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영화 리뷰] <어떤 영웅>
아쉬가르 파라디, 이란 영화계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자파르 파나히와 함께 국제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지고 또 인정받고 있다. 2002년에 장편 연출 데뷔 후 2010년대 왕성하게 활동하며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세일즈맨> 등 걸작들을 쏟아냈다. 심리와 갈등 관계를 다루는 데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2021년에 내놓은 <어떤 영웅>으로 2020년대에도 건재하게 활동을 이어갈 거라고 공표했다. 전작 <누구나 아는 비밀>의 아쉬움을 말끔히 씻어내듯 제74회 칸 영화제에서 <6번 칸>과 공동으로 2등 상에 해당하는 그랑프리(심사위원대상)를 수상했다. 세간에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이후 최고작이라는 평가가 자자했다. 2, 3년마다 빠짐 없이 작품을 내놓았으니 조만간 차기작이 나올 게 확실시된다.
<어떤 영웅>은 돈을 갚지 못해 교도소에 갇혔다가 우연과 작은 거짓말로 영웅이 된 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진 거짓말로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어떤 이의 이야기를 다뤘다. 다분히 잔잔한 드라마 장르를 표방하지만,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웬만한 스릴러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서스펜스가 돋보인다. 도대체 '어떤 영웅'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그는 영웅인가, 거짓말쟁이인가
라힘 솔타니는 돈을 갚지 못해 교도소에 갇혀 있다. 조르고 졸라서 이틀간의 휴가를 받아 집에 돌아왔다.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가 우연히 주운 금화로 빌린 돈의 반 정도를 갚고 나머지는 감옥에서 나와 일을 하며 갚으려는 계획을 세운 후 매형에게 부탁한다. 매형과 함께 채권자에게 찾아 가려고 말이다. 하지만 채권자의 반응이 싸늘하고 매몰차다.
라힘의 채권자는 전 장인이다. 사업을 하려고 전 장인 바람에게 큰 돈을 빌렸는데 동업자가 모든 돈을 쥐고 도망갔다. 바람은 라힘을 고소했고 갚을 능력이 없는 라힘은 교도소에 가야 했던 것이다. 한편, 라힘은 바람에게 퇴짜를 맞고 여자친구의 금화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그 금화를 사용할 수 없다고 판단해 주인에게 돌려주고자 은행을 찾는다.
곧 주인이 라힘네를 찾아 라힘의 누나가 보관하고 있던 금괴를 찾아간다. 이 사실이, 즉 선행이 은행과 교도소에 알려지고 언론 인터뷰도 하면서 라힘은 '영웅'이 된다. 지역 사회가 공개적으로 그를 영웅시하며 재단에서 기부금도 모금하고 시의회에 일자리도 마련해 준다. 창창한 미래만 있을 것 같은 찰나, 그를 둘러싼 안 좋은 소문이 돈다. 그의 영웅 설화가 사실 그가 지어낸 이야기였다고 말이다. 과연, 라힘은 어떻게 될까? 그리고, 그는 누구인가? 영웅인가, 거짓말쟁이인가?
'양심적인 죄수의 선행'을 둘러싸고
라힘이 나쁜 사람 같지는 않다. 악인은커녕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소시민에 가깝다. 그런 그가 어쩌다가 감옥에 가게 되었는가? 돈을 빚졌고 갚지 못했다. 사실이다. 그의 여자친구가 우연히 금화가 든 가방을 주웠고 돈으로 바꿔 그의 채권자에게 주려고 한다. 역시 사실이다. 그런데 라힘이 변심해 금화 가방을 주인에게 돌려주고자 했고 주인이 가져갔다. 더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여기까지의 문제라고 하면 남의 돈으로 빚을 청산하려던 마음이지만 이내 마음을 돌렸으니 문제될 건 없어 보인다.
진짜 문제는 이제 시작된다. 빚을 져 감옥에 갇힌 죄수가 금화 가방을 우연히 주웠는데 주인에게 돌려줬다는 이야기에 '양심적인 죄수의 선행'이라는 프레임이 씌어져 미담이 된다. 죄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내홍에 휩싸인 교도소장이 이미지 쇄신을 위해 앞장 서고, 방송국에서 시청률을 잡고자 미담의 주인공을 취재하고 인터뷰하기 시작했으며, 자선 재단은 라힘을 앞세운 대규모 모금 행사로 언제나처럼 신뢰와 평판을 쌓고자 했다. 이제 더 이상 라힘과 라힘의 여자친구만의 이야기가 아니게 된 것이다. 순식간에 말이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또 다른 문제가 터져 나온다. 순식간에 '영웅'으로 우뚝 서며 돈보다 훨씬 중요한 명예를 얻은 라힘의 영웅 설화에 석연치 않은 점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이다. 주지했다시피 금화 가방은 그가 아니라 그의 여자친구가 주운 것이고, 금화 가방을 가져갔다는 주인의 행동이 심상치 않았으며, 라힘의 채권자 바람은 지난 몇 년간 라힘의 행실을 문제 삼는다. 무엇보다 라힘에게 일자리를 주겠다는 시의회에서 마치 취조하듯 굉장히 세세하게 그의 영웅 설화를 파고드는 것이었다. 헤어 나오지 못할 늪으로 빠지는 것 같다.
영웅에서 나락으로
다시 라힘에게로 돌아가 보자. 그는 하루라도 빨리 출소해 돈을 벌어 빚을 완전히 갚고 여자친구와 결혼해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다. 그런 일념 하나뿐이었는데, 생전 본 적도 없는 사람들도 자신을 알아보며 존경을 표하는 '영웅'의 명예를 얻고 나니 달라졌다. 빚을 청산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명예가 실추되는 건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게 된 것이다. 물론 이란이 그 어떤 가치보다 명예를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사회이기도 하다. 이슬람교 시아파가 국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엄격한 종교적 규범 때문일 테다.
영화가, 아니 아쉬가르 파라디가 이끌어 가는 서사는 너무나도 무난하고 잔잔한 외피를 띠고 있다. 그야말로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이들의 평범한 생각과 행동과 대화들이 오가기 때문이다. 평상시 제아무리 심각한 상황에 처해도 그 얼마나 극적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외피 이면의 심각성이 그때그때 뿜어져 나오지 않을 수 있겠으나, 라힘이 천천히 그리고 진득하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순간순간 섬뜩하기 이를 데 없다. 나라는 사람의 상승과 하락에 모두 나의 의지가 개입되지 못하니 말이다.
누구라도 언제라도 라힘이 처한 상황에 맞닥뜨릴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지금 이 순간 어딘가에서 교도소, 방송국, 자선 재단의 입장에 서 있는 이도 있을 것이다. 각종 욕망이 한 곳으로 모였다가 모래성이 바닷물에 흩어지듯 스르르 흩어지더니 이내 구심점이었던 이를 향해 또 다른 욕망을 분출한다. 그 사이에서 라힘이 오롯한 일개 개인으로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다. 그는 끝내 부러지고 말 것인가, 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진 않을 것인가. 영화는 마지막에 실낱같은 희망의 불씨를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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