하나로 뭉친다. 


1960년대 후반 전 세계는 여러 국가적 분쟁과 여러 신생 국가들의 대두에 따라 이데올로기보다 국가이익을 우선시하는 시대를 연다. 이에 발맞춰 동서를 대표하는 미국과 소련(중국)이 데탕트 국면으로 접어든다. 


긴밀한 물밑 작업 끝에 1972년 2월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과 정상회담을 갖는다. 중국 측은 최고의 예우를 갖춰 맞이한다. 국빈 만찬은 가장 중요한 의식, 중국 측 요리사들은 새우 요리와 빵, 버터 등의 서양 요리에 오리 내장 볶음, 목이버섯 등의 베이징 요리를 내놓는다. 아울러 마오타이주가 나왔는데, 닉슨은 외교관의 권유를 무시하곤 주저 없이 마셔버렸다. 미중 데탕트의 상징이다. 


2016년부터 시작된 촛불 혁명 여파로 탄핵 당한 박근혜, 조기 대선으로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0년간 불통이었던 남북 관계 개선에 나선다. 다행히 미국과 중국이 호의적으로 나와주었다. 


역시 긴밀한 물밑 작업 끝에 2018년 4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전격적으로 만남을 가진다. 11년 만의 길지 않은 텀의 남북정상회담이지만, 흐르는 기류는 완전히 달랐다. 역시 만찬 메뉴가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되었을 터, 역사적 인물의 교향 식재료, 양 정상과 남북 교류를 상징하는 콘셉트로 구성되었다. 


김대중 대통령 고향인 전남 신안 가거도의 민어 해삼 편수, 노무현 대통령 고향인 김해 봉하마을에서 수확한 쌀로 지은 밥,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에서 착안한 충남 서산 한우 숯불구이, 작곡가 윤이상의 고향인 경남 남해 산 문어 냉채가 한 콘셉트였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이 유년 시절을 보낸 부산의 달고기구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스위스에서 유학한 것을 고려해 스위스 감자요리 뢰스티의 우리식 조리 감자전이 한 콘셉트였다. 만찬주로는 면천 두견주와 문배술을 올렸다. 


마지막으로 대망의 미를 장식했던 남북교류의 상징 음식으로 평양 옥류관 냉명과 DMZ 산나물 비빔밥이 메뉴에 올랐다. 옥류관 냉면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평양 옥류관 수석요리사를 파견하고 옥류관의 제면기를 그대로 가져와 판문점 통일각에 설치했다. 이후 평양냉면은 공히 남북 모두에게 화제의 음식이 된 건 물론, 비둘기를 대체할 평화의 상징이 되었다. 미중 데탕트의 상징이 마오타이주였다면 남북 데탕트의 상징은 평양냉면이라 하겠다. 


2018 남북정상회담은 곧 사상 최초의 북미정상회담으로 이어져 역사의 한 페이지를 확고히 장식했다. 서양식을 기본으로 싱가포르 현지 중식과 한식을 두루 고려한 북미정상회담 만찬도 화제를 뿌렸는데 '식탁'이란, '요리'란, '음식'이란 인류의 가장 중요한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단순히 수단으로서 장식품처럼 있는 게 아닌 목적까진 아니겠지만 실질적인 상징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어 왔던 것이다. 앞으로의 역사에서도 어김없이 그 몫을 다할 게 분명하다. 


역사는 식탁에서 이루어진다 - 10점
마리옹 고드프르와.자비에 덱토 지음, 강현정 옮김/시트롱마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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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영화의 완벽한 교과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

오래된 리뷰 2018. 11. 2.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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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


제2차 세계대전 영화의 교과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 포스터. ⓒUIP 코리아



10대 때부터 영화를 만들었다는 스티븐 스필버그, 최소한 미국 할리우드 역대 최고의 감독이라고 할 만하다. 여전히 현역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그라서 의외로 저평가되는 것 같은 느낌인데, 그가 '소싯적', 즉 2000년대 전에 만든(주로 감독) <죠스> <E.T.>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쥬라기 공원> 시리즈 등은 여러 가지 의미로 전설의 반열에 올랐고 2000년 이후에 만든(제작, 기획도) 영화들은 할리우드 판을 유지하고 또 확대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할리우드 영화의 중추를 세우고, 기록을 세우고, 판을 지탱하고, 판을 확대하는 수순으로 영화를 만들어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유명한 영화들, 그중에서도 특히 2000년대 전에 나온 영화들은 여러 장르에서 기념비적인 업적을 세웠다. 초창기의 SF, 판타지, 어드벤쳐, 공포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위의 것들은 2000년대 전이라기보다 1990년대 전이라고 하는 게 맞다. 그쯤 되어야 기틀을 세울 수 있는 시대가 아닌가. 그런데 여기 21세기 바로 직전에 내놓았음에도 기념비적인 업적 또는 기틀을 세운 영화가 있다. 전쟁 영화, 정확히는 제2차 세계대전 영화의 교과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다. 


영화란 이런 것이다!


영화란 이런 것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한 장면. ⓒUIP 코리아



1944년 6월 6일 일명 'D-DAY'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가장 치열한 곳 오마하 해변에 상륙한 미 육군 레인저 부대 소속 밀러 대위(톰 행크스 분)와 대원들, 수천 명이 죽어나간 그곳에서 살아남은 그들은 상부로부터 특별하고 특수한 작전을 하달받는다. 이 전쟁에 '라이언 가' 4형제가 출전해 3형제가 전사하고 막내인 제임스 라이언 일병(멧 데이먼 분)만 생존한 상황에서 그를 구해 집으로 돌려보내는 임무였다. 


하지만 라이언은 101공수사단 소속으로, 적지 한가운데나 마찬가지인 프랑스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 알 뿐 자세한 건 알 수가 없다. 밀러를 대장으로 한 8명의 '라이언 일병 구출 부대'는 오직 한 명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여정을 떠나야 한다. 


최상부의 절대적인 명령, 대원들의 불평불만, 대장과 부대장의 라이언을 향한 의심 등이 한데 뒤엉킨 이 여정은 성공할 수 있을까. 와중에 미군의 궁극적 목표인 '승전'을 위해서도 그들은 행동해야 한다. 그것만이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이다... 


영화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빈틈없는 전투, 여정이 함께 하는 서사를 통해 생각해보게 되는 '전쟁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본격적이고 치열한 질문과 생각들이 쉼없이 우리를 덮친다. 그리고 우린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영화란 이런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영화의 새로운 시작


제2차 세계대전 영화의 새로운 시작 <라이언 일병 구하기> 포스터. ⓒUIP 코리아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제작되어 나온 건 1998년, 올해로 20주년이다. 지금이야 전쟁영화 하면, 최근 개봉했던 <덩케르크> <다키스트 아워> <헥소 고지> 등을 봐도 알 수 있듯 베트남전쟁보단 제2차 세계대전이 주류지만 20세기까지는 아니었다. 정확히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미국에게 제2차 세계대전은 '행복'한 기억일 테지만, 베트남전쟁은 '불행'한 기억일 테다. 할리우드는 실로 오래전부터, 즉 베트남전쟁이 끝난 지 오래지 않아서부터 기억해왔다. 다만, 대체적으로 반성하는 방식으로. 그래서일까. 전쟁이라는 장르를 떠나 명작이 많다. <택시 드라이버> <지옥의 묵시록> <디어 헌터> <플래툰> <풀 메탈 자켓> <햄버거 힐>... 하다 못해 <람보> 시리즈까지. 


그런 조류를 스티븐 스필버그가 완전히 바꿔버린다. 무차별적으로 사람이 죽어가는 전장에서 사람을 가장 중요시 여기는 '인본주의'를 앞세우면서도, 폭발적인 블록버스터 개념을 끌어들여 전장에 와 있는 느낌이 들게 하는 '리얼리즘'을 추구했다. 기존과 아예 다른 차원인 것이다. 동시대에 나온 또 다른 제2차 세계대전 명화 <신 레드 라인>이 보여준 '전쟁으로 철학하기'와는 결이 다르다 하겠다. 


이후, 무사히(?) 세기말을 보내고 2000년대 초반 제2차 세계대전 영화들이 쏟아진다. <에너미 앳 더 게이트> <진주만> <윈드토커> 등. 그리고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까지. '생각하는' 장르에서 '보는' 장르로의 선회, 전쟁영화 장르의 새로운 장이 열렸고 지금도 제2차 세계대전 영화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전쟁을 바라보는 미국의 입장에서만큼, 스티븐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구세주와 같다. 오랫동안 앓던 이를 빼고 임프란트를 박았다기보다, 오랫동안 콤플렉스였던 듬성듬성한 머리에 다른 곳의 털을 옮겨 심었다고 할까. 그 기억, 베트남전쟁의 기억을 완전히 지울 수도 또 지워서도 안 되기에.


인간. 인간? 인간!


인간. 인간? 인간! <라이언 일병 구하기> 포스터. ⓒUIP 코리아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영화 역사상 가장 강렬한 오프닝으로 손꼽힌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20년 동안 몇 번이나 봐왔지만, 여전히 전률에 몸을 떤다.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있어서, 총과 대포가 빗발치고 사방에서 온갖 종류의 비명이 들리는 와중에 팔다리가 날아가고 내장이 쏟아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며 영화는 전쟁을 통해서만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아이러니함을 보여준다. 고작 라이언 일병 하나를 구하기 위해 특공대 소속 대원 8명이 적진을 통과해야 하는 아이러니가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그 이면에는 한 명의 사람이 해낼 수 있는, 보다 훨씬 많은 사람을 돕고 살리는 삶의 존재가 있다. 결국은 그 사람 한 명으로 대표되는 인간 본연의 환원, 인간을 향한 무한대의 믿음이다. 


한편, 8명의 대원에는 겁쟁이 업햄이 있는데 그는 아군을 죽인 적군조차 항복했으면 살려보내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전장에서는 순진하기 짝이 없지만, 평시에는 그도 군인이 아니었을 터 당연하다는 생각 이전에 순진이고 뭐고 성립조차 되지 않는 생각이다. 업햄의 생각 자체가 아이러니라는 점과 함께, 적군을 살려보내줘야 한다는 아이러니와 그 적군이 다시금 아군을 죽이러 오게 되는 아이러니가 함께 한다. 


전쟁에서는 인간적이고 싶은 이도, 인간이기를 포기한 이도,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도 모두 빨아들여 갈아버린다. 영화는 그 와중에도 인간에 대한나름의 신념을 실천하는 업햄, 그리고 밀러 대위를 통해 인본주의를 외친다. 열광이나 내세움이 아닌, 생존과 도움의 외침이다. 여기 죽어가는 인간, 살고 싶은 인간, 살게 된 인간이 있다고 말이다. 그들 모두 최선을 다해 치열하게 살았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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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 일병 구하기, 베트남 전쟁,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 인간, 전쟁, 제2차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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