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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시한부 판정 받은 영혼 없는 공무원의 진정한 자아 찾기 <리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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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리빙: 어떤 인생>

 

영화 <리빙: 어떤 인생> 포스터. ⓒ티캐스트

 

제2차 세계대전의 화마가 휩쓸고 간 지 오래되지 않은 영국 런던시청 공공사업부. 부서를 이끄는 윌리엄스는 암암리에 '미스터 좀비'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전형적인 공무원 마인드로 살아가는데, 이를테면 골치 아픈 민원이 들어오면 다른 과로 보내 버리고 다시 돌아오면 한쪽에 처박아 버린다. 손에 닿을 거리에 두지만 절대로 손을 대지 않을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6개월 정도. 부서 사람들한테는 물론 아들내미 부부한테도 말하지 못한다. 그래도 이대로 떠나기는 싫으니 뭐라도 하려 한다. 바닷가로 훌쩍 떠나 생전 처음 보는 젊은 친구한테 하루를 온전히 맡겨 보기도 하고, 부서의 홍일점이었던 생기발랄한 해리스와 하룻 나절을 함께 보내 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문득 깨닫고 출근해서는 한쪽에 치워둔 민원서류를 잡아든다. 폭격으로 무너져 버린 놀이터를 재건해 달라는 민원이었다. 전쟁 후 하루빨리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 놀이터 재건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하지만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윌리엄스의 눈에는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떤 인생을 살다가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거장들의 의기투합, 평범한 이야기 

 

영화 <리빙: 어떤 인생>은 2011년 <뷰티>로 칸 영화제 퀴어종려상을 수상한 바 있는 올리버 허머너스 감독과 부커상과 노벨문학상 위너 출신의 가즈오 이시구로 작가가 의기투합해 구로사와 아키라의 1952년작 <이키루(살다)>를 리메이크한 결과물이다. 영국의 대배우 빌 나이가 주인공 역의 윌리엄스를 맡아 방점을 찍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 각색상 후보에 올랐다.

갑작스레 시한부 판정을 받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의 드라마틱한 변화를 다룬 콘텐츠는 부지기수다. 사람이 급작스럽고도 충격적인 변화에 맞닥뜨릴 때 비로소 '인생이란 무엇인가?'의 물음을 던지고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시한부야말로 가장 극적인 경우가 아닌가. 하여 그동안 수없이 쓰였다.

그런 와중에 <리빙>이라는 영화가, 그것도 70년 전에 이미 거장의 손에 만들어졌고 이후로도 수없이 다양한 형태로 재탄생했던 작품을 또다시 리메이크한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이 시대에 이 작품이 충분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 아닐까. 시한부를 판정받은 노인이 아닌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공무원의 생애 단 한 번뿐인 선택 말이다. 수십 년의 어떤 인생과 수개 월의 어떤 인생은 어떻게 달랐을까.

 

시한부, 공무원, 진정한 자아

 

영화는 이야기가 층층이 쌓여 있다. 우선 시한부 판정을 받은 어느 평범한 노인이 일탈을 꿈꾼다. 평생 일터와 집을 오가며 그저 살아갔다. 어렸을 적 꿈꾼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의 모습, 남들과 함께 남들 속에 섞여 남들처럼 살았다. 그런데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하니 저도 모르게 벗어나고 싶다. 죽기 전에 한 번쯤은 평범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노인의 직업은 공무원이다. 여느 공무원처럼 그도 영혼 없이 주어진 일에만 매달린다. 골치만 아프고 그의 입장에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기어코 맡지 않는다. 타 부서로 떠넘기는 건 타 부서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곳에서 그는 '윌리엄스'가 아니라 런던시청 공공사업부의 부서장이디. 관료제의 폐해가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들이다.

진짜 자아를 찾는 건 힘든 일이다. 웬만한 사람에겐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속절없이 주어진 일만 하다가, 세월 타령만 하다가, 신세 한탄만 하다가 죽음에 이르기 때문이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윌리엄스는 차라리 괜찮은 걸까. 진짜 자아를 찾을 시간이 주어졌다. 생기와 활기를 되찾아 그동안 하지 않았거나 또는 못했던 것을 해내고자 한다. 그리고 의미를 부여한다.

 

평범한 그의 찬란한 선택

 

영화가 '산다는 게 뭔지'에 대한 답을 감히 건넬 순 없을 테다. 저 유명한 철학자들, 밥 먹고 하는 생각이 '산다는 게 뭔지'인 이들도 만고불변의 답을 찾지 못했으니 말이다. 하여 그저 한 번 질문을 던질 뿐이다. 그리고 지극히 평범한 이의 인생 마지막을 보여줄 뿐이다. 거기엔 어떤 인생의 선택이 있다. 일탈, 회상, 화해 등을 뒤로하고 후대를 위한 일다운 '일'을 하기로 말이다.

그렇다, 적어도 그의 인생에선 일다운 일이야말로 죽기 전에 꼭 해내야 했던 바다. 혹자는 의아해할 것이다. 왜 하필 일을 하느냐고, 지금까지 일만 했으니 지쳐 쓰러질 때까지 놀아야 하는 게 아니냐고. 그런데 그의 인생에선 일이 모든 것이었다. 일에 있어서 그의 손으로 직접 매듭을 지어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다.

모든 삶은 나름의 의미가 있다. 긍정과 부정, 선과 악의 개념이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을 테지만 스스로의 뜻에 따라 스스로 인정하고 스스로 나아가지 않으면 의미가 퇴색될 것이다. 윌리엄스의 마지막 몇 개월은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이전 수십 년에 버금갔을까, 그 이상이었을까, 터무니없이 모자랐을까. 비교 대상이 잘못되었다. 그 자체로 충분히 찬란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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