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영화 리뷰] <헌트>
한국 첩보 영화의 면면을 간략히 들여다본다. 1970년대에도 첩보물이 없었던 건 아니나 과감히 패스한다면 오랜 시간이 지나 1999년에 나온 <쉬리>가 우뚝 서 있다. 한국형 첩보물이 한국 영화계에 정식으로 또 본격적으로 들어온 첫 사례라고 하겠다. 이후 <이중간첩> <다찌마라 리> 정도가 2000년대에 나왔다. 2013년 류승완 감독의 <베를린>이 등장해 한국 첩보물의 한 획을 그었다. 같은 해 <은밀하게 위대하게> <용의자>도 나왔다. 이후 쏟아지다시피 나왔는데, <밀정> <강철비> <공작> <남산의 부장들> <야차>가 그것들이다.
면면을 보면 알겠지만, 한국 첩보물은 절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망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이른바 초대박을 이룩하지도 못한다. 한 편도 천만 영화 대열에 올라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최근 들어 꾸준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니, 분위기나 스토리가 비슷비슷해 식상해 보일 수도 있고 관객들의 피로도가 점차 쌓이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와중에 이정재 배우가 '감독'으로 입봉한 작품이 다름 아닌 첩보물인 건 크나큰 모험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정재가 감독뿐만 아니라 각본, 제작, 주연까지 도맡아 한 영화 <헌트>는 2022년 여름 성수기를 수놓을 빅 4 중 가장 약체로 평가받으며 다른 텐트폴 영화들이 휩쓸고 간 전쟁터에 가장 늦게 개봉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알맹이가 꽉 찬 간장게장이 탐스럽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헌트>는 1999년 <쉬리>와 2013년 <베를린>에 이어 한국 첩보물의 또 다른 획을 그었다. 이정재라는 이름 뒤에 배우가 아닌 '감독'의 수식어를 붙이는 게 벌써 전혀 어색하지 않은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안기부에 스며든 스파이를 색출하라!
1983년 미국 워싱턴, 교민들의 시위가 한창인 가운데 한국 대통령이 방문할 예정인 곳에 알 수 없는 이들의 테러가 발생한다. 많은 안기부 요원이 죽으면서 사태를 수습했지만, 내부에서 1급 기밀이 빠져나간 게 분명해 보인다. 안기부 1차장 해외팀 박평호(이정재 분)와 안기부 2차장 국내팀 김정도(정우성 분)는 안기부 내부에 감도는 이상한 기류를 눈치챈다.
그런 와중에 북한의 고위급 관리이자 핵 개발 책임자 표동호 국장이 망명을 신청해 온다. 하지만 그를 데려오는 데 실패하고 안기부 내부에 '동림'이라는 스파이가 존재한다는 얘기만 전해 듣는다. 안기부 부장으로 새롭게 부임한 안병기는 먼저 김정도에게 박평호와 해외팀을 조사하라고 하고 이어 박평호에게 김정도와 국내팀을 조사하라고 지시한다. 서로를 이간질해 힘을 분산시키는 한편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안기부 내 스파이를 색출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모양새다.
박평호와 김정도, 김정도와 박평호는 동림을 잡지 못하면 옷을 벗어야 하는 처지로 내몰린다. 동림이 안기부 내에 있다면, 박평호에겐 김정도 식구들 중에 있을 것이고 김정도에겐 박평호 식구들 중에 있을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처절하게 강도를 높이며 점차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과연, 박평호와 김정도는 동림을 색출해 낼 수 있을까? 그리고, 점차 밝혀지는 생각지도 못한 거대한 음모의 끝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가?
영화 곳곳에서 묻어나는 영리함
<헌트>는 굉장히 영리하게 만들어진 영화다. 적지 않은 단점들, 이를테면 신과 신이 이어질 때 자연스럽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었고 1980년대 한국 현대사를 어느 정도라도 알지 못하면 100%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으며 전체적으로 상당히 복잡한 구조의 성격을 띄고 있음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장점을 부각시키는 데 온 힘을 쏟은 모양새다. 그러다 보니, 관객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숨어 있는 단점을 굳이 들춰 내는 것보다 확연하게 드러나 있는 장점에 집중하게 하는 것이다.
영화는 1부와 2부로 정확하게 나눌 수 있을 만큼 전반부와 후반부가 여러 모로 갈려 있다. 전반부가 박평호와 김정도의 '뭣도 모르는' 대립이라면 후반부는 김정도와 박평호의 '뭘 좀 알고 나서의' 대립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물론 영화 밖 관객 그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두 인물이 휘몰아치듯 의심하고 싸우는 데 한창 정신이 팔려 있다 보면, 어느새 하나둘 진실이 드러나고 이어서 분명 블록버스터급 처절 액션이 펼쳐지는데도 불구하고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한 점으로 몰려 눈물까지 자아낸다.
영화의 화려한 외형을 책임지는 '액션'에 아주 많이 신경 쓴 듯한 장면이 곳곳에서 눈에 띄는 바, 단순히 연기가 좋았다거나 카메라 워킹이 일품이었다거나 총알이 빗발치는 듯한 현장감이 느껴졌다거나 하는 걸 넘어서 액션 장면의 '설계'가 완벽했다고 말하고 싶다. 현장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합이 좋은 느낌이랄까. 물론 완벽할 순 없으니, 단점은 최대한 가리고 장점은 최대한 드러나게 했을 테다. 여기에서도 <헌트>의 영리함이 돋보인다.
나는 이 영화 <헌트>가 좋다
<헌트>는 명명백백 액션 장르이지만 한편으론 '팩션' 장르를 표방한다. 역사적 사실에 고유의 상상력을 덧붙여 재미와 의미를 다잡고자 했기 때문이다. 영화가 시작하며 1983년이라고 시대적 배경을 정확하게 보여 줬는데, 이후 '이웅평 대위 미그-19기 귀순 사건'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일들이 벌어진다. '장영자 금융사기 사건' 관련된 말도 오가고 '5.18 광주 민주화운동'도 엿보인다. 실제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만큼 재미가 더할 것이다. 잘 몰라도 무리가 없을 만큼 전반적 스토리 라인에 적절히 스며들었다.
영화는 후반부 들어 박평호와 김정도를 통해 하고 싶은 말,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명백하게 강렬하게 뿜어낸다. 무자비한 국가 폭력을 절대로 용인할 수 없다는 것과 수많은 이가 다치고 죽는 전쟁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1980년대 한국 현대사의 틀에서 벗어나 범시대적이자 현재적으로까지 의미가 확대되는 순간들이다. 충만한 장르적 재미와 함께 누구나 마음속 깊이 새길 만한 보편적 의미가 두루두루 갖춰져 적재적소에 뿜어져 나오니, 어찌 이 영화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싶다.
그렇다, 나는 <헌트>가 좋았다. 이 영화가 한국 첩보물 역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라서가 아니라, 액션이 너무나도 세련되고 빼어나서 볼 맛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정재와 정우성이 23년 만에 영화 속에서 조우해서가 아니라 그동안 제대로 보여 주지 쉽지 않았던 폭력의 시대 1980년대 한가운데를 있는 그대로 스크린에 담으려고 한 노력이 절절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거기엔 여지 없이 명분과 대의가 한가득한 '대한민국 1호 암살'이라는 바람이 있다.
시대적 함의와 대의가 맞물리는 개인의 신념들이 처절하게 부딪히는 가운데 폭발하는 액션이 역대급인 <헌트>, 보고 보고 또 보면서 오롯이 받아들이고 새기고 싶을 만한 영화다. '이런 영화가 또 나올 수 있을까?' 하는 물음표가 아니라 '이런 영화가 또 나오면 좋겠다!' 또는 '이런 영화는 꼭 다시 나와야 한다!' 하는 느낌표를 찍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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