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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여자로서의 주체적인 삶 vs 황후로서의 객체적인 삶 <코르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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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코르사주>

 

영화 <코르사주> 포스터. ⓒ그린나래미디어

 

유럽 역사를 대표하는 최대 가문으로 유럽을 세계사의 중심으로 이끈 합스부르크 가문은 모습을 드러낸 지가 1000년여 되었다. 그러던 중 1500년대에 최전성기를 지나 합스부르크 제국을 세워 20세기 초까지 400여 년간 이어오는 바, 유럽을 넘어 세계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당사자다. 공식적인 명칭은 아닌 합스부르크 제국은 1800년대 초 ‘오스트리아 제국’이었다가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거듭났다.

그 사이 정국은 오스트리아 제국 제3대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이끌었는데, 곧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제1대 황제이기도 하다. 헝가리 왕국의 왕으로 즉위하기도 했다. 이보다 더 복잡할 수 없을 것 같은데, 프란츠 요제프 1세의 황후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는 오스트리아 제국 황후이자 헝가리 왕국 왕비가 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마지막 황후는 따로 있지만, 그녀야말로 ‘마지막 황후’로서의 상징을 오롯이 지니고 있다.

영화 <코르사주>는 유럽을 호령했던 합스부르크 제국이 서서히 저물어갈 때의 황후 엘리자베트의 40세 즈음의 방황기를 담았다. 제목처럼 코르사주, 즉 코르셋이 지독히 보수적이고 관습적이며 황후가 그저 장식품으로 작용하는 황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한 여인의 자화상이 담겨 있다. 물론 그녀의 또 다른 정체성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상징인 엘리자베트 황후다.

 

마흔 살 즈음의 엘리자베트 황후

 

19세기 후반 빈에 수도를 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정무에 바쁘고 황후 엘리자베트는 웃음을 짓느라 바쁘다. 그녀는 황제의 말마따라 머리에 1kg이 넘는 가체를 이고 허리를 옥죄어 잘록하게 하고 가슴을 돋보이게 하는 코르사주를 입은 채 화려한 외모를 자랑하며 온화한 미소로 대중 앞에 서 있으면 그만인 존재였다. 그게 그녀가 할 일의 전부였다.

하지만 엘리자베트는 그런 자신의 모습이 혐오스러웠다. 그건 그녀가 아니었다. 원하던 모습이 아닐 뿐더러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이곳저곳으로 여행을 자주 다니곤 했다. 멀리 영국으로 가까운 독일로,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며 ‘황후’가 아닌 ‘여자’로서의 자신을 확인받고 싶어 하기도 한다. 물론 어렵다.

그러던 중 마흔 살에 접어든다. 당시 일반 여성의 평균 수명에 해당하는 나이로, 여러모로 관리가 필요한 시점이지만 그녀는 그런 식으로 저물어가는 자신을 용납하기가 힘들다. 여의치 않지만, 아니 불가능에 가깝겠지만 이제부터라도 자신만의 인생을 살고 싶다. 아이들도 있고 황후라는 직책도 있지만 말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해야 할까?

 

'여자'라는 주체로서의 엘리자베트

 

영화 <코르사주>는 합스부르크 가문 그리고 제국의 복잡다단한 정세를 조금 제쳐두고 엘리자베트 황후의 40세 즈음의 나날들에 집중한다. 당연히 엘리자베트 역을 완벽하게 맡아 해낼 배우가 중요할 텐데, <팬덤 스레드> <올드> <베르히만 아일랜드> <안녕, 소중한 사람> 등으로 우리나라에도 꽤 알려진 룩셈부르크 배우 '비키 크립스'가 열연했다. 2022년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최우수 연기상을 받았다. 

 

엘리자베트는 19세기 유럽을 대표하는, 아니 유럽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황후로 알려져 오늘날까지도 다양한 형태로 우리를 찾아오고 있다. 유명 뮤지컬 <엘리자벳>이 대표적이고, 지난해 9월에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황후 엘리자베트>가 공개되어 큰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이 영화 <코르사주>도 나왔고 또 지난해 10월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선 전시 <합스부르크 600주년, 매혹의 걸작들>이 시작되어 관람객들의 발길을 붙잡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 익숙하지 마지않는 '엘리자베트'를 영화 <코르사주>는 어떤 시선으로 비췄을까? 동정적인(주체적인) 시선과 비판적인(객체적인) 시선이 공존하는 엘리자베트의 삶, 그중에서도 마흔 살이 될 때즈음의 행적을 좇는 건 아무래도 비판적인 시선보다 동정적인 시선이 앞서 있지 않을까 싶다. 나아가 그녀를 아무런 생각도 없는 상징으로서의 황후라는 객체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고민에 휩싸여 삶의 격랑을 온몸으로 헤쳐 나가는 여자라는 주체로 바라보려 하지 않을까 싶다. 

 

엘리자베트, 그녀는 왜?

 

누구나 삶에서 자기 자신을 주체로 두고 온전히 자신만의 길을 가는 건 어렵다. 어느 누구든 '누구의 무엇'일 수밖에 없고 거기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 수식어가 삶 자체를 대변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하물며 한 대륙을 대표하며 한 시대를 풍미한 제국의 황후라면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런 자리에 있던 엘리자베트는 '감히' 또는 '과감히' 정해진 길에서 이탈하려 했다. 

 

안 그래도 사방이 꽉 막힌 황실인데, 19세기 당시의 합스부르크 제국은 크게 휘청였다가 간신히 살아남아 근근이 수명을 연장하고 있는 처지였다. 황제도 황제지만 황후에게 기대는 바 또한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고 그에 비례해 더더욱 사방팔방으로 꽉 막힐 수밖에 없었다. 예민하면서도 자유분방한 성격도 큰 몫을 차지했을 테지만, 여러 방면에 풍부한 학식을 써먹을 수 없었던 점이 그녀를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밀어붙인 게 아닌가 싶다. 내 안에서 용솟음 치고 있는 무엇을 내보일 수 없으니 말이다. 

 

물론 영화에도 나오듯 그녀는 일국의 황후로서보다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제 역할을 해냈다고 보기 힘들다. 제아무리 직계 황족이 부모 아닌 각계각층의 전문가들에 의해 길러진다고 해도 말이다. 지난 수백 년간 수없이 많은 황후가 맡은 바 소임을 해 왔는데 왜 그녀는 하지 못하는가 하는 비판의 목소리를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게 바로 객체화의 오류가 아닌가 싶다. 엘리자베트라는 사람을 황후라는 자리에만 옭아맬 때 생기는 안팎의 문제점. 

 

단순 비교할 수밖에 없지만, 그녀는 왜 남편 프란츠 요제프 1세처럼 정무에 참여할 수 없는가? 왜 남편처럼 아무 남자, 그러니까 남자와 염문을 뿌릴 수 없는가? 왜 머리엔 1kg짜리 가체를 이고 허리는 코르사주로 숨도 못 쉬게 졸라매며 극악무도한 식단으로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가? 왜 시덥잖은 소리를 들으며 제대로 된 대답도 못한 채 그저 웃고만 있어야 하는가? 이 영화가 그에 대한 답을 내놓지 못하겠지만 문제제기는 나름 괜찮게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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