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중쇄 미정>
<중쇄 미정> 표지 ⓒ그리조아
지난해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대대적인 인기를 얻은 드라마 <중쇄를 찍자!>, 일본 만화 매거진 업계 2위를 달리는 대형 출판사에 입사해 고군분투를 마다 않고 성장해가는 신입 편집자의 이야기를 담았다. 우리로서는 알 길 없는 일본만화계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고 '편집자'라는 더더욱 알 길 없는 직업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어, 그 새로움이 많이 와닿았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문학계간지와 단행본을 양립하는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는지라, 접해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새로움보다 일종의 동료로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며 한편으론 자괴감이나 자격지심도 느꼈으니... 나는 출판계의 99%를 차지하는 소형출판사의 일원이고, <중쇄를 찍자!>의 주인공는 굴지의 대형출판사의 일원이 아니겠는가. 재미와 공감과는 별개로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편집자의 소소하지만 피말리는 일상
이런 99%의 사정을 눈치챘는지 출판계의 99%를 차지하는 소형출판사의 이야기가 만화로 나왔다. 제목은 '중쇄를 찍을지 정하지 못했다'라는 뜻의 <중쇄 미정>(그리조아). <중쇄를 찍자!> 원작이 만화이거니와 중쇄를 찍자는 얘기이니, 다분히 노리고 나온 작품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겠다.
만화는 굉장히 얇은 분량에 대사도 거의 없고 배경도 거의 없으며 스토리라 할 것도 없다시피 하다. 대신 소형출판사의 막내 편집자가 겪는 일상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거의 없는 대사도 거의 출판계에서만 쓰는 전문 용어이기에, 초반엔 각주만 읽으며 지나간다. 그 자체로 편집자의 소소하지만 피말리는 일상이다.
책 한 권을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편집자의 일, 말그대로 피말린다. 잘 팔릴 것 같은 책 기획, 밤새 작업해도 마감에 맞추기 힘든 일상, 3번이나 꼼꼼히 살펴도 보이지 않던 오자는 꼭 인쇄가 마무리되어 책으로 나와야 보이고, 서점이나 유통업체는 절대 굽히지 않을 고압적인 자세로 자존감을 밑바닥으로 끌어내리고, 무엇보다 수많은 고민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책은 팔리지 않는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중쇄 미정>에 나오는 표류출판사보다 더더욱 작은 출판사에서 온갖 잡일부터 시작해 대형 진행까지 도맡아 한다. 그러다보니 제대로 '3교'를 볼 시간도, 저자 관리나 서점 관리를 할 시간도, 오자 하나에 '편집자란 무엇인가'라는 자문도 할 시간이 없다. 그렇지만 공통적인 게 있다면, '팔리지 않는 책'에 대한 고민은 항상 따라 다닌다는 것이다.
'책 팔아 돈 버는 시대는 지났다'는 씁쓸하고 충격적인 깨달음
만화에 나오는 표류출판사는 지난 한 해 '중쇄'를 찍은 책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중쇄를 찍는다는 건 비로소 '본전 치기'를 했다는 뜻(중쇄를 찍으면서도 돈이 들기에 완전한 본전은 한참 멀었지만). 초판 1쇄를 찍을 때 총제작비에 맞춰 부수를 산정하기 때문인데, 사실 99%의 출판사들이 중쇄 찍는 것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을 것이다.
그나마도 시간이 갈수록 초반 부수가 적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2000부를 찍으면 많이 찍은 거라고 봐야할 정도이다. 그 수치는 앞으로 점점 더 작아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제는 중쇄를 찍어도 본전이 아닌 경우가 다반사인 것이다. 소형출판사의 앞날에 희망이 있기는 한 것일까.
표류출판사의 편집장은 참으로 멋지다. 아니면 의지가 박약하거나 내려놓았거나. 주인공인 막내 편집자에게 조언하길, '천 권만 팔리는 책도 만들어야 해. 만 권이 팔리는 책의 독자는 천 권만 팔리는 책을 안 볼 테니까. 우리는 그런 독자들이 책을 보게 해야 할 의무가 있어.' 혹자에겐 자본주의 시대에 적자만 늘어나는 소형출판사 편집장이 늘어놓는 궤변이자 자기 위안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공감이 가는 건 사실이다.
자력으론 절대적으로 만 권 팔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애초에 천 권만 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젠 '책 팔아 돈 버는 시대'는 지나갔다는 깨달음, 책을 펴내 독자들에게 전달한다는 사명감밖에 안 남았다는 깨달음. 이 쓸씁하고 충격적인 깨달음을 만화는 담담하게 전한다. 심지어 아기자기까지 하다.
편집자란 무엇인가, 출판이란 무엇인가
매일 매순간에 편집자의 일에 대한 자괴감이 따라온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이 뒤따른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사명감으로도 지탱할 수 없을 때가 올 텐데. 표류출판사의 사장처럼 뒤를 봐주는 사람이 없어지면 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 텐데. 그때 회사 식구들은? 내 가족들은? 우리 출판계는? 독자는?
경력이 조금 쌓인 지금은 덜하지만, 혼자 끙끙대며 밤새 두려움에 떨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초판 부수를 만 단위로 고민하는 출판사의 이야기인 <중쇄를 찍자!>는 이런 나의 고민과 두려움에 절대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어줄 수 없었다. 반면 <중쇄 미정>은 비록 고민과 두려움을 수면 위로 다시 올라오게 했지만 상당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나만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게 아니구나. 심지어 강 건너 일본에서도 하는구나.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저 열심히 책을 만들고 어떻게든 팔아보겠다고 이것저것 해보는 수밖에. 하지만 그건 모든 출판사에서 나보다 훨씬 열심히 치열하게 하고 있을 일이다. 그러니 어쩌면 '버틴다'는 표현은 맞지 않을지 모른다. 지극히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의 일이니. 그저 '나아가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게 맞는 말 같다.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책'을 만들어야 하는 시대가 왔다고 말이다. 요즘 들어 책에 관한 책이나 출판사에 관한 책, 편집자에 관한 책에 전보다 많아진 것도 그 일환이 아닌가 싶다. 그야말로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욕망의 표출이 아닌가. '저자와 독자를 이어주는 창'에 불과한 편집자, 책의 모든 곳에 스며들어 있지만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편집자의 이야기를 말이다. 여기까지 왔다. 아니,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기에 여기까지 온 게 당연할지 모른다.
이 책은 '소형출판사'의 편집자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소형출판사의 '편집자' 이야기이기도 하다. 출판사 관계자는 물론, 일반 독자분들도 한번 보시면 좋을 듯하다. 이 책 또한 작디작은 출판사에서 홀로 옮기고, 편집하고, 디자인하고, 영업하고, 펴낸 이가 작업한 책이니만큼, 보는 것으로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은근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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