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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다분히 실험적이고 예술적인, 적당하게 볼 만한 영화 <원더스트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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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원더스트럭>


영화 <원더스트럭> 포스터. ⓒ CGV 아트하우스



1980년대, 20대 중반이 나이로 일찍 데뷔해 첫 번째 장편영화로 전 세계 독립영화계의 총본산인 선댄스 영화제를 석권한 천재 감독 토드 헤인스. 1990~2000년대 주로 활동하며, <벨벳 골드마인> <파 프롬 헤븐> <아임 낫 데어> 등의 좋은 작품을 남겼다. 그리고 지난 2015년, 8년 만에 영화감독으로 돌아온 그는 <캐롤>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작을 선사했다. 


토드 헤인스의 필모를 들여다보면, 그는 스토리텔러 내지 구성주의자라기보다 비쥬얼리스트에 가깝다. 물론 앞에 나열한 수작들 모두 그가 연출뿐 아니라 각본까지 담당한 걸로 보아, 절대 이야기를 중시하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관객의 입장에서 그의 영화들이 시각적으로 더 결정적이게 다가올 뿐이다. 


<캐롤>은 그의 필모에서 처음으로 각본에 참여하지 않고 연출로만 참여한 작품이다. 결과는 전에 없는 대성공이었다. 2년만에 돌아온 <원더스트럭> 또한 연출로만 참여한 작품으로, <캐롤>의 성공을 이어가려 한 의도가 다분하다. 과연 성공했을까. 


아빠와 엄마를 찾아 뉴욕으로 향하는 두 소년 소녀


영화 <원더스트럭>의 한 장면. ⓒ CGV 아트하우스



1977년 미네소타 건플린트, 소년 벤(오크스 페글리 분)은 사고로 엄마를 잃은 후 어느 날 우연히 '원더스트럭'이라는 책을 접한다. 거기엔 생전 본 적도 없는 아빠에 대한 단서가 담겨 있었는데, 그는 벼락을 맞아 청각을 잃고 만다. 그럼에도 의지를 꺾지 않고 뉴욕으로 향한다. 뉴욕에 있는 킨케이드 서점으로. 


1927년 뉴저지 호보큰, 소녀 로즈(밀리센트 시몬스 분)는 선천적으로 청각 장애를 가지고 있어 아빠에 의해 집에서 감옥 같이 지낸다. 그녀는 뉴욕에서 영화배우로 살고 있는 엄마를 보고 싶어 한다. 어느 날, 청각 장애인 교육을 강제하는 아빠의 강요에 반발해 집을 나와 뉴욕으로 향한다. 


정확히 50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청각 장애를 가진 두 소년 소녀는 각각 아빠와 엄마를 찾아 뉴욕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필연과 우연으로 자연사 박물관을 향한다. 벤은 아빠를 찾을 수 있을까? 로즈는 이후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무성영화, 그리고 모든 것이 분출된 예술적 표현


영화 <원더스트럭>의 한 장면. ⓒ CGV 아트하우스



영화는 실험적이다. 비쥬얼만큼 구성이 중요하다. 1920년대 시점과 1970년대 시점을 나눠, 각각 무성영화의 특징과 예술적 표현을 극도로 살린 특징을 고스란히 투영시켰다. 너무나도 극명하게 갈려 양 극단에 위치하고 있는 것 같은 두 시공간은, 극단은 이어진다는 비논리의 논리에 따라 왠지 이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게 한다. 


청각 장애를 지니고 있는 소녀 로즈의 1927년은, 그래서 노랫말조차 없는 OST만으로 모든 걸 전달할 뿐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로즈가 되어 답답함을 호소하는 동시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관객을 위해 마련한 '상황에 맞는 OST의 변화무쌍함'을 즐겁게 맛본다. 그 자체로 무성영화이다. 


한편 1970년대는 전 세계를 휩쓴 68 혁명 직후이자 통제와 절제의 시대 80년대 직전이다. 모든 것이 분출되던 그 시대를 영화는 소년 벤의 1977년으로 표현하고 있다. 화려하다기보다 진한 느낌의 색감과, 남녀노소는 물론 모든 인종이 한데 모여 소용돌이치는 뉴욕의 모습을 통해서 말이다. 


적당한 기대감으로 볼 만한 영화


영화 <원더스트럭>의 한 장면. ⓒ CGV 아트하우스



두 시공간의 병렬은 자못 예술적 총합처럼 다가온다. 예술이라 하면 다분히 '개성'이 생각나는데, 이 영화가 보여주는 예술은 개성과 개성의 총합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감독이 진정 영화를 사랑하여 영화가 당대 가장 꽃피웠던 두 시절을 되살려 동시에 내보이고 있다고 충분히 느낄 만하다. 


그러면서도 영화 내적으로 소소한 감동과 반전의 서사를 놓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 청각 장애에 의한 '불통'의 기반 위에 감동과 반전이 출현한다. 말이 아닌 표정과 행위에의 소통, 힘든 소통으로도 피어나는 웃음꽃, 결국 느끼고 체험할 수밖에 없는 소통의 위대함, 그리고 소통의 탄생에 대한 은유까지. 


영화는 후반에 가서 갑자기 스토리텔링적 반전으로 선회하여 강점인 비쥬얼적인 측면과 구성적인 측면을 버리다시피하며, 힘을 잃어버렸다. 영화 초반 내보였던 명언 '우리는 모두 시궁창 속에 있지만 그중 몇몇은 별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 영화의 스토리텔링 중심에 위치해 있는데, 후반에 그 의미가 퇴색되어 버린 게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원더스트럭>은 충분히 볼 만한 영화이다. 환상적이지는 않지만, 오래도록 깊은 여운을 남길 것 같진 않지만, 탄성을 자아낼 만한 스토리 내지 구성 내지 비쥬얼이라고 하기엔 애매하지만, 최소한 이 모든 방면에서 후회할 만한 모습을 보여주진 않는다. 적당한 기대감으로 접하는 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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