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영화 리뷰] <매스>
지난 5월 24일, 미국 텍사스주 유밸디의 롭 초등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불과 18살의 남성이었고, 4학년 교실의 학생들에게 소총과 권총을 난사했다고 한다. 그 결과 19명의 학생과 2명의 교사가 사망했다. 차마 뭐라고 말하기 힘들 만큼 참혹한 비극이었다. 이에 미국에서 총기 규제 논란이 극으로 치달았는데 상원이 초당적으로 총기 규제 일부 강화에 합의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한편, 가해자의 어머니는 자신과 아들을 용서해 달라며 아들은 아주 조용한 아이였고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았는데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벌였는지 알 수 없다고 인터뷰했다. 미국에서 거의 매년 시간과 장소와 대상을 막론하고 발생하는 총기 난사 사건, 원인과 결과에 대해 전국민이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지만 여전히 뚜렷한 방안을 찾기가 요원해 보인다.
영화 <매스>는 총기 난사 사건으로 아이를 잃은 두 부부가 한자리에 모여 나누는 이야기를 다룬다. 두 부부는 다름 아닌 가해자와 피해자의 부모들이다. 수년간 상담을 받으며 많이 나아졌지만 더 나아지기 위해 모인 것이다. 연출은 신인 감독 프란 크랜즈가 맡았는데, 지난 20여 년간 단역, 조연, 주연을 오가며 연기생활을 해온 배우다. 그런가 하면, 두 부부의 배역을 맡은 이들이 중요할 텐데 대배우 제이슨 아이삭스, 마샤 플림튼, 리드 버니, 앤 도드가 열연했다.
피해자의 부모와 가해자의 부모
교회 집사 주디는 분주하게 움직인다. 곧 교회 구석에 있는 방에 손님들이 방문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디는 방 한가운데 원형 테이블을 놓고 의자를 네 개 놓았다. 손님들이 오기 전에 상담사 켄드라가 와서 체크한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서 티슈를 걷어 내고 창문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유심히 살피더니 그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고 허락한다. 그러곤 의자 위치를 손본다.
제이, 게일 부부가 먼저 도착하고 리처드, 린다 부부가 도착해 방으로 들어선다. 두 부부는 분명 구면이지만 초면인 것처럼 어색하고 일면 찬바람이 부는 것 같기도 하다. 아주 조심스럽게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는 두 부부, 네 사람. 대화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정체가 밝혀진다. 그들은 모두 교내 총기 난사 사건의 유족들이다.
제이, 게일 부부는 피해자 에번의 부모이고 리처드, 린다 부부는 가해자 헤이든의 부모다. 그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아들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는 하찮은(!) 점이지만, 차이점은 헤이든이 에번을 참혹하게 살해했다는 차마 말로 다하지 못할 점이다. 사건이 발생한 지 6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그때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게 계속 살 순 없어서, 더 나아지고 싶어서 그들은 크나큰 용기를 내 만난 것이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너희 아들이 한 짓을 알아? 용서할 수 없어!'일까.
영리한 연출과 조화로운 연기
외부와 차단되다시피 한 교외 교회의 외딴방에 네 명, 그들을 비추는 카메라 워킹은 상당히 노골적이고 그래서 영리한 측면이 있다. 피해자의 부모와 가해자의 부모를 마치 대치시켜 놓은 듯한 구도로 의자를 배치해서는 거의 쉬지 않고 번갈아 비춘다. 그런가 하면, 서로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며 경청하고 대화를 이어가려는 의지의 구도로도 읽힌다.
그러곤 후반부에 가선 자리가 조금씩 틀어진다. 제이가 감정을 폭발시키며 끔찍한 얘기를 하니 게일이 일어나 멀찌감치 떨어져 앉았고 리처드가 감정을 절제하며 끔찍한 얘기를 이어가니 린다가 일어나 멀찌감치 떨어져 앉는다. 게일과 리처드도 자리에서 일어난다. 한동안 그들은 아주 멀리 떨어져 앉았는데, 곧 이전보다 더 가깝게 테이블도 없이 한곳에 모인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부모 사이라는 구도에서 아들을 잃었다는 공통점으로 서로의 아픔을 공감하는 구도로 바뀐 것이겠다.
정녕 아무것도 없는 방에서 단 네 명의 배우만으로 지루하기는커녕 긴장감이 철철 넘치게 하려는 의도가 아주 다분한 장면 연출이다. 여기에 다분히 배우들의 연기에 방점을 둘 수밖에 없었는데, 이 영화가 영화제들에서 유독 '앙상블상'을 많이 수상한 걸 보면 유추할 수 있듯 네 명의 연기가 최상의 조화를 이뤘다. 티키타카가 이렇게도 잘 맞았던 영화가 또 있었나 싶을 정도다. 영화 전체를 원 테이크로 진행한 듯한 인상마저 준다. 특히, 절제된 감정과 폭발적인 감정의 폭에서 오는 진동의 크기가 너무나도 컸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가해자에게 사연을 부여하다
영화를 구성하는 기술, 즉 연출이나 연기는 더할 나위 없었지만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고 또 전하고자 하는 바에서 느끼는 껄끄러움은 자못 심각할 수 있다. 논란의 여지가 다분하지만 죽은 피해자의 부모와 죽은 가해자의 부모가 만나 아들 잃은 부모로서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며 진정한 용서로서의 구원까지 가닿으려 한다는 취지까지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지만 영화는 피해자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구체적인 스토리로 일종의 '사연'을 부여하고 만다. 이게 굉장히 무서운 건, 피해자와 가해자에게 똑같이 사연을 부여했을 때 피해자보다 가해자에게 시선이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가족은 너무나도 가슴 아프기 때문에 피해자의 이야기를 잘 하지 못하는 반면, 가해자의 이야기는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했는가?'라는 질문의 답이 될 수도 있기도 하거니와 가해자의 가족도 가해자와 가해자의 가해를 따로 떼어 놓으려는 경향을 보이기에 가해자의 이야기를 잘 풀어 놓은 편이다.
가령 이런 식인 것이다. 언론이나 수사당국에서는 피해자의 신원보다 가해자의 신원을 파헤치고 싶어하고 파헤칠 수밖에 없으니, 많은 이의 시선이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게 쏠린다. 나아가, 가해자의 가족은 가해자가 죽고 없는 상황에서 '그가 도대체 왜 그랬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름의 사정이 있을 테니 함부로 단정하지 말아 달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니 피해자와 피해자의 이야기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기 일쑤다.
그런데 <매스>도 그런 경향 또는 도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피해자의 부모와 가해자의 부모가 서로의 아픔을 공감한다는 구도를 형성시켜 놓으니,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야기가 나란히 노출되었고, 자연스레 가해자의 이야기가 더 많이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심지어 피해자의 부모가 가해자의 부모를 용서하는데, 이 영화가 무슨 권리로 대신 용서를 해 줄 수 있는 것인지 의문도 든다. 영화 <매스>를 아주 잘 만든 작품으로 기억할진 모르겠으나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진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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