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달팽이의 회고록>
스톱 모션 클레이 애니메이션 영화 <달팽이의 회고록>은 'This film was made by human beings', 즉 '이 영화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라는 자막으로 끝맺는다. CG나 AI 기술이 애니메이션계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한 지 오래인데 수공업 100%를 자랑하는 애니메이션이라니, 엄청나다든가 대단하다든가 하는 말 이상의 반응이 나올 만하다.
나아가 이 작품의 세상은 제작진이 직접 빚은 점토로 만들어졌는데, 200여 개의 세트에 7천여 개의 오브제와 13만 5천여 개의 사진 등 숫자가 주는 무게감이 상상을 초월한다. 극 중 주인공의 처연한 삶을 오롯이 담아내기 위해선 그에 맞는 무게감이 필요했을 테다. 영화는 그 작업을 완벽에 가깝게, 아니 완벽하게 해냈다.
<달팽이의 회고록>은 멀리 호주에서 건너온 애니메이션 영화다. 의외로 신선한 '호주 영화' 또는 '호주 애니메이션'인데, 작품성을 인정받아 세계 최고의 애니메이션 영화제라 불리는 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대상을 수상했고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에선 장편 애니메이션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2024년 최고의 매니메이션 중 하나로 손꼽을 만하다.
한평생 불행과 불운이 함께한 삶
쌍둥이 누나 그레이스는 입술갈림증을 안고 태어나 비록 수술로 고쳤지만 어렸을 적부터 놀림을 많이 당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달팽이 껍데기 안에 숨는 상상을 했다. 엄마의 영향으로 달팽이와 친숙했던 영향도 있지만 태어나길 소심했던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쌍둥이 남동생 길버트만이 유일한 버팀목이다.
하지만 그들은 일찍이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헤어진다. 그레이스는 캔버라로 가서 너무나도 자유분방한 양부모를 만났고 길버트는 퍼스로 가서 직접 사이비종교를 만들어 아이들을 착취하는 양부모를 만난다. 새로운 환경에서도 그들의 삶은 더 나빠지면 나빠졌지 결코 나아지지 않았던 것이다.
와중에 그레이스는 독특한 괴짜 할머니 핑키를 만나 삶의 새로운 버팀목이자 유일한 친구로 함께한다. 제임스를 만나 결혼까지 골인한다. 그런데 이제 같이 살 수 있게 된 길버트가 갑자기 죽었다고 하는 게 아닌가. 천천벽력 같은 소식에 그레이스는 무너지고 만다. 그래도 핑키와 제임스가 극진히 보살피니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불행은 그녀를 또다시 방문하는데…
서로 의지하며 서 있는 모습
그레이스가 직접 들려주는 그녀의 삶은 '불행'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어났을 때부터 한시도 그녀를 떠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그녀는 그럴수록 더 당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성향이 아니라 멈춰서 움츠러들고 급기야 숨고 마는 성향이다. 길버트, 핑키, 제임스 등 버팀목이 되어줄 이들이 없었다면 어땠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그런데 비단 '한 사람'은 그녀에게만 필요한 게 아니다. 누구든 산다는 건 힘들고 괴롭고 외로운 만큼 옆에 버팀목이 될 한 사람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 '한 사람'도 상대를 버팀목이라고 여길 테다. 한자 '사람 인(人)'을 봐도 사람은 홀로 서 있는 게 아니라 서로 의지하며 서 있지 않은가. 그레이스가 누군가를 의지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양새다.
달팽이는 그레이스처럼 위험을 닥쳤을 때 딱딱한 껍데기 안으로 숨으며 자신을 보호하려 하지만, 단체 생활을 하며 한데 몰려다니니 만큼 항상 버팀목이 함께한다.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이다.
스스로 쌓은 성에는 문이 없다
점토로 만든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이라는 특이점 때문이 아닌 스토리적으로 마술적 리얼리즘의 묘미를 뽐내는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의외로 단순하다. 껍데기를 깨고 밖으로 나와 당당하고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독특하고 괴짜스럽지만 한때 그레이스에게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핑키의 유언으로 전한다.
달팽이는 새끼를 낳으면 죽고 만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쏟아부어 후세를 남기는 행동일 텐데, 정녕 위대하고 또 용기 있는 행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 자신의 삶에 온전히 집중하며 오직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온 결과라 하겠다.
<달팽이의 회고록>이 전하는 이야기에는 시대를 관통하는 위로가 담겨 있다. 온갖 불행과 불운과 불쾌가 나를 덮쳐 스스로 쌓은 성에 웅크려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을 때, 스스로 쌓은 성을 부수고 밖으로 나가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스스로 쌓은 성이니 만큼 '문'이 없다는 사실이다. 꼭 성을 부술 필요는 없다, 문이 없다는 사실부터 인지하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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