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장고: 분노의 추적자><장고: 분노의 추적자>는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가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한 채 대중들한테로 더욱 다가가 인정을 받은, 적어도 흥행에 있어서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기존 최고 흥행작이었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을 넘어서 전 세계적으로 4억 달러가 넘는 흥행 성적을 올린 것이다.
<저수지의 개들>, <펄프픽션> 등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후 <킬빌> 시리즈로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었고, <신시티>로 그의 작품 세계를 확실히 했다. 이후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로 작품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감독이 되었고, 이번 작품 <장고: 분노의 추적자>로 마침표를 찍었다. 균형을 맞추며 여전히 성장하고 있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최신작에는 어떤 매력이 흐르고 있는 것일까.
흑인 노예와 백인 현상금 사냥꾼의 기묘한 조합
<장고: 분노의 추적자>의 한 장면. 흑인 노예와 백인 현상금 사냥꾼의 기묘한 조합. ⓒ 소니 픽쳐스코리아
<장고: 분노의 추적자>는 미국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85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직 흑인 노예가 해방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쿠엔틴 타란티노는 이 점에 착안했다. 흑인 노예를 전면에 내세우며, 백인 현상금 사냥꾼 한 명을 딸려 보낸다. 그것도 미국인이 아닌 독일인을. 그는 바운티 헌터이지만 시종일관 (흑인 노예의 입장에서) 정의로운 모습을 보인다. 굳이 미국인이 아닌 다른 나라의 백인이라는 설정을 차용한 것은 이 백인이 실제로도 오스트리아 태생이라는 점이라는 웃지 못할 우연성을 차지하고서라도 다분히 고의적이다. 즉, 당시 미국의 인종차별을 희한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다.
흑인 노예의 이름은 장고(제이미 폭스)이고, 백인 현상군 사냥꾼의 이름은 슐츠(크리스토퍼 왈츠)이다. 그들은 영화의 시작에서 만나게 된다. 장고는 다른 흑인 노예 네 명과 같이 두 명의 백인에게 팔려서 끌려가고 있었고, 길을 가던 중 슐츠와 맞닥뜨린다. 슐츠의 흑인 노예 한 명 판매 제안을 백인 두 명이 거절하자, 슐츠는 그들에게 다짜고짜 총을 갈긴 후 장고를 데리고 사라진다.
그런데 이 백인, 장고에게 생각지도 못할 제안을 하는 게 아닌가? 엄연히 장고를 돈 주고 산 슐츠는 그에게 자유를 주고, 대신 자신과 함께 현상금 사냥꾼의 길을 떠나지 않겠냐고 제안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장고의 아내인 브룸힐다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말이다. 장고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장고의 발목을 묶었던 '사슬은 풀렸고'(unchained)(영문 부제), 그는 '분노의 추격자'(한글 부제)가 되었다.
서부극, 그리고 블랙스플로이테이션과 폭력
<장고: 분노의 추적자>의 한 장면. "나랑 현상금 사냥꾼 노릇 같이 해볼래?" ⓒ 소니 픽쳐스코리아
그들은 본격적인 현상금 사냥에 나선다. 총으로 쏴서 죽이고 현상금을 받고. 그렇게 사냥감을 찾아, 아내를 찾아 떠나 떠돌던 어느 날, 장고의 아내를 사갔던 캔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집에 당도한다. 극 중에서 누가 누구를 악당이라고 칭하기에는 뭔가 꺼림칙하긴 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캔디가 악당이다. 그는 부자이며 흑인을 당연하게 노예로 부린다. 이를 악당으로 치부한 것은 즉, 당시 미국의 백인 거의 전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흑인 노예가 주인공인 것도 모자라 백인 부자가 악당이라. 어디서 들어봤던 전문 영화 용어가 생각나게 한다. '블랙스플로이테이션 필름(blacksploitation film)'이라고 했던가. black(흑인)과 exploitation(착취)의 합성어로, 본뜻과는 다르게 흑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흑인을 위한 영화를 총칭한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장고>에서 서부극(정확히는 남부가 배경이지만)이라는 장르적 특성을 베이스에 깔고, 블랙스플로이테이션과 자신의 장기인 폭력을 조미료로 친 것 같다. 영화의 인물, 사건, 배경 등을 제쳐두고서라도, 영화 자체에 대한 사랑과 실험정신이 돋보인다고 하겠다.
이처럼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에서는 보이지 않는 감독의 영향력이 가히 절대적이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전작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 이어 이번에도 아카데미를 거머쥔 슐츠 역의 크리스토퍼 왈츠의 존재가 빛난다.(크리스토퍼 왈츠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장고: 분노의 추적자>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쿠엔틴 타란티노 사단의 새로운 히어로로 등극한 그의 차후 행보를 기대해 본다. 쿠엔틴 타란티노와 함께할 다음 작품에서는 어떤 연기로 어떤 폭력의 미학을 어떤 조미료를 쳐서 보여줄지. 이 둘의 조합이 자못 신선하다.
난무하는 패러디와 설정들, 그리고 웃음 코드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를 리뷰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그의 영화에는 수많은 패러디와 오마주가 난무하고, 영화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는 설정과 조합들이 얽히고설켜 있다. 영화감독이기 이전에 영화배우이고 영화배우이기 이전에 영화광인 그의 독특한 이력이 한몫하고 있는 바, 양파같이 벗기고 벗겨도 계속 나오는 속살과 계속 흐르는 눈물처럼 그의 영화도 끝날 때까지 정신이 하나도 없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이 영화는 동일한 제목의 1966년 작 <장고>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작품의 주인공 장고 역을 했던 프랑코 네로가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 잠깐 모습을 드러낸다. 또한 캔디의 집사 역할을 한 사무엘 잭슨은, 과거 블랙스플로이테이션 필름의 대표작 <샤프트>(1971년도 작)를 리메이크한 <샤프트>(2000년도 작)의 주인공이었다.
패러디와 오마주의 숲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타란티노는 특유의 유머를 살짝 가미한다.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서는 슐츠라는 캐릭터 자체가 영화 전체의 유머를 담당한다. 그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화신이기도 하다. 화려한 언변과 장난기 어린 으로 방심하게 하고 피도 눈물도 없이 총을 쏘아 죽이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얼굴이 찌푸려지기보다 '풉'하는 웃음이 나오곤 한다.
<장고: 분노의 추적자>의 한 장면. 총을 쏘는 그의 표정을 보라. 장난기가 어려있지 않은가? ⓒ 소니 픽쳐스코리아
또 기억에 나는 한 장면이 있다. 장고와 슐츠가 기거하는 마차를 습격하려는 일당이, 잔인한 행동과는 다르게 바보 같은 말들을 주고받으면서 말 위에서 말싸움을 하는 장면이다. 자신들이 누구인지 모르게 하려면 두건을 뒤집어 써야하는데 두건을 썼더니 앞이 보이지 않는 다는 따위의 말들이다. 그 와중에도 피는 튀고, 튀는 피는 통쾌하며, 통쾌함에 대한 해석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가 기본적으로 항상 받아왔던 평단의 지지 속에서, 대중성으로도 인정을 받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해석의 유무. 평론가들은 그의 영화를 입체적으로 해석하고 평가한다. 앞서 말했듯이 양파 같은 면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입맛에 딱 맞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영화는 시원시원하다. 통쾌하고 뒤끝 없다. 굳이 해석하려 하지 말고 그냥 그가 보여주는 화려한 액션과 피의 향연을 즐기면 된다. 이번 영화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서는 액션과 피의 수위가 다소 낮았던 것 같다. <킬빌>에서 봤던 사지절단의 향연을 기대했다면 그 기대감을 조금 낮추시라. 대신 치밀한 각본 및 구성과 더욱더 성숙되고 완벽해진 쿠엔틴 타란티노 스타일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니.
"오마이뉴스" 2013.4.1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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