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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치료제로 작용해야 한다'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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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표지 ⓒ책세상



'철학'은 어렵고 멀게 느껴진다. 어려운 건 어쩔 수 없을지 몰라도, 굳이 멀어야 할 필요는 없겠지마느 그 어떤 학문보다 우리와 먼 게 사실이다.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을 아우르는 인문학이 맹위를 떨치고 있는 와중에도 철학은 그 고고함을 꺾지 않는다. 가까이 오라 손짓해도 선뜻 가까이 가지 못한다. 


철학이 생겨난 고대, 철학은 삶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을까'하는 문제가 곧 철학이었다는 것이다. 지혜 추구가 주요 목표였다. 하지만 17~18세기 자본주의 형성과 시민사회 성립으로 근대가 시작되며 함께 등장한 근대 학문 하에서 철학은 삶에서 멀어졌다. 근대 철학자들은 학문과 기술과 경제로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철학은 지금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지극한 '학문'이 된 것이다. 


이에 반기를 든 위대한 철학자 칸트는 '철학이 치료제로 작용해야 한다'고 했다. 20~21세기의 '아픈 시대'에 이보다 더 정확하게 철학이 가야할 길을 제시한 말이 있을까. 이 말은 전언과 다름 없었다. 많은 철학자들이 이에 동의하고 활발한 논의를 전개했다. 철학은 학문에서 다시금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 직접적으로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삶의 기술'로서의 철학, 철학의 전통으로의 회기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걸 삶을 다스리는 기술이라 한다면, 이는 '삶의 기술'로 요약할 수 있겠다. 혹자에게는 이 움직임이 철학을 삶의 기술의 하나로, 즉 '삶'이라는 하찮은 것을 위한 수단으로 축소하려는 걸로 보일 수 있겠다. 사실이다. 하지만 철학이 살기 위해선 필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는 철학의 전통으로의 회기이다. 


삶의 기술 철학 권위자 빌헬름 슈미트는 오랫동안 이를 천착해왔다. 그의 주요 저서 또한 <삶의 기술 철학>이라는 책인데, 우리는 그 요약판인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책세상)으로 손쉽게 그 정수를 접할 수 있다. 앞의 책에선 18개 장을 통해 15개의 기술을 선보였던 바, 이 책에선 3개의 기술을 추가했다. 


"철학적 숙고는 삶의 기술에서의 기술에 대해, '숙련된 삶'에 대해 그리고 의식적인 삶의 운영을 위해 한몫을 할 수 있다. 근거와 논증을 탐구하고, 개념들을 해명하고, 구조와 그것에 근본적으로 연관되는 사항들을 발견하고, 조건들을 숙고하고, 가능성들을 분석하는 것은 철학적인 행위이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은 삶이 처한 상황을 해명하는 데 보조 역할을 할 수 있다."(11쪽)


저자가 주장하는 삶의 기술들, 그중 공감되는 것


저자가 주장하는 삶의 기술들은 일관성 있게 나열되어 있지만, 격렬히 공감되는 것들이 있기도 하고 받아들이기 힘들기도 하다. '습관'을 삶의 기술을 지속적으로 수련하고 의식적으로 실행하는 기법 중 하나로 본 것도 그 중 하나이다. 그동안 습관에 자기계발 요소를 듬뿍 담아 참으로 많은 저서들이 나왔는데, 철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애초에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철학의 자기계발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삶의 기술의 주체는 수련과 테크닉이 필요하고, 그 가장 기초적인 기법으로 습관을 들며, 타율적 습관이 아닌 자율적 습관이 진정 의미 있는 형식의 습관이라 말한다. 탁월한 능력을 양산하는 습관, 모든 게 완벽하지만 주의할 점이 있다면 칸트가 모든 습관의 위험한 적대자로 삼은 '관성의 법칙'이다. 정착된 습관은 아무런 수고 없이 탁월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멜랑콜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독특한대, 가장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우울증'으로 불리며 '치료'해야 하는 '질병'으로 인식된 멜랑콜리를 삶의 기술 철학 중 하나로 본 것이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이 주장하는 '피로사회'와 닿아 있는 면이 있다. 심하게 낙관적인 보편적 정보와 소통의 문화에서 의미가 생긴 세계에 대한 무상함의 의식으로서의 멜랑콜리, 활동의 과잉이 낳은 활동사회 또는 성과사회에서 느끼는 피로감과 정반대에 위치한 무력감 충분한 멜랑콜리. 


한때 멜랑콜리가 트렌드처럼 젊은 층을 휩쓴 적이 있었는데, 다분히 반(反)세계적인 생각에서 기인했다고 본다. 세계가 한없이 오르막일 때에도, 한없이 내리막일 때에도, 다를바 없는 무한 활동과 긍정이 모두를 압박할 때였다. 아마 이전까지 찾을 수 없는 막강한 압박이었을 테다. 그 반대급부로 생겨난 질병인 멜랑콜리. 이제는 당당히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 고민할 때 반드시 필요한 기술 중 하나로 자리매김 해야 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삶의 기술들, 그중 받아들이기 힘든 것


끝간데 없는 긍정이 아무리 철폐되어야 한다고 해도, 일부러라도 부정적으로 사고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을 완전히 받아들이긴 힘들다. 현대적 인간이 행복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힘들어 한다는 건 알고 있다. 그렇지만, 항상 가장 좋지 않은 경우를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조금 유치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같은 주장을 하는 한병철의 접근과 성찰과는 차이가 있다. 


주도권을 쥐려고 하는 주체가 통제할 수 없는 일 앞에서 좌절하며 얻는 병리현상을 말하기 위해, 한병철은 긍정의 폐해을 주장했지 그저 부정을 말하진 않았다. 반면, 저자가 주장하는 부정은 부정을 위한 부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멜랑콜리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자는 주장은 하나의 시각으로 바라볼 요지가 있지만, 부정적으로 사고하라는 건 인생 자체를 바꾸라는 말과 다름 없다. 함부로 해야 하는 말이 아닌 것이다. 거기에 어떤 깊은 접근이 있다고 해도 말이다. 


죽음을 동반하는 삶을 살라는 주장은 머리로는 받아들이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 누가 있겠으며, 죽음을 상정함으로서 삶이 더욱 풍부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 누가 있겠는가.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아직 삶 속에 온전히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든 게 사실이다. 


죽음의 재발견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가슴으로도 받아들여지게 지속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간접적으로라도 죽음을 체험한다. 궁극적으로 죽음에의 집착을 없애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자 한다. 


"삶의 기술은 죽음의 기술과 결부되어 있다. 또한 삶의 지식 역시 죽음의 지식과 결부되어 있다. 죽음은 삶을 그늘지게 하지 않는다. 죽음은 삶의 한 구성요소이다." (106쪽)


'아름다운 삶'과 '나의 삶'


열거된 관점들로 저자가 추구하는 삶의 기술의 목적은 무엇일까. '아름다운 삶'이라고 한다. 아름다운 삶은 무엇일까. 명명백백히 밝히지는 못하고 있지만, '긍정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름답다고 한다. 얼핏 저자가 앞서 주장한 바와 상반되는 것 같은데, 이에 저자는 쾌적한 것과 즐거운 것 등의 '긍정적인 것'과는 다른, 불쾌한 것, 고통스러운 것, 추악한 것, 부정적인 것 등을 포함한 '긍정적인 것'을 뜻하다고 밝혔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삶의 기술의 자기계발화일지 모른다고 했는데, 정정해야 할 것 같다. 그는 삶의 기술을 미셸 푸코의 '실존의 미학'과 맞닿아 있는 개념으로 상정하고, 이를 위해 아름다움의 개념을 새롭게 규정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르면 '삶의 기술의 자기계발화'가 아닌 '성찰적 삶의 기술'이 형성 된다. '인간'과 '삶'을 위한 철학적 접근, 그 일환인 '삶의 기술'.


오히려 지극히 철학적인 접근이 주를 이루기에, 명백한 기술이 명명되고 방법이 상세히 설명되고 있음에도 편하고 쉽게 읽어내려갈 수 없다. 철학을 '지식'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과 '지혜'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해석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방법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되, 그 안을 깊이 들여다보는 해석을 손수 살펴야 한다. 그 끝에 다름 아닌 '나의 삶'이 있다는 것만 잊지 않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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