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영화 리뷰] <괴인>
기홍은 목수로 일한다. 나이는 30대 중후반쯤으로 보이고 회사를 때려치운 지 2년밖에 안 되지만 벌써 사람도 부리며 돈도 하루에 40만 원씩 번다. 친구를 만나 비싼 식사도 척척 사줄 정도는 된다. 집도 좋다. 경기도 과천 외곽에 멋들어진 집에 세 들어 사는데 집 구조도 특이하고 집 근처 풍광은 감탄이 들며 심지어 집주인도 좋다.
그런데 기홍은 그의 말마따나 '노가다 중 그나마 엘리트'인 인테리어 목수다. 시작한 지 2년밖에 안 되었으니 아는 건 별로 없고 약간의 기술과 많은 장비가 있다. 친구 한 명을 부린다. 일이 들어오지 않으면 손가락만 빨아야 하는 상황이지만 자세히 모르는 친구한테는 허세를 부리기 일쑤다. 세 들어 사는 집을 마치 자기 집인 양 떠들어 대기도 한다.
덥수룩한 수염에 일할 때는 버럭 화를 내기 일쑤다. 처음 보는 사람들한테 서슴없이 반말을 내뱉는다. 마치 오래 봐왔던 듯 말이다. 그런가 하면 가족에겐 한없이 무뚝뚝하고 모르는 사람한텐 차가운 듯 친절하며 같이 일하는 사람들한테는 표독스럽다. 어려 보이는 여 고객한테는 과도하게 친절하고 세 들어 사는 집의 주인한테는 공손하기 이를 데 없다. 기홍, 그는 누구인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가?
과연 '괴인'은 누구인가
영화 <괴인>은 여러 단편으로 주목받은 이정홍 감독의 장편 영화 연출 데뷔작이다. 이 영화 또한 개봉 전부터 주목받았는데,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4관왕을 차지했고 제11회 무주산골영화제에서는 감독상과 영화평론가상을 받았으며 제48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는 영예의 대상 주인공이 되었다. 이밖에도 시드니영화제, 홍콩아시안영화제 등 해외 유수 영화제들에 초청되었다. 데뷔작 치고는 엄청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영화에서 제목의 '괴인'이 누구인지 생각해 본다. 영어 제목 'a wild roomer'는 주인공 기홍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데 말이다. 물론 그마저도 범상치는 않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기홍은 덥수룩한 수염에 반말을 찍찍 내뱉는 30대 중후반 남자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대하는 태도와 자세가 완전히 다르기도 하다. 흔하다면 흔하지만 이상하다면 이상할 수도 있겠다.
평범한 듯 범상치 않은 듯 괴상한 듯한 캐릭터들은 난생처음 연기해 보는 일반인들이 맡아 완벽하게 구현했다. 서툴고 거친 맛이 캐릭터와 조화를 이루었다. 한편 그나마도 없는 서사를 뚝뚝 끊기는 편집으로 더 불친절한 듯 또 거친 듯 표현했다. 모두 하나를 향해 달려가 모아진다. 제목 '괴인'이라는 단어에서 유발되는 알 수 없는 묘한 불안감과 긴장감 그리고 몰입감.
관계와 공간에서의 침입
<괴인>은 '침입'에 관한 이야기다. 우선 관계에서의 침입이다. 살면서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하여 첫인상, 관계맺음, 유유상종, 회자정리 거자필반 등의 말이 쓰이는 것이다. 관계를 맺을 때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 외모, 행동거지, 말투, 분위기 등에서 풍기는 이미지에서 말이다. 그들과는 선뜻 관계를 맺기 힘들다. 관계를 맺는 게 아니라 침입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영화에는 기홍이 괴인인 듯하다. 주지했듯 수염도 덥수룩하고 반말을 서슴지 않으며 사람마다 행동거지를 확연히 다르게 한다. 반면 관계를 맺지 않은 이들에겐 친절하다. 그런데 그와 관계 맺은 이들도 만만치 않다. 들여다보면 기홍보다 건실하지 않거나 외모가 호감형이 아니거나 사람을 막 대하거나 삶이 예사롭지 않다. 마치 내 삶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것 같다.
다음으로 공간에서의 침입이다. 영어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 기홍은 정환과 현정의 집에 세 들어 산다. 기홍에게 거칠고 투박한 면이 있지만 그들은 금세 친해진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정환과 현정은 기홍에게 뭔지 모를 감정을 느낀다. 정환과 현정은 서로 말 한마디도 잘 섞지 않지만 기홍과는 따로 잘 노는 게 아닌가. 기홍을 보고 정환은 질투하는 것 같고 현정은 호감을 느끼는 것 같다. 그런 기홍의 공간에 또 다른 누군가가 침투해 오자 위화감을 느끼는 기홍이다.
부유하는 현대인의 표상
<괴인>은 현대인의 표상을 이야기한다. 시도 때도 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 여기저기를 부유하는 게 전형적인 현대인의 모습이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자신을 투영하고 이곳저곳에서 안식처를 찾으려 한다. 그런데 잘 되지 않는다. 사람들마다 개성이 다르고 또 곳곳마다 역시 각자의 개성이 있으니 말이다. 나와 결이 비슷한 사람과 장소를 발견하기가 너무나도 힘든 것이다.
영화에서 기홍은 괴인의 면모를 지녔지만 사실 지극히 보통의 현대인이다. 자신을 지키려고 또 밑 보이지 않으려고 센 척하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자신의 별 볼일 없는 얼굴을 수염으로 가리고 역시 별 볼일 없는 직업을 근사한 집으로 가리며 또한 별 볼일 없는 외형을 말투와 행동거지로 가리는 것이다. 가면을 벗은 그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들에게 하는 것처럼 친절하고 어리숙하고 착한 보통의 사람일 뿐이다.
현대인은 커뮤니티, 즉 공동체의 일원이길 지향한다. 혼자인 모습을 남들이 보길 원치 않기 때문이다. 한편 남 이야기 하기를 좋아하는 현대인인데, 그렇게 하면 자신을 조금이나마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괴인은 특별하지 않다. 특별한 이유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현대인의 특성이 보다 더 진하게 묻어 괴인의 모습을 형성한다. 그들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나를 발견할 수도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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