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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 하마구치 류스케 <우연과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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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우연과 상상>

 

영화 <우연과 상상> 포스터. ⓒ그린나래미디어

 

하마구치 류스케, 20년 넘게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 감독으로 군림하고 있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뒤를 이을 적통으로 떠오르고 있다. 1978년생으로 매우 젊지만, 2000년대 초반 연출 데뷔 후 쉬지 않고 꾸준히 작품을 내놓아 작품수가 꽤 된다. 2011년 도호쿠 대지진이 일어난 후 연작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이름을 알리고 본격적인 극영화로 우리에게 찾아왔다. 

 

2015년작 <해피아워>, 2018년작 <아사코>(칸 영화제 경쟁부문), 2021년작 <우연과 상상>(베를린 영화제 은곰상 심사위원대상) <드라이브 마이 카>(칸 영화제 각본상,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 골든글로브 비영어영화상 등)까지 그야말로 광폭 행보를 이어 왔다. 우리나라엔 <해피아워>와 <드라이브 마이 카>가 2021년 말경 비슷하게 개봉했고 반년 뒤 <우연과 상상>이 개봉해 하마구치 류스케 특집같은 모습을 연출했다. 갈수록 더 대단한 영화를 내놓고 있는 바, 현재진행형 거장이자 미래가 더 기대되는 거장이기도 하다. 

 

주지했다시피 <우연과 상상>이 가장 최근에 개봉했다.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 '문은 열어둔 채로' '다시 한번'이라는 세 단편으로 이뤄진 옴니버스 영화로, 2021년 최고의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평가를 받았고 평가에 걸맞게 더할 나위 없이 대단하고 사랑스러러우며 여러모로 감탄 어린 영화다. 이 영화를 보고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팬이 되지 않기 힘들 것이다.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

 

메이코와 츠구미, 절친이자 동료이기도 한 둘은 밤 늦게 일을 마치고 함께 택시로 귀가 중이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츠구미가 최근 만나서 너무나도 좋은 기분을 느꼈다는 남자 카즈키의 얘기를 한다. 곧 츠구미는 택시에서 내리고 메이코는 집으로 향하다가 이내 왔던 길을 돌아간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카즈키의 사무실이다. 카즈키는 메이코의 전 남친이었던 것.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은 상상을 아름답게 자극하곤 최악의 우연으로 치닫는다. 츠구미가 첫만남에서부터 끌렸다는 '카'(카즈키)라는 남자에 대해 얘기할 때 그녀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너무나도 아름다운 분위기의 장면이 떠오르는 것이다. 남의 시덥잖은 연애 이야기에 이토록 집중해 본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단언컨대, 그런 적은 없었다. 

 

그런데,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아름다운 상상은 곧 기막힌 우연에 의한 최악의 사태로 치환된다. 메이코가 2년 전 헤어진 전 남자친구가 다름 아닌 츠구미가 만난 남자이니 말이다. 더군다나 메이코가 득달같이 찾아가니, 카즈키는 메이코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다는 게 드러난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게 남녀 간의 관계이자 사랑인가. 

 

문은 열어둔 채로

 

나오는 결혼하고 자식까지 있지만 대학교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그녀에겐 섹스 파트너 사사키가 있는데, 그는 지난 학기 불어 과목에서 낙제해 담당 교수 세가와에게 가서 무릎까지 꿇으며 사정했지만 통하지 않았던 전적이 있다. 사사키는 세가와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는데, 세가와가 일본 굴지의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나오에게 부탁 아닌 협박을 한다. 미인계를 써서 세가와가 곤란에 처하게끔 하라는 것이었다. 나오는 세가와를 찾아간다. 

 

'문은 열어둔 채로'는 자극적인 상상이 아름다운 우연으로 그리고 다시 최악의 우연으로 흐른다. 세가와 교수를 찾아간 나오는 그를 유혹하고자 그가 직접 쓴 책의 야한 부분을 그의 앞에서 직접 읽는데, 자못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한다. 하지만 정작 세가와의 상상은 다른 곳을 향했으니, 나오가 읽은 부분이 아니라 나오의 목소리 자체였다. 나오는 더 이상 세가와를 나쁜 쪽으로 유혹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단편의 백미는 이후의 세가와와 나오의 대화다. 이성과 감정에 천착된 MBTI들끼리의 대화인 듯, 서로 전혀 통하지 않을 것 같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할 나위 없이 잘 통하는 느낌 말이다. 논리적이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한편 너무 진지해서 웃음이 삐져 나오기도 한다. 문은 열어둔 채로 대화를 나누는 건 마치 군중 속의 고독처럼 오히려 군중 속에서 둘만 있는 것 같게 하는 것 같다.

 

다시 한번

 

나츠코는 20년만에 동창회 참석 차 고향 센다이로 돌아온다. 혹시 20년 전 첫사랑이었던 그녀, 아야를 만날 수도 있을 거란 기대를 품고서 말이다. 나츠코의 바람은 현실이 되어 우연히 아야를 만난다. 그들은 한눈에 서로를 알아본다. 아야는 나츠코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고 둘은 의미심장한 대화를 이어간다. 그런데, 갑자기 아야가 자신을 두고 아야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다시 한번'은 아름다운 우연과 아름다운 상상이 버무려진 아름다운 이야기다. 나츠코의 20년간의 바람과 상상이 기막힌 우연에 의해 현실이 되었으니 말이다. 아야를 만나 그녀의 집에 가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게 나츠코로선 얼마나 황홀한 경험이었을지 감히 상상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아야가 자신을 두고 아야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하니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산산조각 나는 것인가?

 

이 단편의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산산조각 날 것 같은 시점 이후에 빛을 발한다. 둘은 헤어지기 전 서로가 20년 전의 그녀가 되어 못다 한 진심 어린 말을 전한다. 그렇게 비로소 나는 내가 되고, 너는 네가 될 수 있었다. 비록 바라마지 않았던 당사자는 아니지만 우연은 충분히 아름다웠고 상상도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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