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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으로 훌륭한 고전적인 이야기 <지구빙해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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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지구빙해사기>


<지구빙해사기> 표지 ⓒ미우



먼 미래의 지구, 제8기 빙하기 시대는 전 지구가 얼어붙었다. 어비스 메갈로폴리스 가넷 지역 지하에 시블 자원 개발 공사 석탄 채굴 기지 털파가 있다. 석탄 매장량이 거의 바닥나기 시작했고, 여기저기 고장나 기지를 통째로 바꾸지 않는 한 다람쥐 쳇바퀴 같은 나날이 이어질 뿐이다. 


타케루는 시블 자원 개발 공사 사장의 서자다. 꼬이고 꼬인 그의 성향은, 어비스에서 쫓겨나게 했고 털파에서조차 설 자리를 잃게 만들었다. 위태로운 상황이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 듯하다. 와중에 사고로 털파의 소장이 죽고 타케루가 소장이 된다. 하지만 타케루는 술에 쩔어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다. 한편, 자연이 선사하는 대재앙이 눈앞에 왔다. 한 달이나 빨리 한겨울이 시작된 것이다. 털파는 식량도 다 떨어져 가는 상황에서 자칫 갇혀버릴 위험에 처하는데...


빙하기, 간빙기 시대를 배경으로 한 SF 만화


<고독한 미식가> 등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만화가 '타니구치 지로'의 유일무이한 SF 만화 <지구빙해사기>다. 일반 만화책보다 큰 판형에 조금 많은 페이지까지, 방대한 SF 세계를 그리기에는 다소 부족해 보이는 스펙에도 불구하고 기대를 하게끔 만드는 그다. 또한 <투모로우> <설국열차>로 대표되는 빙하기 SF 또는 빙하기 재난 영화의 면면도 믿음을 갖게 하는 이유다. 


만화의 배경은 먼 미래의 빙하기, 간빙기 시대다. 언젠가는 반드시 빙하기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예상 하에 만드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어떤 시대일까? 학생 때 지구과학 시간에 많이 배웠을 텐데, 우리는 신생대 제4기 후빙기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한다. 신생대의 마지막 빙기가 종료된 약 1만 년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지질시대다. 


하지만 오늘날 지구의 기온 상승 추세는 예사롭지 않다. 북극 빙하의 감소가 그 대표적 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후빙기가 아닌 간빙기라고 추측할 수 있는 강력한 이유다. 만약 그렇다면 빙하기 시대의 도래가 멀지 않았다. 간빙기를 짧게 유지하다 빙하기를 맞이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만화를 보면 빙하기에서 순식간에 간빙기로 진입한다. 타케루를 한결 같이 지지해주던 이들의 죽음으로 정신을 차리고 각성한 타케루가 지상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 건지 알기 위해 여행을 떠나면서 겪게 되는 엄청난 재난이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긴 빙하기가 끝나고 간빙기가 다시 찾아오는 바로 그 시기, 지구는 요동치고 지구의 온갖 생물이 다음 종을 형성한다. 왠지 지금이 바로 그 시기인 듯하다. 


'전형적'으로 훌륭한 고전적인 이야기


상, 하로 나눠 진행되는 <지구빙해사기>는 상권이 빙하기 시대의 털파 기지를 다루고, 하권이 간빙기 시대의 타케루 일행 모험을 다룬다. 스케일은 하권의 내용이 크지만, 상권의 내용이 훨씬 더 잘 짜여져 있고 재밌고 흥미롭다. SF 치고 절대적인 양에서 부족한 것이 뒤로 갈수록 힘이 부치는 결과를 낳은 것 같다. 작가도 후기를 통해 드러내고 있는 바, 그런 부분이 상당히 아쉽지만 전체적으로 볼 만 하다. 


만화는 인간이 만들어 낸 기계문명과 자연의 대립, 그리고 인간과 자연을 이어주는 구원자의 출현과 성장이 주를 이룬다. 아주 고전적인 이야기인데, 이 만화가 만들어진 때가 1990년 전후인 만큼 그럴 만도 하겠다 싶다. 스토리 라인의 짜임새는 훌륭하다. 죽음과 그에 따른 눈물로 인간이란 존재가 천진함의 마지막 잔재를 씻어내는, 즉 성장하는 모양새를 잘 이끌어냈다. 거기에 성장해 구원자가 된 그를 매개자이자 현자 또는 멘토가 나와 도와주는 것도 '전형적'으로 훌륭하다. 


작화(그림) 솜씨는 뛰어날 대로 뛰어나 SF에 제격이다. 스토리에 아쉬움이 남아도, 만화인 만큼 작화를 감상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하겠다. 특히 섬세하기 이를 데 없는 장면 장면을 대하다 보면, 요즘 만화들에선 찾아보기 힘든 90년대 감수성을 느낄 수 있다. 만화의 전성기라고도 할 수 있는 그때인데, 실험 정신 넘치는 대범함과 자신감으로 중무장한 채 그리고자 하는 세계를 거침없이 만들어낸 사례의 수혜자가 아닐까.


공상은 공상으로만 그치길...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구상하고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엔 다 이유가 있을 거다. 그중 단연 압권은 '자연과 인간'일 거다. '대립'일 때도 있고, '조화'일 때도 있고, '공존'일 때도 있다. 인간사를 보면, 18세기에 본격적으로 기계 문명을 일으키며 자연과의 대립을 시작했다. 기계 문명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자연은 파괴될 때로 파괴되었다. 그러고나선 보란듯이 재난·재해가 인간 사회를 덮쳤다. 오롯이 '인재'인 경우도 있었고, '자연 재해'인 경우도 있었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인간은 자연과의 조화와 공존을 꿈꾸지만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지구빙해사기>는 상권에서 빙하기를 배경으로 자연의 무차별 공습에 기계로 연명하는 인간을 그렸고, 하권에서는 간빙기를 배경으로 폭주하는 기계에 대응해 자연과 인간이 연합하는 모습을 그렸다. 일반적인 일대일 구도와는 조금 다른, 반 기계·반 문명의 다층적인 면을 지향한다. 기계와 자연의 조화는 불가능한 것일까. 인간과 자연의 연합이라는, 생소한 모습에 위안을 삼아야 할까. 


어느덧 5년이 지난, 인류사에 길이 남을 대재앙 '동일본 대지진'. 대지진이야 인류사에 수없이 많았지만, 동일본 대지진이 특별한 이유는 '원전 사고' 때문이다.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 낸 문명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바, 자연의 일격에 한순간 무너졌다. 그리고 5년이 지나 그 여파가 우리나라까지 미쳐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진을 선사했다. 정녕 거짓말 같은 시나리오가 아닌가. 그렇지만 눈앞에서 이루어졌다. 


공상은 공상으로 그쳤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수많은 이들의 예상과 예측이 빗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지만 이대로 흘러가면 공상은 반드시 현실이 되고, 예상과 예측은 여지 없이 적중할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저 언젠가 들이닥칠 그 무엇을 어렴풋이 생각하며 살아가면 되는 걸까.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는다. 아무도 다음 세대를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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