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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그냥 그 자리에 있었을 뿐" <비상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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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비상선언>

 

영화 <비상선언> 포스터. ⓒ쇼박스

 

여행객들로 붐비는 인천 공항, 재혁은 딸 수민과 함께 하와이행 비행기 탑승 수속을 밟고 있다. 수민이 우연히 심상치 않은 행동을 하는 진석을 보는데, 진석이 기분 나쁘게 재혁과 수민의 주위를 맴돈다. 그들은 같은 비행기 KI501편을 타고 하와이로 향하는데, 이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진석이 비행기 화장실에 알 수 없는 가루를 뿌린다. 그러곤 수민에게 "이 비행기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 죽을 거야"라고 한다. 수민이 재혁에게 말하고 재혁이 사무장에게 전한다. 그 사이에 화장실에 갔던 승객 한 명이 피를 뿜으며 쓰러져 죽는다. 

 

한편, 지상에서 베테랑 형사 팀장 인호는 인터넷에 장난처럼 올린 비행기 테러 예고 동영상을 보고 용의자를 찾아간다. 열려 있는 용의자의 집, 그곳엔 피를 뿜고 죽어 있는 사람이 비닐에 싸여 있었고 쥐 수십 마리를 가지고 바이러스 실험을 한 영상 테이프 수십 개가 발견되었다. 바로 그 용의자 진석이 KI501편을 타고 있다는 게 확인되고 빠르게 국토부 장관 주제 긴급 대책 회의가 열린다. KI501편에 아내가 타고 있는 인호도 그 회의에 참석한다. 

 

KI501편에서는 진석을 잡아 놓지만 승객들은 계속 죽어 나간다. 화장실에만 퍼져 있던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객실 내 전체에 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상에서는 청와대에서도 관심을 갖고 전국가적으로 대책을 세우는 한편 진석이 누구인지, 그가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런 와중에 기장도 바이러스로 쓰러지고 마는데... 과연 KI501편은 무사할까? 

 

한재림 감독의 다섯 번째 이야기

 

한재림 감독은 2005년 발칙한 데뷔작 <연애의 목적>으로 흥행과 비평 두 마리 토끼를 다잡으며 혜성처럼 등장했다. 이후 <우아한 세계>로 비록 흥행에서는 실패했지만 한국 조폭 느와르의 신기원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실로 오랜만에 <관상>으로 돌아왔는데 초호화 캐스팅으로 화제를 모았고 크게 흥행했다. "내가 왕이 될 상인가?"라는 희대의 명대사도 남겼다. 그리고 <더 킹>까지 흥행과 비평에서 성공시키며 믿고 보는 충무로 대세 감독으로 입지를 완전히 굳혔다. 

 

<비상선언>은 탄탄대로 한재림 감독의 다섯 번째 연출작이다. 2022년 여름을 뜨겁게 달굴 영화 빅4(<외계+인> <한산> <비상선언> <헌트>) 중 하나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2020년에 촬영이 끝나고 2021년에 칸 영화제에서 상영되었으며 2022년에 정식으로 개봉한 것이니 한편으론 기대가 크겠고 한편으론 불안감이 클 것이다. 

 

<관상>에 버금가는 초호화 캐스팅으로 화제를 모은 한편 한국 영화 최초의 항공 테러물로 기대감이 컸던 <비상선언>, 스릴러 재난 드마라 장르를 표방한다. 항공 테러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걸 한데 모았는데, 호불호가 명명백백하게 갈릴 것 같다. 항공기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고품격 스릴러를 기대했다가 한재림 감독이 봐 주길 바라는 재난을 지나 신파끼가 묻은 드라마로 끝나니 말이다. 반면 다채로운 맛을 좋아하면 이 작품이 제격일 테다. 

 

재난에 속수무책 인간군상

 

영화는 재난 상황에 속수무책으로 지배당해 버린 인간의 군상을 적나라하게 비추는 데 초첨을 맞췄다. "그냥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라는 문장이 영화 전체의 핵심을 이루며 불확실성에서 오는 두려움과 항공 테러 상황의 공포를 맞닥뜨려 극도의 몰입을 불러일으켰다. 자칫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의 몰입 말이다. 예전만큼의 관심과 걱정은 줄었다지만 코로나19가 여전히 창궐하고 있는 지금, <비상선언>은 현실과 픽션 간의 경계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다. 

 

영화 전반부를 이끄는 건 단연 원탑 악역이자 유일무이한 빌런이라고 할 만한 류인석이다. 첫 등장부터 희대의 '돌아이'를 만천하에 드러내듯 온몸으로 제스처를 취했는데,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앞으로 무슨 짓을 할지 도무지 가늠이 안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임시완 배우가 8년 전 <미생>의 장그래와 똑같은 얼굴과 차림새를 하고선 미친 짓을 꾸미고 있으니, 그의 연기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영화 값의 절반 이상은 하지 않았나 싶다. 

 

폐쇄되고 닫힌 공간에서 큰일이 일어나면 자연스레 인간군상이 나뉘기 마련이다. 나서는 사람, 알리는 사람, 도망가는 사람, 돕는 사람, 북돋는 사람, 모함하는 사람, 가만히 있는 사람, 불안을 전파하는 사람 등등. <비상선언>이 '재난 블록버스터'를 지향하지 않고 '재난'에 포커스를 맞춰 상황과 사람에 천착한 건 참으로 잘한 것 같다. 비행기 안에서뿐만 아니라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 즉 상황에 대처하는 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도 실감나게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이내믹 한국사회

 

<비상선언>의 러닝타임은 140분에 달한다. 주지했듯 스릴러와 재난과 드라마 장르를 모두 보여 주려 하다 보니 시간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직잠하는데, 한재림 감독은 재난에 중점을 두되 스릴러와 드라마 모두 놓치고 싶지 않았나 보다. 좋다, 스릴러와 재난까지는 더할 나위 없었다고 할 만한데 드라마로 넘어 오면서 기시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영화도 생각나고 저 영화도 생각나며, 최근 영화도 생각나고 예전 영화도 생각나니 말이다. 누군가는 풍성하다고 느낄 테고 누군가는 뒤로 갈수록 별로라고 생각될 테다. 

 

공중과 지상의 구도는 완벽에 가깝게 짜여 있다. 공중에선 재혁과 테러범 진석 그리고 부기장과 사무장이 짝을 이루고 지상에선 인호와 경찰들 그리고 국토부 장관과 청와대 위기관리센터 실장이 짝을 이룬다. 따로 또 같이 유기적으로 엮여 긴밀하게 소통하며 일이 벌어지고 해결된다. 시시각각 일어나는 재난에 최대한 빠르고 정확하게 대처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지만 쉽지 않다. 와중에 재혁과 인호의 존재가 눈에 띈다. 각각 딸(함께)과 아내(홀로)가 위기의 비행기에 탑승해 있는 위기의 가장인 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애처롭다. 

 

장점만큼 단점도 많은 <비상선언>, 한국사회의 면면들을 영화 곳곳에 살짝살짝 흩뿌려 놓으며 짧고 굵게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가 하면 한국사회에 대놓고 비상선언을 선포하듯 화끈하게 어지럽게 돌진하기도 한다. 마치 모든 면에서 플렉스하면서도 가차없는 심플과 미니멀을 추구하고 그 어느 나라나 사회보다 다이내믹하면서도 하염없이 침참하는 한국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 같기도 하다. 닫혀 있는 비행기 안에서나 열려 있는 지상에서나 똑같은 구도와 인간군상이 엿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가, 아니 한재림 감독이 그것까지 노린 걸까?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이 영화가 그동안 무수히 나온 항공 테러 영화들 중 '최고'라고 말이다. 이토록 시종일관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이성이 제자리를 못 찾게 하는 게 쉬운 일인가? 딱 재난에 맞닥뜨렸을 때의 느낌 같았다. <비상선언>은 충분히 성공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