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 큐레이터'S PICK] <나의 작은 시인에게>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 포스터. ⓒ(주)엣나인필름
미국 뉴욕의 작은 섬에서 20년째 유치원 교사로 살아가는 리사(매기 질렌할 분), 매일매일 따분한 일상을 영위하는 그녀에게 유일한 낙은 종종 있는 야간 시 수업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좋은 평가를 얻지 못해 좌절할 뿐이다. 자신의 평범한 예술적 감각을 이해와는 와중, 그래도 다정다감한 남편이 있어 위로가 되지만 다 큰 아들과 딸들은 그녀의 성에 차지 않는다. 또 그들은 부모를 경원시하는 것 같다.
어느 날 우연히 유치원생 중 다섯 살 난 지미(파커 세바크 분)가 앞뒤로 오가며 시를 읊는 장면을 포착한다. 그 꼬마에게서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천재적 면모를 발견한 리사는 곧바로 달려가 시를 받아적고는 보모에게 말해 집에서도 지미가 불현듯 읊는 시를 옮겨적을 것을 부탁한다. 리사는 지미의 시를 야간 시 수업에서 가서 발표하고 전에 없는 칭찬세례를 받는다.
그녀는 지미의 시를 몇 편 더 자신의 야간 시 수업에서 발표하는 한편, 지미를 훈련시키기 시작한다. 자신은커녕 주위에 그 누구도 알아봐주지 않고 또 못하는 그의 시적 예술 재능을 최대한으로 끄집어내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건 평범한 시적 예술 재능을 지녔지만 욕망과 열망이 꽃피어난 자신을 대신하려는 움직임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리사의 지미를 향한, 아니 리사의 시적 예술 재능을 향한 광기는 어떻게 흘러갈까.
유치원 교사
원작의 제목은 <유치원 교사>, 이 제목이 훨씬 더 적절해 보인다.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의 한 장면. ⓒ(주)엣나인필름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이스라엘의 훌륭한 연출가이자 작가인 나다브 라피드의 2014년작 영화 <시인 요하브>를 원작으로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로스앤젤레스타임즈가 '훌륭한 원작의 영리한 재해석'이라고 평했는데, 딱 들어맞다고 생각한다. 1980년생 사라 코랑겔로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인 만큼 감각적으로 재해석했다.
원제가 <The Kindergarten Teacher>, '유치원 교사'이다. 한국어판 제목인 '나의 작은 시인에게'가 주는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이 제목은 직설적이고, 주체가 '작은 시인'처럼 느껴지게 하고, 심지어 영화가 달달할 것 같다고 짐작하게 만든다. 즉, 한국어판 제목은 상당히 잘못 지었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겠다.
반면 원제 <The Kindergarten Teacher>는 그 무엇도 지레짐작하지 않게 한다. 대신 영화를 보며 계속 곱씹을 수 있다. 유치원 교사이자 엄마이자 아내이자 여자인 리사, 그녀는 이제 유치원에서 전에 없던 예술적 열망에 눈을 뜨게 된다. 그건 교사, 엄마, 아내라는 명명에서 벗어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녀에게 예술적 열망은 곧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가꾸고 나아가는 것과 다름 없는 것이다.
40대 여성 리사의 삶
교사이자 엄마이자 아내로서의, 40대 여성 리사의 삶은 무엇일까.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의 한 장면. ⓒ(주)엣나인필름
영화는 매우 '시시하게' 시작된다. 평화롭고 나른하고 무료한 일상을 단 한 장면으로 보여주는데, 곧 40대 여성 리사의 삶이다. 안정적이지만, 그래서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삶 말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우선 '리사의, 리사에 의한, 리사를 위한', 리사를 주체로 하여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녀의 고뇌와 열망과 삶을 총체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 다섯 살 천재 시인 '지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리사에 의해 '모차르트급 재능의 천재 시인'이 된 지미는, 그러나 영화에서 결코 주인공도 주체도 될 수 없다. 혹자는 이를 두고 영화 <아마데우스>의 천재 모차르트와 그를 시샘하는 범인 살리에리를 연상시킬 수도 있겠고, 그 영화에서 사실 주인공이자 주체는 모차르트가 아니라 살리에리라며 운을 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리사와 지미는 살리에리와 모차르트가 아닌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와 모차르트에 가깝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일찍이 알아본 레오폴트가 철저히 교육시키고 또 일명 '그랜드투어'로 유럽 전역을 다니며 홍보도 했기에 모차르트가 모차르트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리사는 지미의 보호자가 아니고, 다행히도 레오폴트는 모차르트의 보호자였다.
이런 관계 설정이 영화의 한 축이라면, 그로 인해 변해가는 40대 여성 리사의 삶이 또 한 축이겠다. 유치원에서도 집에서도 시 수업 교실에서도 그녀는 전에 없는 열망 어린 눈빛과 몸짓을 보이며 한껏 활기찬 삶의 여운을 내보이는 듯하다. 물론 그에 따른 희생량이 있어야 하므로, '누군가가 전해주는 시를 그저 읊을 뿐인' 천재 시인 아이 지미가 그 희생양일 것이다.
예술적 열망의 표출
예술적 열망이 표출되다 못해 폭발한다. 그 끝은 어떤 모습일까.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의 한 장면. ⓒ(주)엣나인필름
크게 영화를 구성하는 두 축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데 다층적인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리사가 단순히 자신의 예술적 열망을 분출할 매개체로 지미를 이용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한편 지미의 천재적 시적 예술 재능을 아무도 알아봐주지 않고 알고 싶지도 않다는 걸 알기에 그렇게 그냥 묻혀버리기엔 너무 아쉽고 안타깝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극중에서 지미가 시를 얼마나 좋아하고 즐기고 하고 싶어 하는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대략적으로나마 재단하기도 힘들 것 같다. 결국 감독이 전하고 보여주고자 하는 건 리사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리사의 시적 예술 열망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반면 교사이자 아내이자 엄마로서의 무료한 삶에 변화를 주고 싶다는 열망은 추상적으로 드러난다.
리사의 열망과 욕망이 좀 더 다층적이고 다채롭고 구체적으로 드러났다면 영화가 좀 더 풍성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조금 있지만, 영화가 다루고 있는 게 다름 아닌 '시'라는 점에서 나도 모르게 이해가 가기도 한다. 시를 잘 모르지만, 시에 '추상'이 상당히 용인된다는 건 인지하고 있다. 이 영화를 한 편의 시로 생각하면 그러려니 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극 중에서 몇 번이나 읊어지는 지미의 첫 시를 인용한다. 무료한 삶도 충분히 아름답고 특별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애나는 아름답다
나에게는 충분히 아름답다
태양이 그녀의 노란색 집을 두드린다
마치 신이 보낸 신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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