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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술 마시다가 깨어나 보니, 눈앞에 시체가 딱! <옆집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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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옆집사람>

 

영화 <옆집사람> 포스터. ⓒ디스테이션

 

5년 차 경시생 찬우는 원룸에서 기거하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그런데 옆집에서 남녀가 싸우는 듯한 목소리가 크게 들려와 도무지 집중하기가 함들다. 찾아갈 용기도 없고 또 찾아가면 안 되니 괴로워하다가, 집주인 아주머니한테 조치를 취해 달라고 부탁할 뿐이다. 시험 원서 접수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어느 때보다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다 잡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시험 접수가 되지 않는다. 통장을 들여다보니 시험 접수비 만 원이 남아 있지 않다. 엄마가 올해까지만 하고 안 되면 내려오라고 하니, 엄마한테 부탁할 수가 없다. 친구한테 전화해 보니, 일단 나와서 밥 같이 먹으면 돈을 빌려 준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나가는 찬우, 딱 한잔만 하려고 술잔을 들었는데 눈을 떠 보니 침대 위다. 그런데 익숙하지가 않다.

 

깨어나 보니 침대 아래 거실 한가운데 웬 남자가 머리에 피를 흘린 채 뻗어 있다. 아무래도 죽은 것 같다. 상황파악을 하고 밖에 나오니 옆집이다. 어쨌든 집으로 돌아온 찬우, 그런데 핸드폰이 없다. 문이 잠겨 있으니 위험하지만 창문을 통해 들어간다. 핸드폰을 챙겨 집으로 가려던 찰나 집주인 아주머니가 전화 와선 보일러를 고쳐 주려고 오는 중이라고 한다. 찬우는 복귀 타이밍을 놓친다. 시체로 보이는 남자와 함께 꼼짝없이 옆집에 갇힌 것이다. 이 황당한 시츄에이션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까.

 

모골이 송연한 블랙아웃 경험

 

살면서 한 번쯤 이런 상황에 맞닥뜨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술 실컷 마시다가 어느 순간 필름이 끊겨 깨어나 보니 ‘나는 누구, 여긴 어디?’의 상황에 직면한 경우 말이다. 십수 년 전, 깨어나 보니 새벽 6시쯤이었고 가방을 어디다가 내팽겨친 채 남의 집 대문 앞에서 자고 있었던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도 끔찍한 최악의 블랙아웃 경험이다. 그런데, 깨어나 보니 남의 집 침대에 침대 밑엔 시체가 있다면?

영화 <옆집사람>은 상상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끔찍한 블랙아웃 경험을 극적으로 옮겼다.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도 막막하지만, 간밤에 내가 무슨 짓을 했고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으니 소리치며 울고 싶은 마음이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후회되는 마음도 깊다. 다신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해 보지만, 지금은 별 의미가 없다.

찬우의 경우, 빨리 집으로 돌아가 원서 접수를 해야 한다.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해결책을 생각해 실행에 옮기려고 하면, 시간이 모자랄 수도 있다. 어떻게든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그런데 찬우가 범인이 아니라는 법이 없지 않나? 당장 뭔가 해야 하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각이 서질 않는다. 영화는 상황이 주는 스릴을 기반으로 찬우의 캐릭터성에 기댄 코믹이 분위기를 이끈다. 총칭해 블랙코미디라고 할 수 있겠는데, 시종일관 코믹한 듯 심각한 듯한 긴장감을 놓지 않은 채 사회문제의 단면까지 들여다본다.

 

무관심과 이기주의

 

우리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옆집을 물론 옆 건물과 웬만한 동네 사람들과 알고 지냈다. 이름, 나이, 직업, 가족관계, 성격까지 대략이나마 알고 있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런데 요즘 그렇게까지 알았다간 이상한 사람이다. 경찰 신고를 당해도 이상하지 않다. 서로 교류하는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염탐하는 모양새이니 말이다.

403호 찬우가 404호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 404호가 매일같이 시끄럽게 해도 찬우로선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없거니와, 어차피 찬우나 옆집의 누군가나 그곳은 인생에서 스쳐지나가는 곳일 뿐이다. 예전처럼 한 곳에서 오래 머물 수 없는 시대다. 옆집과 친해지고 싶어도 그럴 필요가 없고 그럴 이유도 없으며 그러기도 힘들다.

 

무관심이 현대 사회의 최대 적이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이 사회가 무너지는 건 무지막지한 반목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반갑다. 옆집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기막힌 사건들 앞에서 찬우는 정녕 이상한 대응을 한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쓰러져 있는데 신고를 하지 않고, 어떻게든 빠져 나가서 원서 접수 하려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지 않은가. 물론 그에게 일어난 일이 황당하기 이를 데 없기에 당황스러웠겠지만, 반응은 가히 이기적이다.

 

탐욕의 물질만능주의

 

한편 찬우가 휘말린 사건의 주요 실마리는 다름 아닌 ‘돈’이다. 알고 보니 돈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찬우도 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돈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 같다. 시체(로 보임)를 앞에 두고 오롯이 자기 안위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에 돈만 생각하는 탐욕의 물질만능주의가 중첩되니, 그야말로 현대 사회의 병리적 특성이 망라되어 있는 것 같다.

문제는 누구라도 이 문제적 상황에 똑같이 처한다면 찬우와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할 거라는 예상이 가능하고도 남는다는 점이다. 어느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시체를 보자마자 경찰에 신고하고 또 돈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지. 상황의 특수성으로 긴장감을 놓지 못한 채 찬우의 코믹함 앞에 무장해제 당해 메시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요량이 크지만, 영화가 말하려는 바는 이토록 명확하다.

그렇다고 이기주의에 물질만능주의에 파묻혀 버린 찬우를 욕할 수도 없다. 그도 피해자이니까, 수혜자가 아니니까 말이다. 그가 처한 상황이 특수하다고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 상황이 일상적으로 매일같이 반복되는 게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다. 일개 개인으로선 어떻게 해 볼 수 없이 ‘사회’라는 생물이 그렇게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옆집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게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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