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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왕가위와 박찬욱을 연상시키는 감각적 중국 영화의 현재 <열대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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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열대왕사>

 

영화 <열대왕사> 포스터. ⓒ싸이더스

 

1997년 중국, 열대야가 극심한 어느 여름 밤에 에어컨 수리기사 왕쉐밍은 여자친구를 만나러 차를 몰고 가던 도중 누군가를 친다. 이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도망가 버린다. 그러곤 다시 와서 시신을 유기하는데, 잠도 못 잘 정도로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경찰서에 가서 자수하기로 한다. 하지만 겁에 질려 자수하지 못하고 돌아선다. 

 

대신 왕쉐밍은 그가 차로 치어 죽인 이의 아내 후이팡에게 사실을 이실직고하는 걸 선택한다. 우연히 후이팡이 남편의 실종 전단지를 붙이는 걸 봤었고 그녀의 집이 어디인지 알아 놨던 것이다. 하지만 왕쉐밍은 그마저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후이팡의 주위를 서성일 뿐이다. 에어컨 실외기 냉매를 빼서 찬바람이 안 나오게 하고, 남편 빛으로 협박하러 온 남자들과 싸우기도 했으며, 후이팡이 죽은 아들의 묘지를 찾을 때 차로 태워 주기도 한다.

 

그렇게 왕쉐밍과 후이팡은 미묘하게 가까워진다. 후이팡은 아들의 죽음으로 남편을 원망했고 남편이 죽었는데 오히려 후련하기도 하다고 말하고, 왕쉐밍은 남편을 친 게 본인이라고 말한다. 왕쉐밍은 본인의 뺑소니 말고도 후이팡의 죽은 남편이 또 다른 사건에 엮여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정체불명의 킬러에게 쫓기게 되는데... 

 

스타일 압권

 

중국산 미스터리 스릴러 <열대왕사>는 '열대야에 있었던 지난 일'이라는 단순한 의미의 제목을 지니고 있다. 영화의 스토리상 정확한 의미다. 하지만, 한 꺼풀만 벗겨 보면 전혀 단순하지 않다. '열대야에 있었던 뺑소니'가 중심을 이루고 있으니 말이다. 더해 뺑소니 직전에 있었던 또 다른 일이 얽히고 설키니 점입가경이다. 

 

영화는 샤이페이 웬 감독의 장편 영화 연출 데뷔작이다. 스토리로만 보면 별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스타일이 압권이다. 빨강과 초록이 중심을 이루고 검정과 노랑이 뒤를 받치는 색감 미장센이 미묘한 분위기를 생성시킨다. 자연스레 왕가위 감독이 생각난다. 데뷔작으로서의 단점과 장점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지점이라 하겠다. 

 

제74회 칸영화제, 제46회 토론토국제영화제,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등 전 세계 유수 영화제에 초청되어 화제를 뿌렸다. 신인 감독의 패기에 언제나 역할에 충실한 배우 펑위엔의 우수와 고뇌에 찬 연기와 대만의 대표 배우 실비아 창의 미묘한 매력이 더해져 좋은 결과를 낳은 듯하다. 점점 천편일률적으로 가는 중국 영화계에 새로운 자리를 구축할 것으로 보인다. 

 

죄책감, 속죄와 구원

 

<열대왕사>의 영어 제목은 'Are You Lonesome Tonight?(오늘 밤 당신은 외로운가요?)'이다. 그 유명한 엘비스 프레슬리가 1960년에 부른 동명 노래 제목이기도 하다. 후렴구가 이 영화의 스토리 라인과 일맥상통하는데, '당신 마음이 고통으로 먹먹하니, 내가 돌아갈까요?'라는 부분이다. 왕쉐밍은 엉겹결에 돌이키기 힘든 선택을 저지르고 죄책감으로 고통스러워하니 말이다. 

 

왕쉐밍은 당장에 죗값을 받는 대신 속죄를 택하고 더해 그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죄책감에서 해방되어 마음의 자유를 얻는 구원인 바, 다분히 영화적인 설정이라 하겠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혼란에서 죄책감 어린 고독을 지나 세상과의 단절에서 오는 외로움의 감정이 떠오른 후 속죄하기로 마음 먹고 구원에의 길을 간다. 그는 단지 스스로를 구원하려 했지만 그 끝엔 가해자인 그가 피해를 준 이의 아내의 구원도 기다리고 있었다. 

 

영화는 키워드들이 나열되는 것 같은 인물의 심리적 변화가 중심을 이루는 한편 단조롭기 짝이 없을 수 있는 스토리를 과감한 편집으로 커버하려 했다. 자못 불친절하다고 생각할 때쯤 플래시백으로 매우 친절하게 그동안의 일을 보여 주는 식이다. 퍼즐 놀이를 할 때 퍼즐을 맞추기 전까지의 답답함이 퍼즐을 맞출 때 한 번에 해소되는 느낌과 비슷한 감정을 도출한다. 

 

감각적인 영화

 

미장센은 왕가위 감독을 연상시키지만, 스토리와 주제의식과 미장센을 총체적으로 엮은 부분은 박찬욱 감독을 연상시킨다. 냉혹한 감정과 잔혹한 표현 그리고 인간의 본성과 죄의식이 서사를 이끄는 만큼, 스토리 또는 주제로서의 서사가 영화 전체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 호불호가 꽤 극명하게 갈릴 텐데 자신만의 세계를 견고하게 구축하는 건 분명하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후반부의 힘이다. 죄, 죄책감, 속죄, 구원 등의 다분히 영화적인 주제의식들을 후반부까지 힘 있게 끌고 가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주제의식들은 초중반까지 영화를 이끄는 주체였지만 후반부 들어서 갑자기 사라지고 그 자리를 스릴러로서의 장르적 움직임이 대신한다. 물론 그것으로도 충분할 수 있겠지만 그 때문에 영화가 이도저도 아닌 것 같기도 했고 하나의 영화 속에 두 개의 영화가 들어가 있는 느낌을 주기도 했다. 이조차 신인 감독의 패기에서 발현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 영화를 둘러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종합해 보면, '감각적'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렇다, <열대왕사>에는 감각을 자극하는 것들이 무수하다. 영화를 영화적으로 감상하고 즐기는 데 무리함이 없다. 호불호와 별개로 누구나 '볼 만하네'라는 말이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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