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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가난한 이들에겐 죽음조차도 사치일 수 있겠구나... <축복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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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축복의 집>

 

영화 <축복의 집> 포스터. ⓒ필름다빈

 

젊은 여성 해수는 공장에서 온몸이 땀에 쩌들 만큼 일하곤 빠르게 어디론가 향한다. 지하철을 타고 가며 누군가한테 전화를 걸지만 받지 않는다. 어느새 그녀는 식당에서 불판을 닦고는 잔반을 정리한다. 일을 끈내곤 늦은 밤 다시 빠르게 어디론가 향한다. 이번엔 집앞이다. 하지만 무슨 연유에선지 선뜻 들어가지 못한다. 집 근처 계단에서 다시 누군가한테 전화를 걸어 보지만 받지 않는다.

집으로 들어선 해수는 녹물이 충분히 나오게끔 한 후 샤워를 한다. 다음 날 아침 현금을 두둑히 챙겨 집을 나선다. 그녀가 사는 동네는 지구 전체가 재개발이 한창인 듯하다. 일을 하러 가지 않고 의사를 찾아가 25만 원을 주고 시체검안서를 뗀 해수, 어느 중년 남성의 차에 올라 타 집으로 향한다. 집에는 해수 어머니 시신이 있었는데 같이 간 남성 즉 형사가 시신의 사진을 찍는다.

어머니 시신을 모시고 장례식장으로 향한 해수, 장례를 위해 이것저것 준비하는 와중에 밖으로 나와 남동생 해준을 찾는다. 이틀 동안 몇 번이나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던 전화의 상대가 해준이었던 것, 실랑이 끝에 해준을 장례식장으로 데려와 상복을 입힌다. 그러던 중 보험회사 직원이 찾아와 살아생전 해수 어머니가 보험 보장을 일반적인 경우와 다르게 한 걸 석연치 않아 하며 전한다. 해수는 곧바로 급히 집으로 향하는데...

 

불친절하지만, 단비같았다

 

2000~2010년대 나름의 활황기를 맞이했던 한국독립영화, 한국의 유수 독립영화제들이 2000년을 안팎으로 비슷한 시기에 생겨난 걸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2020년대 들어 거짓말처럼 쪼그라들었다. 코로나 팬데믹의 여파가 영화계 전반에 큰 타격을 주는 동시에, 판도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극장을 향하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OTT 시장으로 재편되었기에 수많은 콘텐츠 회사들이 사활을 걸고 작품을 쏟아 내니 독립영화가 설 자리는 없었다.

이런 때 찾아오는 한국독립영화 한 편 한 편이 소중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축복의 집>은 영화 자체가 주는 우울하고 답답하며 고립감이 침투하는 느낌을 뒤로 하고, 주지한 이유로 단비같았다. 그런가 하면,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이 영화에 80여 분 동안 단 한 컷도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인물 해수는 말이 거의 없다. 초중반까지는 아예 한마디도 없다. 그러니 무슨 상황인지도 잘 알 수가 없다.

더불어 어떤 사연이 있는지 아예 알 수 없을 정도이지만, 아빠는 없고 엄마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젊은 나이에 두 가지 일을 하고 그보다 어린 남동생도 일을 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와중에 엄마가 자살하지 않은 것처럼 꾸며 보험금을 타서는 정작 자신은 그 돈을 거의 만질 수 없는 것 같다. 처참하고 황당한 상황에 몰입하며 기구하고 참담할 것 같은 사연은 어느새 궁금해지지 않는다.

 

먼지와 재, 가난한 죽음

 

<축복의 집>으로 장편영화 연출 데뷔를 이룩한 박희권 감독은 영화 분위기와 전혀 맞지 않을 것 같은 필모를 가지고 있다. 상업영화 <감기> 각본과 드라마 <세가지색 판타지-생동성 연애> <제3의 매력>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의 극본을 썼다. 그가 진짜 하고 싶었던 콘텐츠와 이야기는 <축복의 집>의 그것이 아니었을까 새삼 생각해 본다.

<축복의 집>의 그것은 무엇일까. 영제 'dust and ashes'에 눈길이 간다. 직역하면 '먼지와 재',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의 'ashes to ashes, dust to dust'에서 따온 것 같다. 영화 속 해수와 해준의 어머니는 비록 살아생전의 모습이 비추진 않지만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는 사실상 그녀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와 죽어 가는 과정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저 육체적으로 죽어서 모든 게 끝난 줄 알겠지만, 절차에 의해 사회적으로 또 합법적으로 죽는 건 살아 있는 이들의 몫이다.

영화가 굉장히 불친절하다고 주지했는데, 들여다보면 곳곳에서 현상을 보여 준다. 굳이 해수가 상복을 입지 않아도, 시종일관 어둠이 그녀를 잠식하고 있는 것 같다. 낮이든 밤이든 흐릿하고 어두우며, 하다 못해 그녀는 검정 마스크와 검정 바지와 검정 끈의 가방을 지니고 있다. 자신을 극구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다. '나쁜' 죽음을 목도한, 산 자의 삶의 방식이 아닌가 싶다. 물론, 거기엔 '가난'이라는 씻어 버릴 수 없는 것이 언제나 따라다닌다.

 

최선의 축복

 

영화를 보면 가난한 이들에겐 죽음조차도 사치일 수 있겠구나 하는 충격적이지만 당연하다면 당연한 진실을 목도할 수밖에 없다. 해수와 해준은 무조건적으로 돈이 들어가는 장례의 모든 절차에서 최소한을 택한다. 하여, 해수와 해준을 응원하지는 않을 망정 동정 어린 시선을 보거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보기조차 힘들다. 그러기엔 그들은 잘못된 짓을 저질렀고 최선을 다해 고인을 보내지도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불편해진다. 불친절해서 불편한 영화가 던지는 이야기와 메시지 또한 불편하다.

그런가 하면, 죽음을 대하는 시선을 확장해서 볼 수도 있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해수가 엄마의 장례 절차를 진행함에 있어 여러 어른들을 대하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한 사람의 죽음을 아무것도 아닌 듯 취급한다. 그들이 사회 시스템의 중추를 형성한다면, 이미 붕괴해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다. 최소한 붕괴되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모양새를 보면, 제대로 된 삶은커녕 제대로 된 죽음조차 어려워진 사회로 들어선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직면하는 것이다. 이 사회도 죽음이 멀지 않은 걸까 하는 두려움도 함께.

누가 누구의 행복을 빌어 주는 집일까. 보험회사 직원의 말로 유추해 보면, 엄마가 살아생전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죽음을 목도하고 보험금 보장을 변경시킨 다음 자식들과 입을 맞춰 자살한 뒤 자살하지 않은 것처럼 꾸며 막대한 보험금을 수령하게 한 걸까. 그것이 가난한 가정을 책임지는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축복이었을까. 너무나도 절절한 축복, 비참한 축복, 행복하지 않은 축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