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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세상을 조망하는 마틴 맥도나의 시선이 경이롭다 <이니셰린의 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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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이니셰린의 밴시>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 포스터.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1923년 4월 1일, 아일랜드 외딴섬 이니셰린에 소소한 사건 아닌 사건이 일어난다. 섬마을 사람 모두가 잘 아는 절친 사이 파우릭과 콜름이 멀어진 것이다. 아니 콜름이 일방적으로 파우릭에게 절교를 선언했다. 파우릭은 하루아침에 벌어진 일을 두고 어리둥절할 뿐이다. 그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섬에 유일하다시피 한 유흥거리인 펍에서 맥주 한잔을 하며 수다를 나눴더랬다.

콜름을 몇 번이고 찾아가니 그가 하는 말이 가관이다. 파우릭이 그냥 싫어졌다며,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이니 이름을 남길 뭔가라고 하려면 쓸데없이 수다 떠는 일을 멈춰야 한다는 것이었다. 콜름에겐 파우릭과 수다 떠는 게 인생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었고, 이젠 더 이상 의미 없는 일을 붙잡고 있지 않으려 한다. 본토에서 음대생을 불러 음악 작업에 박차를 가한다.

파우릭으로선 황당할 따름이다. 친절하고 다정한 콜름이 하루아침에 바뀌어 버리다니? 믿기 힘들어서 계속 찾아가서 이유를 묻고 사과할 거리를 찾아 화해도 요청한다. 하지만 콜름에게서 돌아온 답은 극단적이기 이를 데 없다. 한 번만 더 귀찮게 굴면 자기 손가락을 잘라 보내겠다는 협박. 한편, 바다 건너 본토에선 폭탄 소리가 들리는데… 내전은 끝날 기미가 안 보인다. 그런가 하면, 파우릭과 콜름은 어떤 관계를 이어갈까?

 

마틴 맥도나 감독의 아일랜드 이야기

 

마틴 맥도나 감독은 영국 연극계를 평정한 후 영화계로 넘어왔고 내놓은 작품마다 평단의 찬사를 받으며 자신만의 세계를 확실하게 구축하고 있다. 그 정점이 지난 2017년에 내놓은 <쓰리 빌보드>다. 당해 연도 최고의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평가를 받았고 흥행에서도 매우 크게 성공했다. 그리고 5년이 지나 내놓은 작품 <이니셰린의 밴시>가 훌륭하게 뒤를 이었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감독 다음으로 제목부터 살펴봐야 한다. 이니셰린이라는 아일랜드 가상의 섬에 밴시가 제목인데, 밴시란 켈트 신화(아일랜드 전설)에 나오는 요정으로 울면소 누군가의 죽음을 예고하고 애도한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알려줘 도움을 주지만 불길한 존재로 인식되기도 한다. 영화에도 밴시로 보이는 노파가 나와 누군가의 죽음을 예고한다.

두 주인공 파우릭과 콜름 역의 배우들도 눈여겨봐야 한다. 파우릭 역의 콜린 파렐과 콜름 역의 브렌단 글리슨, 마틴 맥도나 감독의 페르소나라고 부를 만한 이들이다. 둘은 마틴 맥도나의 2008년작 <킬러들의 도시>에 주연으로 출연한 바 있다. 마틴 맥도나, 콜린 파렐, 브렌단 글리슨 모두 아일랜드 출신이기도 하다. 특별히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아일랜드인들이 모여 영화를 찍은 이유가 있을까?

 

아일랜드 내전에 빚대

 

1922년 6월부터 1년여간 아일랜드에서 '아일랜드 자유국'과 'IRA'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다. 영국의 지배에서 독립하면서도 영국의 지배를 사실상 용인한 '영국-아일랜드 조약'에 찬성하는 아일랜드 자유국과 반대하는 IRA가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1923년 4월이 배경인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종종 보이는 바다 건너 본토에서의 폭탄 소리는 아일랜드 내전을 형상화시킨 것이리라.

<이니셰린의 밴시>가 해외에서 개봉한 2022년은 아일랜드 내전의 개전 100주년이고 우리나라에서 개봉한 2023년은 아일랜드 내전의 종전 100주년이다. 이 영화를 아일랜드 내전의 은유로 보지 않기 힘든 이유다. 전쟁이라는 게 시작할 땐 명분이 전부지만 끝나고 나면 허무가 전부다. 그중에서도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키는 내전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의미 없고 허무뿐만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상처만 남긴다.

파우릭과 콜름, 콜름과 파우릭. 비극의 시작은 콜름이었다. 파우릭이 보기에 콜름이 하루아침에 자기를 멀리하는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다. 물어봐도 돌아오는 건 더 큰 증오다. 다른 이들과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전과 다름없이 잘 지내니 더 미칠 노릇이다. 기껏 말해 준 이유도 어이없다. 그냥 싫어졌다, 너랑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이대로 이 관계의 종말을 고할까? 그런데 생각할수록 열받는다. 도대체 왜?

 

콜름이 보기에 파우릭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바로 그 의미 없음이 좋아 그와 함께 시간을 죽였는데, 앞으론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시간을 살리고 싶다. 각오는 되어 있다. 관계를 이런 식으로 끊으려면, 그것도 사람 몇몇 살지도 않는 외딴섬에서 그러려면 큰 사달이 나도 날 것이다. 그래도 파우릭을 떨쳐 내기 위해선 뭐라도 하려 한다. 그래야 내(콜름)가 산다.

 

삶을 대하는 방식에 빚대

 

파우릭과 콜름이 삶을 대하는 방식은 차원을 달리한다. 파우릭은 감정을 신봉한다. 다정하고 친절했던 콜름이 갑자기 싸늘해진 걸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 콜름은 이성을 신봉한다. 의미 있고 일로 이름을 남겨야 진정으로 살았다고 생각한다. 파우릭 따위는 이제 그만 사라져야 한다. 누가 옳고 그르며 누가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저 무엇에 가치를 두고 또 우선순위를 두는지 다를 뿐이다.

한편 외딴섬 이니셰린의 사람들은 도통 뭘 하며 먹고사는지 알기 힘들다. 적어도 영화에서 열심히 생계활동을 하는 장면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멍 때리거나 술 마시거나 노닥거리거나 노래 부르면서 나른하고 허무하게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다. 이 허무를 어떻게 견뎌야 하나. 허무를 나름의 방식으로 견뎌내는 파우릭, 콜름 과는 달리 파우릭의 여동생 시오반과 파우릭과 친한 동네 청년 도미닉은 둘 다 가부장제의 피해자다. 시오반은 항시 오빠를 챙겨야 하고 도미닉은 동네 유일한 경관인 아버지에게 폭행당하기 일쑤다. 허무 따위 견뎌낼 겨를이 없고 편안하게 허무에 대항해 보고 싶을 뿐이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정말 별것 없어 보이는 이야기를 통해 내전이라는 인류 최대 비극부터 삶을 대하는 방식의 차이와 허무를 견뎌내는 모습까지 두루두루 보여 준다. 아니, 대놓고 보여 주는 게 아니라 유추할 수 있는 여지를 줄 뿐이다. 이밖에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을 테니 정녕 문학적이고 철학적이다. 영화 감독뿐만 아니라 극작가로 더 활발하게 활동하는 마틴 맥도나의 작품답다.

세상을 조망하는 마틴 맥도나의 시선이 경이롭다. 진지한 듯 유머스럽고 촘촘한 듯 헐겁다. 모든 장면과 대사 하나하나에 이유가 있다. 그러면서도 답답하거나 숨 막히는 느낌 없이 편하다. 이런 걸 두고 완벽하다고 하겠다. 다음 작품 때까지 어떻게 기다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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