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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주인공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유 <썬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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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썬다운>

 

영화 <썬다운> 포스터. ⓒ엠엔엠 인터내셔널

 

멕시코 아카풀코 해변의 초호화 리조트, 닐은 여동생 앨리스 그리고 그녀의 아들 딸과 함께 한가로이 휴가다운 휴가를 보내고 있다. 일면 무료해 보이기까지 할 정도다. 앨리스가 손에서 핸드폰을 놓지 못하고 일을 하면 자식들이 극구 말리며 쉴 것을 종용하기도 한다. 그러던 차,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닐과 앨리스의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곧바로 짐을 싸서 귀국하려는 일행, 하지만 닐은 여권을 두고 왔다며 셋은 보내고 홀로 어느 허름한 호텔로 향한다. 그러곤 기다렸다는 듯 해변에 가서 무료해 보이기까지 하는 하루하루를 보낸다. 매일같이 앨리스가 전화로 빨리 귀국하라고 하지만 닐은 대충 둘러 댈 뿐 돌아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말은 잘 안 통하지만 몸은 잘 통하는 여자친구도 만들고 말이다. 

 

그가 자주 노니는 호텔 앞 해변가에서 느닷없이 총을 쏴 누군가가 죽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별 일 아니라는 듯 노닐 뿐이다. 닐은 여전히 엄마의 장례식에 가지 않을뿐더러 귀국하고 싶지도 않은 듯하다. 기다리다 못한 앨리스가 직접 닐을 보러 오는데, 닐은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내놓겠다고 한다. 닐과 앨리스 남매는 영국의 양돈·도축 사업 억만장자 2세대였던 것이다. 닐은 왜 그러는 걸까? 어쩌자고 그러는 걸까? 누구도 이해하기 힘든 그의 행동, 오직 그 자신만이 알 것이다.

 

<이방인>이 떠오른다

 

멕시코 영화계가 전 세계에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차세대 대표 감독 '미셸 프랑코', 내놓은 작품마다 족족 유수 영화제의 초청을 받았다. 칸을 휩쓴 바 있고 최근 작품들은 베니스가 사랑하고 있다. 그녀의 작품에는 특별한 뭔가가 있는 걸까. 개인적으로 2019년에 개봉한 <에이프릴의 딸>부터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데, 앞으로 더 지켜볼 여지가 충분한 감독이다. 

 

<썬다운>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어느 중년 남성, 그러니까 영국 억만장자 닐의 행태를 따라 간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데 슬퍼하는 기색은커녕 무덤덤하고 무료해 보이니 말이다. 나아가 그는 인생 자체가 권태로운 것 같다.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답답하고 분노까지 일기도 하지만, 그로선 어쩔 도리가 없는 무엇이 그를 덮친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면 딱히 이상할 것도 없어 보인다. 

 

알베르 카뮈의 대표작 <이방인>을 보면, 평범한 직장인 뫼르소가 어머니 장례를 치르는데 슬픔이나 분노같은 감정을 보이지 않는다. 소설의 첫 문장이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잘 모르겠다.'이니 말이다. 그는 어머니 장례 후 일련의 일을 거쳐 해변에서 햇빛에 자극을 받아 어느 아랍인으로 총으로 죽이는데, 법정에서 불충분한 자기 변호와 어머니 장례식에서 보인 불충분한 감정으로 사형 선고를 받는다. <이방인>의 뫼르소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썬다운>의 닐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실존주의의 그것?

 

<썬다운>은 상당히 불친절한 영화다. 주인공 닐이 어떤 직업을 갖고 있는지, 어떤 가족의 형태를 띄고 있는지, 어떤 마음으로 휴가를 왔는지 등 최소한이라고 할 수 있는 정보도 드러내지 않은 채 영화가 시작되고 중반부까지 흘러간다. 그러다 보니 닐에 대해 추측하기보다 닐을 못마땅하게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편이 편하다. 

 

한편, 앞서 말했듯 <이방인>의 느낌적인 느낌이 곳곳에서 묻어나다 보니 자연스레 '실존주의' '부조리주의'가 떠오른다. 무의미한 일상을 반복하는 삶의 현대인이 할 수 있는 게 뭔지 생각해 봤을 때, 삶의 무의미함을 알아차려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해 의미를 부여해 보려는 것이다. 닐은 깨달은 걸까, 삶이 무의미하다는 걸. 그래서 어머니의 죽음에도 자신의 삶에도 관심이 없는 걸까. 

 

하지만 닐이 삶의 모든 면에 무료함을 느끼는 건 아니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멕시코 여인과 꽤 깊은 관계를 이어가는 걸 보면 말이다. 삶의 무의미를 알아차린 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한 게 '욕망'이라는 이름의 연애 관계라면, 나쁠 게 전혀 없지 않나 싶기도 하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나날, 무의미하고 무료하며 권태롭기까지 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 발버둥 치는 방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영화의 제목 '썬다운'은 우리말로 '일몰'이다. 하루가 저무는 때이니 한 인간의 삶이 저무는 때라고 치환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정작 영화에선 일몰은커녕 햇빛이 시종일관 내리쬐니 닐로서는 햇빛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은 상태가 지속된다. 닐의 삶이, 무의미하고 무료하고 권태로운 삶이 만천하에 공개되어 버리는 듯한 모양새다. 그렇다고 '썬라이즈' 그러니까 '일출'이라고 할 수 없는 건 닐의 상태는 누가 봐도 저물어 가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일면 '체념'의 단계에까지 다다른 듯. 

 

'삶의 무의미'를 넘어서

 

후반부에 이르면 영화는 짧고 굵게 그리고 급격히 휘몰아친다. 일련의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며 전반부의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긴장감이 한꺼번에 터진다. 닐의 알 도리가 없는 행동도 어느 정도 이상 해소되고 말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고 이해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영화의 뒷부분에서 나오는 일이기에 영화의 전체를 관통하는 서스펜스를 설명해 줄 수 없고 결을 같이 하지도 않는다.

 

주인공의 행동과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불안한 분위기 그리고 멕시코라는 반 무법 나라의 치안이 불완전한 해변이라는 배경이 이 영화의 골자를 구성하겠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닐'이다. 그런고로 닐 역의 '팀 로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라는 얘긴데, 그가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듯한 나른함이 인장처럼 영화에 그대로 묻어난다. 그렇게 묻어난 나른함은 곧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장악한다. 근데 마냥 편안해 보이지 않는 게 또 기이한 매력이다. 이 영화만큼 주인공이 중요한 영화가 또 있나 싶을 정도다. 

 

그럴 때가 있다, 나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을 때. 그럴 때도 있다, 이게 다 무슨 의미인가 싶을 때. 그럴 때는 없나 싶다, 내가 해놓고 나도 이해하지 못할 때. <썬다운>의 닐을 보면, 그는 자신의 행동이 기이하고 이해받지 못할 거라는 걸 그 스스로가 잘 알고 있으나 기어코 그렇게 행동해 버린다.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진 않지만 그 자체가 '무의미의 반동으로서'의 의미 있는 행동이다. 

 

자, 그래서 어쩌라는 걸까? 한 번쯤은 어머니 장례식조차 별 관심을 두지 않는 불효막심한 놈이 될 필요가 있다는 걸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극적 수단이자 도구일 뿐이다. 오히려 '삶의 무의미'라는 거대하고도 무지막지한 파도 앞에서 인간이 휩쓸리지 않고 버티는 대신 포기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크나큰 일이다. '산다'는 건 '죽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힘든 일이다. 그 진실을 알았으면 한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