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영화 리뷰]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
영국 남부의 작은 해안도시 시포드, 시 선집을 엮는 그레이스와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에드워드는 29주년 결혼기념일을 코앞에 두고 있다. 그레이스는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반면 에드워드는 소극적이고 조용한 듯하다. 그때쯤 오랜만에 찾아온 아들 제이미, 부모님 댁이 그리 반갑지는 않은 눈치다. 그런데 하필 그때 사달이 난다.
다그치는 그레이스와 반응이 없는 에드워드 그리고 반응이 없는 에드워드가 답답한 그레이스와 계속 몰아부치는 그레이스를 피하고 싶은 에드워드 말다툼을 벌인 것이다. 그레이스는 에드워드를 자극하고자 에드워드에게 손찌검을 하고 아침 밥상을 엎어 버린다. 에드워드는 자리를 피한다. 제이미는 아빠를 몰아 세우고 손찌검까지 하는 엄마를 이해하기 힘들다.
그레이스가 성당에 간 사이 점심 식사 겸해서 한 자리에 앉은 에드워드와 제이미, 에드워드는 제이미에게 충격적인 선언을 한다. 되는 대로 그레이스를 떠나겠다는 것이다. 1년 전에 안젤라라는 여자를 알게 되었고 그녀의 집으로 들어간다고도 했다. 얼마 후 돌아온 그레이스에게도 똑같은 말을 전하는 에드워드, 하지만 그레이스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에드워드가 안젤라를 사랑하는 것 같지도 않다. 집을 나간 아빠 에드워드와 집에서 넋을 잃고 있는 엄마 그레이스 사이를 오가는 아들 제이미, 이 가족의 앞날은?
윌리엄 니콜슨의 두 번째 연출작
1948년생, 한국 나이로 75세의 '윌리엄 니콜슨'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각본가 또는 스토리텔러이다. 199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활동하며 <섀도우랜드> <글레디에이터> <레미제라블> 등을 비롯한 작품의 각본을 썼고 1998년에는 스티븐 딜레인, 소피 마르소 주연의 <파이어라이트>로 연출 데뷔를 했다. 그리고 실로 오랜만에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으로 두 번째 연출을 했다.
이 영화는 일찍이 1999년 윌리엄 니콜슨 자신이 쓴 희곡 <모스크바로부터의 후퇴>를 20여 년만에 각색한 것인데, 2003년에는 브로드웨이에 진출해 토니상 3개 부문(최우수 작품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하는 등 큰 사랑을 받은 바 있다. 윌리엄 니콜슨 본인의 자전적 이야기를 충분히 살렸다고 하는데, 그렇기에 섬세한 감정이 표출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영화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은 영화를 만든 이, 영화를 보는 이, 영화 속 인물 모두에게 질문한다. 아니, 생각하게 한다. 사랑이라는 게 무엇이냐고, 사랑이라고 믿는 게 무엇이냐고. 그리고 인생에서 사랑이 어떤 의미냐고. 누구도 확신할 수 없을 것이고 누구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사랑에 대한 직설적이고 솔직한 고민의 흔적과 다름 아니다.
결혼, 가족, 부모
그레이스와 에드워드는 29년이나 함께 살며 아들 제이미라는 결실도 함께 맺었지만, 정작 서로를 잘 몰랐다. 그레이스는 그레이스대로 에드워드를 생각하고 바라봤고 에드워드는 에드워드대로 그레이스를 생각하고 바라봤다. 시작은 운명같았으나 그 또한 지나서 생각해 보니 상황에 자신을 맞춘 것이었다. 이 결혼 생활은, 이 사랑은 시작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감정을 잘 표출하지 않는 에드워드는 시간이 갈수록 힘들었을 것이다. 홀로 자신만의 세계로 침참해 들어가는 걸 즐기는 성향과 맞지 않으니 말이다. 그레이스도 다르지 않았다. 무슨 짓을 하든 반응 없는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게 얼마나 고역이겠는가. 성향 차이 이전에 예의의 문제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레이스는 에드워드를 사랑했다. 아니, 사랑한다고 믿었다.
제이미는 태어났을 때부터 부모님이라는 '어른'이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어른으로서 어른답게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생각했다. 어른이라면 으레 모든 걸 잘 알고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반면 그들 사이에 '사랑'이라는 게 구체성을 띄고 있을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 사이에 사랑이 끼어 들었고 모든 걸 잠식해 나갔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부모님이라는 어른의 형태를 그려 보면 '완벽'에 가까우니 말이다. 그들 사이에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살아 숨 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은 부모님이지 다른 무엇이 아니니까.
문학적인 조화로움
영화는 인생이 서서히 저물어가는 어느 날 갑자기 튀어 나와 모든 걸 잠식해 버리는 '사랑'의 무거움을 그리면서도, 경이로울 정도로 장엄한 세븐 시스터즈의 하얀 절벽과 드넓게 펼쳐진 언덕 초원의 풍광으로 '사랑'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절벽 앞에 낭떠러지처럼 지난한 '사랑' 앞에 인생이 끝나 버린 것 같다가도 낭떠러지가 끝나는 시점에 바다가 끝없이 펼쳐지는 것처럼 결코 '사랑' 따위로 인생이 끝나지 않으며 인생은 계속된다는 걸 보여 준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이 문학적이라고 느껴지는 건 비단 '사랑'에 대한 여러 면을 보여 주는 것뿐만은 아니다. 클래식, 시, 역사의 한 장면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등장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그들의 감정선을 잡는 데 역할을 한다. 더불어, 영화가 별 내용 없이 진부할 수 있는 스토리라인을 띄고 있음에도 전체적으로 우아하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한 편의 우아한 '작품'을 감상한다는 느낌 말이다.
그레이스 역의 아네트 베닝과 에드워드 역의 빌 나이, 그리고 제이미 역의 조쉬 오코너가 잔잔한 듯 치밀하고 섬세하게 펼쳐지는 삼각 구도가 극의 중심을 완벽하게 잡았음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감정선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조화가 일품이다.
보는 이들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느끼고 생각하고 깨달은 바가 다를 것 같다. 누구는 각각의 인물에 감정이 이입될 것이고 누구는 사랑이라는 게 뭔지 다시 생각해 볼 것이며 누구는 가족, 어른, 인생 등에서 새롭게 깨달은 게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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