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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진정으로 소중한 건 쉽게 얻을 수 없어" <피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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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피그>

 

영화 <피그> 포스터. ⓒ판씨네마

 

슬럼프는 누구에게 언제든지 어떤 모습으로든 찾아오기 마련이다. 소위 '잘나간' 사람일수록 슬럼프의 파동이 크게 느껴질 것이다. 대중의 관심을 먹고 사는 상업 영화배우의 경우, 잘 나가는 것도 한순간이지만 슬럼프에 빠지는 것도 한순간이다. 세상이 나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어느새 아무도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는 것이다. 여기, 아주 적절한 배우가 한 명 있다. 

 

니콜라스 케이지, 할리우드 최고의 로얄패밀리라고 할 만한 '코폴라' 가문 출신으로 1980년대 영화계에 얼굴을 내민 뒤 오래지 않아 스타덤에 오른다. 1990년대 중반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로 골든글로브와 미국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휩쓸며 연기파 배우로도 우뚝 선다. 이후 액션, 드라마 장르를 가리지 않고 출연하는 족족 흥행에 성공하며 광폭 행보를 이어간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갑자기 흥행에 실패하기 시작하더니 인생도 내리막길을 걷는다. 

 

영화 <피그>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인생사를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하다. 한때 모르는 이가 없었고 모두가 존경해마지 않았으며 모두에게 긍정적 영향력을 전파했었지만 모종의 이유로 모든 이를 뒤로 하고 사라졌고 모든 이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이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니 말이다. 그는 단 하나뿐인 소중한 돼지를 찾고자 15년 전 모든 이를 뒤로 하고 사라졌던 그곳으로 향한다. 

 

누가 나의 돼지를 데려갔다

 

미국 북서부 오리건주 숲속, 롭은 가진 건 없어 보이지만 자연과 벗하며 송로버섯 돼지와 함께 평화로운 듯 살고 있다. 돼지가 송로버섯이 있는 곳을 알려 주면 그저 가서 캐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캔 송로버섯은 그를 유일하게 찾아오는 바이어 아미르에게 건넸다. 그 대가로 받는 건 돈이 아니라 죽지 않고 먹고살 만큼의 식료품이었다. 그들은 별 말도 나누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롭의 집에 쳐들어와 롭을 가격해 쓰러뜨리고 송로버섯 돼지를 데려갔다. 다음 날 눈을 뜬 롭은 막무가내로 돼지를 찾아 나서지만 여의치 않다. 이리저리해서 아미르를 만난 롭은 그의 차를 얻어 타선 15년만에 포클랜드로 향한다. 포클랜드에 도착한 롭과 아미르, 롭은 돼지를 찾고자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니지만 롭의 더러운 행색 때문에 같이 다니면 이미지에 타격을 받을까 봐 아미르는 전전긍긍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롭을 알아 보는 게 아닌가? 그리고, 롭의 진짜 이름이 로빈 펠드라는 게 아닌가? 또한, 그가 15년 전에는 포클랜드 최고의 셰프로 이름을 날렸다는 게 아닌가?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왜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걸까. 한편, 아미르는 포클랜드를 좌지우지하는 사업가이자 일밖에 모르는 아빠를 두고 있는 바 어릴 때의 상처가 여전히 치유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따로 또 같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버드맨? 존 윅? 

 

영화 <피그>를 보다 보면 자연스레 두 영화가 떠오른다. <배트맨> 시리즈로 큰 사랑을 받았지만 이후 그저 그런 배우가 된 마이클 키튼의 영화 인생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것 같은 영화 <버드맨>과 모든 걸 다 잃고 곁에 남은 단 하나의 소중한 강아지를 괴한들이 들이닥쳐 죽이자 전설의 킬러 본능으로 참혹한 복수의 여정을 떠나는 영화 <존 윅> 말이다. <피그> 속 롭이 <존 윅>의 '존 윅'이라면, <피그> 밖 니콜라스 케이지는 <버드맨>의 마이클 키튼이다. 

 

하지만 <피그>는 두 영화의 스타일을 따르지 않는다. 의도적으로까지 보일 정도로 정반대에 가깝다. <버드맨>처럼 다양한 인간군상을 버라이어티하게 늘여놓지 않고 '롭' 또는 '로빈 펠드'라는 한 인물에 천착한다. <존 윅>처럼 처절한 복수의 여정을 떠나는 게 아니라 심오한 위로의 여정을 떠난다. 실로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롭이, '이제는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었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사람들에게 의미를 선사하려 하는 것이다. 

 

니콜라스 케이지만이 자신의 경험을 충분히 녹여내 모든 걸 담고 있는 듯하지만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눈으로 진심 어린 조언과 위로를 건넬 수 있었다. 예전의 자신처럼 진짜가 아닌 가짜로 살고 있는 셰프 데릭을 만나 신랄하게 현실을 깨닫게 하고, 지금의 자신처럼 상실의 슬픔을 (다른 방식으로) 억누르며 살고 있는 아미르의 아빠 다리우스를 만나 음식으로 행복했던 기억(이젠 슬픔으로 남은)을 떠올리게 한다. 돼지를 찾는 여정에서 사람들을 만나 조언과 위로를 전하는 롭의 모습에 덩달아 힐링되는 기분이다. 

 

무엇이 진짜이고 진정으로 소중한 것인지

 

롭의 전하는 조언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진정으로 소중한 건 쉽게 얻을 수 없어"일 것이다. 그는 아마도 15년 전 포클랜드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해마지 않는 레스토랑의 운영자이자 포클랜드의 모든 셰프들이 선망해마지 않는 셰프 중의 셰프였을 테다. 하지만 크나큰 상실,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을 목도하고 나니 모든 게 가짜에 불과했다는 걸 깨달았을 테다. 진정으로 소중한 게 뭔지도 몰랐을 테다. 

 

지금 그는 나름의 해답을 찾아 숲속에서 지내고 있고 진정으로 소중한 것(돼지)과 함께 있다. 영화에서도 몇 차례나 나오듯 돼지 한마리 새로 마련하면 되는 게 아닌가 싶겠지만, 진정으로 소중한 건 결코 쉽게 얻을 수 없는 만큼 돼지를 얻는 것도 어려웠을 테고 어렵게 얻은 돼지가 소중해지는 것도 어려웠을 것이다. 돼지는 돼지이지만, 롭에게는 가짜들의 바다에서 힘겹게 걸어 올린 '진짜'이자 소중한 게 뭔지 몰랐던 인생의 어느 날 얻은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생각하면 막막해지기 일쑤다. 이렇게 하면 저게 걸리고 저렇게 하면 이게 걸린다. 구체성을 띌 만한 게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 <피그>는 '돼지'를 생각하라고 말한다. 무엇이 진짜인지 생각하고 무엇이 진정으로 소중한 것인지 생각하라고 말이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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