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영화 리뷰] <드라이>
호주 멜버른의 고층 아파트, 연방수사관 에런은 뜻밖의 연락을 받고 20여 년 전 떠났던 고향 마을 '키와라'로 향한다. 어린 시절 친구 루크의 장례식이 열린다고 했는데, 그가 아내와 첫째 아이를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했다. 남겨진 루크의 부모는 마을 사람들의 비난을 한몸에 받으면서 루크의 갓난아이를 키우고 있었는데, 에런에게 사건을 좀 들여다봐 줄 것을 말한다. 사건 개입을 꺼려 하는 에런에게 루크의 아빠는 20여 년 전 사건을 들먹인다. 루크도 거짓말을 했고 에런도 거짓말을 했다면서.
안 그래도 고향에 돌아온 에런에게 향하는 마을 사람들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다. 그가 연관되었던 20년 전 사건 때문이었는데, 에런과 루크 그리고 그레첸과 엘리는 단짝 친구로 함께 어울려 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엘리가 강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고, 엘리의 부모님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정황상 에런이 엘리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에런은 어쩔 수 없이 아빠와 함께 키와라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에런은 루크 장례식 후 마을을 천천히 돌아 다니며 수사 아닌 수사를 이어간다. 개중엔 에런을 조롱하고 비난하며 방해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마을 경찰 그렉 래코처럼 선선히 도와주는 이도 있다. 그런 와중에도 에런을 수시로 찾아오는 게 있었으니, 20년 전의 그날들이다. 20년 전 그때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지금, 이 사건의 진상은 무엇일까?
이 영화만의 서스펜스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의 최대 장점이라 한다면 '서스펜스'일 것이다. 사전 정의상 '줄거리의 전개가 관객에게 주는 불안감과 긴박감' 따위 말이다. 서스펜스를 얼마나 적절하게 활용하는지에 따라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의 승패가 갈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게 '반전'인데, 작품 내내 생각지도 못한 전개가 계속 이어져 불안감과 긴박감을 내려놓을 겨를이 없게 하는 것이다.
영화 <드라이>는 서스펜스의 강도가 굉장히 약한 편이다. 반전에 반전이 거듭되며 미스터리 서사를 쌓아 올리는 게 아니라,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사건의 전말을 가늠조차 하지 못하는 데에서 서사가 쌓아 올려진다. 천천히, 조금씩, 묵직하게 진행되는 바 '키와라'라는 마을의 변한 배경이 큰 몫을 차지한다. 수목이 풍부했던 20년 전과 확연히 비교되는 현재의 황폐함 말이다.
왠만한 환경이라면 인간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않을 테지만, 거의 1년 동안 비가 오지 않는 상황에서 70%가 가뭄에 시달리고 산불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최악의 환경이라면 인간에게 크나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키와라 마을은 믿을 수 없는 살인 사건 이전에 이미 밑도 끝도 없는 절망과 맞닿아 있다. 칙칙하던가 끈적하던가 짜증나던가 하는 분위기가 아닌, 건들기만 해도 바스라질 것 같은 위태로운 메마름이 마을을 지배하고 있다.
진실과 거짓, 현재와 과거, 범인과 용의자
<드라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측면은 참으로 여러가지다. 진실과 거짓, 현재와 과거, 범인과 용의자, 그리고 환경까지. 어느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주제를 가져올 수 있을 만큼 큰 소재들인데, 모든 걸 엮어 내면서도 어김이 없고 과함이 없다. 연출의 힘일까, 연기의 힘일까, 원작의 힘일까. 삼박자가 조화로웠다고 하는 게 정답인 듯하다.
옳고 그름과 결이 달리하는 진실과 거짓의 소용돌이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펼쳐진다. 그 연결고리가 에런일 텐데, 과거 사건의 핵심인 엘리와 루크는 죽었고 그레첸은 잘 모르는 눈치다. 하지만 에런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속 시원하게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사건의 실마리를 풀고자 동분서주 뛰어 다녀야 한다. 바로 그 점이 이 영화의 미스터리 핵심 중 하나다. 주인공의 아이러니.
그럼에도 에런은 범인을 색출해야 한다. 그의 과거를 알고 있는 듯한 루크의 아버지가 협박처럼 그에게 현재 사건의 진실을 요청했으니 말이다. 마을 경찰과 함께 따로 또 같이 마을을 돌며 수사를 이어간다. 몇몇 용의자를 특정해 강한 의심까지 해 보지만, 전혀 알 수가 없다. 어느새 관객도 수사에 참여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할 만한 '환경'이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을 형성한다. 영화 극초반 에런이 키와라로 향하는 길의 황량한 모습과 더불어 라디오에서 나오는 말이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절망적으로 메마른 상황에 처했다는 걸 말이다. 절망이 기본값인 상황, 일가족 살인사건이라는 또 하나의 절망, 과거의 절망을 상기시키는 에런의 등장.
환경 그리고 성미
영화의 배경이 되는 가상 마을 키와라는 단순히 가뭄이 심하다는 정도에 그칠 만한 상태가 아닌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에런이 마을 곳곳을 다니며 옛 생각을 하는데 불과 20년 전에 숲과 초지가 풍성했던 곳이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은 황무지가 되었고 강이었던 곳이 이젠 동식물조차 살지 못하는 곳으로 변해 버렸으니 말이다. 자연적 요인이든 인위적 요인이든, 사막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영화에서 심각한 환경 변화를 중요한 듯 다루고 있진 않다. 이미 기본값으로 내정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메마르고 예민하고 절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걸 넘어, 진실을 감추는 데 습관이 되어 버렸다. 진실을 덮지 않고 파헤치려 하면 할수록, 건조한 산림에 산불이 순식간에 붙어 타오르듯 메마르고 예민한 성미가 한꺼번에 터져 나올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드라이>는 예리하게 전한다. 메마르고 건조한 환경이 메마르고 건조한 성미를 조성하고 오래 지속되면 남는 것 없이 싹 다 없어져 버릴 수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사막화는 자연적 요인보다 인위적 요인이 훨씬 많이 차지한다. 즉, 인간이 이 재난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에런이 과거의 진실을 말하고 현재의 진실을 밝히면 본인의 삶과 마을의 분위기를 돌려놓을 수 있듯이 말이다. 여러모로 근래 보기 드물게 탄탄한 수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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