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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혈중알코올농도와 중년 위기의 상관 관계 <어나더 라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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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어나더 라운드>

 

영화 <어나더 라운드> 포스터. ⓒ엣나인필름

 

덴마크 코펜하겐의 어느 고등학교, 학생들이 과도하게 술을 마신다며 교장이 금주를 예고하는 가운데 네 중년 남성 교사들이 무덤덤하게 수업을 이어간다. 각각 역사 교사 마틴, 체육 교사 토미, 심리 교사 니콜라이, 음악 교사 피터인데 그들은 친구 사이다. 특히 마틴의 경우 학부모들한테조차 신임을 얻지 못하고 가족들과도 육체적·심리적으로 멀어진 지 오래다. 그런 와중, 니콜라이의 40살 생일을 축하하고자 한자리에 모여 술을 마신다.  

 

니콜라이가 힘들어 하는 마틴을 위해서인지 심리 교사로서의 지식을 뽐내기 위해서인지 술자리라서인지 모르겠지만, 노르웨이 정신과 의사 핀 스콜데루드의 가설을 인용해 음주가 현명하다고 말한다. 그러며, 혈중알코올농도가 0.05%로 유지되면 더 느긋해지고 침착해지며 음악적이고 개방적으로 변한다는 것이었다. 새벽까지 함께 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네 친구, 다음 날 마틴은 니콜라이의 말에 관심을 가지고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보드카를 들이킨다. 하지만, 결과는 언어 기능에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는 것. 

 

그날 다시 모인 네 친구는 스콜데루드의 가설을 본격적으로 실험하고자 보고서를 작성한다. 수행 능력 증진을 확인하는 게 목적이고, 매일 술을 마셔 혈중알코올농도 0.05%를 유지하며, 헤밍웨이처럼 저녁 8시 이후와 주말에는 금주한다. 실험 결과, 확연한 변화가 일어난다. 마틴은 가정과 학교생활 양면에서 대담해지고 자신감이 넘치며 열정적이 되고, 토미와 피터도 마찬가지였다. 실험에 힘이 붙으니 니콜라이는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자고 제안한다. 혈중알코올농도를 개인에 맞게 바꿔 보자는 것이었다. 과연 이 실험의 끝은...?

 

토마스 빈터베르와 매즈 미켈슨

 

우리나라 사람들이 술을 참 좋아한다고 하지만, 덴마크에 비할 바는 아닐 것 같다. 여타 북유럽 국가들인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처럼 술 판매 시간을 엄격하게 제한하기는커녕 원할 때 언제든 술을 사서 마실 수 있고 취하든 말든 지극한 개인의 자유라고 여긴다. 도수가 높지 않은 웬만한 술은 만 16세부터 구입이 가능하고 마시는 데는 나이 제한이 없다고 한다. 

 

<어나더 라운드>는 다름 아닌 덴마크 산 영화로 공교롭게 술이 메인 소재이다. '폭음'이라는 뜻의 원제 'druk'만 봐도 알 수 있고, '한 잔 더'라는 뜻의 영어 제목 'another round'만 봐도 알 수 있으며, 술 광고의 한 장면 같은 포스터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누가 연출했는지 알면 영화가 단순하지만은 않겠구나 할 것이다. 라스 폰 트리에와 더불어 현대 덴마크 영화를 대표하는 토마스 빈터베르 감독의 최신작이다. 니콜라스 빈딩 레픈, 수사네 비르, 로네 셰르피같은 유명 감독도 있지만 앞의 두 대표 감독에 비할 바는 아닐 테다. 

 

토마스 빈터베르라고 하면, 라스 폰 트리에 등과 함께 <도그마 95>라는 한 번쯤 들어봤음직 하지만 누구도 자세히 알지 못할 '영화의 순수성 회복' 선언이자 운동을 최초로 주창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한때의 치기 어리고 제대로 갈무리되지 않은 선언이었을지 모르지만, 라스 폰 트리에와 토마스 빈터베르는 지금도 여전히 전 세계적으로 신망 어린 작품을 만들어 내고 있다. 

 

덴마크 영화계를 대표하는 인물이 한 명 더 있는데, '매즈 미켈슨'이 그다. 덴마크 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과 배우가 함께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듯, 토마스 빈터베르와 매즈 미켈슨은 2012년 <더 헌트>로 함께했고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8년 후 다시 의기투합해 <어나더 라운드>를 내놓았고 2년 후 한국에 상륙한 것이다. 미국·영국 아카데미에서 각각 국제장편영화상과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고 이밖에도 전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외국어영화상과 작품상, 감독상을 휩쓸었다. 

 

혈중알코올농도에 관한 보고서

 

술에 관한 또는 혈중알코올농도에 관한 보고서 같은 외면의 느낌을 띄는 영화는, 그러나 엄연히 술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영화에서 술에 관한 가설을 직접 실험하는 네 중년 남성들의 이야기이자 '중년 위기'의 이야기이다. 먼저, 네 친구가 왜 술 실험을 하게 되었는지 또는 할 수밖에 없었는지 보면 알 수 있다. 그들 모두 각자 삶의 영역에서 이유가 어떻든 하염없이 힘들었다. 

 

그냥 힘든 것도 아니고 예전보다 힘들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당연히 왜 그러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나름대로 자구책을 찾게 된 게 '술'이었던 것이다. 술을 적당량 마시니 전에 없던 자신감이 붙고 자못 대담해졌다. 중년 들어 사라졌다고 생각한 혹은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 '열정'이 다시 샘솟는 듯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교사로서 매일같이 대하는 학생들이 알아챘고, 마틴의 경우 오랫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감정의 골이 한순간에 좁혀진 걸 가족들이 알아챘다. 인생 제2막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술이란 게 웬만한 인간이 마음대로 제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인간이 술을 다루고 이기기는 불가능에 가깝지만, 술이 인간을 다루고 이기기는 너무도 쉽다. 네 친구라고 예외일 수 있을까. 술은 술을 부르기 마련이니, 실험에서 그치지 않고 다분히 위기를 술로 타개하려는 의도는 크게 빗나갈 것이었다. 

 

영화는 말하는 것 같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라고 말이다. 적어도, 위기를 타개하려는 의도는 좋으나 술처럼 그 자체로 또 다른 위기를 불러올 수 있는 걸 이용하려 하지 말라고 말이다. 

 

중년 위기를 넘어서

 

그렇다면, '중년 위기'는 어떻게 타개해야 할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을까. 그게 이 영화 <어나더 라운드>의 통찰일까. 영화 종반부, 네 친구는 다름 아닌 술 때문에 학교에서, 가정에서 크게 흔들린다. 술 '덕분에' 힘을 얻었던 영역에서 고스란히 술 '때문에' 곤욕을 치르게 된 것이다. 그들이 다음 스텝으로 선택한 건 각자 다르다.

 

영화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라'라고 말한 다음 말하고 싶은 게 네 친구의 다음 스텝이다. 누구는 특별한 선택을 하지 않고, 누구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 잡으려 하며, 누구는 술을 이용해 누군가한테 도움을 주려 하고, 누구는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돌이킬 수 없는 잘못된 선택을 저지른다. 공통점이라면, 나름의 변화를 통해 더 났다고 생각한 삶의 길을 가려 했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제목을 다시 보면 얼핏 다른 의미가 떠오른다. '또다른 회차', '또다른 기회'라고 읽을 수도 있겠다. '중년 위기'를 넘어선 '인생 위기'에도 접목해 볼 수 있다. 누구나에게 언제든 예고 없이 찾아올지 모를 위기 말이다. 하여, 영화는 단순히 술에 관심 있는 이나 중년에 들어선 남성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나름의 의미로 다가올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