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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링컨, 파렴치한 일을 했더라도 위대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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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링컨>'링컨'의 초상화를 보노라면 헝크러진 머리와 깊게 패인 팔자 주름 그리고 다 죽어가는 듯한 반쯤 감긴 눈을 한 그의 모습이 들어온다. 대통령이라면 잘 손질된 머리와 형형하다 못해 상대방을 죽일 듯이 쏘아보는 눈빛이 연상되건만, 링컨의 모습은 대통령은 커녕 평생 고생한 옆집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그의 모습에서 내가 느낄 수 있었던 건 하나다. '고뇌' 즉 괴로워하고 번뇌하는 모습이다.  

영화 <링컨>은 그의 생애 마지막 4개월의 고뇌를 그리고 있다. 그는 무엇에 그리 괴로워하고 번뇌하였을까. 먼저 위에서 언급한 링컨의 모습과 그리고 그의 고뇌를 훌륭히 연기한, 아니 재연한 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의 연기의 바탕에는 훌륭한 시나리오가 있었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몇 년간 주연을 고사하다가 '라이벌까지 끌어안은 링컨의 포용 리더십'이라는 부제를 단 <권력의 조건>(21세기북스)이라는 책을 원작으로 시나리오를 보고 거절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동안 주로 자신이 맡은 주연을 원톱으로 한 영화에서 한 인간의 한계와 이를 극복하는 연기를 잘했던 그가 그동안 만들어진 많은 링컨 관련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링컨의 인간적인 고뇌의 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이를 더할나위 없이 훌륭히 해냈고, 미국 아카데미 사상 최초의 남우주연상 3회 수상의 영광을 안을 수 있었다. 이로써 그는 영화 <링컨>에서 경쟁자(?)인 미국 아카데미 감독상 2회 수상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명성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자유냐 전쟁이냐

영화 <링컨>의 주된 내용은 앞서 언급했듯이 링컨의 고뇌다. 그 고뇌에는 인류를 바꿀 딜레마가 존재한다. 한국판 영화 포스터에도 나와 있듯이 '자유냐 전쟁이냐' 즉, 미래 세대를 위해 노예제를 폐지해 전인류의 판도를 바꿀 자유를 위한 선택을 하느냐, 현 세대를 위해 남부군으로부터 들어 온 평화제의를 받아들여 전쟁을 종식시키는 선택을 하느냐.

모든 사람들이 알다시피 링컨은 전자의 선택을 한다. 그리고 그의 바람대로 노예제는 폐지되었고, 비록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살렸고 그들에게 자유를 주었으며 그보다 더욱 큰 영향력을 끼쳤다.

당시의 남북전쟁에도 '노예제 폐지'뿐만 아니라 여러 경제적인, 정치적인 입장들이 뒤섞여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중심을 잃지 않고 '자유와 평등'라는 숭고한 이념을 달성한 것을 보면, 링컨이 그것을 위해 파렴치한 일들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위대'라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링컨>의 한 장면. 자유냐 전쟁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 20세기폭스코리아


작금의 우리도 링컨 재임 당시 미국과 비슷한 구도에 있다. 우리나라는 '자유 민주주의'의 수호를 내걸고 북한과 대립하고 있는바, 이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이를 행하고 있는 권력자(들)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들이 행하는 짓은 링컨이 행했던 짓과 다를 바 없다. 결정적 차이점은 그 목적에 있다. 개인적인 영달을 추구함과 대인적인 목표를 추구함의 차이.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링컨

영화를 보면 최고 권력자 링컨이 아닌 '인간(개인)' 링컨이 보인다. 인간이고, 개인이기 이전에 최고 권력자이자 숭고한 자여야 했던 모습에 남편 링컨, 아버지 링컨, 숭고한 이념을 위한 비(非) 숭고한 모습의 링컨을 보여준다.

아들을 잃은 슬픔에 더해 아들을 잃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아들을 사지로 몰아 넣을 수 있는 법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남편을 보고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이는 아내에게, 어느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에 링컨은 소리를 친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난 할 만큼 했어! 나보고 어쩌라고!"

그렇다. 그는 인간이고 개인이기 전에 최고 권력자로서 해야 할 일을 훌륭히 해냈고, 아내를 위해서 아들을 위해서 나름 할 일을 충분히 해왔다. 그런데 왜 아내는 몰라줄까? 그는 매일 옆에서 잔소리를 해대는 아내 때문에 주름이 늘어만 간다. 결국 그는 폭발했고 아내에게 너무나도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고 만다.

<링컨>의 한 장면. 당신, 우리 아들이 그깟 노예들보다 중요해요? ⓒ 20세기폭스코리아


링컨은 또한 아버지이기도 했다. 전 인류를 위한 일을 하고 있지만, 그로 인해 아들이 죽으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는 나이가 차서 군대에 입대하려는 아들에게 말한다. 요약하면 이렇다.

"아들아, 아빠가 대통령이잖니? 너 하나쯤 군대 안 가게 하는거 문제도 아냐. 가지 말거라"

링컨은 아들에게도 너무나도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고 만다. 앞에 것과 지금 것도 모두 다 실제 링컨의 모습이다. 감독이 링컨의 이미지를 깎아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넣은 것이 아니란 것이다. 이를 현재로 가져온다면 용서할 수 없는 죄에 해당되지만, 그 자체로 영화의 맛을 살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링컨은 또 하나의 아주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그것 또한 작금의 정치에서 종종 보이는 수작이다. 공직이나 일자리를 주며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행위 말이다.

<링컨>의 한 장면.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미국 헌법 수정 제13조를 통과시켜야 하오. ⓒ 20세기폭스코리아


영화의 배경은 남북전쟁 막바지. 링컨은 전쟁이 종결되기 전에 공식적으로 노예제도를 폐지한다는 골자의 '미국 헌법 수정 제13조'를 통과시키려 한다. 왜냐하면 그는 전쟁이 끝나면 노예제 폐지 또한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당의 표가 20표 모자른 상황에서 남부군으로부터 평화제의가 들어온다. 

이에 링컨은 어쩔 수 없는 조치를 내린다. 공직과 일자리를 주며 어떻게 해서든지 야당 의원들을 매수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전쟁 지속을 불사하고 야당 의원 표를 모으기 위한 파렴치한 매수 작전을 펼친 것이다. 이에 어느 누구보다 노예제 폐지를 강하게 주장했던 스티븐슨조차 이렇게 말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가장 순수한 사람이 가장 부패한 방법으로 행한 가장 위대한 법"

이에 링컨이 했던 말을 무엇일까.

"나침반은 정북의 방향을 가리켜준다. 그러나 그 길에 있는 늪, 사막과 협곡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럴땐 돌아야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에겐 노예해방으로 인한 자유와 평등이라는 신념을 실현시켜야 할 막중한 임무가 있었다. 하지만 그 길에 수많은 악재가 있었고 이를 돌파하기 위해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을 때도 있었다. 그에게는 인간적인 모습조차 그의 신념을 향한 길을 가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 길이 올바른 길이라고 믿는다면...

링컨의 신념은 무엇이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시골의 변호사 출신이자 서민들을 위한 정치를 한 것에 불과한 링컨은 1858년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 선거에서의 연설로 유명해진다. 당시 민주당의 시티븐 더글라스는 미국 각 주와 준주 시민들이 노예제를 택할지 말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자치권을 강조한다. 이에 링컨은 답한 바는 다음과 같다. 이는 곧 그의 정치 신념에 부합하기도 한다.

"자치주의는 옳습니다. 이는 절대적이며 영원합니다. 그러나 노예제 문제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제 오랜 신념은 제게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인간이 다른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것과 관련된 도덕적 권리는 있을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선거에서 떨어지고 만 링컨이지만 그의 확고한 신념 하에의 연설과 토론으로 많은 사람을 매료시킬 수 있었고, 이는 대통령에 당선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링컨>의 한 장면. 내가 선택한 길은 이 길이고, 나는 그저 이 길을 갈 뿐이오. ⓒ 20세기폭스코리아

최고 리더의 신념에 의한 한 마디는 이토록 많은 영향을 끼친다. 아무리 영향력있고 머리좋은 사람들이 떠들어대도 최고 권력자의 생각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당시에는 분명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단적인 생각이라고 폄하당했겠지만, 결론적으로 그의 생각은 올바른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위대한 이유는 단순히 소수를 희생하면서까지 대의를 실현했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가 행한 대의가 가는 길에 자신의 생각이 도움을 줬을 뿐, 그의 생각을 위해 대의를 갖다 붙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가 행한 대의가 만약 실현되지 않았을 때에도 그가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 자신에게는 더 좋았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신념을 실현하려 했다는 점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신념들이 존재한다. 거기서 한 개의 신념을 선택해 신조로 삼고, 이 길이 올바른 길이라고 믿고 목숨을 걸고 가는 사람들도 수없이 많다. 그러나, 링컨이 가고자 했던 길을 갔던 사람은 얼마나 될까?

영화는 링컨의 위대함을, 링컨의 치졸함을 보여주지 않는다. 제목과는 역설적이게도 영화는 링컨을 보여주지 않는다. 위대한 선택 앞에 내던져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한 인간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단지 그가 링컨이었을 뿐이다. 이와는 반대로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아니면 안 되었을 영화였다.


"오마이뉴스" 2013.3.21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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