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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나의 스무 살'에 성적을 매겨 본다면 <성적표의 김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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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성적표의 김민영>

 

영화 <성적표의 김민영> 포스터. ⓒ(주)엣나인필름

 

수능 100일 전 본격적으로 준비를 하고자 김민영과 유정희가 함께 쓰는 기숙사 방에 모여 자못 엄숙히 클럽 해체를 선언하는 비공식 삼행시 클럽의 세 멤버, 김민영과 최수산나 그리고 유정희. "이 선언문을 통해 우리의 삼행시 클럽 해체를 선언합니다. 지금 우리는 수능 백 일을 앞두고 학생과 자식으로서 본분을 다하기 위해 우리의 창작욕을 잠시 재워 두려 합니다."

 

민영은 대구대학교에 입학해 대구에서 생활하고 있고 수산나는 하버드대학교에 입학해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반면 정희만은 청주에 그대로 남아 대학교에 입학하지 않고 테니스클럽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서로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삼행시 클럽 모임은 온라인으로 계속 가지고자 하는데 여의치 않다. 민영은 삼행시를 대충하는 것도 모자라 모임에 빠지기 일쑤고 수산나는 민영과 정희가 자신들이 편할 저녁 시간대에 편중해 모임을 하니 배려가 없다며 타박한다. 정희만이 모임에 변함 없는 애착을 보일 뿐이다. 

 

그러던 중에 민영이 서울에 올라와 머문다고 한다. 정희한테 올라와 같이 시간 보내자고 하니, 마침 테니스클럽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게 된 정희는 바리바리 싸들고 서울로 향한다. 그런데, 막상 정희한테 같이 있자고 한 민영은 자신의 성적표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처참한 성적을 받고는 어떻게 하면 교수한테 잘 말해서 점수를 올릴 수 있을까 하고 궁리만 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엔 같이 궁리하던 정희는 점점 서운함을 느끼는데...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삼행시 클럽의 세 멤버는 앞으로 어떤 인생 항로로 항해를 하게 될까?

 

20살, 세상 밖으로 뿔뿔이 흩어지다

 

<성적표의 김민영>은 '김민영의 성적표'라는 상식적인 제목이 아니라 '성적표의 김민영'이라는 자못 낯설고 기이하기까지 한 제목부터 인상적인 영화다.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아하' 하고 제목의 의미가 단번에 다가오는데, 영화의 전체를 지탱하고 이끌어 나가는 주인공은 김민영이 아닌 김민영의 절친이자 삼행시 클럽의 다른 멤버 유정희이기 때문이다.

 

19살 때까지 그들은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좋으나 싫으나 같이 생활하며 공부하고 웃고 울었다. 그러던 것이 1년(실제로는 몇 개월 또는 며칠)이 채 못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니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길을 간다. 그럼에도 그들에겐 삼행시 클럽이라는 끈이 있었으니, 수산나는 여의치 않았고 민영은 별 생각 없이 귀찮았지만 정희는 끈을 놓치기 싫었다. 그녀만 대학교에 입학하지 않은 채 여전히 청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였을까? 어른이 되는 과정이란 자연스레 과거와 다른 결로 살아가게 되는 것일 뿐일까?

 

영화는 2017년 한겨레 영화 워크숍에서 만나 함께 영화감독에의 꿈을 꾼 이재은, 임지선 감독의 공동연출로 만들어졌는데 정식 개봉 전에 이미 전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되었고 제22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대상, 제2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발견 대상을 비롯해 다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자타공인 2022년 한국 독립영화계 최대 기대주다. 

 

'누구나의 스무 살' 떠올리기

 

이 영화를 보며 '나의 스무 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한테는 지나갔을 스무 살, 누군가한테는 지나고 있을 스무 살, 누군가한테는 다가올 스무 살. 즉, '누구나의 스무 살' 말이다. 나의 스무 살은 유정희 같았다. 속수무책으로 세상 밖에 내던져진 것 같은 느낌 때문에 10대 때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고 그때의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돌아갈 순 없어도 변하진 않았으면 했는데, 너무나도 빨리 그리고 크게 변하고 있어서 당황스러웠고 절망스러웠다. 

 

그러니 정희한테 마음이 갈 수밖에 없다. 그녀의 스무 살이 누구나의 스무 살처럼, 아니 나의 스무 살처럼 심드렁하고 재미 없고 불확실해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찬란했던 10대 때의 끈을 놓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마음은 비단 스무 살 때뿐은 아닌 것 같다. 시간이 많이 흘러 나이가 먹어 가도 과거의 어느 순간에서 온전히 빠져나오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런 면에서 민영과 수산나는 자못 대단한 것 같다. 현재의 삶에 지극히 만족해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희와 다르게 찬란했던 10대 때의 끈을 과감히 놓고 달려 나가고 또 날아 오르려고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영화가 이런 구도 하의 스토리와 메시지 정도에서 멈췄다면 감히 말하지만 '그렇고 그런' 영화가 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성적표의 김민영>은 그러지 않았다. 

 

'성적표의 김민영'인 이유

 

영화 후반부 유정희는 김민영의 성적표를 매긴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정희가 본 김민영이라는 '사람'의 성적표다. 후반부의 일이라는 점과 영화의 가장 결정적인 장면이라는 점이 스포일러의 요건을 충분히 충족시키겠지만, 제목이 '성적표의 김민영'인 만큼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제목에서 충분히 유추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스포일러가 아니라고도 할 수 있을 테다. 더 중요한 이야기는 성적표 이전의 김민영의 일기에 있기도 하고 말이다. 

 

민영은 정희의 행동에 사뭇 서운함을 느낀 채로 민영의 일기를 들추곤 성적표를 매기는데, 일기엔 정희가 민영에 대해 보지 못한 것과 생각하지 못한 것 그리고 기억하지 못한 것들이 있었고 성적표엔 민영이 민영 스스로에 대해 보지 못한 것과 생각하지 못한 것 그리고 기억하지 못한 것들이 있었다. 이 영화의 표면적 주인공이 유정희이지만 진짜 주인공이 김민영인 이유이겠다. 

 

충분히 오해가 풀리고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하겠지만, 별다른 감명을 받지 못해 심경에 큰 변화가 없을 수도 있겠다. 평소 관련해서 생각이 많은 누군가에겐 명명백백 분명한 인사이트를 줬지만, 평소 관련해서 아무런 생각이 없는 누군가에겐 아무런 인사이트를 주지 못한다. 애매모호한 결말, 의도한 것이라면 유정희와 김민영의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틀리지 않은 그리고 둘 다 맞는 스무 살의 이야기가 적절하고 균형감 있게 표현되고 있는 것이겠다. 

 

청춘에게, 이제 갓 어른이 되었다는 스무 살에게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는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누구나의 스무 살'이 따로 있고 '나의 스무 살'이 따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