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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https://linktr.ee/singenv

'삶'에 해당되는 글 48건

제목 날짜
  • '삶'이라는 거대한 벽, 풀리지 않는 문제에서 깨내 볼 영화 <소울> 2021.01.22
  • 이집트 고왕국 사제, 그 화려한 무덤과 평범한 삶의 비밀 <사카라 무덤의 비밀> 2020.11.11
  • 기대 이상의 여성 액션과 빼 때리는 현실 메시지가 만났을 때 <올드 가드> 2020.08.10
  • 인류보편에 속하는 그녀 그리고 나의 이야기 <그리고 베를린에서> 2020.07.06
  • 조지 오웰의 삶과 사상과 작품의 핵심을 엿보다 <조지 오웰> 2020.05.18
  • 잔잔한 공감과 삶의 보편적 단면으로 중무장한 이주민 드라마 <타이거테일> 2020.05.05
  • 기적같은 탈출이 곧 죽음보다 힘든 삶에의 투쟁 <12번째 솔저> 2019.05.01
  • 무료한 삶도 충분히 아름답고 특별할 수 있을까? <나의 작은 시인에게> 2019.04.12
  • "절대, 절대 눈가리개를 벗지마, 알아들었니?" <버드 박스> 2019.01.04
  • 3D 혁명의 연장선상에서, '힘든' 삶으로의 나아감까지 <그래비티> 2018.12.14

'삶'이라는 거대한 벽, 풀리지 않는 문제에서 깨내 볼 영화 <소울>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21. 1. 22.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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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소울>


애니메이션 영화 <소울> 포스터.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2010년대 들어서 예전만 못하다는 말을 듣고 있는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그도 그럴 것이 <카 2> <카 3> <몬스터 대학교> <굿 다이노> 등이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좋지 못한 평가를 받은 것이다. 그동안 픽사가 쌓아올린 업적을 향한 기대치에 못 미치는 결과물을 내놓았기 때문일 텐데, 픽사라는 회사의 흔들리는 내부 사정도 무시하진 못할 테다. 픽사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디즈니의 위기 탈출에 절대적인 공을 세웠던 존 라세터가 성 추문으로 쫓겨났거니와, 그에 앞서 임금 스캔들에 연류되어 홍역을 치른 픽사였다. 


2015년 <인사이드 아웃>과 2017년 <코코>가 '역대 최고'라는 수식어를 얻으며 픽사에게 다시 명성을 안겼고, 2018년 <인크레더블 2>와 2019년 <토이스토리 4>가 나란히 속편으로 월드와이드 10억 달러를 넘기는 수익을 안겼다. 그리고 2020년 코로나 시대의 한 가운데에서 어김없이 우리를 다시 찾아온 픽사는 <소울>을 선사했다. 디즈니는 북미에서 디즈니+로 공개할 수밖에 없었고, 아직 디즈니+가 들어오지 않은 국내에서는 극장 개봉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존 라세터가 연출한 <토이스토리>의 원안을 만들었고, 픽사의 황금라인이라고 해도 무방한 <몬스터 주식회사> <업> <인사이드 아웃>을 연출한 피트 닥터 감독의 최신작인 만큼 100%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상상력'을 전할까? 그 상상력엔 어떤 현실이 있을까? 픽사로 한정해, 최초로 사람을 주인공으로 했던 작품이 <인크레더블>(2004)이었고 최초로 여성을 주인공으로 했던 작품이 <메리다와 마법의 숲>(2012)이었다면 <소울>(2020)은 최초로 흑인을 주인공을 한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 8년의 차가 있는 바, 2028년에는 어떤 '픽사 최초'가 선보일지 궁금하다.


살고 싶은 영혼 조, 살기 싫은 영혼 22호


뉴욕시의 한 중학교에서 시간제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재즈 음악가 조 가드너, 그에게 좋지만 좋지만은 않은 소식이 날아든다. 학교에서 그를 정식 교사로 채용하겠다는 것, 하지만 그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지 교사로 평생 일하긴 싫다. 물론 그의 가족은 축하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와중, 유명 재즈 음악가인 도로시 윌리엄스의 밴드에서 연락이 온다. 그가 가르쳤던 아이가 커서 드러머로 있는 밴드였는데, 중학교 교사라는 타이틀에 처음엔 실망했던 도로시가 그의 피아노 실력을 보고는 바로 함께하자고 한다. 


꿈에나 그렸던 제안을 받으니 날아갈 것 같은 기분, 기분에 정신이 팔려 위험천만한 뉴욕 한복판을 아무 생각 없이 거닐다가, 맨홀에 빠져 버린다. 알 수 없는 몸의 형태로 알 수 없는 공간에서 깨어난 조, 이내 그는 자신이 '머나먼 저세상'으로 가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 한순간 죽음으로 가는 걸 받아들일 수 없는 조는, 도망치다가 '태어나기 전 세상'으로 가게 된다. 몇 번이고 지구로 가고자 해 보지만 실패하고, '유 세미나'라는 곳으로 향한다. 새로운 영혼들이 지구에서 태어날 요건을 충족하도록 교육시키는 곳이었다. 


얼떨결에 노벨상을 수상한 심리학자의 영혼의 이름표를 갖게 된 조는, 새로운 영혼의 멘토가 되어 그로 하여금 지구로 갈 마지막 하나의 열정 '불꽃'을 채우게 한 다음 '지구 통행증'을 가로 채 지구로 가려는 수작을 꾸민다. 그런데 하필 그가 멘토로 함께 하게 된 이는, 22호로서 지난 수천 년간 지구로 가길 거부한 영혼이었다. 함께 이런저런 구역에서 이런저런 일을 겪은 둘은, 지구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구역에서 역시 지구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이들을 만나 우연히 코마 상태에 있던 조와 누군가의 고양이로 빙의된다. 문제는, 조의 영혼이 고양이로 빙의되고 22호가 조로 빙의된 것이었다. 과연, 조는 도로시의 밴드에서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을까? 22호는?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 거지?


<소울>은 비주얼, 메시지, 음악에 상상력, 유머, 열린 태도 등 그야말로 영상 매체 중 애니메이션이 도달할 수 있는 최대치에 도달한 면모를 과시한다. 러닝타임은 평균치인 2시간에 턱 없이 부족한 1시간 40분밖에 되지 않지만,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건 많다 못해 넘칠 정도이다. 그러다 보니, '성인'을 위한 애니메이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수준이 되었고 '아이'들이 보기엔 상당히 어렵지 않나 싶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메시지'일 텐데, 이 영화가 보여 주는 여러 가지 사항 중에 하필 메시지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니 더욱 어렵게 비춘다. 


재즈를 삶의 이유라며 남을 설득할 수 있는 자기확신과 실력을 가진 조 가드너는, 하필 '꿈'을 이룬 순간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다. 모두가 삶의 안정 대신 꿈이라는 삶의 이유를 찾아 나서라고 하는데, 조는 이 얼마나 안성맞춤인가. 그를 응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앞에 살고 싶은 이유를 모르는 영혼이 나타났고 함께 우여곡절을 겪으며 '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삶의 이유가 될 수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조로서는, 얼토당토 말도 되지 않는 삶의 이유인 것이다. 우리는 그런 그들을 보며, '아직 세상을 잘 모르네, 제대로 된 꿈을 꿔 봐'라고 할 것이다. 


이 영화는 통념과 시대정신을 바꿀 만한 인사이트로 지금 세대와 다가올 세대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어떻게 살아야 맞는 거지'라는 생각은 더 이상 통념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 거지'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해진 정답은 없으며, 각자의 자신이 찾은 해답으로 살아가면 될 테다. 조 가드너로선 오직 재즈에만 몰두, 몰입, 과몰입하는 것만이 삶의 이유일 필요는 없고, 22호 영혼으로선 일상의 아무것도 아닐 순간순간이 아름답게 보이며 삶의 이유가 될 수 있다. 


다만, 영화는 일련의 유려한 서사로 자연스럽고 이해하기 편하게 삶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보여 주고 있지는 못하다. 영화를 크게 나눈다고 했을 때, 챕터가 바뀌는 부분이 그리 매끄럽진 않다. 우연에 기댄 게 자주 보인다. 대신 태어나기 전의 세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같은 저세상 상상력과 뉴욕의 길거리를 함께 관통하고 있는 것 같은 현실 상상력이 아우러져, 애니메이션이어야만 할 수 있는 포스를 뿜어 낸다. 상당히 어렵지만 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부여 한 것이리라.


누군가에겐 '인생 영화'


제목 '소울'엔 두 가지 중의적 의미가 있을 테다. 영혼을 뜻하는 '소울'과 재즈 음악가를 포함한 음악가가 지녀야 할 정신과 애정과 신념을 일컬는 '소울'이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두 배경, 조 가드너와 22호가 영혼으로서 존재하는 '태어나기 전 세상'과 조 가드너와 22호의 영혼이 각각 고양이와 조 가드너로 빙의한 '뉴욕시'의 현실에 맞닿아 있다. 그렇지만,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에서의 '소울'은 또 다른 무엇에 다다른다. 주지한, 영혼으로서의 소울이 지향하는 게 음악가의 정신, 애정, 신념으로서의 소울에 있다면 영화는 나아가 '지금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나로서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토대를 먼저 세우고 난 뒤 소울로서의 소울로 향하면 좋지 않을까 하고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다. 


하여,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삶에 직접적으로 실천하기란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말이다. 그동안 교육받고 경험하고 실천하며 헤쳐 왔던 삶의 이중, 삼중의 역설을 뒤로하고 한 발 더 나아가야 하니 말이다. 그래서 '열린 태도'야말로 이 영화를 볼 때 핵심 중 핵심 키워드라 할 만하다. 아무 생각 말고 영화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며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반드시 다시 한 번 보며 정립된 생각으로 대응해 보면 좋을 테다. 살아오면서 느꼈던 '뭔가 하나 빠진 느낌'을 채울 절호의 기회일지 모른다. 


'소울'이라는 단어의 한자어 '疏鬱'이 가진 의미를 생각해 본다. '소통할 소' '답답할 울'의 두 글자로, '답답한 마음을 풀어헤친다'는 의미를 갖는다. <소울>을 다 보고 나면, 누군가는 반드시 답답한 마음이 풀어지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나는 어떻게?' '나는 왜?'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는 둥실둥실 떠다니는 물음들을 어느 정도 해소하게 해 주는 힘이 있는 애니메이션이었다. 해소해 주진 못해도, 공감과 위로를 건네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너만 그런 고민을 하는 게 아냐, 우리 모두 같은 고민으로 힘들어 하지. 내 생각을 한 번 들어 볼래?' 하는 것 같다. 누군가에겐 '인생 영화'로 등극할 만하다. 삶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면 언제든 꺼내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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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뉴욕, 삶, 상상력, 소울, 영혼, 인생영화, 재즈, 죽음, 피트 닥터, 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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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고왕국 사제, 그 화려한 무덤과 평범한 삶의 비밀 <사카라 무덤의 비밀>

넷플릭스 오리지널 2020. 11. 1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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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사카라 무덤의 비밀>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사카라 무덤의 비밀> 포스터. ⓒ넷플릭스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남서쪽에 위치한 '사카라 네크로폴리스(고대 묘지)', 기자와 다슈르 등과 함께 이집트 고왕국의 피라미드 소재지로 유명하다. 이들이 모두 포함된 고왕국 시대 수도 '멤피스'의 피라미드 지역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잘 알려져 있는데, 단연코 지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명이기도 하다. 배워서 익히 알고 있는 4대 문명(황하,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중 하나다. 


사카라에는 수많은 유물이 있지만, 지상에서 가장 규묘가 큰 최초의 석조 피라미드가 가장 유명하다. 자그마치 4600여 년 전 이집트 고왕국 제3왕조 조세르왕의 묘지 말이다. 이 피라미드는, 이후 기자 지역에 건립되었던 피라미드들의 원형이기도 하다. 그곳엔 발견되지 않은 유물들이 여전히 많다고 알려져, 현재도 조사·발굴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지난 2018년 말경 근래 수십 년 동안의 발견을 압도할 만한 발견이 이루어져 전 세계를 놀라게 했는데, 이집트 고왕국 제5왕조 왕실 사제였던 '와흐티에'의 묘로 추정되는 피라미드 무덤이었다. 4400년 동안 발굴·도굴의 흔적 없이 아주 잘 보관되었다고 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사카라 무덤의 비밀>에서 그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와흐티에의 무덤은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할까. 


와흐티에 무덤, 큰 의미를 가진 발견


와흐티에 무덤을 찾은 후 가장 먼저 할 일은 '해석'이었다. 전문가도 결코 쉽게 알아낼 수 없는 수천 년 전 상형문자를 해독하고, 함께 그려진 그림들 그리고 함께 있는 조각상들과 맞춰 봐야 한다. 완벽한 해석일 수 없이 합리적인 추측을 해야 하기에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다. 그 사이 발굴자들은 또 다른 무덤을 찾아 작업을 계속한다. 해독이 끝나면 갱도를 파기 시작할 텐데, 그곳에 유골이 묻혀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 조그마한 발굴단에 현실적인 문제가 들이닥친다. 라마단이 시작되는 6주 후에는 발굴 자금이 바닥나게 되는 것이다. 그때까지 작업을 끝마쳐야 하고, 이후 시즌을 이어가기 위해 또 다른 거대 발견을 이뤄내야 한다. 자잘하지만 의미 있는 발굴을 이어가는 와중, 다수의 고양이 미라를 확보한다. 그런데 그중에 유독 크고 또 얼굴 부분에 얼굴 그림이 그려져 있는 미라가 있었다. 


전문가를 통해 정밀하게 알아보니 고양이가 아니라 '새끼 사자'라는 게 아닌가. 적어도 사카라 피라미드에선 최초의 발견으로, 이집트 고왕국 시대의 문화, 경제, 종교를 새롭게 정립할 수 있는 의미를 가지는 유물인 것이다. 그들은 야생동물과도 교감을 나눴고 야생동물을 신께 제물로 바치기도 했을 테다. 그동안엔 합리적인 가설에 불과했지만 이 발견으로 사실에 한 발짝 더 가까이 간 것이리라. 와흐티에 무덤과 함께 크나큰 의미를 가진 발견으로 칭송받을 만하다. 


너무나도 비극적인 일가족의 최후


몇 개월의 기다림 끝에, 문자 해독이 끝나고 안전검사가 통과되고 묘실 갱도를 발굴하기 시작한다. 라마단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었다. 4개의 갱도 중 우선 2개를 파기로 한다. 시작부터 아주 안 좋은 소식이 들린다. 2번 갱도가 가로세로 1m의 넓이를 자랑하지만 깊이는 불과 60cm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나온 게 거의 없었다. 반면 1번 갱도는 상당히 아래까지 파 들어 갔는데, 심히 가슴 아픈 것들이 발견된다. 


다름 아닌 아이의 유골이 발견된 것이다. 그것도 세 아이, 유골을 맞춰 유추해 보니 동시에 죽어서 묻혔던 것으로 나온다. 묘실의 글, 그림, 조각상 들을 해독한 결과 와흐티에 본인과 함께 어머니와 아내와 네 아이(여자 아이 1, 남자 아이 3)가 묻혔다고 나왔으니, 세 남자 아이의 유골일 것이다. 신과 왕을 잇고 왕과 백성을 잇는 최고위 관리인 사제였던 와흐티에도 아이들의 죽음 앞에선 무력했던 것일까. 얼마나 가슴 아팠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발굴자들의 심정도 다를 바 없다고 한다. 


3번 갱도에서도 3명 분의 유골이 나온다. 모두 여성으로, 와흐티에 어머니와 부인과 딸로 추정된다. 눕혀져 있지 않고 수직으로 묻힌 것으로 보아 급하게 묻은 게 아닌가 추측할 수 있다고 한다. 1번과 3번 갱도에서 발견된 유골들을 통해 강한 의구심이 도출된다. 한꺼번에 죽어 묻힌 걸까? 마지막 4번 갱도에서 와흐티에 본인의 유골이 나온다. 그의 유골까지 모두 모아놓고 가설을 도출해 본 결과, 말라리아 전염으로 일가족이 몰살하지 않았을까 싶다는 것이다. 이집트 역사를 뒤흔들 발견인 동시에, 너무나도 비극적인 고위급 일가족의 최후이다. 


삶은 같은 방향으로 지속된다


앞서 글과 그림과 조각상을 해석하여 알 수 없는 일차적 비밀이 드러났었다. 사실 이 무덤은 와흐티에 본인의 묘가 아니라 와흐티에 형제의 묘라는 것. 즉, 와흐티에가 형제의 묘를 가로챘다는 것이다. 뒤이어 갱도에서 발견된 유골들을 해석하여 합리적 가설에 의한 이차적 비밀이 드러난다. 와흐티에 가족이 말라리아로 한꺼번에 몰살했을 거라는 것. 그렇다면, 와흐티에는 어쩔 수 없이 형제의 묘를 가로챈 것일까? 몰살한 가족들을 급하게 매장하기 위해서? 전문가들도 그것까진 알 수 없는 듯하다. 


사실 와흐티에 무덤 발견은 당시 이집트는 물론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아주 중요한 발견이니 말이다. 하여, 검색창에 '와흐티에'라고만 쳐도 수많은 기사가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당연히 단편적으로만 알 수 있을 뿐 자세한 이야기는 알 수 없다. 이 다큐멘터리로 비로소 자세한 뒷이야기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여러 모습이 엿보인다. 발굴의 진짜 모습, 4400년을 잇는 동질성, 현세와 내세의 비동질성 등. 


'고고학'이라고 하면, 거창하고 세련되고 우아한 모양새가 상상된다.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에서 보이는 모양새는 정반대에 가까웠다. 몇몇의 전문가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기술자와 일용노동자였던 것. 책임자들은 위대한 발견뿐만 아니라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의 생계를 위해 발굴을 계속하길 원한다. 위대한 발견이 그 자체로 열렬한 박수를 가져오지만, 발굴 작업을 계속할 수 있게 해 주기에 열렬한 박수로 이어지는 것이다.


수천 년 전을 가로지르는 동질성도 특별하게 다가온다. 고고학자라면 잘 알 텐데, 수천 년 전에도 지금과 같은 곳에서 별로 다르지 않은 일을 하며 먹고 살았다는 것이다. 문명이 발달하고 사람들은 달라진 생각과 보다 훨씬 편안해진 혜택을 받고 살아가는 듯하지만, 궁극적으론 다를 게 없다. 삶은 같은 방향으로 지속되어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말로만 듣던, '현세보다 내세를 중요하게 여긴 이집트인'의 실체도 알 수 있다. 현세에선 지금의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다가, 내세에도 현세의 모든 걸 그대로 가져갈 수 있다고 믿었기에 그런 무덤을 만들어, 현실 아닌 꿈을 표현한 것이다. 반면, 우리가 직접적으로 보는 건 사막에서 발굴되는 화려한 무덤이다. 그들의 실체는 아주 '평범'했을 테다. 지금 여기의 우리가 생각하는 그 '평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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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갱도, 사카라 무덤의 비밀, 삶, 와흐티에, 유골, 이집트 고왕국, 죽음, 평범, 화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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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 이상의 여성 액션과 빼 때리는 현실 메시지가 만났을 때 <올드 가드>

넷플릭스 오리지널 2020. 8. 10.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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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올드 가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올드 가드> 포스터. ⓒ넷플릭스



샤를리즈 테론이라는 배우를 영화 <몬스터>로 처음 알게 된 이들이 많지 않을까 싶다. 그녀는 일찍이 90년대 중반에 데뷔하여 할리우드의 숱한 그렇고 그런 주조연 배우로 활약하다, 2003년 <몬스터>로 연기력을 폭발시키며 단번에 최정상급 배우로 우뚝 섰다. 하지만 곧바로 승승장구하지는 못하고, 2010년대 들어서 다시금을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장르를 불문하고 크고 작은 영화에서 주연으로 활약했다. 


<헌츠맨> <매드맥스> <분노의 질주> <아토믹 블론드>를 거치며 여전사의 계보를 이을 만한 재목(?)으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최근 몇 년간은 드라마 장르에 천착하기도 했다. 그리고 2020년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올드 가드>로 화려하게 여전사로 돌아왔다. 본래 그녀가 주연으로 분한 <분노의 질주> 9편도 2020년에 개봉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 19로 이듬해로 옮겨졌으니, 그녀에게 2020년은 필모 상으로 특별한 해라고 할 수 있겠다. '액션' 또는 '여전사'의 해라고 할까. 


<올드 가드>는 샤를리즈 테론의, 샤를리즈 테론에 의한, 샤를리즈 테론을 위한 영화라고 해도 무방하지만, 들여다보면 보다 다양한 이야기를 전하고자 하고 있다.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전부터 죽지 않고 살아오면서, 세상을 위하는 한편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 온 불멸의 전사 집단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다. 최소한의 재미는 보장된 것 같고, 그 이상의 무엇이 있을까?


불멸의 전사 집단이 하는 일


이름도 없고 정체도 불분명한 불멸의 전사 집단을 이끄는 앤디(샤를리즈 테론 분)는 '안드로마케 스키타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족히 수천 년은 살았을 이름인데, 그녀가 이끄는 집단엔 3명의 남자가 있다. 십자군 전쟁에서 서로를 몇 번이고 죽였다는 커플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죽었다는 이가 그들이다. 그들은 전직 CIA 요원 코플리의 아이들 구출 작전 제안을 받아들여 수행하는데, 함정에 빠져 무참히 살해 당하곤 금방 되살아나 적들을 모두 죽이고 탈출한다. 와중에 교감몽을 꾸고 아프가니스탄의 어느 흑인 여성 군인이 새로운 불사인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된다. 


새로운 불사인을 찾아나선 앤디, 다른 대원들과는 파리 외곽의 안가에서 재회하기로 한다. 본인의 상황과 상태를 알지 못하거니와 알고 난 후 혼란에 빠진 새로운 불사인 나일과 함께 과격하게 티격태격하며 파리로 향하는 앤디, 일행과 조우하고는 현재와 앞날에 대해 생각하는데 누군가의 급습을 받아 2명이 끌려간다. 알고 보니 코플리가 거대 제약회사와 손을 잡고는, 불사인을 실험체로 하여 인류의 장밋빛 미래(?)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아프지 않고 죽지 않는 인류 말이다. 


앤디는 잡혀 가지 않은 부커와 신입 나일을 이끌고 잡혀 간 2명 조와 니키를 구하고자 한다. 그녀에겐 오래된 아픔이 있었으니, 마녀사냥 시대 때 그녀와 함께 한 불사인이 깊은 물속에서 영원히 고통과 죽음을 계속하게 된 걸 막지 못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일행을 구해내야 했다. 그런데, 그녀의 몸에 이상이 생기고 만다. 빠르게 치유되어야 할 몸이 갑자기 전혀 치유되지 않는 것이다. 무슨 일일까? '그때'가 온 것일까, 과연 무사히 일행을 구해낼 수 있을까. 


샤를리즈 테론의 액션


영화 <올드 가드>는 여성 감독이 연출하고, 여성이 단독 주연을 맡고, 또 다른 여성이 단독 주연만큼 중요한 역을 맡고, 파워풀하고 잔인하다고 할 만한 액션이 주를 이룬다.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영화에 다가가게 하는 힘이 여기에 있다. 바로 '샤를리즈 테론'의 액션 말이다. 믿고 보는 배우이자, 맡은 바 역할에 최선을 다하기로 유명한 그녀의 액션이라면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뚜껑을 열어 보니, 기대 이상이다. 감히 평하건대, 그녀의 액션은 여타 여배우들과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우아하게 거칠고, 속 시원하게 멋지며, 군더더기 없고 빠르다. 이는 남배우들은 흉내낼 수 없는 종류이니, 오롯이 그녀만의 액션이라고 하겠다. 그녀의 액션에 날개를 달아주는 이가 있으니, 신입 나일이다. 그녀의 액션은 보다 투박하고 둔탁하지만 보다 파워풀하고 패기 있다. 우아하고 시원시원하고 빠른 앤디의 액션과 대비되는 듯 조화를 이룬다. 그녀들의 액션 합만으로도 <올드 가드>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전형적이다 못해 오그라들 정도의 배경과 스토리라인을 장착하고 있는 이 영화가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가 전부 그녀 또는 그녀들에게 있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감탄을 연발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영화를 끝까지 보게 하는 힘은 다른 데 있다. 이 역시 그녀들의 힘인 건 매한가지인데,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에 맞닿아 있다. 


그저, 최선을 다해 현실을 살아갈 뿐


이 영화엔 생각보다 액션이 자주 그리고 오래 나오진 않는데, 그 사이사이를 메시지와 분위기 어린 이야기와 대사와 생각가 메운다. 영화의 극초반, 함정에 빠져 처참하게 죽었다가 되살아난 후 앤디의 생각과 대사가 뼈를 때린다. '전에도 이랬다. 반복에 반복, 매번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건가? 때가 온 걸까? 그리고 매번 같은 답이다. 너무 지긋지긋해.' "우린 한 게 없어. 세상은 나아지지 않아, 점점 나빠지기만 하지... 이따위 세상 불타 없어지든가." 지긋지긋할 정도로 수없이 많은 죽음과 부활을 해 오면서, 세상을 위해 노력하고 노력했지만, 나아지는 것 없이 오히려 나빠지기만 한다는 불쾌와 불만과 불신. 


자못 과한 설정으로 보일 수도 느껴질 수도 있을 터, 하지만 이 설정에서 시작되어 적게는 수백 년을 살아오고 많게는 수천 년을 살아오면서 느끼는 불사인만의 외로운 투쟁이 잔잔하지만 확실하게 전해진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반드시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을 항상 간직하고 살며, 세상을 위하고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 왔음에도, 오히려 세상이 자신들을 속이고 이용하려 한다는 불편한 진실까지 목도할 때 느끼는 절대적 외로움. 하여, 그들은 신입 나일이 합류하지 않는다 해도 막을 수 없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을 바꿀 수 없다. 누가 어떤 의도로 무엇을 위해 그들에게 그런 운명의 올가미를 씌운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다만, 그들은 현실을 살 뿐이다. 그것밖에 남은 게 없다고 한다. 어떻게 태어났든, 언제 그때가 올지 알 수 없을지라도, 최선을 다해 내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며 살아간다고 말이다. 바로 이 부분이야말로 이 영화를 끝까지 보게 하는 힘이다. 영화 속 불사인과 현실 속 우리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우리 또한 어떻게 태어났든 상관 없이, 언제 죽게 될지 알 수 없을지라도, 최선을 다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며 살아갈 뿐이지 않는가. 이 정통파에 가까운 판타지 기반 액션 영화를 보고, 그것도 수백 수천 년을 세상을 위해 살았다는 불사인을 보고, 이와 같은 생각까지 하게 되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 아닌가. 시청자 수 기반으로 엄청난 흥행을 선보이고 있다는 <올드 가드>, 흥행과 함께 영화의 끝 장면만으로도 후속편을 기대하게 만든다. 또 어떤 액션과 메시지를 던질지, 1편에서의 단점을 어떻게 보완할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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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 집단, 삶, 샤를리즈 테론, 액션, 여성, 올드 가드, 운명, 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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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보편에 속하는 그녀 그리고 나의 이야기 <그리고 베를린에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2020. 7. 6.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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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그리고 베를린에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그리고 베를린에서> 포스터. ⓒ넷플릭스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현재의 이야기다.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윌리엄스버그, 유대인 하시디즘 공동체 소속의 에스티는 17살이 되자 중매결혼한다. 그녀는 집을 떠난 엄마와 주정뱅이 아빠 대신 할머니 손에 길러졌는데, 반면교사 삼아 결혼에 대한 기대와 환상이 있었다. 하지만, 시댁 모두의 '감시' 아래 그녀에겐 오직 아이를 낳아 길러야 하는 의무만이 있을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에스티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엄마가 왜 떠났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녀 또한 엄마와 똑같은 수순을 밟고 있었다. 유일하게 외부와 소통하는 창구였던 외부인 피아노 교사를 통해 독일 베를린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엄마가 집을 떠나면서 그녀에게 주고간 증서 덕분이기도 했다. 그 증서 덕분에 에스티는 독일에서 살 수 있었다. 에스티 엄마도 다름 아닌 베를린에서 거주 중이었다. 


에스티 시댁 집안 어른들은, 에스티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베를린에서 그녀를 돌아오게 하는 방법을 강구한다. 집안의 수치이기도 하지만 사람 찾는데는 도사인 모이셰를 부른다. 에스티의 남편 얀키의 사촌 형인 그를 얀키와 함께 베를린으로 급파해 에스티를 데리고 오라는 것이었다. 한편, 에스티는 베를린에 무사히 도착했지만 어떻게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모르던 찰나 우연히 음악원 학생과 마주한다. 그리고 평소 애정하던 음악을 향한 열정을 비로소 쏟아보기로 하는데... 과연 그녀는 베를린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2020년을 대표할 명작 드라마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시리즈 <그리고 베를린에서>는, 미국 뉴욕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 유대인 하시디즘 공동체를 떠나 독일 베를린으로 향해 음악 등으로 진짜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데보라 펠드만의 자전적 회고록 'Unorthodox'를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원제가 품은 뜻인 '이단(異端)'이라는 단어가 주인공 에스티의 여정과 맞물려 눈에 띈다. 


작품은 크게 세 트랙으로 진행된다. 현재 베를린에서의 에스티, 에스티를 쫓아온 현재 베를린에서의 모이셰와 얀키 그리고 과거 뉴욕에서의 에스티.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은 모이셰와 얀키의 트랙을 뒤로 하면,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베를린과 뉴욕의 에스티가 극을 이룬다. 천천히 확고하게 변화해가는 에스티를 보는 것도 인상적이지만, 베를린과 뉴욕 모두에서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은 에스티도 인상적이다. 


이 작품은 지난 3월 말에 공개되어 2020년을 대표할 '명작' 드라마로 칭송받고 있는데, 그동안 개인적으로 손이 가지 않아 제쳐두고 있었다. 제목에서 그 어떤 흥미 요소나 의미 요소를 발견할 수 없었거니와, 생각할 거리가 많고 어려울 거라 지레짐작했기 때문이다. 조금은 늦게나마 뚜껑을 열어 보니, 생각할 거리는 많았지만 어렵지 않았고 매우 속도감이 빨랐으며 의외의 서스펜스도 선사해주었다. 드라마로서의 흥미 요소와 더불어,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다가오는 의미적 소구점 또한 그 어떤 콘텐츠보다 적확했고 논쟁적이었고 풍부했다. 


살고자 하는, 살고 싶은 삶


뉴욕 유대인 하시디즘 공동체에 대해 구구절절 읊을 필요는 없을 듯하다. 다만, 여성을 '아기 낳는 기계'로 대한다는 정도는 알아두자. 극중 에스티의 말로는, 홀로코스트로 희생 당한 600만 명의 유대인 수를 복구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또한 여성은 그 어떤 교육을 받을 수 없고 공동체 외부와의 접촉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결혼하면 머리를 완전히 밀어 버리곤 가발을 쓰고 다닌다. 외부인의 시선에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엄연한 그들만의 '문화'이다. 고로, 비판은 하되 비난을 할 수는 없을 테다. 


그럼에도, 비록 '문화'라는 이름이라고 해도, 인류 보편적인 시선에서 용인하기에는, 아주 불편한 구석이 있다. 적어도 이 작품을 통해서 본 뉴욕 유대인 하시디즘 공동체는 말이다. 이 작품이 앞으로도 길이 남을 '명작'으로 불릴 충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동안 누구도 알기 힘들었고 알 수도 없었으며 알고 싶지도 않았던 그들만의 문화를 수면 위로 정확하게 끌어올렸다. 우리의 시선에 다양성을 부여한 것이다. 나아가 이 작품의 명작인 이유에 드는 요건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에스티의 결심과 여정이다. 


에스티가 향하는 곳은 하필 독일 베를린, 히틀러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로 희생당한 유대인의 망령이 여전히 살아숨쉬는 듯한 곳이나 다름없다. 그곳에서 에스티는 도망칠 때 입었던 가발과 옷을 던져 버린다. 그리고 '감히' 치장을 하며 불경한 음식들을 먹는다. 또한 여성으로서 상상도 해본 적 없거니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교육'도 받고자 한다. '사랑'이라는 감정도 느껴 보고... 살아내야 하는 삶이 아닌, 살고자 하는 또는 살고 싶은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인류보편에 속하는 그녀 그리고 나의 이야기


'숱한 역경을 극복하고 행복하게 살았다'에서 그치면 명작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베를린에서>는 뉴욕에서와는 다른 베를린에서만의 실패를 그리며, 또 다른 차원의 고민에 가닿게 한다. 뉴욕의 공동체에서는 '육체(몸)'적으로 아주 편안하다. 어떤 면에서는 정신적으로도 편할 것이다. 먹고살 걱정 없이, 공동체 차원에서 모든 걸 해주니까 말이다. 반면, 베를린에서 에스티는 정신의 자유를 얻었지만 육체의 힘듦을 얻었다. 현실 앞에서 먹고살 걱정을 해야 하는 것이다.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거니와 독일어를 전혀 할 줄 모르니 살아갈 길이 막막하다. 


하여, 에스티를 찾아낸 얀키는 설득을 위해 원론적인 이야기를 던지는 대신 모이셰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던진다. 얀키가 '이제 나도 바뀔게. 아이를 위해서라도 함께 돌아가자'라고 하는 반면, 모이셰는 '네가 베를린에서 혼자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선택은 네가 해'라고 하는 것이다. 에스티로서는 모든 걸 건 선택을 해야 하는 입장, 돌아가든 남아 있든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그녀의 여정을 봐온 이라면 누구나, 그녀를 둘러싼 환경이 아니라 '그녀' 자체를 응원할 게 분명하다. 


에스티의 계속되는 선택의 순간들과 우여곡절이라는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여정을 보고 있노라면, 비록 여성 아닌 남성이지만 가슴이 벅차다. 아무리 부조리하고 잘못되었다고 느낀다고 해도 나를 둘러싼 환경과 상황이 곧 '세상'일 텐데, 세상 '밖으로' 나아가는 건 대다수에게 불가능에 가깝다. 하여, 그녀를 응원하는 것도 응원하는 것이지만 일면 부러움과 함께 선망의 눈길을 보내게 된다. 그녀와 나는 하등 상관이 없는 게 분명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 그녀와 나는 결코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그녀 그리고 나의 이야기는 인류보편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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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의 삶과 사상과 작품의 핵심을 엿보다 <조지 오웰>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20. 5. 1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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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도서 리뷰] <조지 오웰>


그래픽 노블 <조지 오웰> 표지. ⓒ마농지



에릭 아서 블레어, '조지 오웰'의 본명이다. 무명 작가였던 그는 유명 출판사에 소설을 투고했으나 번번이 퇴짜를 당하고는, 필명을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유명 소설가를 넘어,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견자'의 위치에 다달아 영원히 추앙받는 조지 오웰에게도 힘든 시절이 있었다는 걸 믿기 힘들다. 아마도, 조지 오웰의 사상과 작품은 알고 있지만 정작 그의 삶을 모르는 이유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나름 소설을 많이 봐왔다고 자부하는데, 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또는 존경하는 작가가 누구냐'라고 물어보면 단연코 '조지 오웰'이라고 말한다. 언젠가 조지 오웰이 제대로 된 소설가라고 할 수 있느냐라는 말을 들었는데, 충격적이기도 했지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도 생각했다. 그는, 소설가 이전에 저널리스트이고 소설가 이후에 사상가이다. 


그의 대표 작품들, 이를 테면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카탈루냐 전기> <동물농장> <1984>를 섭렵했으니 그를 웬만큼 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보다시피 그를 이루는 자장은 얇기는커녕 굵거니와 매우 다단계적이고 또한 사방으로 퍼져 있다. 그러니,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작품만으로는 그를 알기 힘든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의 전기를 들여다본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도 싶다. 


조지 오웰의 삶과 사상과 작품의 핵심


2020년은 조지 오웰 사후 70년이 되는 해이다. 저작권이 사라지는 해이기도 하기에, 그야말로 조지 오웰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앞으로 더욱더 많이 쏟아져 나올 게 분명하다. 와중에, 조지 오웰 70주기 기념 그래픽 전기 <조지 오웰>(마농지)이 찾아왔다. 엄청나게 큰 판형임에도 150여 쪽의 짧은 분량이기에 조지 오웰의 삶을 오롯이 담기엔 역부족일 테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조지 오웰의 삶을 가볍게 들여다볼 수 있고 추후에 있을지 모를 훨씬 깊게 들여다보는 시간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조지 오웰의 삶과 사상과 작품의 핵심으로 함께 들어가보자. 


조지 오웰은 1903년 인도에서 대영제국 아편국 하급 관리 아버지와 프랑스계 영국인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나 1년도 되지 않아 영국으로 돌아왔다. 시프리언스 사립예비학교에 반액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지만 부잣집 도련님들만 챙기는 분위기로 지옥같은 생활을 했다. 그럼에도 성적이 출중하여 이튼 칼리지에 진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국주의자' 양성이 최우선이었던 분위기에 맞추지 못하고 학업을 뒤로 한 채 독서에만 열중했다. 자연스레 성적이 떨어지기도 했지만 대학에 갈 마음이 없었기로서니,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인도 제국 경찰이 된다. 


인도의 영국 경찰로 5년간 성실히 근무하였지만, 역시 제국주의만 내세우는 위선에 깊은 혐오를 느끼고 나오게 된다. 이때의 경험으로 훗날 <버마 시절>을 집필하였다. 이후 그는 이모가 사는 프랑스 파리로 갔지만, 처참한 밑바닥 생활만 하고 돌아왔다. 이때의 경험으로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집필하였다. 1936년엔 결혼 6개월만에 스페인 내전 소식을 듣고 바르셀로나로 달려가 반정부군 소속으로 전쟁에 참가하였다. 희망도 얻었지만, 충격도 얻었다. 목에 관통상을 입고도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다. 이때의 경험으로 <카탈루냐 전기>를 집필하였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고 조지 오웰은 어떤 식으로든 참전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사상 면으로 건강 면으로 반려되고 말았다. 극구 입대를 하지만 그곳에서도 팽배한 제국주의적 시각에 환멸을 느끼고 나온다. 이후에도 끊임없이 글을 쓴 그는, 1945년 <동물농장>을 출간해 스탈린식 소련 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해 명성을 드높인다. 결핵으로 고생하던 와중에도, 1949년 <1984>를 내놓아 명성에 정점을 찍는다. 이 작품 역시 스탈린식 소련 체제를 비판한 것이지만, 본질은 '전체주의' 비판에 있다. 그의 삶, 사상, 작품 중심에는 언제나 '전체주의' 비판이 있었다.


바뀌지 않은 본질에의 신념


개인적으로 조지 오웰을 가장 좋아하고 또 존경하는 작가로 생각하고 그의 작품들을 최고의 소설로 생각해 왔지만, 정작 그의 삶과 사상을 몰랐었다는 게 부끄럽다. 와중에 이 작품 <조지 오웰>로나마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갈 수 있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막상 일별해 보니, 이전까지 어렴풋이 생각했던 바와는 다른 결이 보였다. 


나는 그의 사상이 계속 바뀌어 왔다고 생각했다. 보수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 회의주의자, 휴머니스트... 틀린 말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본질은 거기에 있지 않았다. 그의 본질은 '반(反) 전체주의' 그리고 '친(親) 사회민주주의'에 있었다. 그 평생 바뀌지 않은 본질에의 신념을 중심에 두고, 참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고 글을 쓴 것이다. 


이 짧지만 굵은 그래픽 전기 곳곳에 나와 있다. 조지 오웰의 삶과 사상과 작품의 중심과 본질이 어디에 있고 또 무엇이었는지 말이다. 이 책을 보고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는 조지 오웰의 작품이나 사상이 아닌 삶 그 자체에 매력을 느끼고 그와 같이 살고 싶은 게 아니었나 싶다.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는 대략적인 삶의 단면을 엿보고도 말이다. 비록 그의 삶이, 일반적인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보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노동하며 실천하고 글쓰기로 내보이는 삶


나도 어렸을 땐 공부를 괜찮게 했다. 조지 오웰만큼은 아니었을 테지만, 상위권에서 내려와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난 학업보다 책 읽기가 좋았다. 고3 수능을 앞둔 자율학습시간 때도 소설 책을 보다가 압수당한 기억도 있다. 성적에 걸맞는 대학을 가진 못했고, 적응을 하기 힘들어 꽤 오랫동안 휴학을 한 채 '밑바닥' 알바를 전전하며 돈을 벌기도 했다. 지금에 와선 전부 훌륭하고도 훌륭한 경험으로 남아 있다. 


그런가 하면, 난 정치색이 뚜렷하진 않지만 항상 민주 계열에 가까웠고 의심이 많아 나조차 잘 믿지 못하며 글로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표현하려는 열망이 높다. 문학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꽤 오래 일했지만, 정통 순수예술 문학계와는 거리가 있는 조지 오웰을 항상 가까이 했다. 현실 참여에 이은 현실 기반의 작품이 아닌, 머리에서 또는 자료에서 또는 타인의 현실과 경험에서 기반한 작품은 인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조지 오웰의 삶을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고 살아가려 하는 게 아닌가, 감히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그처럼 살아갈 용기가 있는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그처럼 평생 노동하며 실천하고 글쓰기로 내보이는 삶을 살아갈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하지만, 그처럼 유명해질 수도 그처럼 위대한 사람이 되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다. 다만, 그처럼 나도 나의 삶과 사상과 작품으로 나의 생각을 내보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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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70 주기, 글쓰기, 동물농장, 사상, 사회민주주의, 삶, 작품, 전체주의, 조지 오웰, 카탈루냐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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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공감과 삶의 보편적 단면으로 중무장한 이주민 드라마 <타이거테일>

넷플릭스 오리지널 2020. 5. 5.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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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타이거테일>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타이거테일> 포스터. ⓒ넷플릭스



핀쥐이는 어릴 때 대만의 시골 '호미(타이거테일)'에서 할머니 손에 키워진다. 할머니는 그에게 울지 말고 말을 적게 하며 강해지라고 말하곤 했다. 1950년대, 장선한 핀쥐이는 홀어머니와 함께 살며 함께 공장에 다닌다. 그에겐 어릴 때부터 친구인 위안이 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는데, 잘사는 위안과 못사는 핀쥐이는 이어지지 못할 운명이었다. 엄마를 끔찍이 생각하고 아끼는 핀쥐이는, 미국으로 건너가 성공하고픈 꿈을 꾸고 있었다. 


결국 핀쥐이는 사랑하는 위안을 뒤로 하고 사랑하지 않는 공장장의 딸과 결혼하면서 미국으로 건너가는 길을 택한다. 성공한 뒤 엄마를 데려올 생각이었다. 오랜 세월 성실하게 일해 성공으로 가는 핀쥐이, 하지만 공장장 딸과의 관계는 점점 금이 가기 시작한다. 그들 사이에선 딸이 태어나고 집도 더 큰 곳으로 옮긴다. 중년에 이른 어느 날, 핀쥐이는 이혼을 당한다. 


세월이 흘러 장성한 핀쥐이의 딸 앤젤라, 하지만 핀쥐이와 앤젤라는 한 없이 서먹서먹할 뿐이다. 앤젤라 또한 남편이 떠나서 힘든데, 아빠하고 얘기를 할 수가 없다. 그런 딸을 두고 홀로 대만의 어머니 장례식에 다녀온 핀쥐이, 큰 집에 홀로 남아 회한과 후회와 그리움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이 성공한 이민 가족은, 무엇을 위해 살아왔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으며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이민자 가정의 이야기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타이거테일>은 하버드대학교 출신의 전도유망한 드라마 연출가이자 각본가 앨런 양의 영화 연출 데뷔작이다. 그는 일찍이 2002년부터 활동을 해 왔는데, 이름을 날린 작품은 NBC 드라마 시리즈 <팍스 앤 레크리에이션>이다. 이 작품으로 에미상 등 많은 어워드에 노미네이트되는 기염을 토했다. 이후 NBC <굿 플레이스>, 넷플릭스 <마스터 오브 제로>, 아마존 프라임 <포에버>, 애플TV <리틀 아메리카>까지 꾸준히 드라마 연출을 해 왔다. 이중 <마스터 오브 제로>로 기어코 에미상을 거머쥐었다. 


대만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앨런 양 감독은 아버지에게서 들은 얘기를 바탕으로 <타이거테일>을 만들어다고 한다. 현재의 미국과 과거의 대만을 오가는 구조를 제외하곤 평범하고 평면적이기 짝이 없는 이야기인데, 처음부터 층층이 쌓아올린 감정이 마지막에서 소소하고 잔잔하게 터지는 걸 목격할 것이다. 이민자 가정의 슬프고 안타까운 말로를 그린다고 볼 수 있는데, 아메리칸 드림을 꿈꾼 동양계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형태를 띈다. 


최근 들어 동양계 미국 이주민 영화가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중국계 미국 이주민 가족을 다룬 <더 페어웰>이 유수 영화제에서 화제를 뿌리며 연내에 국내 개봉이 예정되어 있고, 36회 선댄스영화제 관객상과 심사위원대상으로 큰 주목을 받은 <미나리>는 한국계 미국 이주민 가족 이야기이다. 그런가 하면 제작년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둔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도 함께 큰 맥락을 형성한다. 엄연히 미국 영화이지만 백인은 눈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는 <타이거테일>이 계보를 잇는다. 


이 순간을 받아들이는 용기


영화는 시종일관 잔잔하지만 지루하진 않다. 중간중간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을 보여 주고자 약간의 배경이 바뀐 동일한 장면을 수없이 반복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지루하기에 앞서 깨달음을 준다. 별것 아닌 하루하루가 모여 일상을 이루고, 그렇게 이루어진 일상을 바꾸기에도 되돌리기에도 힘들다는 것. 명백한 미래의 목표가 있을 때나 과거에 매몰되어 있을 때나, 시간은 하염없이 흐르고 있다는 것. 


하여, 먼 미래만을 보여 별 생각 없이 매순간, 매시간, 매일을 보내면 언젠가 후회로 남을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내 몸은 언제일지 모를 미래의 그때 그곳으로 가 있는데 말이다. 그런가 하면 계속해서 과거를 추억하며 현재를 온전히 보내지도 못하는 것도 안 될 일이다. 결국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하다. 


스포일러가 될지 모르지만, 영화는 '타이거테일(호미)'에서 시작해 '타이거테일'에서 끝난다. 단순히 대만의 한 지역을 뜻할지 모르겠지만, 실상 사람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시작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있을 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말이다. 그때마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또는 새롭게 시작하려면, 시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일 수도 있겠다. 


우리네 삶과 맞닿아 있는 보편성


핀쥐이의 삶은 비단 이민 가정에만 국한되어 있진 않다. 누구나의 인생과도 맞닿은 보편적 삶의 단면이다. 그는 희망은 없지만 사랑은 있는 현실에서, 희망을 택했다. 그에게 희망은 곧 성공이었고, 성공을 향해 맹렬히 달려갔다. 그의 맹렬함에 아내와 딸이 멀어졌다. 비단 그 맹렬함이 다름 아닌 아내와 딸을 위함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안타까운 이 상황은 우리네 삶과 맞닿아 있다. 


굳이 이민을 가지 않더라도, 누구나 희망과 성공을 위해 맹렬히 달리며 정작 중요한 것들을 생각하지 못한다. 아니, 알면서도 모른 채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우린 아직 그에 대한 정답을 찾지 못했기에, 수많은 나름의 해답을 내놓으며 혼자 아닌 함께 후회와 회환의 의식을 하는 것이다. 그 나름의 해답이 현실로 말끔히 이루어질 때 자신 있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 거다. 


영화는 나름의 해답을 내놓았을까? 아직 늦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시작으로 돌아가라는 것. 영화적 해답이 실제 삶에 통용될 수 있을 것 같은가? 영화가 시종일관 내 보인 지극한 현실 감각으로 미루어볼 때 통용될 수 있을 것 같다. 당장이라도 실행에 옮길 수 있는가? 실행에 옮길 수 없는 건 없을 것이다, 문제는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의지가 있느냐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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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같은 탈출이 곧 죽음보다 힘든 삶에의 투쟁 <12번째 솔저>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9. 5. 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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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12번째 솔저>


영화 <12번째 솔저> 포스터. ⓒ엣나인필름



제2차 세계대전은 현대 세계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다. '절대적'이라고 표현해도 과하지 않을 만큼 영향을 끼쳤다. 비록 선진으로 나아가던 유럽이 야만으로 빠지게 되어 충격을 받은 건 제1차 세계대전 때였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더 큰 전쟁이 일어난 건 5대양 6개주 56개 이상의 나라들 모두에게 헤어나올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내년이면 종전 75주년, 참으로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이 전쟁에 관한 콘텐츠는 여전히 다양하게 소개되고 있다. 영화도 물론이다. 매해 여러 나라에서 몇 편씩은 만드는 것 같다. 그동안 미국을 위시해 주요 참전국이었던 독일, 러시아, 일본, 영국, 프랑스, 중국 등의 이야기를 참으로 많이 들어왔다. 특히, 미국과 미국을 상대했던 독일과 일본의 전쟁은 정말 다양한 시선을 선보여왔다. 


최근 들어서는 조금 다른 전쟁영화들이 찾아왔다. 2017년에 나온 전쟁영화를 표방한 '재난' 영화 <덩케르크>와 종전 후 연합국 측인 덴마크군이 독일군 소년 포로로 하여금 지뢰를 제거하게 한 실화를 다룬 <랜드 오브 마인> 같은 영화들이 그 예다. 올해에도 전혀 접해보지 못했던 제2차 세계대전의 이야기가 영화로 나왔다. 당시 노르웨이군의 실화를 다룬 <12번째 솔저>다. 이 영화는 전쟁영화를 표방한 '탈출기'다. 


탈출을 상상할 수 없는 탈출


도무지 탈출을 상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탈출을 시도한다. 영화 <12번째 솔저>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1940년 초반 독일은 노르웨이를 침공해 점령해버린다. 영국에서 독일 항공기지 파괴 임무를 띤 노르웨이군 12명이 급파된다. '마틴 레드 작전'이다. 하지만 접선책 정보 미갱신으로 엉뚱한 사람과 접선을 하는 바람에 노출되어 그들은 배를 폭파시키고 탈출한다. 지상으로 가지만 그곳엔 이미 독일군이 진을 치고 있었고, 현장에서 1명이 죽고 10명이 잡힌다. 1명만 간신히 살아남는다. 


살아남은 1명 얀 볼스루드는 초반 탈출 시도 직후 총에 맞아 엄지발가락이 날아간다. 그럼에도 필사의 탈출을 시도, 첫 위기를 간신히 넘긴다. 그를 쫓는 독일군 대령도 그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추운 노르웨이 땅에서, 엄지발가락이 날아가버린 상태로, 얼음물을 몇 Km나 건너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또 다른 독일군 대령 커트 스테이지는 상식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노르웨이인으로 남보다 더 투철하게 충성하거니와 노르웨이에서의 노르웨이인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이보다 더 춥고 추운 만큼 치열하고 치열한 만큼 안타까운 탈출을 상상할 수 없는 탈출이 시작된다. 얀은 스웨덴을 거쳐 영국으로 돌아가는 게 목적이다. 처음엔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탈출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그, 가는 길마다 그의 탈출을 돕는 노르웨이인들이 있다. 그들은 그의 탈출을 도우며 희망 없는 현실에서 기적을 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얀의 탈출기는 점점 더 삶보다 죽음을 택하고 싶을 정도로 가혹해진다. 


죽음보다 힘든 삶에의 투쟁


그의 탈출은 곧 삶에의 투쟁이다. 죽음보다 힘든. 영화 <12번째 솔저>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영화 <12번째 솔저>는 한 인간의 죽음보다 힘든 삶에의 투쟁을 그린다. 제2차 세계대전 한복판의 겨울 노르웨이 설원을 배경으로 끔찍한 부상을 당한 채 자연과 싸우고 적군에게 쫓기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게 특이점이다. 지난 3월 말에 개봉했던 매즈 미켈슨 주연의 <아틱>이 생각나게 하는데, 그 영화에서 주인공은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위함으로써 기적을 바라는 마음을 온몸으로 표출했다면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살아남는 것이 그 자체로 기적이기에 온몸으로 탈출을 감행했다. 


노르웨이는 오랫동안 덴마크와 스웨덴의 지배를 받아왔던 바, 20세기 초에 독립을 하지만 반 세기도 지나지 않아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나라를 빼앗긴다. 이에 영국으로 탈출해 망명 정부를 세우고 독일군에 대한 격렬한 저항운동을 시행한다. '마틴 레드 작전'은 그 시작점과도 같은 것으로, 최후의 1인 얀 볼스루드가 살아돌아오는 기적을 연출함으로써 크나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영화는, 그러나 노르웨이 '국뽕'에 심취한 시선이나 행동이 주가 아니다. 물론, 독일군에게 피해를 주기 위해 목숨을 내버리다시피 하며 작전에 투입되는 이들의 영웅적인 행동은 다분히 '국가'가 제일 앞에 나올 수밖에 없게 한다. 반면 얀 볼스루드는 국가보다 11명의 '전우'다.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려면 살아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살아돌아가게 돕는 노르웨이인들 역시 국가보다 '기적에의 희망'이다. 희망 없는 현실을 버티고 미래를 그릴 수 있는 기적 말이다. 


전쟁영화답지 않은, 미시적이고 세밀한 


영화는 '전쟁영화'답지 않게 미시적이고 세밀하다. 영화 <12번째 솔저>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영화는 여타 전쟁영화와는 다르게 거시적 스펙타클이나 총체적 액션이 나오지 않는다. 지극히 미시적이고 세밀하다. 얀의 탈출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북극에 가까운 추운 곳 노르웨이의 겨울, 부상 당한 채로 쫓기는 이를 보고 있노라면, 같은 인간으로 그저 응원하게 된다. 제발 붙잡히지 말라고, 제발 죽지 말라고, 제발 살아남아 탈출하라고. 


삶은, 죽음에 가까워졌을 때 죽음에 직면했을 때 죽음을 목도했을 때 비로소 그 온전한 힘을 발하게 되는 것 같다. 그저 눈을 감으면, 몸에 힘을 풀면, 생각을 접으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을, 절대 포기하지 않고 다시 눈을 뜨고는 몸에 힘을 불어넣고 생각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한다. 전쟁에서 이긴다는 막연한 목표 이상의, 인간으로서 계속 살아가야겠다는 숭고한 목표가 생겨난다. 


그런 면에서 다분히 전쟁을 연상시키는 제목의 이 영화 <12번째 솔저>는 굉장하다. 삶에의 충만한 에너지로 가득하다. 제목만 보고 치워버리지 말고 오히려 꼭 끌어안았으면 한다. 그 삶에의 투쟁이 주는 육체적 고통이 상상을 초월하지만, 그래서 얼굴이 찌푸려지고 뒷덜미에 소름이 끼치고 머리카락이 바짝 서고 모골까지 송연해지겠지만, 사실 그게 우리의 삶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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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번째 솔저, 노르웨이, 마틴 레드 작전, 삶, 제2차 세계대전, 죽음,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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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한 삶도 충분히 아름답고 특별할 수 있을까? <나의 작은 시인에게>

모모 큐레이터'S PICK 2019. 4. 1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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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큐레이터'S PICK] <나의 작은 시인에게>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 포스터. ⓒ(주)엣나인필름



미국 뉴욕의 작은 섬에서 20년째 유치원 교사로 살아가는 리사(매기 질렌할 분), 매일매일 따분한 일상을 영위하는 그녀에게 유일한 낙은 종종 있는 야간 시 수업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좋은 평가를 얻지 못해 좌절할 뿐이다. 자신의 평범한 예술적 감각을 이해와는 와중, 그래도 다정다감한 남편이 있어 위로가 되지만 다 큰 아들과 딸들은 그녀의 성에 차지 않는다. 또 그들은 부모를 경원시하는 것 같다. 


어느 날 우연히 유치원생 중 다섯 살 난 지미(파커 세바크 분)가 앞뒤로 오가며 시를 읊는 장면을 포착한다. 그 꼬마에게서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천재적 면모를 발견한 리사는 곧바로 달려가 시를 받아적고는 보모에게 말해 집에서도 지미가 불현듯 읊는 시를 옮겨적을 것을 부탁한다. 리사는 지미의 시를 야간 시 수업에서 가서 발표하고 전에 없는 칭찬세례를 받는다. 


그녀는 지미의 시를 몇 편 더 자신의 야간 시 수업에서 발표하는 한편, 지미를 훈련시키기 시작한다. 자신은커녕 주위에 그 누구도 알아봐주지 않고 또 못하는 그의 시적 예술 재능을 최대한으로 끄집어내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건 평범한 시적 예술 재능을 지녔지만 욕망과 열망이 꽃피어난 자신을 대신하려는 움직임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리사의 지미를 향한, 아니 리사의 시적 예술 재능을 향한 광기는 어떻게 흘러갈까. 


유치원 교사


원작의 제목은 <유치원 교사>, 이 제목이 훨씬 더 적절해 보인다.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의 한 장면. ⓒ(주)엣나인필름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이스라엘의 훌륭한 연출가이자 작가인 나다브 라피드의 2014년작 영화 <시인 요하브>를 원작으로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로스앤젤레스타임즈가 '훌륭한 원작의 영리한 재해석'이라고 평했는데, 딱 들어맞다고 생각한다. 1980년생 사라 코랑겔로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인 만큼 감각적으로 재해석했다. 


원제가 <The Kindergarten Teacher>, '유치원 교사'이다. 한국어판 제목인 '나의 작은 시인에게'가 주는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이 제목은 직설적이고, 주체가 '작은 시인'처럼 느껴지게 하고, 심지어 영화가 달달할 것 같다고 짐작하게 만든다. 즉, 한국어판 제목은 상당히 잘못 지었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겠다. 


반면 원제 <The Kindergarten Teacher>는 그 무엇도 지레짐작하지 않게 한다. 대신 영화를 보며 계속 곱씹을 수 있다. 유치원 교사이자 엄마이자 아내이자 여자인 리사, 그녀는 이제 유치원에서 전에 없던 예술적 열망에 눈을 뜨게 된다. 그건 교사, 엄마, 아내라는 명명에서 벗어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녀에게 예술적 열망은 곧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가꾸고 나아가는 것과 다름 없는 것이다. 


40대 여성 리사의 삶


교사이자 엄마이자 아내로서의, 40대 여성 리사의 삶은 무엇일까.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의 한 장면. ⓒ(주)엣나인필름



영화는 매우 '시시하게' 시작된다. 평화롭고 나른하고 무료한 일상을 단 한 장면으로 보여주는데, 곧 40대 여성 리사의 삶이다. 안정적이지만, 그래서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삶 말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우선 '리사의, 리사에 의한, 리사를 위한', 리사를 주체로 하여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녀의 고뇌와 열망과 삶을 총체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 다섯 살 천재 시인 '지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리사에 의해 '모차르트급 재능의 천재 시인'이 된 지미는, 그러나 영화에서 결코 주인공도 주체도 될 수 없다. 혹자는 이를 두고 영화 <아마데우스>의 천재 모차르트와 그를 시샘하는 범인 살리에리를 연상시킬 수도 있겠고, 그 영화에서 사실 주인공이자 주체는 모차르트가 아니라 살리에리라며 운을 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리사와 지미는 살리에리와 모차르트가 아닌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와 모차르트에 가깝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일찍이 알아본 레오폴트가 철저히 교육시키고 또 일명 '그랜드투어'로 유럽 전역을 다니며 홍보도 했기에 모차르트가 모차르트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리사는 지미의 보호자가 아니고, 다행히도 레오폴트는 모차르트의 보호자였다. 


이런 관계 설정이 영화의 한 축이라면, 그로 인해 변해가는 40대 여성 리사의 삶이 또 한 축이겠다. 유치원에서도 집에서도 시 수업 교실에서도 그녀는 전에 없는 열망 어린 눈빛과 몸짓을 보이며 한껏 활기찬 삶의 여운을 내보이는 듯하다. 물론 그에 따른 희생량이 있어야 하므로, '누군가가 전해주는 시를 그저 읊을 뿐인' 천재 시인 아이 지미가 그 희생양일 것이다. 


예술적 열망의 표출


예술적 열망이 표출되다 못해 폭발한다. 그 끝은 어떤 모습일까.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의 한 장면. ⓒ(주)엣나인필름



크게 영화를 구성하는 두 축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데 다층적인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리사가 단순히 자신의 예술적 열망을 분출할 매개체로 지미를 이용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한편 지미의 천재적 시적 예술 재능을 아무도 알아봐주지 않고 알고 싶지도 않다는 걸 알기에 그렇게 그냥 묻혀버리기엔 너무 아쉽고 안타깝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극중에서 지미가 시를 얼마나 좋아하고 즐기고 하고 싶어 하는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대략적으로나마 재단하기도 힘들 것 같다. 결국 감독이 전하고 보여주고자 하는 건 리사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리사의 시적 예술 열망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반면 교사이자 아내이자 엄마로서의 무료한 삶에 변화를 주고 싶다는 열망은 추상적으로 드러난다. 


리사의 열망과 욕망이 좀 더 다층적이고 다채롭고 구체적으로 드러났다면 영화가 좀 더 풍성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조금 있지만, 영화가 다루고 있는 게 다름 아닌 '시'라는 점에서 나도 모르게 이해가 가기도 한다. 시를 잘 모르지만, 시에 '추상'이 상당히 용인된다는 건 인지하고 있다. 이 영화를 한 편의 시로 생각하면 그러려니 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극 중에서 몇 번이나 읊어지는 지미의 첫 시를 인용한다. 무료한 삶도 충분히 아름답고 특별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애나는 아름답다

나에게는 충분히 아름답다

태양이 그녀의 노란색 집을 두드린다

마치 신이 보낸 신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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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절대 눈가리개를 벗지마, 알아들었니?" <버드 박스>

넷플릭스 오리지널 2019. 1. 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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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버드 박스>


영화 <버드 박스> 포스터. ⓒ넷플릭스



"절대, 절대 눈가리개를 벗지마, 알아들었니?" 멀레리(산드라 블록 분)는 두 어린 딸과 아들에게 주지시킨 후 먼 여행을 떠난다. 눈가리개를 하곤 바깥으로 나와 숨겨놓은 보트를 꺼내 강을 항해한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눈을 떠도 자살하지 않는 안전하다는 곳이다. 


5년 전, 전 세계에 재앙이 닥친다. 미지의 '악령'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살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알 수 없는 재앙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창문을 모두 가린 채 집안에만 있는 것 또는 눈가리개로 눈을 가린 채 집밖을 나오는 것. 


해결 방법을 찾지 못한 채 종말로 치닫는 세계, 5년이 지났음에도 변함없이 그대로인 세계. 눈을 가리면 '안전'한 세계인데 눈을 뜨고도 '안전'하다는 그곳은 과연 어떤 곳인가, 그곳에 있는 눈 뜬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한편, 멀레리가 '악령'의 소재 파악을 위해 항상 동행하는 세 마리의 '새'는, 그리고 새를 담아두는 '상자'는,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연이자 주역이다. 주제와 맞닿아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아포칼립스와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지금 이순간의 현실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게 새와 상자이다. 


산드라 블록의 영화


영화 <버드 박스>는 보는 이마다 확실하게 호불호가 갈릴 게 분명한, 그래서 차라리 영화를 보기 전에 얇게나마 해석을 엿보는 게 좋을 그런 영화이다. 이 또한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수작이라면 수작이랄 수 있겠다. 긴장감 어린 설정과 예측할 수 있는 결말보다 과정에서의 메시지와 그에 대응하는 현실을 들여다보려는 데 집중해보자. 


<문라이트> 이후 주연급으로 발돋움한 트래반트 로즈와 이제는 그 이름 자체로 하나의 상징이 되어버린 존 말코비치가 함께 열연하거니와,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를 석권한 <인 어 베럴 월드> 등으로 유명한 덴마크 출신 감독 수잔 비에르의 최신작이지만, 뭐니뭐니 해도 이 영화는 산드라 블록의 영화이다. 


1990년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할리우드 스타 중 하나인 산드라 블록은, 2000년대 들어 진정한 전성기를 맞이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크래쉬> <블라인드 사이드> <그래비티>라는 인생 영화를 만났고 한다 하는 여배우 8명을 모아놓은 <오션스 8>에서는 메인 센터에 서기도 했다. 


와중 <로마> <모글리> 등과 더불어 넷플릭스의 2018년 12월 최신작 <버드 박스>는 설정과 배경에서 <눈 먼 자들의 도시> <콰이어트 플레이스> <해프닝> 등을 생각나게 하는 동시에 <그래비티> <칠드런 오브 맨>과의 접점도 있어 보인다. 


그 덕분일까. 지난해 12월 28일 넷플릭스가 트위터를 통해 <버드 박스> 1주일 성적표를 발표했는데, 자그마치 4500만 명이 시청했다고 한다. 크레딧까지 포함 전체 70% 이상 관람한 수이자, 여러 사람이 함께 봤을 경우도 한 사람으로 체크한다고 한다. 아주 단순무식한 비교이지만, 북미 평균 극장 티켓가를 약 9달러로 상정했을 때 4500만 명이 관람한다면 약 4억 달러를 벌어들인 것이다. 


넷플릭스 사상 최고의 흥행을 기록한 영화 <버드 박스>, 설정의 힘일까 산드라 블록의 힘일까. 영화 <버드 박스>의 한 장면. ⓒ넷플릭스



앞을 볼 수 없는 공포, 앞을 보아선 안 되는 공포


앞을 볼 수 없는 건 상상을 초월하는 공포를 선사한다. 더욱이 어쩔 수 없음을 기반으로 하여 공포의 대상이 밖으로 수렴함에도 불구하고, 볼 수 있기에 보고 싶다는 내적 요소도 함께 하여 더욱 힘들게 한다. 앞을 보아선 안 되는 건 공포 이상의 자극을 불러오는 것이다.


<버드 박스>는 볼 수 있지만 보면 안 되는 점을 내세워, 단순히 앞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만 오는 공포만을 직시하지 않고 볼 수 있다는 내적 갈등도 함께 내보인다. 영화는 공포보다 바로 이 내적 갈등에 초점을 맞춘 듯하다. SF형 공포와 서스펜스를 동반한 스릴러가 만난 것이다.


그래서 '보면 안 돼'라는 별 것 아닌 듯 보이는 문구에서 오는 작용과 반작용이 심오하게 작용할 수 있다. 모든 이가 죽어가는 이 '보는 세상'의 종말 앞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서 죽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점이다. 죽음에의 광신도들이 출몰하여 그 한순간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진정한 삶이라고 주장하는 게 당연 와닿지 않지만 일면 이해가 된다.


여기에 멀레리가 아이들에게 절대로 하면 안 되는 것들만 일별하고, 반드시 조만간 죽을 종말의 시기이기에 미래나 희망 없이 아이들에게 이름조차 붙여주지 않는 상황에서, 보지 못하는 '삶'이라는 것이 무엇이고 무슨 의미를 갖는지 모르는 것이다. 


완전하지 않은 스릴러, 그럼에도 존재하는 미덕


생각보다 재미있지는 않지만, 특유의 분위기가 꽤 오랫동안 머문다. 영화 <버드 박스>의 한 장면. ⓒ넷플릭스



새와 새 상자는 그들이 악령을 감지하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멀레리와 아이들,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과 정확하게 병치된다. 제목인 것에서만 봐도 알 수 있듯 영화의 내외적으로 아주 중요한 존재인 것이다. 


새는 새 상자가 아닌 새장에서 키우고 이동한다고 해도 새장으로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새들도 인간처럼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칠흙 같은 어둠 속 상자에 있다. 보는 것 자체는 가능하지만 보면 안 되는 세상 속 기약없는 위험한 여행을 떠나는 세 명의 인간과 똑같다. 


전반적으로 치밀하지 못하고 루즈한 감이 없지 않아 있는 스릴러이다. 흥미 돋는 설정과 배경으로 초중반의 긴장감이 후반부의 감동 어린 여정으로 자연스럽게 이어가는 건, 5년 전 사건이 처음 시작되는 시점과 현재의 기약없고 위험한 세 명의 여정 사이의 연결에 있다고 할 텐데 이 또한 완전하다고 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몇몇 점들에서 확고한 미덕이 존재한다. 산드라 블록과 아이들의 연기는 영화에 활기를 불러넣고 종말에 닥쳤음에도 미소를 불러일으킨다. 공포의 종류가 외적 공포와 내적 갈등을 수반하고 새와 새 상자로 대변되는 상징과 병치의 것들은 대체로 자연스러워, 영화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여타 종말 스릴러 장르 영화에 비해 색다르고 명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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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 혁명의 연장선상에서, '힘든' 삶으로의 나아감까지 <그래비티>

오래된 리뷰 2018. 12. 1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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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


영화 <그래비티> 포스터. ⓒ워너브라더스코리아



2009년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로 시작된 3D 혁명, 그 유산은 2012년 이안의 <라이프 오브 파이>와 2013년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 두 작품은 3D 혁명의 유산을 목적 아닌 수단으로 이용했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삶'의 경이로움을 말하는데, 평생 뇌리에 남을 기적 같은 비쥬얼을 선사한다. 또한 두 작품 모두 올해 사이좋게 재개봉을 했다는 공교로움이 함께 한다. 


이중 <그래비티>의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올해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로마>로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거머쥐며 2013년의 올해 최고에 이어 2018년의 올해 최고로 등극했는데, 필모를 들여다보면 알다시피 굉장히 과작하는 감독이다. 기획과 제작하는 영화에 비해 연출하는 영화는 많지 않다. 


90년대 최고의 음수대 키스신으로 유명한 <위대한 유산>, '해리포터' 시리즈 중 가장 좋은 평가를 받지만 어두운 톤 때문에 흥행성적은 가장 낮았던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그래비티>의 성공 이후 10년 만에 국내에 개봉되었던 명작 <칠드런 오브 맨> 등이 그의 작품이다. 


이밖에도 그가 연출한 작품들이 5개도 되지 않으니 25년 여 동안 10 작품 정도 내놓은 것이다. 와중에 <그래비티>는 영화 역사상 CG와 3D에 있어서도 '우주 영화'라는 장르에 있어서도 한 기수가 넘어가는 기준이 될 만한 중요 영화이지만, 알폰소 쿠아론 감독 개인의 필모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영화일 것이다. 


'편안한' 죽음과 '힘든' 삶 사이에서


'편안한' 죽음인가, '힘든' 삶인가. 영화 <그래비티>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우주 왕복선 익스플로러에 탑승해 우주에서의 첫 번째 임무인 허블 만원경 수리를 작업 중인 라이언 스톤 박사(산드라 블록 분), 그녀와 함께 마지막 임무를 수행 중인 우주 비행사 맷 코왈스키(조지 클루니 분). 임무를 마칠 때까지 아직 한 시간 정도 소요될 예정인 상황에서, 휴스턴의 우주비행 관제센터에서 경고가 날아온다. 


러시아 측에서 자국의 사용하지 않는 인공위성을 부술 요량으로 미사일을 쏴 거대하고 많은 파편들이 생성되어 빠른 속도로 지구 궤도를 돌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즉시 임무를 중지할 것과 익스플로러에 탑승해 빨리 지구 궤도로 재진입할 것을 명한다. 하지만 이내 파편들이 그들을 덥쳐 뿔뿔이 흩어진다. 


우주미아가 된 스톤,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그녀에게 맷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곧 그녀를 구해준다. 익스플로러로 돌아가봤으나 모두 죽고 모두 박살났다. 그들은 비록 산소가 다 떨어져 가지만 멀리 떨어진 국제 우주 정거장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때까지 그들은 '함께'지만 과연 언제까지 함께일 수 있을까. 


90분마다 더 거대하고 많은 파편들이 더 빠른 속도로 그들을 덮칠 예정인 와중에 산소는 다 떨어져 간다.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실날 같은 방법을, 즉 기적을 수없이 되풀이해야만 한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힘든' 삶을 영위할 것인가. 


삶과 죽음의 대치들


영화에 수많은 삶과 죽음의 대치들이 보인다. 영화 <그래비티>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코리아



'드넓다' 또는 '끝없다'는 표현으로는 적절하지 않은 지구 궤도 밖 우주 한복판, 삶과 죽음에 어떤 차이도 의미도 찾을 수 없는 그곳에서, 티끌보다 작고 못한 존재인 한 인간이 있다. 그녀, 라이언 스톤 박사는 지구에서 어린 딸을 허무하게 잃고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우주의 고요함이 좋다. 


영화는 광활한 우주와 아름다운 지구가 주배경임과 동시에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인 와중에, 다름아닌 우주와 지구 사이를 여러 가지 의미들로 대치시켜 놓는다. 기본적으로 이 재난 상황과 스톤 박사의 상황에 비춰볼 때, 우주는 죽음으로 지구는 삶으로 대치할 수 있겠다. 


그리고 티끌 같은 소리 한 점 찾을 수 없는 우주적 고요함을 역시 죽음과 다름 없는 단절 상황에, 시시콜콜 끝없이 얘기를 주고받는 스톤, 맷, 우주비행 관제센터 간의 대화는 우주적 고요의 단절과 대비되는 연결 상황으로 바꿔 생각해볼 수 있다. 


여기에 이르면 드디어 제목 '그래비티'의 의미에 다다른다. 지구로 향하는 끝없는 타의지인 중력은 다름 아닌 '삶' 그 자체이다. 반면, 우주미아가 되어 우주를 유영할 때나 죽어서 우주를 허망하게 떠돌 때나 모두 무중력 상태에 처하게 되는데, 다름 아닌 '죽음'과 다름 아니다. 영화는 이처럼 모든 것들에 삶과 죽음이 대치되어 있다. 


삶을 받아들이게 하는 영화


결국, '삶'이다. 그래도, '삶'이다. 영화 <그래비티>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이 영화가 CG와 3D의 영화 외적으로 영화사에서 큰 의미를 가지는 건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누구나 충분히 느끼고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진정 '위대'한 점은, 영화 내적으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인생에서 '삶'에의 끝없고 끈기있는 나아감을 받아들이게 한다는 점이다. 


영화가 계속 죽음을, 그러니까 우주의 고요함과 재난 상황과 제어할 수 없는 무중력과 이어지는 죽음, 단절을 보여주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아이러니하지만 인간은 죽음에 가장 직면했을 때 비로소 삶의 진면목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생 어차피 혼자다'라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쓴웃음을 유발시키지만 결코 웃을 수 없는 이 명제를, 영화는 진지하게 그래서 끔찍하다고 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삶의 '당연함'이 아닌 그럼에도 '살고 싶다' '살아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단절된 혼자와 연결된 혼자는, 무서움과 두려움을 동반하는 것과 외로움을 동반하는 절대적 큰 차이가 있다. 


결론에 비춰 영화에서 말하는 '삶'을 조금 더 들어가보면, 스톤 박사의 상황은 단순히 죽음에서 삶으로의 방향 선회가 아닌 죽음에 몇 번이고 이르렀다가 다시 사는 부활 또는 재탄생의 의미가 있다. 그녀는 적어도 세 번(우주미아, 산소부족, 연료부족) 이상 사실상의 죽음에 이르렀는데, 다시 살게 된다. 


삶에의 향함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가장 이성적 본능인 것일까, 본능적 이성인 것일까. 스톤 박사가 다시 살게 되는 몇 번의 장면들은 이성 또는 본능 어느 한 면만으로는 완벽한 설명이 부족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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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 CG, 그래비티, 삶, 알폰소 쿠아론, 우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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