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영화 리뷰] <페르시아어 수업>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2년 프랑스, 젊은 남성 유대인 질은 트럭 뒷칸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다. 옆 남자가 페르시아어로 된 책을 줄 테니 샌드위치를 주라고 한다. 그렇게 페르시아어 책을 챙긴 질은 처형장에서 모두가 총살당하는 와중에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라 페르시아인이라고 하여 살아난다. 천우신조로 수용소의 친위대 대위 중대장 코흐가 페르시아어를 배우고자 페르시아인을 찾는다고 했다.
코흐 대위 앞으로 끌려가는 질, 그는 자신을 레자 준이라고 속이고는 그 자리에서 가짜 페르시아어를 만들어 낸다. 코흐는 반신반의하지만 질은 순발력 있게 대처해 살아나 주방에서 일하며 배식하고 일과 후에 시간을 내 코흐에게 가짜 페르시아어를 가르치기로 한다. 매일 4개씩 단어를 가르쳐서 전쟁이 끝날 거라고 예상되는 2년 후에 2920단어를 외운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질은 머지 않아 위기를 맞는다. 빵과 나무를 헷갈려 같은 단어를 말했다가 코흐한테 엄청 맞고는 채석장으로 보내진 것이다. 기지를 발휘해 다시 코흐에게 가짜 페르시아어를 가르치게 된 질이다. 질에게 기록 업무도 빼앗겨 심통이 난 여군 엘자, 엘자와 썸타면서 질이 페르시아인이 아니라는 걸 간파한 분대장 막스, 코흐가 질을 싸고도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는 수용소 사령관. 질은 살아서 수용소를 나갈 수 있을까? 코흐는 페르시아어를 배워 뭘 하려는 걸까, 할 수 있을까?
제2차 세계대전, 나치의 수용소 이야기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수용소 이야기는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 소설, 에세이 등을 통해 수없이 또 다양하게 접해 왔다. 그러다 보니 보는 것뿐만 아니라 상상만으로도 견디기 힘들 정도의 감정이 물밀듯 차오르곤 한다. 어떻게든 삶을 향해 나아가거나 살아가는 게 아니라,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죽음을 향해 나아가거나 죽어가는 곳이니 말이다. 감정이 무뎌지지 않는 수용소 이야기다.
영화 <페르시아어 수업>은 또 한 번 찾아온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수용소 이야기다. 독일 작가 볼프강 콜하세가 1977년 출간한 단편집의 실화 기반 단편소설 <언어의 탄생>을 원작으로, 소련 태생 우크라이나-캐나다계 미국인 감독 바딤 피얼만이 연출했다. 아르헨티나 배우 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가 질(레자 준) 역으로 분했고 독일 배우 라르스 아이딩어가 코흐 대위로 분했다. 그야말로 다국적 작품이다.
나치의 수용소 이야기는 한없이 무겁거나 긴장 일색일 뿐인데 이 작품은 절반 이상의 시선이, 즉 질을 제외한 거의 모든 주요 인물이 유대인 아닌 독일군이기에 분위기가 다르다. 수용소 독일군 내의 소소한 정치, 알력다툼, 사랑싸움이 얽히고설켜 있으니 말이다. 그런가 하면, 코흐가 질(코흐에겐 레자 준)을 총애하며 그에게서 페르시아어를 배우는 게 알게 모르게 그 모든 중심에 있다.
가짜 페르시아어, 유대인의 이름들, 유대관계
질이 코흐에게 ‘가짜’ 페르시아어를 가르치는 게 이 영화의 첫 번째 핵심이다.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페르시아인으로 속인 유대인, 그는 급기야 생전 듣도보도 못한 언어를 만들고 외워서 가르치기까지 해야 한다. 그 지점에서 이 영화의 외향을 이루는 간절함과 긴장감이 배양된다. 무슨 수를 쓰든 살아남고 말겠다는 간절함, 절대 들키지 않아야 하는 건 물론 털끝만큼도 의심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긴장감.
코흐의 명령으로 기록 업무까지 보게 된 질, 그는 수용소 내 유대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적으며 그 이름에게서 영감을 얻어 가짜 페르시아어 작업에 박차를 가한다. 바로 그 이름들이 이 영화의 두 번째 핵심이다. 질은 새로운 언어를 만든 게 아니라 잊혀질 이름을 보관한 것이다. 가짜건 아니건 언어를 만드는 건 전인류적인 위대함 그 자체이지만, 언어를 사용할 사람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 아닌가.
코흐는 페르시아어 ‘스승’ 질과 조금씩 교감하며 남다른 유대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그러며 자신의 소박한 꿈도 얘기한다. 이 영화의 세 번째 핵심이다. 그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수많은 유대인을 학대하고 학살하는데, 자신의 편의에 따라 질과는 교감하도 유대를 쌓으며, 정녕 아무렇지도 않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또 앞으로도 보낼 거라고 생각한다. 그 평범성이, 악의 평범성이 정녕 무섭다.
언어와 이름으로 인류애적인 의미를 고찰하다
<페르시아어 수업>이 제목 따라 주인공 질과 코흐의 이야기만 내보이지 않고 수용소 내 유대인이 아닌 독일군 군상에 초점을 맞춘 건, 주지한 영화 핵심들 중 세 번째를 보다 깊이 있게 들여다봤다는 걸 의미한다. 영화를 보면 독일군 등장인물들의 면면이 생각 외로 평범하고 소소하기까지 한데, 그들은 속칭 ‘SS’로 불리는 나치친위대로 전쟁 범죄의 최전선에서 활동한 악명 높은 조직의 일원이었다. 아이러니한 모습이다.
수용소 사령관과 주방 담당 코흐 대위를 비롯한 모든 독일군이 ‘군인이라면 상부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는 명목 하에 아무렇지도 않게 민간인을 학살했다. 영화에선 그에 대해 그 누구도 어떠한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사랑, 시기, 질투를 동반한 파워게임을 하고 앉았으니 한심해 보이는 게 아니라 소름이 끼치는 것이다. 악마가 사람의 탈을 쓰고 사람 노릇을 하는 것 같아 보이는 것이다.
영화는 평범한 악마 같은 나치 독일의 만행을 그 안으로 파고들어 고발하곤 다시 ‘언어‘와 ’이름‘을 통해 인류애적인 의미를 고찰하고 되새기는데, 감동받지 않을 수 없다. 질이 나치에 의해 이름조차 완전히 사라져 버린 피해자들의 이름을 복원함으로써, 그들의 존재와 삶의 의미를 세상에 남겼고 나아가 인류가 살아갈 이유를 전했다. 살아남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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