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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https://linktr.ee/singenv

'예술'에 해당되는 글 17건

제목 날짜
  • 고통을 영광으로 승화시키는 예술적인 방법 <페인 앤 글로리> 2020.02.12
  • 죽음, 고독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절규'의 화가 <뭉크> 2019.04.29
  • 무료한 삶도 충분히 아름답고 특별할 수 있을까? <나의 작은 시인에게> 2019.04.12
  • '돈'이 되는 '무명'의 그림을 향한 추악한 욕망 천태만상 <벨벳 버즈소> 2019.02.11
  • 다분히 실험적이고 예술적인, 적당하게 볼 만한 영화 <원더스트럭> 2018.05.09
  • 삶은 언제,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패터슨> 2018.01.05
  • 봉준호의, 봉준호에 의한, 봉준호를 위한 <옥자> 2017.07.07
  • 사랑, 인간, 문학이라는 가깝지만 먼 개체들의 소용돌이 <은교> 2016.10.19
  • 위대한 예술가 쳇 베이커의 불행했지만 빛났던 시절 <본 투 비 블루> 2016.08.01
  • 화가들 생의 마지막 그림, 그들의 삶과 죽음이 거기에 있다 <화가의 마지막 그림> 2016.07.04

고통을 영광으로 승화시키는 예술적인 방법 <페인 앤 글로리>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20. 2. 1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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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명작 리뷰] <페인 앤 글로리>


영화 <페인 앤 글로리> ⓒ조이앤시네마



페드로 알모도바르, 현대 스페인 영화를 홀로 대표하다시피 하는 감독으로 1980년에 데뷔해 40년 동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선명하고 세련된 색감과 센세이션을 일으킬 만한 스토리로 전 세계 평단과 대중을 사로잡은 바, 80년대부터 꾸준히 10년을 대표할 만한 작품을 만들어왔다. 1980년대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90년대 <내 어머니의 모든 것>, 2000년대 <그녀에게>, 2010년대 <페인 앤 글로리>까지. 


그에겐 1980~90년대와 1990~2000년대 확고한 페르소나로 누구나 알 만한 두 남녀 배우가 있다. 안토니오 반데라스와 페넬로페 크루즈가 그들이다. 그들은 알모도바르와 작업하여 '연기'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후, 헐리우드에 진출하여 '흥행'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는 스페인으로 돌아와 2010년대에는 셋이서 함께 작업한 작품들이 눈에 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최고의 조합임에 분명하다. 


2010년대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한 <페인 앤 글로리> 역시 알모도바르 감독에 안토니오 반데라스와 페넬로페 크루즈가 함께 했다. 전 세계 수많은 영화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최고의 외국영화상 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였다. 그 정점이라 할 만한 제92회 아카데미에서 <기생충>이 국제장편상을 수상하며, <페인 앤 글로리>가 판정패하였다. 하지만,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칸을 비롯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남우주연상을 접수하며, 작품이나 감독보다 배우의 진가를 더 잘 끄집어내는 알모도바르 감독의 진가를 보여주었다. 


고통뿐인 과거의 거장, 그에게 찾아온 영감


걸작들을 탄생시키며 거장 반열에 올랐던 살바도르 말로(안토니오 반데라스 분) 감독, 하지만 지금은 온몸에 아프지 않은 곳 없이 진통제에 의존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노인일 뿐이다. 어느 날 32년 전 영화 <향취>를 보게 되었고 마음속에 무언가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런 와중 우연히 <향취>의 여주인공을 만났고, 그녀에게서 남주인공 알베르토의 소식과 함께 영화박물관에서 특별전을 한다는 얘기를 듣는다. 영화를 찍었을 당시, 좋지 않았던 사이로 좋지 않을 후문을 남겼던 바 30여 년 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살바도르가 알베르토를 찾아간다. 


실로 오랜만에 만난 그들, 알베르토가 살바도르에게 헤로인을 권한다. 헤로인으로 줄어든 고통, 살바도르는 헤로인에 중독되어 가며 엄마와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가진 것 하나 없었지만 아주 똑똑했던 살바도르, 엄마 하신타(페넬로페 크루즈 분)는 장학금을 대준다는 신학교에 그를 보내려 한다. 그런가 하면, 글도 모르고 산수도 모르는 벽돌공에게 공부를 가르쳐주며 그로 하여금 아무것도 없는 동굴 집을 개조하게 한다. 


알베르토는 우연히 살바도르의 컴퓨터를 열어 저장되어 있는 수많은 글 중 하나를 본다. <중독>이라는 작품, 알베르토는 장르를 알 수 없는 이 작품으로 뭐라도 하고 싶어하지만 살바도르는 심신이 지칠대로 지쳐 아무것도 하기 싫다. 아니,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와중에도 그는 계속해서 헤로인을 하며 옛날로 돌아가, 잊고 살았던 또는 떨쳐내지 못했던 친구와 첫사랑과 어머니를 만나 자신도 모르게 영감을 얻는다. 그는 자신에게 남아 있는 게 영화밖에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다시 매달릴 수 있을까?


영광에의 고통의 승화, 예술만이 할 수 있는 일 


영화 <페인 앤 글로리>는, 비록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부인(否認) 인터뷰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전적 이야기로 비친다. 그는 실제로 어린 시절 궁핍한 곳으로 이사를 갔고 수도원 생활을 했으나 맞지 않아 영화관 가는 일을 낙으로 삼았다. 10대 중반에 마드리드로 상경해 노동자로 돈을 벌며 단편영화를 찍었고, 30대 초반에 장편영화로 정식 데뷔 후 승승장구하여 지금까지 왔다. 영화와 같은 듯 다르면서도 비슷하다. 


제목으로 영화를 유추할 수 있고 보고 나선 모든 걸 정의할 수 있다. 고통과 영광, 예술을 상징하는 듯하다. 오직 예술만이 끔찍한 고통을 영광으로 승화할 수 있다. 사실 예술이라는 것이 절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결과물을 내놓기까지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길에의 온갖 고통이 닥쳐온다. 그 끝에 영광이 온다는 건 한없이 0에 수렴한다. 더욱이, 고통의 과정을 거치는 것도 모자라 고통 자체를 수단으로 하겠다는 건 어불성설과도 같다. 그리 한다면, 영광은 반드시 따라와야 하고 따라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적어도 이 영화 속 살바도르는 그런 과정을 따르고 있는 것 같다. 끔찍한 육체적 고통을 마주하지 못해 도망갔을 때 영감을 얻었고, 과정에서 영감의 주체들을 돌아보고 또 만났으며, 결국 모든 종류의 고통을 직시해야 한다고 깨닫고는, 다시 시작한다고 말이다. 그동안의 알모도바르 감독 필모를 들여다봤을 때,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수많은 남 모를 고통들의 면면이 다시 보인다. 이 영화는 알모도바르 감독에게서 시작했지만, 모든 예술가들을 향한 헌사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당신네들이 겪었고 겪고 있고 겪을 고통들에 반드시 영광이 뒤따를 거라고 말이다. 


그런가 하면, 영광이 고통의 결과 아닌 과정에서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친구와 첫사랑과 어머니를 되새기고 만나는 것 자체가 영광이 아닌가 싶다. 물론 그들과 다시 조우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랄 수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술가는 주관적이기 짝이 없는 다사다난의 느낌들을 제3자적 입장에서 잡아낼 수 있어야 한다. 


알모도바르 감독의 장기, 색감과 스토리


영화는 여지없이 알모도바르 감독의 장기가 발휘된다. 그의 인장(印章)이라고 해도 무방한, 화려하고 세련된 색감과 센세이셔널한 스토리 말이다. 주로 외부 아닌 내부에서, 액션 없이 대사와 표정으로 이루어지는 영화인 만큼 배경이 중요한대, 화려하지만 쨍하지 않고 포근한 감정을 유발하는 빨간색을 중심으로 다양한 원색을 추구한다. 화려한 색감에 한없이 눈을 빼앗길 것 같지만, 인물들의 압도적인 대사와 표정과 잘 어울린다. 하여 관객들은 화면 자체에 오감이 쏠리는 것이다. 


이번에는 스토리 자체에 파격적 요소가 짙게 깔리진 않은 듯하지만, 끝없이 나오는 마약(헤로인) 섭취와 무심한 듯 툭툭 튀어나오는 예상치 못한 사실들이 마음을 요동치게 하기에 충분하다. 뭐니뭐니 해도 가장 잘 보여준 건 살바도르 역의 안토니오 반데라스이다. 그 덕분에 우린 파격을 파격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절제 속에서 안정된 파격이라는 모순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살바도르의 믿을 수 없는 육체적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질 때면 치를 떨었고 과거와 조우하며 복잡한 감정이 전해질 때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예술과 예술가의 고통과 영광을 집대성하고, 페르도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 인생을 집대성하며, 안토니오 반데라스 배우의 다시 없을 인생 최고 연기를 선보인 바, <페인 앤 글로리>는 여러 모로 두고두고 회자될 게 분명하다. 나와 내가 속한 곳의 역사를 다른 누군가의 손에 넘기기 싫다면, 내가 직접 들여다봐야 한다. 그곳에 마주하기 싫은 고통이 있을지라도, 자연스레 따라올 영광은 기대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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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고독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절규'의 화가 <뭉크>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9. 4. 29.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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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뭉크>


<뭉크> 표지. ⓒ아르테



에드바르 뭉크, 우리에겐 전 세계 최고의 미술품 중 하나인 <절규>의 화가로 잘 알려져 있다. 이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뭉크는 몰라도 <절규>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2012년 소더비 경매를 통해 당시 역대 최고가인 약 1400억 원에 판매되면서 예술적 평가는 최고점을 찍었고, 인터넷 검색만 해봐도 이 그림 하나로 셀 수 없이 많은 패러디가 양산되는 걸로 보아 대중적 평가 역시 최고점을 찍었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건 <절규>이지 결코 뭉크는 아니다. <절규>가 아닌 뭉크를 상상해보았는가? 아니, 뭉크가 언제적 사람이고 어디에서 태어나 어디에서 활동하며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한가? 단언컨대, '아니오'라는 대답이 주를 이룰 것이다. 필자부터, 뭉크가 노르웨이의 국민화가이고, 노르웨이는 물론 독일 베를린과 프랑스 파리 등에서 활동했다는 것, 평생 독신으로 살아왔다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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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표현주의 미술의 선구자'라는 타이틀과 본인 삶에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죽음, 불안, 고독' 등의 주제에 깊이 천착했다는 것과 생전 그와 관련된 유명한 사건이 있었고 사후 그의 작품과 관련된 유명한 사건이 있었다는 정도는 얼핏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거의 동시대에 활동했던 빈센트 반 고흐나 한 세대 후에 활동한 파블로 피카소처럼 그 이름만으로도 누구나 알 정도는 아닌 것이다. 


이번 기회에 에드바르 뭉크에 대해 수박 겉 핥기 정도만이라도 알아보고자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뭉크>를 펴들었다. <모차르트>에 이어 시리즈 8번째로 나온 책으로, 거장의 삶과 예술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진다. 시리즈 차기작으로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나온다는데, '음악'의 모차르트와 '미술'의 뭉크와 '문학'의 가와바타 야스나리까지 서평으로 소개해볼 예정이다. 


예술가적 키워드들


<뭉크>를 통해 들여다본 뭉크의 삶은 그야말로 흔히 생각하는 '예술가적' 키워드들로 가득 차 있다시피 하다. 다섯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열세 살 때 누이 소피에가 요절했으며 20대 파리 유학 시절엔 아버지까지 사망했거니와 그 자신 어린 시절부터 몸이 좋지 않았기에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다. 그의 그림 주요 모티브가 삶과 죽음이었다. 


아버지로부터 정신병을 유전적으로 물려받았다고 생각하며 근원적인 '불안'에 시달렸다. 평생 독신이었던 그에게 '외로움'은 자연스레 따라오는 키워드였을 텐데, 그런 그에게도 '사랑'의 시절이 있었다. 밀리, 율, 툴라가 그들인데, 뭉크는 그들과의 사랑 덕분에 다양한 자극을 받으면서도 그들과의 이별로 외로움과 상실감에 빠져 더욱 침잠하고 '고독'해졌다. 


예술가 하면 으레 따라 생각하게 되는 이런 종류의 정신이상적 키워드들은, 뭉크의 삶뿐만 아니라 작품에도 고스란히 투영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공포, 불안, 죽음, 외로움, 고독 등이 태반을 이룬다. 동시에 그의 작품 활동에 가장 큰 원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하여,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예술 절정기에 해당하는 작품들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하겠다. 


노르웨이에서 거주하기도 하는 저자의 말에 따르면, 노르웨이라는 나라의 자연이 주는 거부할 수 없는 사색과 고독도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긴긴 겨울이 지나면 봄과 여름과 가을이 순식간에 찾아오고 다시 겨울이 찾아온다고 한다. 그래서 노르웨이인들은 짧은 여름을 최대한 즐긴다고 하는데, 그 방법이 자연 속에 고립되어 사색과 고독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고 한다. 노르웨이인 DNA에 내재되어 있는 게 아닐까. 역시 노르웨이인 뭉크도 자의 반 타의 반 고독을 즐기는 한편 고독과 싸웠던 게 아닐까 싶다. 


뭉크의 삶과 예술


화가로서의 뭉크는, 당대 화단과 정반대에 있다시피 한 길을 갔다. 노르웨이는 자신의 길을 가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베를린과 파리에서 주로 활동하였는데, 평단으로부터 수없이 많이 혹평의 융단폭격을 당했다. 초기에 살짝 주춤했을 뿐 이후에는 오히려 그걸 즐겼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럴수록 뭉크는 이단아로 더욱 유명해졌고 뭉크 또한 그런 식으로 자신만의 길을 가는 한편 유명해지길 바랐다. 그런 일환으로, 뭉크는 노르웨이에선 크리스티아니아 보헤미안 그룹에, 베를린에서는 검은 새끼 돼지 그룹에 참여하여 기존 사회와 문화에 대한 비판의식을 함께 했다. 


그런가 하면 뭉크를 흔히 표현주의 화가로 수식하는데, 저자는 표현주의라는 현대 미술 운동에 결정적인 초석을 놓았다는 게 정확하다고 평가한다. 그의 대표작 <절규>를 놓고 수많은 '주의'들이 달라붙었는데, 독일 낭만주의, 상징주의, 종합주의 또는 나비파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 중 어느 사조와도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바, 자신의 경험을 형과 색의 왜곡을 통해 시각화한 뭉크의 그림들은 오히려 당시 새로운 움직임을 갈구하던 독일의 젊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뭉크는 시대를 앞서 갔던 진정한 선구자였던 것이다. 


<절규>와 더불어 뭉크를 대표하는 작품은 <생의 프리즈>라는 연작이다. 1900년대 초 재기를 꿈꾸며 베를린으로 돌아온 뭉크는 오래전부터 구상한 '생명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인간의 인생'의 주제를 그림으로 표현해낸다. '뭉크의 노트'를 통해 <생의 프리즈>가 탄생하게 된 과정을 살짝 들여다보자. "나는 그 그림들을 모아보았을 때, 각각의 그림들이 내용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그림들이 전시되자 그림들 사이에서 하나의 울림이 터져 나왔고, 그림들이 따로따로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것은 교향곡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생의 프리즈'를 그리게 되었다."


뭉크에게도 인생 제2막이 찾아온다. 노르웨이 아닌 외국을 전전하며 유럽에서 대가의 반열에 오른 뭉크는, 예술가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며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지만 건강과 정신의 모든 측면에서 무너져내렸다. 그러던 차 40대 중반에 접어든 1909년 노르웨이로 돌아와 정착하게 된다. 방황과 불안, 갈등과 피폐의 젊은 시절을 보내고 중년을 맞이한 예술가에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안정과 정착이 필요했던 때였던 것이다. 뭉크 스스로도 그렇게 판단했던 게 분명하다. 


제2막 인생에서도 여전히 고독했고 죽는 그 순간까지도 고독했던 뭉크, 그의 삶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우울해지기도 하지만 공감 어린 동질감 또한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현대인의 고질적인 병이 불안과 우울이 아닌가. 반대로 말해 불안과 우울이야말로 현대인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뭉크의 그림이야말로 현대인에게 가장 적확하게 다가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뭉크의 그림에 나오는 인물이 곧 나이고, 그림을 온전히 채우는 배경과 분위기 또한 곧 나의 일상과 머릿속이며, 그림을 그린 뭉크의 삶이 나의 삶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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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 노르웨이, 뭉크, 미술, 불안, 생의 프리즈, 예술, 절규, 죽음, 표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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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한 삶도 충분히 아름답고 특별할 수 있을까? <나의 작은 시인에게>

모모 큐레이터'S PICK 2019. 4. 1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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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큐레이터'S PICK] <나의 작은 시인에게>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 포스터. ⓒ(주)엣나인필름



미국 뉴욕의 작은 섬에서 20년째 유치원 교사로 살아가는 리사(매기 질렌할 분), 매일매일 따분한 일상을 영위하는 그녀에게 유일한 낙은 종종 있는 야간 시 수업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좋은 평가를 얻지 못해 좌절할 뿐이다. 자신의 평범한 예술적 감각을 이해와는 와중, 그래도 다정다감한 남편이 있어 위로가 되지만 다 큰 아들과 딸들은 그녀의 성에 차지 않는다. 또 그들은 부모를 경원시하는 것 같다. 


어느 날 우연히 유치원생 중 다섯 살 난 지미(파커 세바크 분)가 앞뒤로 오가며 시를 읊는 장면을 포착한다. 그 꼬마에게서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천재적 면모를 발견한 리사는 곧바로 달려가 시를 받아적고는 보모에게 말해 집에서도 지미가 불현듯 읊는 시를 옮겨적을 것을 부탁한다. 리사는 지미의 시를 야간 시 수업에서 가서 발표하고 전에 없는 칭찬세례를 받는다. 


그녀는 지미의 시를 몇 편 더 자신의 야간 시 수업에서 발표하는 한편, 지미를 훈련시키기 시작한다. 자신은커녕 주위에 그 누구도 알아봐주지 않고 또 못하는 그의 시적 예술 재능을 최대한으로 끄집어내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건 평범한 시적 예술 재능을 지녔지만 욕망과 열망이 꽃피어난 자신을 대신하려는 움직임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리사의 지미를 향한, 아니 리사의 시적 예술 재능을 향한 광기는 어떻게 흘러갈까. 


유치원 교사


원작의 제목은 <유치원 교사>, 이 제목이 훨씬 더 적절해 보인다.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의 한 장면. ⓒ(주)엣나인필름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이스라엘의 훌륭한 연출가이자 작가인 나다브 라피드의 2014년작 영화 <시인 요하브>를 원작으로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로스앤젤레스타임즈가 '훌륭한 원작의 영리한 재해석'이라고 평했는데, 딱 들어맞다고 생각한다. 1980년생 사라 코랑겔로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인 만큼 감각적으로 재해석했다. 


원제가 <The Kindergarten Teacher>, '유치원 교사'이다. 한국어판 제목인 '나의 작은 시인에게'가 주는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이 제목은 직설적이고, 주체가 '작은 시인'처럼 느껴지게 하고, 심지어 영화가 달달할 것 같다고 짐작하게 만든다. 즉, 한국어판 제목은 상당히 잘못 지었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겠다. 


반면 원제 <The Kindergarten Teacher>는 그 무엇도 지레짐작하지 않게 한다. 대신 영화를 보며 계속 곱씹을 수 있다. 유치원 교사이자 엄마이자 아내이자 여자인 리사, 그녀는 이제 유치원에서 전에 없던 예술적 열망에 눈을 뜨게 된다. 그건 교사, 엄마, 아내라는 명명에서 벗어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녀에게 예술적 열망은 곧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가꾸고 나아가는 것과 다름 없는 것이다. 


40대 여성 리사의 삶


교사이자 엄마이자 아내로서의, 40대 여성 리사의 삶은 무엇일까.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의 한 장면. ⓒ(주)엣나인필름



영화는 매우 '시시하게' 시작된다. 평화롭고 나른하고 무료한 일상을 단 한 장면으로 보여주는데, 곧 40대 여성 리사의 삶이다. 안정적이지만, 그래서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삶 말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우선 '리사의, 리사에 의한, 리사를 위한', 리사를 주체로 하여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녀의 고뇌와 열망과 삶을 총체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 다섯 살 천재 시인 '지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리사에 의해 '모차르트급 재능의 천재 시인'이 된 지미는, 그러나 영화에서 결코 주인공도 주체도 될 수 없다. 혹자는 이를 두고 영화 <아마데우스>의 천재 모차르트와 그를 시샘하는 범인 살리에리를 연상시킬 수도 있겠고, 그 영화에서 사실 주인공이자 주체는 모차르트가 아니라 살리에리라며 운을 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리사와 지미는 살리에리와 모차르트가 아닌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와 모차르트에 가깝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일찍이 알아본 레오폴트가 철저히 교육시키고 또 일명 '그랜드투어'로 유럽 전역을 다니며 홍보도 했기에 모차르트가 모차르트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리사는 지미의 보호자가 아니고, 다행히도 레오폴트는 모차르트의 보호자였다. 


이런 관계 설정이 영화의 한 축이라면, 그로 인해 변해가는 40대 여성 리사의 삶이 또 한 축이겠다. 유치원에서도 집에서도 시 수업 교실에서도 그녀는 전에 없는 열망 어린 눈빛과 몸짓을 보이며 한껏 활기찬 삶의 여운을 내보이는 듯하다. 물론 그에 따른 희생량이 있어야 하므로, '누군가가 전해주는 시를 그저 읊을 뿐인' 천재 시인 아이 지미가 그 희생양일 것이다. 


예술적 열망의 표출


예술적 열망이 표출되다 못해 폭발한다. 그 끝은 어떤 모습일까.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의 한 장면. ⓒ(주)엣나인필름



크게 영화를 구성하는 두 축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데 다층적인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리사가 단순히 자신의 예술적 열망을 분출할 매개체로 지미를 이용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한편 지미의 천재적 시적 예술 재능을 아무도 알아봐주지 않고 알고 싶지도 않다는 걸 알기에 그렇게 그냥 묻혀버리기엔 너무 아쉽고 안타깝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극중에서 지미가 시를 얼마나 좋아하고 즐기고 하고 싶어 하는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대략적으로나마 재단하기도 힘들 것 같다. 결국 감독이 전하고 보여주고자 하는 건 리사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리사의 시적 예술 열망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반면 교사이자 아내이자 엄마로서의 무료한 삶에 변화를 주고 싶다는 열망은 추상적으로 드러난다. 


리사의 열망과 욕망이 좀 더 다층적이고 다채롭고 구체적으로 드러났다면 영화가 좀 더 풍성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조금 있지만, 영화가 다루고 있는 게 다름 아닌 '시'라는 점에서 나도 모르게 이해가 가기도 한다. 시를 잘 모르지만, 시에 '추상'이 상당히 용인된다는 건 인지하고 있다. 이 영화를 한 편의 시로 생각하면 그러려니 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극 중에서 몇 번이나 읊어지는 지미의 첫 시를 인용한다. 무료한 삶도 충분히 아름답고 특별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애나는 아름답다

나에게는 충분히 아름답다

태양이 그녀의 노란색 집을 두드린다

마치 신이 보낸 신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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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시인에게, 모모 큐레이터, 모차르트, 삶, 아내, 엄마, 여자, 예술, 유치원 교사,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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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되는 '무명'의 그림을 향한 추악한 욕망 천태만상 <벨벳 버즈소>

넷플릭스 오리지널 2019. 2. 1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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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벨벳 버즈소>


영화 <벨벳 버즈소> 포스터. ⓒ넷플릭스



제이크 젤렌할, 어느덧 믿고 보는 배우가 된 할리우드 남자 배우다. 일찍이 10대 초반에 할리우드에 진출해 역시 10대부터 여러 영화의 주연을 꿰차고 2000년대 중반 <투모로우>, <브로크백 마운틴>, <조디악> 등을 통해 다재다능함을 인정받았다. 


2010년대부터는 정말 '열일'을 하는 중인데, 2019년까지 10년간 20편에 육박하는 작품에 주연을 맡았다. 한 해 1편에서 4편까지 찍은, 믿을 수 없는 행보인 것이다. 장르 불문, 이미지를 깎아 먹지 않는 와중에 그가 주연을 맡은 영화들은 거의 모두 평균 이상의 합격점을 받았다. 


그중 매우 좋은 평가와 함께 제작비 대비 출중한 흥행성적을 거둔 작품 <나이트 크롤러>가 있다. <리얼 스틸> <본 레거시> 등의 각본으로 유명한 댄 길로이의 연출 데뷔작이었는데, 길을 잃은 언론의 천태만상을 특종과 조작과 진실의 소재로 스릴러 장르에 훌륭하게 버무렸다. 


이후 댄 길로이는 덴젤 워싱턴과 함께 법정 영화를 하나 찍었고 올해 <나이트 크롤러>의 히어로 제이크 질렌할과 함께 <벨벳 버즈소>를 내놓았다. 믿고 보는 조합이 된 그들과 넷플릭스의 만남으로 오래전부터 기대작으로 손꼽아온 이 작품은 35회 선댄스 영화제 프리미어로 선보이기도 하였다. 지난번에는 언론계 이번에는 미술계, 또 어떤 섬뜩함을 선보일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무명의 그림을 향한 다양한 욕망들


영화 <벨벳 버즈소>의 한 장면. ⓒ넷플릭스



미국 마이애미, 미술계에서 가장 막강한 입김을 자랑하는 평론가 모프(제이크 질렌할 분)는 독창성 있는 작품을 찾아헤맨다. 와중에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에이전트 로도라(르네 루소 분)와 비서 조세피나, 로도라가 주력으로 밀고 있는 유명 아티스트 피어스, 로도라가 새롭게 관심을 두고 있는 길거리 출신 담리시, 피어스를 데려오려는 에이전트 돈돈, 미술관에서 일하다가 에이전트로 전업한 그레천, 여기저기 에이전트를 돌고도는 인턴 코코 등 얽히고설킨 관계의 파장이 사방팔방으로 퍼진다. 


조세피나는 로도라에게 사실상 해고를 당한 후 어느 날 같은 건물의 2층 노인이 죽은 걸 발견하고 신고한다. 그러곤 우연히 그의 집으로 들어가는데, 믿을 수 없이 많은 그림들이 사람을 빨아들이는 미스테리한 색체를 띤 채로 있었다. 그녀는 그날로 바로 작업에 착수해 일가친척은 물론 지인도 없는 노인 디즈의 그림을 가져와 모프에게 소개한다. 


모프의 심미안에도 딱 걸려든 디즈의 그림들은 그 즉시 미술계에 파란을 일으킨다. 소식은 일파만파로 퍼져 로도라의 귀에도 들어가고 로도라는 즉시 조세피나를 협박하여 그녀의 밑으로 다시 불러들인다. 대신 조세피나는 이전의 비서급 이상이 된다. 한편, 디즈의 그림들은 스스로 움직이는 괴기스러움을 발산하는데 사람들은 알 도리가 없다. 그저 한없이 빨려들어갈 것처럼 들여다볼 뿐이다. 


이제 미술계의 모든 촉각, 즉 돈의 움직임은 디즈로 향한다. 단, 아티스트인 피어스와 담리시만 제외하고 말이다. 와중에 디즈의 섬뜩한 개인사와 본인의 모든 그림을 폐기하라는 유언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사람이라면 빨려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디즈의 그림들을 향한 다양한 욕망은 끝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불러일으킬 게 분명하다...


미술계 상류층의 천태만상


영화는 현대 미국의 미술계 상류층을 형성하고 있는 다양한 부류들의 천태만상을 보여주며, 예술 아닌 돈에 천착하는 비즈니스적 욕망, 오로지 독창성과 자신의 심미안만으로 미술계를 들었다놨다 하는 아트적 욕망의 추악함을 향해 경고를 날린다. 


그 중심엔 그 누구도 작품은커녕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무명의 '디즈' 그림들이 있지만, 그런 디즈의 그림조차 그것을 둘러싼 욕망들에겐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자신의 욕망을 분출하고 또는 채워줄 수단 말이다. 


그들이 자신을 자신으로 알고, 예술을 예술로 알며, 욕망을 욕망으로 알았다면 디즈의 그림이 위대한 그림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디즈의 그림은 무지막지한 돈으로, 미술계에서 내로라하는 명성으로, 한없이 높아진 심미안을 채워줄 수단으로 보였다. 


비단 미술계뿐만 아닐 것이다. 가지각색의 '계'에서 각계각층의 '욕망'들이 돈과 명성과 지위 등을 매개로 모든 것을 다루고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문학을 다루는 필자는, 종종 아니 자주 아니 항상 문학작품을 대할 때 욕망이 고개를 쳐들곤 한다. 이 작품은 우리 출판사에 얼마의 돈과 명성을 가져다줄 것인가. 그 가치판단의 기준을 어떻게 세워야 하는가. 


예술을 위한 변명 혹은 조언


미술계에 만연한 추악한 욕망의 실체를 들여다보는 데 주력하는 초반과 달리 중후반은 스릴러 아닌 고어 공포로 내달린다. 온갖 욕망에 몸과 마음을 내맡긴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 앞뒤 재지 않고 보여주는 것이다. 때론 섬뜩하기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때론 굉장히 독창적으로. 


초반과 중후반이 확연히 다른 장르를 내보이는 것처럼, <벨벳 버즈소>는 애매모호한 면들이 다수 보인다. 스토리상 별다른 걸 느낄 새가 없이, 캐릭터들의 관계와 그들을 분한 연기 그리고 장면장면의 연출이 극을 이끈다. 또한 앞서 말한 바처럼 스릴러적인 분위기와는 달리 굉장한 고어 공포를 선보이고 딱 한 차례 설명되어진 제목 '벨벳 버즈소'의 의미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로도라의 옛날 펑크 시절 그룹 이름이 벨벳 버즈소였다고 하는데, 그 자체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술과 약으로 쪄든 무정부주의자였던 그 시절이 예술을 향한 순수성의 정확하고 정통한 발로였다고 해석하는 게 맞을 듯하다. 그때도 예술을 향한 욕망이 있었을지언정, 그 사이에 돈, 명성, 지위, 심미안, 이기심 등의 이질적인 요소들이 들어앉아 있지 않았다. 


예술을 팔기보다 소개하고, 예술을 판단하기보다 공부하고, 예술에 가치를 매기기보다 감상하는 게 예술계에 종사한 이들이 해야 할 일이겠다. 굉장히 현실지양적이고 허무맹랑하고 지엽적인 얘기처럼 들리는가? 그렇게 그저 스쳐지나가는 얘기처럼 치부할 것인가? 물론 그래도 좋다. 그렇게 살아가도 좋다. 하지만, 남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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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 길로이, 돈, 미술계, 벨벳 버즈소, 순수, 예술, 욕망, 제이크 질렌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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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분히 실험적이고 예술적인, 적당하게 볼 만한 영화 <원더스트럭>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8. 5. 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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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원더스트럭>


영화 <원더스트럭> 포스터. ⓒ CGV 아트하우스



1980년대, 20대 중반이 나이로 일찍 데뷔해 첫 번째 장편영화로 전 세계 독립영화계의 총본산인 선댄스 영화제를 석권한 천재 감독 토드 헤인스. 1990~2000년대 주로 활동하며, <벨벳 골드마인> <파 프롬 헤븐> <아임 낫 데어> 등의 좋은 작품을 남겼다. 그리고 지난 2015년, 8년 만에 영화감독으로 돌아온 그는 <캐롤>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작을 선사했다. 


토드 헤인스의 필모를 들여다보면, 그는 스토리텔러 내지 구성주의자라기보다 비쥬얼리스트에 가깝다. 물론 앞에 나열한 수작들 모두 그가 연출뿐 아니라 각본까지 담당한 걸로 보아, 절대 이야기를 중시하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관객의 입장에서 그의 영화들이 시각적으로 더 결정적이게 다가올 뿐이다. 


<캐롤>은 그의 필모에서 처음으로 각본에 참여하지 않고 연출로만 참여한 작품이다. 결과는 전에 없는 대성공이었다. 2년만에 돌아온 <원더스트럭> 또한 연출로만 참여한 작품으로, <캐롤>의 성공을 이어가려 한 의도가 다분하다. 과연 성공했을까. 


아빠와 엄마를 찾아 뉴욕으로 향하는 두 소년 소녀


영화 <원더스트럭>의 한 장면. ⓒ CGV 아트하우스



1977년 미네소타 건플린트, 소년 벤(오크스 페글리 분)은 사고로 엄마를 잃은 후 어느 날 우연히 '원더스트럭'이라는 책을 접한다. 거기엔 생전 본 적도 없는 아빠에 대한 단서가 담겨 있었는데, 그는 벼락을 맞아 청각을 잃고 만다. 그럼에도 의지를 꺾지 않고 뉴욕으로 향한다. 뉴욕에 있는 킨케이드 서점으로. 


1927년 뉴저지 호보큰, 소녀 로즈(밀리센트 시몬스 분)는 선천적으로 청각 장애를 가지고 있어 아빠에 의해 집에서 감옥 같이 지낸다. 그녀는 뉴욕에서 영화배우로 살고 있는 엄마를 보고 싶어 한다. 어느 날, 청각 장애인 교육을 강제하는 아빠의 강요에 반발해 집을 나와 뉴욕으로 향한다. 


정확히 50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청각 장애를 가진 두 소년 소녀는 각각 아빠와 엄마를 찾아 뉴욕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필연과 우연으로 자연사 박물관을 향한다. 벤은 아빠를 찾을 수 있을까? 로즈는 이후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무성영화, 그리고 모든 것이 분출된 예술적 표현


영화 <원더스트럭>의 한 장면. ⓒ CGV 아트하우스



영화는 실험적이다. 비쥬얼만큼 구성이 중요하다. 1920년대 시점과 1970년대 시점을 나눠, 각각 무성영화의 특징과 예술적 표현을 극도로 살린 특징을 고스란히 투영시켰다. 너무나도 극명하게 갈려 양 극단에 위치하고 있는 것 같은 두 시공간은, 극단은 이어진다는 비논리의 논리에 따라 왠지 이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게 한다. 


청각 장애를 지니고 있는 소녀 로즈의 1927년은, 그래서 노랫말조차 없는 OST만으로 모든 걸 전달할 뿐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로즈가 되어 답답함을 호소하는 동시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관객을 위해 마련한 '상황에 맞는 OST의 변화무쌍함'을 즐겁게 맛본다. 그 자체로 무성영화이다. 


한편 1970년대는 전 세계를 휩쓴 68 혁명 직후이자 통제와 절제의 시대 80년대 직전이다. 모든 것이 분출되던 그 시대를 영화는 소년 벤의 1977년으로 표현하고 있다. 화려하다기보다 진한 느낌의 색감과, 남녀노소는 물론 모든 인종이 한데 모여 소용돌이치는 뉴욕의 모습을 통해서 말이다. 


적당한 기대감으로 볼 만한 영화


영화 <원더스트럭>의 한 장면. ⓒ CGV 아트하우스



두 시공간의 병렬은 자못 예술적 총합처럼 다가온다. 예술이라 하면 다분히 '개성'이 생각나는데, 이 영화가 보여주는 예술은 개성과 개성의 총합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감독이 진정 영화를 사랑하여 영화가 당대 가장 꽃피웠던 두 시절을 되살려 동시에 내보이고 있다고 충분히 느낄 만하다. 


그러면서도 영화 내적으로 소소한 감동과 반전의 서사를 놓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 청각 장애에 의한 '불통'의 기반 위에 감동과 반전이 출현한다. 말이 아닌 표정과 행위에의 소통, 힘든 소통으로도 피어나는 웃음꽃, 결국 느끼고 체험할 수밖에 없는 소통의 위대함, 그리고 소통의 탄생에 대한 은유까지. 


영화는 후반에 가서 갑자기 스토리텔링적 반전으로 선회하여 강점인 비쥬얼적인 측면과 구성적인 측면을 버리다시피하며, 힘을 잃어버렸다. 영화 초반 내보였던 명언 '우리는 모두 시궁창 속에 있지만 그중 몇몇은 별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 영화의 스토리텔링 중심에 위치해 있는데, 후반에 그 의미가 퇴색되어 버린 게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원더스트럭>은 충분히 볼 만한 영화이다. 환상적이지는 않지만, 오래도록 깊은 여운을 남길 것 같진 않지만, 탄성을 자아낼 만한 스토리 내지 구성 내지 비쥬얼이라고 하기엔 애매하지만, 최소한 이 모든 방면에서 후회할 만한 모습을 보여주진 않는다. 적당한 기대감으로 접하는 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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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영화, 비쥬얼, 실험, 예술, 원더스트럭, 청각 장애, 토드 헤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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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언제,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패터슨>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8. 1. 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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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짐 자무쉬의 <패터슨>


'거장' 짐 자무쉬의 신작 <패터슨>. 우린 이 영화에서 아마추어 예술가를 만난다. ⓒ그린나래미디어(주)



짐 자무쉬 감독의 영화를 말함에 있어 '짐 자무쉬'를 언급하지 않는 건 결레다. 그렇지만 1982년 <영원한 휴가>로 센세이션한 데뷔를 한 이후 시종일관 '거장'으로 군림하고 있는 이 위대한 예술가를 난 잘 모른다. 그 명성에 비해 우리나라에 정식 개봉한 작품들이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는 이유가 이유라면 이유겠다. 


2017년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좋은 영화 중 하나라 만평할 만한 <패터슨>을 빗대어 간단히 언급하자면, 짐 자무쉬는 자신만의 확고한 예술세계에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시간과 공간과 인물이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다른 어느 것도 아닌 '삶'에서 예술을 건져올리고 아름다움을 캐치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인가 보다. 


영화 <패터슨>은 미국 뉴저지주 패터슨시에 사는 버스기사 패터슨을 주인공으로 한다. 그는 버스기사로 일하면서 아내 로라와 반려견 마빈과 함께 평범한 삶을 영위하는 와중에 틈틈이 시(詩)를 쓴다. 그렇다, 그는 아마추어 시인이다. 한편 그의 아내 로라도 집에서 페인팅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기타를 치고 펜케이크를 만들어 파는 아마추어 예술가이다. 그 모든 것에 검정과 하양의, 그녀만의 패턴이 있다. 


큰 배신감과 큰 위안과 격려, 그 사이 


영화는 한편 지루해 어떤 느낌도 들지 않을 수 있지만 한편 상당한 위안과 격려를 건넨다. ⓒ그린나래미디어(주)



미국 뉴저지주의 소도시 패터슨시, 버스기사 패터슨(아담 드라이버 분)은 어김 없이 6시 10분쯤에 잠에서 깬다. 아내 로라(골쉬프테 파라하니 분)에게 입마추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시리얼로 아침을 먹고는 전날 챙겨둔 옷을 입고 걸어서 출근한다. 출근하면서 떠올리고 구상한 시상(詩想)을 버스 운행 전 짧은 시간에 쓴다. 


본격적인 버스 운행, 패터슨은 패터슨시를 돌며 많은 풍경을 감상하고 수없이 오가는 승객들의 면면과 그들의 대화를 듣는다. 점심 시간에는 공원에 있는 폭포 앞 벤치에 앉아 아내가 마련해준 도시락을 먹으며 시를 쓴다. 퇴근해서는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마빈과 저녁 산책을 나간다. 


산책 도중 바에 들려 맥주 한 잔 들이키며 바텐더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거나 홀로 생각에 잠긴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다음날 아침이 밝는다. 전날과 그 전날, 매일매일 변함없는 하루가 시작되고 지나간다. 패터슨의 하루는 속절없이 흐르고 변함 없이 똑같으며 아무런 문제도 없다. 


<패터슨>에서 조금이라도 현실적이지 않은 부분은 없다. 단연코 없다. 영화에서 어떤 종류의 영화적 대리만족과 카타르시스를 얻으려고 했다면 '큰'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이다. 반면 영화에서 또 다른 나의 이야기와 같은 공감을 느끼고자 했다면 '큰' 위안과 격려를 얻었을 게 자명하다. <패터슨>은 그런 영화다. 


YOLO 시대정신에 반기를 들다


반복되는 일상이 지겹다는 이 시대, YOLO 시대. 이 영화는 정확히 반복되는 일상을 보여준다. ⓒ그린나래미디어(주)



다람쥐 쳇바퀴 굴리듯 끝없이 반복되는 일상은 우리에게 더 이상 특별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일상에서 특별한 걸 찾거나 만들고자 하지 않는다. 거기에서 안정을 찾는 시대가 저물고 YOLO(You Only Live Once)의 시대가 오지 않았는가. <패터슨>은 그런 시대정신에 일종의 반기를 든다. 


나의 하루는 어떠한가. 6시 반쯤 일어나 씻고 옷을 입고는 아내가 내려준 커피를 마시며 TV를 보고 아내와 얘기를 나눈다. 7시 20분쯤 집을 나서 8시 40분쯤 회사에 도착한다. 저녁 6시에 어김없이 퇴근해 7시 반쯤 집에 온다. 간단히 씻고 저녁을 먹고는 침대에 누워 TV를 보던 스마트폰을 하던 아내와 얘기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12시쯤 잠에 든다. 저녁을 먹고 1~2시간 정도 아내와 함께 산책을 나갈 때도 있다. 


달라지지 않는 하루 루틴의 큰 얼개이다. 패터슨도 다를 바 없겠지만 그에겐 '시'가 있다. 하루 일과의 순간순간, 행간과 자간을 촘촘히 잇는 시상이 그의 하루를 풍성하게 한다, 특별하게 한다.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것, 그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시가 되기에 그 특별함은 다시 평범함으로 치환된다. 삶이 예술이 되는 순간이다. 


나에게도 패터슨의 시와 같은 게 있다. 책과 영화, 내 평범한 삶을 특별하게 해주는 것들이다. 그것들 또한 어느새 내 삶의 패턴 안에 자리잡아 평범함의 하나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특별할 것이다. 패터슨도 그러할 테고, 영화에서 패터슨이 존경하는 패터슨시 출신의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도 그러했을 테다. 그는 평생 의사로 일하면서 역시 평생 시를 썼다. 


자기 계발이 세계 확장


자기 계발보다 세계 확장, 소수 예술보다 만민 예술을 지향해야 한다. ⓒ그린나래미디어(주)



버스기사가 시를 쓴다는 설정임에도 너무나 현실적인 이 영화에서도, 심지어 패터슨이 존경에 마지 않는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상징주의를 배제한 객관주의로 명성을 떨친 와중에도, 영화적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 패터슨이라는 캐릭터를 조금만 더 뜯어보면 '시인'이 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눈을 뜨는 그 순간부터 정확히 정해진 대로의 하루를 살아간다. 전날 아내가 챙겨둔 옷을 입고, 매일 똑같은 아침을 먹고, 산책길 같은 출근길을 걸어가며, 완벽히 정해진 행선지를 돌고 돌며, 아내가 챙겨준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고, 다시 산책길 같은 퇴근길을 걸어오고, 아내와 얘기하는 시간을 갖고, 반려견과 저녁 산책을 나가고, 바에 가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맥주를 마신다. 


거기에 루틴 안에서 생각할 어떠한 거리도 없다. 그의 몸은 정해진 대로 움직이며 그의 정신은 모두 '시'로 향해 있는 것이다. 특히 그는 버스를 운전하며 눈으로는 매순간 똑같은 듯하지만 완전히 다른 풍경을 보고, 귀로는 그가 천착하는 일상의 언어로 된 대화들을 들을 수 있다. 블루칼라 노동자의 훌륭한 자기 계발이 아닌 세계 확장이다. 


우린 자기 계발이 아닌 세계 확장을 해야 한다. 그런가 하면 우리 모두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 다분히 아마추어적으로. 그것이 진정 삶을 풍성하게 하고 결국 행복하게 할 것이다. 패터슨과 로라가 보여주는 아마추어 예술가로의 일상성이 우리에게 힘을 주고 격려와 함께 위로를 보내는 것 같다. 


비록 패터슨의 하루가 최적의 조건으로 꽉 짜여 있다고 해도, 우리 손에는 그런 조건이 쥐어지지 않는다 해도, 예술은 일상과 함께 하는 것이기에 일상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누구도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패터슨>을 보며 삶이 언제, 어떻게 예술이 되는지 알기란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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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의, 봉준호에 의한, 봉준호를 위한 <옥자>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7. 7. 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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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봉준호 감독의 <옥자>


'거장' 봉준호 감독이 4년 만에 들고온 영화 <옥자>. 개봉한 지 열흘 가량 지났지만, 몇 달은 지난 느낌이다. ⓒ넷플릭스



봉준호 영화는 대체로 직선적인 스토리 라인을 지닌다. 확실한 목표가 거기에 있고, 우리의 주인공은 그곳에 다다르고자 부단히도 노력한다. 그 자체로도 흥미를 끌기에 충분한대, 영화를 통해 가장 재밌게 대리만족 또는 대리경험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에드벤쳐적 요소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단 관객을 끌어모으고는, 봉준호는 진짜 하고 싶은 얘기를 한다. 그건 다름 아닌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이야기다. 


봉준호처럼 필모에서 흑역사가 없는 감독도 드물 것이다. 2000년의 시작에서 <플란다스의 개>로 시대를 앞서간 실험적인 현실 풍자 코미디를 선보이고는, 에누리 없이 3~4년에 한 번씩 작품을 들고 왔다. 여전히 그는 현실을 그리고, 가감없는 코미디적 요소를 적재적소에 흩뿌리며, 누군가에게는 실험적일 수 있는 풍자를 선보인다. <옥자>라고 다르지 않을 텐데,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 영화가 '봉준호 영화'라서 좋다. 


문제는 그의 영화에서 문제점을 찾기 힘들다는 데에 있다. 사건은 이해하기 쉽고, 등장인물은 따로 또 같이 개성과 조화를 두루 갖췄으며, 메시지는 도처에서 두루두루 양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그의 영화를 영화적으로도 현실적(영화 외적)으로도 비평하기가 너무 힘드니,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이럴 땐 '봉준호 영화'가 싫다. 


<옥자> 간략 스캔


'미자의 옥자 되찾아 오기 여정'이 주를 이루는 영화 <옥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넷플릭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설국 열차>를 어느덧 4년 전으로 뒤로 하고, 그보다 더 많은 말과 탈을 안고 우리 앞에 나타난 <옥자>를 들여다볼 때다. 상황 논리에 따라 봉준호 영화가 좋다느니 싫다느니 라고밖에 운을 뗄 수 없는 리뷰 초입을 뒤로 하고, 영화를 간략히 스캔해보자. 


글로벌 기업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CEO 루시 미란도(틸다 스윈튼 분)는 회사를 환경친화적인 기업으로 변화시키고자 거대 프로젝트인 '슈퍼돼지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세계 26개국에 슈퍼돼지를 분양하고 잘 키워진 슈퍼돼지를 10년 후에 데려오는 것이다. 강원도 두메 산골에 살고 있는 미자(안서현 분)의 소중한 친구이자 가족인 '옥자'가 바로 그 슈퍼돼지인데,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이들이 옥자를 뉴욕으로 끌고 간다. 


미자는 할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앞뒤 볼 것도 없이 옥자를 끌고 가는 이들을 쫓는다. 두메산골에서 내려와 미란도 한국 지부에 쳐들어가고, 옥자를 뉴욕으로 끌고 가는 트럭에 매달리는 등 위험천만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급기야 옥자를 이용해 그들만의 작전을 벌이려는 비밀 동물 보호 단체 ALF와의 협치, 그리고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협박과 회유로 미자는 뉴욕에서 옥자와의 재회를 꿈꾼다. 


하지만, 그 사이 옥자는 ALF의 대의명분과 미란도의 탐욕, 나아가 한때 동물을 사랑했지만 이제는 미란도의 하수인이 된 동물학자 죠니(제이크 진렌할 분)의 광기로 당해서는 안 될 잔인하고 잔혹한 짓을 당한다. 과연, 미자는 옥자와 함께 강원도 두메산골로 돌아갈 수 있을까? 옥자는 '돼지고기'로 전락하지 않을 것인가?


전형적인 봉준호 영화 <옥자>


여러모로 봉준호가 생각나는 영화다. 봉준호 스타일 구축에서 봉준호 월드 창조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넷플릭스



<옥자> 역시 전형적인 봉준호 영화였다. 자연스레 봉준호 영화에 대한 호불호가 동시에 느껴졌다. 전체적으로 나무랄 데 없는 흐름과 사건과 캐릭터와 카메라워킹과 미장센과 메시지였다. 오랫동안 고심한 흔적과 고심을 고스란히 영화로 옮길 수 있는 능력과 능력을 만천하에 영화 내외적으로 이슈화하면서 떨침에 여한이 없었다. 


봉준호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더 많아지면 많아졌지 줄어들진 않는다. '영화'로서 우리가 기대하는 최소한의 기대치가 아닌 최대한의 기대치에 근접한 퀄리티를 선보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봉준호 영화가 아닌 봉준호 스타일인 것 같다. 처절하게 와닿는 비판이나 작정하고 비꼬는 풍자가 아닌, 다분히 상업영화의 자장 안에서 이루어지고 보여지는 것들이다. 그래서 봉준호 영화는 점점 이슈는 늘어나고 논의는 적어진다. 


또 봉준호 영화는 그 안에서 다른 요소들에 비해 직선적이고 단편적인 스토리 라인을 띄고 있기 때문에, 보여주고 전해주고 싶은 것들이 많아질수록 독이 된다. 그건 다름 아닌 메시지에서 비롯되는데, 덕분에 사건 진행은 산만해지고 캐릭터는 소모되며 영화 내적 재미가 아닌 영화 외적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요소는 줄어든다. 


신념과 교조주의 사이에서 흔들리며 대의를 위해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ALF의 위상과 존재 의의,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운전기사로 잠시 잠깐 얼굴을 비춰 약간의 추임새로 자본주의의 대명사 대기업과 현대사회 젊은이의 우환을 드러낸 김군이 아닌 배우 최우식의 쓰임새, 연관되어 '초호화 캐스팅'과 '사건 진행과 메시지 전달'을 위한 수많은 주연급 배우들의 소모 등. 


그의 영화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입장에선 안타깝지만, 그의 입장에선 이해가 간다. 그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지, '예술'을 만드는 게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영화'를 보여주려 하는 것이지, '스타일'을 보여주려 하는 게 아니다. 이처럼 거시적으로나마 또는 거시적으로밖에 그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또 안타깝다면 안타까운 부분이다. 미시적으로 들어가면, 봉준호 영화는 <설국열차> 이전에 이미 모든 걸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봉준호 월드'를 구축하지 못한 게 또 마음에 걸린다. 


봉준호 영화를 본다


누가 뭐라해도, 봉준호 영화가 나오면 보지 않을 수 없다. <옥자> 또한 최소한 몇 번은 볼 것 같다. ⓒ넷플릭스



그럼에도 우린 봉준호 영화를 본다. 그는 자타공인 지금, 아니 21세기 들어 한국에서 가장 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이다. 그를 만나지 않고는 한국 영화를 제대로 만났다고 하기 힘들다. 과장을 보태지 않고 그가 '한국'에서 태어나 '영화'를 하게 된 건 수많은 이들에게 축복인 것이다. 영화의 총본산 할리우드와 영화의 본고장 유럽에서 인정하고 찬양하는 봉준호다. 


한편 드는 생각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하필 한국에서 태어나 영화를 하게 된 게 그에게는 결코 축복이 아닐 거라는 거다. 할리우드였다면 그는 단연코 크리스토퍼 놀란 이상 가는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하다 못해 일본이었다면 독보적인 존재로 군림하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지난 <설국열차>, 이번 <옥자>를 접하고 더욱 확고해진 생각이다. 


<옥자>를 통해 봉준호 감독이 앞으로 조심해야 할 것들이 보였는데, '비판을 위한 비판'과 '디테일을 위한 디테일'이 그것이다. 둘다 지금의 봉준호를 있게 한 요소들인데, 천착과 스타일은 자칫 울궈먹기와 흐르지 않는 물로 변형·고착될 수 있다. 우린 여지없이 <옥자> 전체와 부분들에서 자본주의 비판적 요소를 볼 수 있었고, 찰나의 순간이나 단역급 캐릭터에게서 봉준호가 던지는 메시지의 핵심들을 볼 수 있었다. 


그가, 봉준호가 파격의 길을 서슴없이 가길 바란다. 언제나 빈틈없이 완벽한 '영화'를 내놓은 그가 이제는 '세계'를 창조하길 바란다. 나는 봉준호의 예술작품이 아닌 영화를 보길 원하지만, 그가 샛길로 빠질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자가 옥자를 기어코 데리고 강원도 두메산골로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고, 미자와 옥자의 여정이 봉준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들로 점철되어 목적이 아닌 수단처럼 비춰지지 않길 바라며, 무엇보다 내가 봉준호 감독의 속깊은 의도를 넘겨짚지 않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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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 봉준호, 비판, 세계, 영화, 예술, 옥자, 이슈,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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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인간, 문학이라는 가깝지만 먼 개체들의 소용돌이 <은교>

지나간 책 다시읽기 2016. 10. 1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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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 읽기] 박범신<은교>


소설 <은교> 표지 ⓒ문학동네



소녀는 데크의 의자에 앉은 채 잠들어 있었다. 이적요 시인은 소녀에게 낯선 감정을 느낀다. 그건 저돌적이기 그지 없는 '욕망'. 그는 우주의 비밀을 본 것 같다고 말한다. 소녀의 이름은 '은교', 머지 않은 곳에 사는 17살 아이다. 그 아이는 이적요의 서재를 청소하게 되었다. 소설 <은교>(문학동네)의 모든 건 은교의 출현에서 비롯된다. 


소설은 이적요 시인이 남긴 노트와 그의 제자 서지우 작가가 남긴 일기, 그리고 시인의 후견인이라 할 수 있는 Q변호사의 현재 시점이 번갈아 가면서 진행된다. 진정한 주인공이라 할 만한 은교의 시점은 끝내 비춰지지 않는다. 


시작은 '시인이 마지막 남긴 노트'인데, 이곳에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사건 전체가 담겨 있다. 소설은 시작하며 그 모든 걸 풀어 놓는다. 스스로 스포일러를 푼 것이다. 이적요 시인은 은교를 사랑했고 서지우를 죽였으며 자신 또한 죽음으로 내몰았다. 남들은 변태적인 애욕이라 부르는 '사랑'과 '욕망' 그리고 누구도 막지 못할 '운명'의 결과물이다.


사건 자체에 반전은 없다. 그대로이다. 다만, 사건의 진행 과정에서 수많은 반전들이 있다. 이적요 시인과 은교, 은교와 서지우 작가, 이적요 시인과 서지우 작가. 얽히고 설킨 삼각 관계, 전쟁을 방불케 하는 심리 스릴러, 관능적인 섹스 판타지까지. 


처참한 영화, 수불석권 소설


소설보다 영화로 먼저 접했다. 영화 <은교>는 개봉도 하기 전에 역시 '노출'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배우 김고은이 이 영화로 데뷔했는데, 헤어 노출을 감행한다. 더불어 박해일은 대역이었다고 하지만 성기 노출을 감행한다. 영화를 안 볼 수 없게 하는 치졸한 언론 플레이였는데, 135만 명 정도의 성적을 거두었을 뿐이다. 영화 자체가 소설에 비해 별 거 없었단 뜻이다. 


조금이라도 박범신 작가의 원작에 그 화살이 돌아갈 순 없지만, 공교롭게도 그의 최신작의 영화 성적이 상당히 별로인 것 같다. <은교>도 은교지만, 최근에 개봉한 <고산자>는 100만 명도 안 되는 처참한 성적을 거두었다. 박범신 작가의 야심작 '욕망 3부작'의 멀티 유즈가 사실상 모조리 실패한 것이다. <촐라체>는 연극으로, <고산자>와 <은교>는 영화로 나왔는데, 큰 반향도 큰 감동도 큰 흥행도 일으키지 못했다. 


영화를 보고선 소설을 보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났는데, 우연히 잡아들게 된 소설은 가히 '수불석권'하게 되는 마력이 있었다. 결코 얇지 않은, 아니 상당히 두꺼운 소설이었는데 욕망의 점점들을 그 끝에 파국이 있을 줄 알면서도 따라갈 수밖에 없다. 마치 불에 뛰어드는 부나방 같다고 할까. 


가끔씩 이런 장르적 글쓰기가 가미된 소설을 읽곤 하는데, 잘못 선택하면 소설에 초점이 맞춰지는 게 아니라 내 자신에게 초점이 맞춰진다. 이런 소설을 보고 있는 나의 파국이 눈앞에 선하기 때문이다. '오래지 않아 책을 덮고 다신 거들떠도 안 보겠구나.' <은교>는 '오래지 않아 소설이 끝나겠구나. 한동안 헤어나오지 못하겠구나. 어서 다른 소설을 꺼내들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게끔 했다. 결코 흔치 않은 경우다. 


노인의 사랑은 특별한가, 당연한가


소설에서 가장 눈살을 찌뿌리게 하면서도 가장 가슴을 친 이는 다름 아닌 초로의 노린 이적요이다. 그의 나이가 되려면 족히 40년은 필요한데 어찌 나는 그에게 매료되었는가. 그의 욕망이, 은교를 향한 변태적인 애욕이자 '사랑'이, 역시 제자 서지우를 향한 삐뚫어진 '사랑'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아니 누구나 느낄 만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누구나'에서 가장 수요가 적은 노인을 택해 극적 요소를 극대화했을 뿐이다. 


이적요의 사랑은 특별했는가. 먼저 생각해봐야 할 건 그가 노인이라는 점이다. 노인은 사랑을 하지 '못한다' 라는 생각보다 하면 '안된다' 라는 생각이 앞선다. 거기에 어떤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노인이 사랑을 하면 추태인 거다. 그런 와중에 10대 여자 아이를 '사랑'한다고? 절대로 용인할 수 없을 거다. 


그럼 노인의 10대 여자 아이를 향한 사랑은 어떠한가. 노인이 아니더라도 10대 여자 아이를 향한 사랑은 쉽게 용인하기 힘들다. 여자 '아이'이기 때문인데, 100% 변태로 찍힐 것이다. 이 또한 사랑이라는 단어를 꺼내들 수 없다. 이적요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꺼내들기 어려운 두 개의 요소를 가지고 사랑이라 말한다.


여기에 제자 서지우가 있다. 이적요와 서지우는 단순한 사제 지간은 아니다. 서지우는 이적요를 스승 이상으로, 아버지처럼 모신다. 시중이나 비서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문학적 신과 다름 없지 않을까? 그렇지만 인간으로서의 이적요도 꿰뚫어보고 있기 때문에 그 이상으로 마음을 주지 못한다. 이적요는 그런 서지우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그에게서 문학적 심성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들보다 더 아들처럼 자신을 대해주는 그에게 인간적으로 호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문학'과 '인간'이라는, 가깝지만 먼 두 개체의 소용돌이가 이들 사이에서 요동친다. 


연애소설? 예술소설!


<은교>는 어느 모로 봐도 연애소설이다.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소설의 주요 골격을 이루고, 사랑이라는 뿌리에서 모든 이야기의 줄기가 뻗어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엔 사랑이라는 욕망과 다른 것들이 있다. 노인의 '사랑'도 있지만 '노인'의 사랑도 있기 때문이다. 노인에 초점을 맞추면, 삶과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죽으면 끝인데 내 마음대로 사랑이라 외치고 사랑을 실컷 해봐야 하지 않겠나 싶다가도, 죽고 나서 영원히 남는 이름인데 살아생전 쌓아올린 명성을 무너뜨릴 순 없겠다 싶은 거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확연히 갈리는 부분이다. 거기엔 삶도 있다. 


또한 이적요는 소설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이기에, 문학이란 무엇인지 시란 무엇인지를 말하기도 한다. 공대생 출신인 서지우로선 절대로 제대로 된 시를 쓰지 못할 거란 강한 믿음과 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러며 이적요가 쓴 소설로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된 서지우를 보면서 이적요가 갖는 복잡한 심리를 통해 '문학 동네'의 생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문학이 별개 아니게 느껴지기도 한다. 


더이상 연애소설로만 볼 순 없지 않을까. 이정도면 예술소설이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다만 한 가지 걸리는 부분은 '이 소설은 단순히 연애소설이 아닙니다. 예술소설을 표방하고 있죠.'라고 대놓고 말하는 듯한 뉘앙스가 소설 전체에 깔려 있어 불편하다는 점이다. 에돌아 은은하게 깔려 자연스럽게 알면 훨씬 좋았으리라. 작가의 실력이 모자랐을까? 그렇진 않은 듯하다. '노인도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외치듯이 '이 소설은 예술소설이다'라고 당당히 외치는 노작가의 기백이 느껴진다. 이 소설은 다름 아닌 박범신의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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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예술가 쳇 베이커의 불행했지만 빛났던 시절 <본 투 비 블루>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6. 8. 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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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본 투 비 블루>


위대한 예술가 '쳇 베이커'. 그는 재즈 음악 역사상 다시 없을 천재 뮤지션인 바, 외모도 출중해 '재즈계의 제임스 딘'으로 불릴 정도였다. 하지만 1950년대 말부터 자신이 대표하는 웨스트 코스트 재즈가 쇠퇴하고 그에 맞물려 마약 인생이 시작된다. 영화 <본 투 비 블루>는 쳇이 불행했던 그 시절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 <본 투 비 블루> 포스터 ⓒ그린나래미디어(주)



천재 예술가, 천사와 악마가 양 어깨 위에 앉아 삶을 조종한다. 천사는 신을 대리해 그에게 천재적인 능력을 주었다. 어느 누구도 감화되지 않을 수 없는, 예술적 능력이다. 그런데 예술가에겐 단순히 '잘'하는 수준을 넘어선 그 무엇이 필요하다. 예술가들은 그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 평생 계속한다. 


천사가 아닌 악마가 그 무엇을 충족시켜줄 수 있다. 천사가 준 능력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때 악마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인다. 악마가 주는 능력은 너무나도 강력하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감당할 수 없기에 무언가가 필요하다. 술이나 마약, 악마를 대리한 것들이다. 


위대한 트럼펫 연주자 쳇 베이커의 불행했던 시절


모든 걸 잃고 다시 일어서려는 쳇 베이커 앞에 제인이 나타난다. 영화는 제인의 출현으로 극적인 변곡점을 맞는다. 임체감을 선사한 것이다. 영화 <본 투 비 블루>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주)



위대한 트럼펫 연주자 '쳇 베이커'. 그는 재즈 음악 역사상 다시 없을 천재 뮤지션인 바, 외모도 출중해 '재즈계의 제임스 딘'으로 불릴 정도였다. 그는 재즈를 대표할 단 한 사람 '찰리 파커'의 사이드 맨으로 재즈계에 데뷔하며 찰리 파커의 영향을 다분히 받았다. 실력도, 삶도. 


찰리 파커가 약을 구하기 위해 친구의 악기까지 훔쳐 팔아먹었다는 일화는 유명한데, 쳇 베이커 또한 평생 동안 마약과 싸워야 했다. 그는 약을 구하기 위해 부인을 사창가로 보내기도 했었다. 1950년대 말부터 자신이 대표하는 웨스트 코스트 재즈가 쇠퇴하고 그에 맞물려 마약 인생이 시작된다. 영화 <본 투 비 블루>는 쳇이 불행했던 이 시절에 대한 이야기다. 


1960년대 중후반의 쳇은 마약으로 감옥을 들락날라하고 갱한테 테러를 당해 앞니가 다 부러지는 치명상을 당했으며 결혼 생활을 두 번이나 실패한 상태였고 '한 물 갔다는' 평이 퍼져 있었다.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연주를 하기 힘들었다. 그 와중에 그 자신의 전기 영화에 그가 출현하게 되었고 그 앞에 제인이 나타난다. 


영화는 뜻밖에 제인의 출현으로 극적인 변곡점을 맞는다. 다분히 쳇 중심으로 전기적 영화가 될 줄 알았건만, 제인이 입체감을 선사한 것이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이 여인은 쳇을 진심으로 사랑하여 그와 함께 살며 옆에서 극진히 보필한다. '인간 쓰레기'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던 쳇, 그의 부활과 제인과의 사랑은 한 몸이다. 과연 그들의 사랑과 그의 부활은 함께 끝까지 갈 수 있을까. 아슬아슬하다. 


천사의 연주를 선사하는 악마의 속삭임 '마약'


쳇 베이커의 인생을 파탄나게 한 원흉인 마약. 하지만 그는 평생 동안 마약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비록 '악마의 속삭임'이지만 '천사의 연주'를 선사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영화 <본 투 비 블루>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주)



제인의 헌신과 본인의 피나는 노력으로 마약은 끊었지만 앞니가 없는 상태에서 제대로 된 연주를 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그가 할 수 있는 게 연주밖에 없고, 무엇보다도 연주를 너무나도 하고 싶었다. 제인을 비롯해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들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고행을 그만두라고 말한다. 


쳇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고통스럽고 지루한 고행을 계속한다. 피나는 노력 같은 말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아니 그들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사실 감옥에 다시 가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일을 얻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일자리를 잡으려는 것과 기회가 같이 찾아 온 것이다. 


우여곡절이 없을 수 없다. 연주 실력은 전에 없이 떨어졌다. 그러나 개성이 뚜렷하고 '좋은' 음악이었다는 것. 비로소 그는 실력이 출중한 예술가에서 예술혼 가득한 진짜 예술가가 되었다. '삶'을 살아보고 왔기에 들려줄 수 있는 음악이었다. 그는 제2의 전성기를 구사하며 상승가도를 달린다. 그러나 불행의 그림자는 다시금 그를 찾아온다. 


그가 재기하고 나서도 약을 끊지 못했다는 건 알려진 사실이다. 마약 없이는 그 중압감을 이길 수 없었고 마약이 있어야 진정한 연주를 선보일 수 있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악마의 속삭임'. 누구라도 한 번쯤 겪어봤을 이 가혹한 딜레마는 그에게 너무 자주 찾아왔다. 영화에서 쳇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익히 알고 있지만, 영화이기에 다른 결말을 기대해본다. 기대하고 싶다. 


자신만을 상처 입혀 위대한 연주를 선 보일 수 있다면?


쳇 베이커는 '연주'와 '사랑'의 갈림길에서 일생일대의 고민을 한다. 다시 없을 절대 부활의 기회에서, 마약에 손을 대면 기회를 완벽히 잡을 수 있지만 그의 사랑은 영영 사라진다.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영화 <본 투 비 블루>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주)



마약은 쳇의 가장 빛나는 순간들을 함께 해왔다. 지배했다는 표현이 맞을까. 그가 마약에 손대지 않았다면, 우린 그 순간들을 지켜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에게 인생 굴곡도 없었을 것이다. 이름은 적당히 떨쳤을지 모르지만, '쳇 베이커'라는 콘텐츠는 남아 있지 않았을 테다. 그래서, 마약을 했어야 한다는 건가?


극 중에서도 나오지만, 그는 찰리 파커를 보고 '오로지 자신만을 상처 입히던 분'이라고 했다. 지독히도 약을 했던 찰리 파커를 옹호하면서 했던 말이라 언뜻 와 닿지 않는데, 거기에 '고독'과 '두려움'을 넣으면 이해가 된다. 찰리 파커나 쳇 베이커나 고독과 두려움에 맞서 싸웠으며, 그 때문에 약을 하면서 자신만을 상처 입혔던 것이다. 자신만 상처 입으면 신의 대리인으로서의 예술혼을 많은 이들에게 선보일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극 중에도 나오는 반가운 전설적 인물들인 '마일스 데이비스'나 '디지 길레스피'를 비롯한 수많은 예술가들은? 그들 중에는 애초에 마약 같은 거에 의지하지 않고도, 마약에 빠졌지만 회복하고 나서 더 좋은 예술혼을 선보였던 이들이 많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기서는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다는 식의 공방은 불필요해 보인다. '어떻게'가 중요해 보이지 않나 싶다. 많은 논란이 있지만, 적어도 예술에서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누구보다 파렴치 했지만 천재적이었던 그였기에 이 논란과 이 주장을 피해갈 수 없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마약을 해서 좋은 음악을 들려주는 걸 옹호한다고 쳐도, 그로 인해 그가 떵떵거리며 사는 건 볼 수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그들은 불행하다. 예술과 삶을 바꾼 거라고 하면 이해가 되겠는가. 


오직 그 하나가 아니고서는 아무 의미도 없는 삶. 우리는 그런 그들을 두고 '위대한 삶'이라 말하지 않는다. 위대한 삶이란 지극히 일반적인, 끝없는 반복을 묵묵히 걸어가는 삶이다. 반면 그들의 삶은 '위대한 무엇'이라 해야 맞을 것이다. 쳇 베이커의 경우, 그것은 '위대한 연주'였다고 해야 할까. 그것이 '위대한 사랑'과 같은 길을 걸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불행한 그의 삶에 비추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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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들 생의 마지막 그림, 그들의 삶과 죽음이 거기에 있다 <화가의 마지막 그림>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6. 7. 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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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화가의 마지막 그림>


<화가의 마지막 그림> 표지 ⓒ서해문집



여섯 살 때 찾아온 척수성 소아마비, 18살 때 당한 끔찍한 교통사고로 평생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안고 살았던 프리다 칼로. 그녀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그림에 '삶이여, 만세'라는 메시지를 남긴다. 오롯이 고통으로 점철된 삶이었기에 오히려 삶에 집착하였던 것이리라. 하지만 그녀가 쓴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이라 적혀 있었다 한다. 


화가들 생의 마지막 그림으로 삶을 유추하다


가수는 노래로 말하고, 작가는 글로 말하며, 화가는 그림으로 말한다. 화가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에는 어떤 특별한 뜻이 담겨져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생각해봄직하다. 처음 그린 그림보다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에 그가 더 많이 담겨져 있음은 자명한 일이다. <화가의 마지막 그림>(서해문집)은 제목 그대로 누구나 알 만한 유명한 화가들의 생의 마지막 그림을 들여다보며 그들의 삶을 유추한다. 


책에 소개되는 19명의 화가들, 그 중에 프리다 칼로의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위태롭고 가장 불행했을 듯한 그녀의 삶이, 가장 빛나 보이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기에. 그건 아마 그녀의 마지막 그림에 담긴 메시지가 죽음이 아닌 삶을 말했기 때문이다. 다른 18명의 화가들이 남긴 생의 마지막 그림들은 어떨까?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을까. 삶이 담겨 있을까, 죽음이 담겨 있을까.


고통스럽고 불행한 삶을 산 화가들


화가 하면 천재가 떠오른다. 천재 하면 고독하지만 화려하고 화창한 삶이었을 것 같다. 그런데 어찌 그리도 하나같이 불행했을까. 책에서 소개하는 19명의 화가들이 물론 수없이 많은 화가들의 삶을 완전히 대변하진 못하지만, 그들은 누가 뭐래도 그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들이었다. 


누구나 알 것 같지만 실상 잘 알지 못하는 이중섭의 삶과 죽음을 들여다보자. 이중섭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가다. 그렇지만 그는 평생 가난에 시달렸다. 그 와중에 일본인 아내를 두었는데 한국 전쟁이 발발해 남쪽으로 피신을 간다. 결국 아내를 일본으로 돌려 보내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 잠시 떨어져 있기로 결정하는데,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이후 그들은 잠깐 만났을 뿐 가난 때문에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이중섭은 그 때문에 삶을 망치고 허망하게 죽는다. 역동적인 그림을 그리곤 했던 그의 마지막 그림이 굉장히 조용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절박한 그리움, 기다림. 


또 한 명의 유명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오랫동안 우리는 그가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고 알고 있었다. 이는 오랫동안 논란거리였다. 저자는 전문가의 최근 연구를 바탕으로 그가 자살로 삶을 마감했을리 없다고 주장한다. 그의 마지막 그림이 중요하게 작용하는데, 일반적으로 고흐의 마지막 그림을 <까마귀가 나는 밀밭>으로 알고 있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나무 뿌리> 미완성본이라는 것이다. 그 작품은 다름 아닌 '생명'을 말하고 있는데, 자살을 하려는 사람이 생명의 메시지를 그린다는 게 어딘지 이상하지 않은가. 여러 정황상 동네에 살던 소년 세크레탕에 의한 타살이 유력하다고 한다. 


사랑과 희망이 가난으로 꺾이고 파괴당한 이들이다. 비단 가난 뿐이겠는가. '삶이 곧 고통'이라는, 삶의 변하지 않는 한 면이자 진리를 몸소 보여준 게 아닌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고 어쩌지 못하는 바, 그저 안타까워하며 기릴 뿐이다. 그래도 그들의 이름은 영원히 남았으니 괜찮다고 해야 할까.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으니, 예술가로서의 인생을 살다간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괜찮다고 해야 할까. 그토록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을지라도. 


고통스럽지만은 않은 삶과 죽음의 화가들


이처럼 고통스러운 삶과 죽음만 있는 건 아닐 거다. 그러면 어느 누가 살고 싶을까. 어느 누가 예술을 하고 싶어 할까. 어느 누가 화가가 되고 싶어 할까. 20세기 미국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에드워드 호퍼는 주로 현대인의 고독을 화폭에 담았지만 그 자신은 헌신적인 아내 덕분에 외롭지 않게 살았다. 그는 아내 조세핀을 만나 그녀의 도움 덕분에 무명화가에서 단숨에 유명화가가 되었다. 조세핀은 호퍼의 반려자이자 모델이자 친구이자 조력자이자 멘토였다. 85세 천수를 누리고 조세핀이 보는 앞에서 임종을 맞이했다. 호퍼의 사망 10개월 후 조세핀 또한 세상을 떠났으니, 이보다 더 좋은 삶이 있을까. 그의 마지막 그림 <두 코미디언>의 모델이 호퍼 자신과 조세핀이었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겠다.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예술가 미켈란젤로, 그는 정확한 인체 비례와 대칭 구도로 조각된 작품들로 균형과 조화를 완벽하게 규현해냈다. 그는 어렸을 때 함께 공부하던 동료와 싸웠는데, 그때 코가 주저 앉는 큰 부상을 당했다. 그 흔적은 평생 그를 따라다니며 외모 콤플렉스를 야기시켰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는 '미(美)'에 집착한다. 그가 '미적인 표현을 신의 섭리로 보는' 르네상스 신플라톤주의에 감화된 건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동성애자이기도 했는데, 당시 동성애는 당연히 시대와 불화할 수밖에 없는 행위였다. 남색은 사형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였다. 아마 평생을 두고 고민했을 것이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향한 시선과 독신할 그리스도교적 믿음 사이에서 말이다. 결국 그는 마지막 그림을 통해 독실한 그리스도교적 믿음을 남긴다. 20대 때 조각한 이상미의 극치 <피에타>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상기시키는 <론다니니 피에타>를 통해서. 


그래도 이들은 다른 이들에 비해선 고통스럽지만은 않은 삶과 살았고 죽음을 맞이했다. 미켈란젤로의 경우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는 살아생전 금지된 사랑을 당당히 밝히고 살았다.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니. 그 또한 호퍼와 마찬가지로 90세의 천수를 누리고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다. '천수'라는 단어는커녕 화가로서의 능력이 아닌 인간으로서 제대로 누리지도 못한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들이 태반인 19인 중에, 그래도 삶다운 삶을 살다간 이들이다. 


고통스러운 삶과 죽음을 마지막 그림으로 보상받다


우린 죽음보다 삶에 관심이 많고, 그가 천재이자 예술가라면 죽음이나 삶보다 작품에 관심이 많다. 반대인 경우엔, 그의 죽음과 삶이 영화보다 극적일 것이다. 책에 소개된 19인들은 어떠한가. 아마 이 모든 걸 충족시켜 줄 거다. 그의 작품도, 삶도, 죽음도 모두 극적이다. 그런 이들의 마지막 작품이라면 더 말할 게 무엇이랴. 그를 온전히 드러내는 것을 테다. 


나의 마지막은 어떨지 상상해본다. 모든 이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편안하게 숨을 거두는 마지막일까,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단 둘이 맞는 포근한 마지막일까, 나조차 모르는 새 급작스럽게 맞는 마지막일까, 너무나도 억울하게 맞는 고통스러운 마지막일까. 어렸을 땐 모든 이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편안하게 숨을 거두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죽음이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최상의 죽음이 아닌가. 


죽음의 형태를 내가 선택할 수 없다면, 이들처럼 죽기 전에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 나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어떤 것을. 그것으로 나의 삶을 반추해볼 수 있도록. 이 또한 하늘이 내릴 수 있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이들 19인의 고통스러운 삶과 죽음 또한 마지막 작품으로 보상받을 수 있지 않을까. 이들이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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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inge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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