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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인생 최악의 날이 전성기의 순간일 수 있으니...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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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봄날>

 

영화 <봄날> 포스터. ⓒ콘텐츠판다

 

어느 장례식장, 가족이 모였다. 8년 만에 출소한 큰아들 호성, 공인중개사로 일하는 작은아들 종성, 몸을 좋지 않은 엄마 정님, 그리고 오랜만에 보는 호성의 큰딸 은옥과 작은아들 동혁까지. 호성은 조직의 큰형님이기도 한데, 조직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감옥에 가서 8년 만에 돌아와 보니 설 자리가 없어졌다.

 

조직에서는 2인자가 1인자 자리를 꿰찬 것 같고, 가족에서는 동생 종성이나 큰딸 은옥이나 작은아들 동혁이나 다 호성을 별 볼 일 없는 존재이자 꼴보기 싫은 존재이자 꿔다 놓은 보릿자루같은 존재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도 엄마 정님은 호성을 여전히 어린아이 취급하며 걱정한다. 그런 와중에 은옥이 남편 될 사람을 소개시켜 주는데, 호성으로선 딸에게 해 줄 게 없으니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을 꾸민다.

 

장례식장 한 켠에 자리를 마련해 조직원들로 하여금 도박을 하게 하고 아버지 장례식에 들어온 부조금을 빌려 주는 돈 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물론 가족들은 학을 띠며 싫어 했지만 호성으로선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고 장사도 짭짤하게 잘 되는가 싶었다. 그때, 술에 잔뜩 취한 호성의 고향 친구 양희가 도박판에 가선 시비를 걸기 시작한다. 하필 그곳엔 세력 싸움이 한창인 두 세력이 같이 있었고, 양희의 시비가 그들의 역린을 건드리고 만다. 결국 도박판이 싸움판으로 번져 가는데...

 

이돈구 감독의 작품

 

장례식에는 온갖 사람이 오기 마련이다. 결혼식이나 돌잔치 같은 좋은 일에는 몰라도 장례식 같은 좋지 못한 일에는 얼굴을 비추는 게 인지상정인지라 별의별 사람이 찾아오니 말이다. '인간군상'을 소재이자 주제로 하는 영화라면, 장례식장을 적절한 배경으로 써도 좋지 않을까 싶다. 다만, 너무 무거우면 영화적 재미가 없고 너무 가벼우면 장례식의 느낌이 살지 않기에 굉장히 어려운 작업일 것이다. 박철수 감독의 1996년작 <학생부군신위>가 대표적으로 아주 잘 만든 장례식 영화다. 참고로 장르는 코미디. 

 

영화 <봄날>도 장례식장이 주 배경으로 코미디적 느낌이 아주 살짝 가미된 드라마 장르다. 이돈구 감독의 네 번째 작품으로, 2013년작 <가시꽃>과 2014년작 <현기증>이 끔찍이도 파괴적인 일을 겪은 이들의 흔들리는 이야기를 그렸다면 2020년작 <팡파레>로 한정된 공간에서 인간군상이 펼치는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그렸다. <봄날>은 정확히 <팡파레>의 연장선상이라 하겠다.

 

개인적으로 이돈구 감독의 작품을 빠짐 없이 전부 보고 나름의 평을 내렸었는데, 데뷔작 <가시꽃>이 가장 충격적인 작품이었다면 이번의 <봄날>은 가장 재밌는 작품으로 남지 않을까 싶다. <팡파레>처럼 주요 등장인물 몇몇이 전부 골고루 주인공급 활약을 펼치는 것 다르게 손현주 배우가 분한 '호성'이 거의 홀로 극을 이끌어 나가는 바, 집중된 스토리와 분위기와 재미가 압권이었다. 

 

장례식장 이야기

 

한정된 곳, 한정된 수의 인물, 한정된 스토리 내라면 '연극'의 개념이 떠오른다. 영화 기법들이 망라된 대신 정직한 씬 하나하나에 인물에 포커스를 맞춰 연기를 승부를 보는 타입이다. 호성 역의 손현주, 종성 역의 박혁권, 양희 역의 정석용, 정님 역의 손숙, 철배 역의 이지훈 등이 더할 나위 없었다. '안정'을 기본으로 따로 또 같이 영화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불어 넣었다. 

 

호성이 원샷으로 나올 때보다 다른 누군가 한두 명이 함께 나오는 투샷, 쓰리샷이 훨씬 더 감상하기 좋았는데, 등장인물들의 '합'이야말로 연기의 꽃이자 영화의 꽃이기도 하는 만큼 <봄날>에서 가장 볼 만한 장면들이다. 정작 특별할 것 없는 소소한 것들, 장례식장에서 한 번쯤 보고 경험해 봤음직한 것들이 희노애락의 포인트가 된다. 

 

영화는 전달하려 하지 않는다, 의미부여에 힘 쓰지 않는다. 자연스럽지만 마냥 자연스럽지만은 않은 느낌이다. 누구나의 장례식장에서 있을 법하지는 않겠지만 누군가의 장례식장에서는 있었을 법한 이야기를 그저 보여 주려 했다. 누군가는 재밌게 봤을 테고, 누군가는 힘겹게 봤을 테며, 누군가는 별 탈 없이 봤을 것이다.

 

진짜 인생, 따라 하는 인생

 

진짜보다 더 진짜같을 때 '하이퍼리얼리즘'이라는 말을 쓴다. 영화 <봄날>을 보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말이다. 저런 장례식장, 저런 분위기, 저런 사람들이 그대로 현실에 존재할 것 같다. 그런데, 하이퍼리얼리즘 즉 '극사실주의'라는 예술 사조의 본래 목적은 진짜를 더 진짜처럼 묘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아무리 진짜처럼 또는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묘사해도 진짜가 아닌 묘사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데 있다고 한다. 

 

인생이 딱 그런 것 같다. 어떨 때는 '진짜' 인생을 사는 것 같다가도 어떨 때는 진짜 인생을 '따라 하고' 있을 뿐이라는 느낌이 든다. <봄날>의 호성은 과거 한때 잘 나갔을 때는 진짜 인생을 사는 것 같았겠지만, 8년 동안이나 감옥에 있다가 나와서는 진짜 인생 따윈 온 데 간 데 없고 과거의 인생을 따라 하고 있을 뿐인 자신을 발견한다. 하지만, 그러는 지금의 최악같은 인생의 순간이야말로 그의 인생 전체에서 또 다른 전성기일지 모른다. 또 다른 진짜 인생 말이다. 

 

영화는 아버지 장례식이라는 배경과 소재로 개성 있는 인간군상을 보여 주는 한편 호성 인생의 최악(이라고 생각하는)의 나날을 그렸다. 하지만 동시에 최악일 수 없고 최악일 리 없는 나날을 그렸다. 그는 과거 제1의 전성기 때도 조직원들을 살리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고 지금 제2의 전성기 때도 큰딸을 위해 장례식장에서 도박판을 열었다. 그 본질에 가 닿으면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는 그의 진가가 보이지 않을까. 그리고 누구나의 인생도 조금은 위로받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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