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장서의 괴로움>
<장서의 괴로움> ⓒ정은문고
장서의 즐거움을 처음 느낀 적은 초등학생 때였던 것 같다. 아버지께서 위인전기 한국편과 세계편을 사주셨는데, 동생과 대결을 벌이며 서로 좋아하는 위인의 전기를 각자 가져갔다. 그때까지는 책이 좋아서라기보다 위인이 좋아서였지만, 지나서 생각해보니 그 행동이 장서 활동의 시작이었다.
이후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최초로 나의 의지 하에 이문열의 <삼국지>를 구입하게 되었다. 빌려볼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사달라고 졸랐던 거였다.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방과 후에 학교 근처 책방에 가서 <강희대제>라는 책을 한 권씩 사봤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부터 독서가에서 장서가로 변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장서가가 된 후에도 변화는 계속되었다. 10 여 년 동안 꾸준히 책을 사모으다보니 예전에 산 책이 늙기 시작했다. 헌책이 된 것이다. 이럴 바엔 애초에 헌책을 사자 하는 취지에서, 20대 후반부터는 헌책을 사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부담이 없다 보니 사는 횟수와 사는 책의 개수가 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마이뉴스에서 서평단에 참여하다 보니 근 1~2년 사이에 책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게 되었다. '장서의 즐거움'이 '장서의 괴로움'으로 변하게 될 날이 멀지 않았다.
정은문고 '수집의 발견' 시리즈의 신작 <장서의 괴로움>은 필자의 괴로움과는 차원이 다른 괴로움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배경은 일본이다. 얼핏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바야흐로 매년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라는 출판계, 종이책의 시대는 저물고 전자책의 시대가 올 것이라 호언장담하는 많은 사람들, 한편에서는 환경 운동을 하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종이책 읽기 운동을 하고 있을 정도로 아이러니한 상황. 이런 상황에 장서의 괴로움이라니? 책을 간직하는 괴로움?
필자의 장서 목록은 약 500권. 크지 않은 책장 3개 분량이다. 본래 더 많지만, 나름대로 양서만 취급하고 있기에 누구에게 주거나 팔아버린 책들이 꽤 많다. 책을 좋아하지만, 책이 주거 하는 데 방해를 하는 건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장서의 괴로움>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런 나의 장서 활동이 별 것 아니게 느껴진다. 책으로 집이 무너진 이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말이다.
나의 아버지는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서재는 책으로 가득했다. 책장에서 흘러넘친 책들이 책상 위나 바닥에 쌓여 있었는데, 어느 날 바닥이 뚫리고 방이 기울었다.
직업 특성 상 책으로 둘러싸인 집을 방문한 적이 몇 번 있는데, 그때마다 부럽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사는 데 불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적어도 무거워서 바닥이 뚫리는 불안감에 시달리지는 않겠지만, 모두 불에 타기 쉽고 물에 흐물거리기 쉬운 종이이기 때문에 너무 조심조심하면서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나의 장서 활동이 현명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필자는 책이라면 앞뒤 안 가리고 모으는 장서가는 진짜 장서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이 과연 구입한 책의 70% 정도나 읽을지 의문이다. 필자의 경우 산 책의 70% 이상은 읽으려고 노력한다. 최소한 그것도 지키지 못한다면, 책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닐까?
작가이자 평론가인 요시다 겐이치는 "책장에 책이 5백 권쯤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5백 권의 가치'는 이랬다. "책 5백 권이란 칠칠치 못하다거나 공부가 부족하다는 것과는 다르다. 어지간한 금욕과 단념이 없으면 실현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를 실행하려면 보통 정신력으로는 안 된다. 세상 사람들은 하루에 세 권쯤 책을 읽으면 독서가라고 말하는 듯하나, 실은 세 번, 네 번 반복해 읽을 수 있는 책을 한 권이라도 더 가진 사람이야말로 올바른 독서가다.
지난 2008년 전 세계 도서 출판 시장에서 종이책이 약 99%를 차지했지만 2012년에는 약 91.5%로 줄었다. 그 동안 전자책 시장은 7배 증가했다. 또한 국내 전자책 시장은 지난 해 전체 도서 출판 시장에서 약 22%를 차지했고 2017년에는 약 32.5%로 증가할 거이라 한다. 종이책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자연스레 '장서가'의 존재는 점점 희귀해질 것이다.
멀지 않아 과거에는 우표를 사용하면서도 모았지만 지금은 단지 '희귀'한 우표를 모으기만 하는 '우표 수집가'나 고문헌을 모으는 수집가처럼, '장서가'도 종이책이라는 '희귀'한 아이템을 모으는 이처럼 비춰질 지도 모르겠다. 시대의 흐름을 바꾸기엔 턱없이 역부족으로 느껴진다.
이런 와중에 이런 책의 출현은 반갑기 그지 없다. 과연 현재 책을 모으는 즐거움을 넘어 괴로움을 느끼는 사람이 몇 이나 될까? 그런 사람은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프로그램에서 소개되었을 것이다. 한편 이 책은 책이라는 다소 거리가 느껴지는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상당히 코믹하다.
'괴로움'은 해학을 자아내는데, 여기에 '구원'이 있다며 '장서의 괴로움'은 남을 웃길 수 있도록 써야 제맛이라고 말하는 저자이다. '장서'를 뒤로 하고 마냥 그 상황을 즐기면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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