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관상> 포스터 ⓒ쇼박스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단종1)에 당시 왕의 숙부였던 수양대군이 일으킨 친위 쿠데타. 3정승(황보인, 김종서, 정분)을 비롯해 여러 대신들을 죽이고 반대파를 숙청하여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일찍이 이방원이 일으켰던 ‘왕자의 난’과는 다르게 명분다운 명분이 없었다. 기껏 명분이 김종서를 죽이고 나서 말했던 “김종서의 모반”이었다.
“이 나라가 이 씨의 것이냐 김 씨의 것이냐?”
영화 <관상>은 조선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인 ‘계유정난“을 배경으로 한다. 그 한 가운데에 조용히 살아가는 천재 관상쟁이 내경(송강호 분)이 뛰어든다. 그리고 그의 처남 팽헌(조정석 분)과 아들인 진형(이종석 분)이 같이 한다. 역적 집안이었기에 조용히 살고 있었던 그들은 서울에서 온 기생 연홍(김혜수 분)의 관상 일에 대한 제안에 따라 서울로 진출한다. 아들 진형은 과거에 급제해 벼슬살이를 하기 위해 서울로 진출한다.
이들 부자가 공통적으로 했던 생각은 “이렇게 재능을 썩인 채 살아갈 순 없다.”였다. 세상을 바꿀 수 없을지 망정, 자신의 삶을 바꿔보려 한 것이다. 한편 팽헌은 진형을 아버지 내경보다 더욱 각별히 생각한다. 이는 뒤에서 영화에 (나아가 조선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관상>의 한 장면 ⓒ쇼박스
실없는 웃음의 향연
영화는 초반을 넘어 중초반까지(약 40~50분) 내경과 팽헌이 아닌 송강호와 조정석 콤비가 이끌어 나간다. 아무리 봐도 그들은 송강호와 조정석이었다. <넘버 3>때부터 일관되게 능청스러운 송강호와 <건축학개론>으로 능청스러움의 계보를 이은 조정석의 코믹 연기 콤비.
최소한 이들의 연기는 시종일관 웃음을 유발했다. 아니, 비극적인 이 영화에서 유일한 웃음을 담당했다. 그러나 실없기 짝이 없는 웃음이었다. 다가올 거대한 비극을 예견했던 것일까? 실없음을 넘어 쓸쓸하기까지 하다.
<관상>의 한 장면 ⓒ쇼박스
중초반까지의 실없는 웃음들의 향연이 끝나고 내경 일행이 서울로 진출한 이후, 내경의 천재적인 관상 능력을 알아본 이들의 의해 영화는 급박하게 흘러가기 시작한다. 그의 능력을 써먹으려는 자들과 그의 능력의 무서움을 알아보고 후환을 제거하려는 자들이 그를 회유하고 협박하는 것이다.
내경 일행이 서울로 진출했을 때는 문종이 죽어가던 때였다. 문종은 내경의 관상 능력을 높이 사 세자를 지켜줄 요량으로 역적이 될 만한 상을 알아보도록 한다. 자연스레 김종서와 가까워진 내경. 그는 호랑이상인 김종서(백윤식 분)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지만, 이리상인 수양대군(이정재 분)을 보고 역시나 경악을 금치 못한다. 명확하게 역모를 꾸밀 상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의 과거와 미래를 꿰뚫어 본다는 그의 관상 능력으로 볼 때, 계유정난이라는 실제 역사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었다.
궁금하지 않은 인물과 스토리를 다루는 방법
여기서 영화는 딜레마에 빠진 듯 보인다. 그리고 이 딜레마를 어느 정도 잘 다룬 것 같다. 누구나가 다 알고 있어 궁금하지 않은 인물과 스토리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먼저 인물 같은 경우는 ‘음악’으로 다룬다. 코믹스러운 내경과 팽헌의 모습에서는 통통 튀고 장난스러운 음악을 선보인다. 김종서와의 첫 대면에서는 웅장하고 장엄하며 평화스러운 음악을 선보이고, 수양대군과의 첫 대면에서는 심장을 움켜쥐는 듯한 위압감과 불량스러움의 음악을 선보이는 식이다.
대면하기도 전에 상기된 명확한 정보로 인해 누군인지 알고 있지만, 이를 음악으로 커버해 안정감을 부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혹자는 이를 두고 뻔한 설정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안정감을 부여한 것은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관상>에서의 김종서와 수양대군 ⓒ쇼박스
반면, 영화가 시작할 때 나오는 늙은 대감의 정체와 영화가 거의 끝날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한명회’의 존재는 괜한 궁금증을 일으키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연홍의 존재는 아쉬웠다. 내경으로 하여금 서울로 오게 하고 이름을 널리 알리게 하는 역할이었을까? 영화가 아닌 드라마였다면 절대 빠질 수 없는 감초 역할로 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스토리의 경우는 어떨까? 스토리 역시 명확한 정보로 인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결국 수양대군은 김종서를 죽일 것이고, 김종서에 붙었던 내경 또한 어떤 식으로든 피해를 볼 것이 당연하다. 이를 어떤 식으로 커버할 것인가? 영화는 이를 팽헌과 진형으로 해결하려 한다.
진형에게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던 팽헌은 어느 날 진형이 테러를 당한 것을 보고 이성을 잃는다. 김종서가 관리명단의 이름에서 한 사람을 뽑아 단종에게 올리면 단종이 그 위에 점을 찍어 그 사람을 관리로 임명한 ‘황표정사’에 대해서 진형이 단종에게 그 폐단을 솔직히 발언하자, 김종서의 부하들이 진형에게 테러를 가한 것이었다. 알고 보니 이는 조작된 것이었지만, 팽헌이 이 사실을 알게 되어 수양대군에게 달려가 김종서의 거사를 밀고한 것이었다. 마치 영화에서 팽헌과 진형이 이 사건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이질감이 있지만,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
무엇보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내경 집안이 역적이었다는 걸 초반에 굉장히 부각시켜놓고선 후반으로 가면 아무런 언급조차 없다. 단지 내경과 팽헌과 진형의 서울행을 위한 이유 때문이었나?
내경이 서울로 올라와 일사천리로 김종서의 핵심 멤버가 되어 거의 수양대군의 한명회와 동급의 참모 역할을 하게 되는 것 또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 순간부터 영화는 <관상>이 아닌 <계유정난>이 되어버렸고, ‘관상쟁이’ 내경의 존재는 사라진다.
마지막으로 수양대군은 왜 진형을 죽이게 되는지 알 수 없다. 훌륭한 왕이 될 상이라는 내경의 말을 듣고 그 보답이라며 활을 쏴 죽이게 되는데, 이후의 모습을 보니 내경과 진형의 진한 가족애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
여러 개성 강한 캐릭터들을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 위에 놓고, 격렬히 부딪히면서도 죽지 않고 살리려는 감독의 의지가 돋보였다. 돋보였지만 성공적으로 잘 이루어졌는지는 의문이다. 살려야 하는 캐릭터도 많고,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보여줘야 하는 사건들도 많았다. 그래서 컷은 짧게 짧게 그러나 굉장히 많이 나왔지만, 자연스레 러닝 타임이 늘어나 지루한 부분이 종종 보였다. 에필로그는 에필로그다웠지만, 영화에 어울리는 에필로그는 아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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