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영화 리뷰] <나나>
동남아시아 지역의 영화를 잘 알지 못한다. 그나마 태국이 장르에 특화된 영화를 앞세워 우리나라에도 많이 소개되어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여타 나라들의 영화는 접하기가 여의치 않다. OTT나 영화제 등으로 제3세계 영화가 많이 소개되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런 와중에 인도네시아 영화는 10여 년 전의 <레이드> 정도밖에 모르겠다. 인도네시아 다큐멘터리로 잘못 알고 있는 유럽 다큐멘터리 <액트 오브 킬링>이 가장 유명한 실정이다.
2011년 데뷔한 카밀라 안디니 감독은 꾸준히 영화를 만들며 전 세계 유수의 영화제들을 섭렵한 몇 안 되는 인도네시아 영화 감독이다. 비록 우리나라에서 정식 개봉된 적은 없지만 매번 부산국제영화제로 국내 영화팬들을 찾아왔다. 그리고 드디어 그녀의 4번째 작품 <나나>가 국내에서 정식 개봉에 성공했다. 부산국제영화제로 먼저 얼굴을 비춘 건 물론이었다. 인도네시아 영화 역사상 최초로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베를린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해 은곰상(조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누리기도 했다.
영화 <나나>는 인도네시아 근현대사의 주요 길목인 1960년대를 배경으로 격변에 휘말린 여성 ‘나나’의 연대기를 그렸다. 나나는 역사의 직접적인 피해자이지만 영화는 그 양상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있지 않다. 매우 간접적으로, 그러니까 나나가 자신이 받은 피해를 안으로 안으로 밑으로 밑으로 침착시키며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하여 나나의 말, 행동, 표정 하나하나를 철저히 따라야 한다.
현재에 있지만 과거를 사는 나나
1960년대 인도네시아 자바, 나나는 돈 많은 지주 남편 덕분에 편하게 지내고 있다. 자못 지루해 보이기까지 한 나날이다. 남편의 말마따라 나이가 꽤 먹었지만 여전한 미모를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남편은 당연한듯 내연녀를 두고 있고 아내 나나 또한 당연한듯 여기고 있다. 정육점에서 일하는 젊고 예쁜 여성 이노가 그녀인데, 먼발치에서나마 몇 번 본 적이 있다.
그런데 나나는 잠자리에 들어 새벽녘이 되면 언제나 악몽을 꾼다.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기 전, 독립 직후 불어닥친 내전으로 아버지는 죽고 남편은 실종되었으며 피난길에 올랐을 땐 자식마저 잃었다. 그때의 일들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촉감마저 느껴지는 것처럼 생생하게 매일같이 꿈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나나로선 몸은 지금 여기에 있지만 영혼은 예전 그곳에 가 있는 것 같다. 몸은 편하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아 보인다. 그런 와중에, 남편의 내연녀 이노가 살갑게 다가와 나나를 챙긴다. 그러며 나나의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그녀가 꺼낸 이야기는 곧 인도네시아의 1950~60년대 역사다. 이노 덕분에 조금씩 자신을 찾아가는 나나, 어느 날 그녀 앞에 예상치 못한 사람이 나타나는데…
인도네시아의 현대사를 표현하는 방식
영화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선 인도네시아 현대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도네시아는 1600~1700년대에 걸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지배했고 이어 1800~1900년대 중반까지 네덜란드가 지배했다. 1940년대 전반기는 일제가 지배했고 후반기는 독립전쟁을 치렀으며, 합중공화국을 거쳐 1950년대부터 공화국으로 정착했다. 나나가 일가족을 잃었던 때는 아마도 독립전쟁 직후의 혼란 시기였지 않나 싶다. 일제에게서 독립을 선포했지만 네덜란드가 승인하지 않아 네덜란드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전쟁을 한 직후 말이다.
나라가 크게 휘청하는 혼란기를 온전히 들여다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직접 겪어 보지 않고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영역이다. 영화 <나나>의 나나는 직접 겪었고 십수 년이 지나도록 생생하게 살아나 괴롭히고 있다. 아마도 이 영화의 첫 번째 숙제는 그 지점을 어떻게 포착해 보여 주느냐는 것이었을 테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피가 철철 흐르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것.
영화는 어려운 길을 택했다. 굉장히 지루할 수 있고 또 어려워 보일 수 있는데,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하기 힘든 만큼 생생한 꿈을 통해 나나가 겪은 고통의 시간을 보여 준 것이다. 한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현재와 완벽히 대비되는, 불안하고 불쾌하고 불확실한 형태로 말이다. 영화적으로 굉장히 재미 없는 부분이기도 해서 완벽하게 표현해 냈다고 하긴 힘들겠지만, 의미론적으로 이보다 더 완벽하게 혼란스러운 그때 당시와 그때를 직접 관통한 나나의 심상을 표현하기는 힘들 것이다.
나나의 미래를 그리는 방식
이 영화의 두 번째 숙제이자 또 다른 핵심은 나나의 과거가 아닌 미래에 있다. 그녀가 시대의 참혹한 폭력을 자신의 잘못인 양 받아들여 여전히 과거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채 빈 껍데기만 현재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그녀의 무표정에서 드러나듯 아무런 희망도 미래도 없어 보인다. 그런 나나에게 현재를 선사하고 과거를 정리하게끔 도와 주는 건 다름 아닌 남편의 내연녀 이노다. 그녀는 나나에게 정부인으로서의 현재 위치를 재정립시키고 과거를 오롯이 끄집어 내게 함으로써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나나가 미래를 생각하고 그리게 할 사람이 나타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나나에게 매우 중요했던 과거의 누군가인데, 이노 덕분에 과거를 정리하고 현재를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은 타이밍에 기가 막히게 나타났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선 과거와 현재를 오롯이 디뎌야 하는가 보다.
주지했듯 나나의 삶은 곧 인도네시아 현대사의 질곡이다. 하여, 영화는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차기 경제대국으로 급부상 중인 인도네시아가 더 이상 과거에 붙잡혀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더불어 여성으로서 말 못할 치욕을 겪었던 과거에서도 빠져 나올 때가 되었다고 말이다. 혼란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여성의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을 때가 되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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