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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그들은 왜 영화 '필름'에 집착했을까 <원 세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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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원 세컨드>

 

영화 &lt;원 세컨드&gt; 포스터. ⓒ영화사 찬란

 

지난 2008 베이징 하계올림픽에서 개·폐회식 총연출을 맡았던 장이머우 감독은 이번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도 ·폐회식 총연출을 맡았다. 14년 전에는 웅장하게 표현했다면 이번에는 섬세하게 표현했다. 중국의 기조가 변했는지 장이머우의 기조가 변했는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올해 개막식에서 중국 내 소수민족의 단결을 강조한 걸 보면 표현 방식만 다를 뿐 중국 우월주의 또는 애국주의로의 길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단단해지고 있는 듯하다. 

 

그런가 하면, 장이머우는 2010년대 들어 '문화대혁명' 시기를 다룬 이야기들을 다수 만들고 있다. <산사나무 아래> <5일의 마중> <원 세컨드> 등이다. 물론, 그 사이사이 <진링의 13소녀> <그레이트 월> <공작조: 현애지상> 같은 애국주의 물씬 풍기는 영화들도 내놓았다. 이 두 집단 영화들의 기조는 다른 듯하지만 같은 곳을 향한다. 바로, 현재의 정부 그리고 현재의 중국 말이다. 

 

시진핑은 중국공산당 제19기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에서 문화대혁명을 '재난'이라고 적시한 2차 역사결의에 변화가 없을 거라고 언급했다. 그도 개인적으로 일찍이 문화대혁명의 직접적 피해자였지만, 그와 별개로 국가적으로도 문화대혁명을 마오쩌둥의 과오로 다시 한번 인정한 것이다. 장어미우도 문화대혁명의 직접적 피해자였거니와 영화를 통해 그때 그 이야기를 계속해서 풀어내고 있는 만큼, 현 정부의 기조와 결을 같이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아울러, 중국 우월주의를 고취시키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 와중에 영화 <원 세컨드>는 또 다른 결을 지니고 있다. 배경은 문화대혁명 시기이지만, 소재는 '영화 필름'이거니와 주제는 '부녀지간'을 통한 '관계'에 가 있다. 장이머우가 이 영화로 말하고 싶었던 건, 문화대혁명 시기의 재현일까 사라져 간 영화 필름의 추억일까 부녀지간의 애정일까. 전부 다일 수도 있겠고, 전부 다 아닐 수도 있을 테다. 

 

영화를 보고 싶은 사람들, 필름이 필요한 이들

 

장주성은 사막을 건너 제2농장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영화를 틀어 주는데, 영화가 시작되기에 앞서 나오는 '중화 뉴스'에 관심이 있는 듯하다. 그는 몰래 필름 배달기사 양허를 뒤쫓는데, 양허가 쉬고 있는 동안 어린 여자애가 필름 하나를 훔쳐 달아난다. 장주성은 그 아이를 뒤쫓아 필름을 되찾는다. 둘은 한동안 서로를 뒤쫓으며 필름을 빼앗고 빼앗긴다. 그들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장주성은 제1농장에서 왔다고 한다. 모두가 손꼽아 기다리는 영화엔 관심 없고 중화 뉴스에 관심을 두는 건, 거기에 딸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필 중화 뉴스 필름을 빼돌리려고 한 어린 여자애 류가녀도 영화엔 관심이 없는데, 남동생이 빌린 필름 전등갓을 태워 먹어 괴롭힘을 당하니 필름을 가져와 전등갓을 만들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화 뉴스 필름이 영사기사 아들의 치명적인 실수로 훼손된다. 자칫 보지 못할 위기에 처한다. 그때 필사적인 장주성이 나서서 필름을 세척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영사기사가 제2농장 사람들 모두에게 말하길, 영화를 보고 싶다면 중화 뉴스를 꼭 봐야 하니 모두 모여서 중화 뉴스 필름을 닦아야 한다고 한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중화 뉴스 필름이 제 모습을 찾아가는데... 장주성은 딸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류가녀는 필름으로 전등갓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제2농장 사람들은 영화를 볼 수 있을까?

 

필름을 향한 헌사

 

물성이 있는 필름으로 영화가 만들어지고 보관되며 틀어지는 시대가 어느새 지나가 버렸다. 영화까지 갈 필요 없이, 필름 없이 고철에 불과했던 카메라가 어느 순간 그 자체로 기능을 온전히 하고 있지 않는가. 이제 영화는 디지털로 만들어지고 보관되며 틀어진다.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에 한데 모이지 않아도 되는 시대이니 필름이 대수랴. 이런 시대에 '필름'이 너무나도 절실한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원 세컨드>가 새롭게 다가온다. 

 

2시간이 채 되지 않은 러닝타임에서, 영화는 초반 20분간을 뭔지도 잘 모를 필름 하나를 두고 장주성과 류가녀가 주로 사막에서 옥신각신 뺏고 뺏기며 벌이는 혈투(?)로 오롯이 채운다. 적어도 여기까지는 필름에 무슨 내용이 들어 있는지 중요하지 않고, 필름 자체가 중요해 보인다. 둘은 나름의 이유로 반드시 필름을 가져 가야 하는 것 같다. 필름의 필요성과 존재성이 희미해지다 못해 사라져 버린 지금의 우리에겐 너무나 하찮아 보이지만, 그때 그 시절의 입장과 모습을 100% 보여 주는 것 같다. 

 

필름이 영사기사의 손에 옮겨지니 필름의 존재는 훨씬 더 부각된다. 제2농장 모두의 염원, 두 달 동안 기다린 영화를 보고야 말겠다는 강렬한 염원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볼 것들과 볼 방법들이 넘쳐 나는 지금도 영화에 열광하는데, 수십 년 전 사막 건너 시골에서 영화에 열광하는 수준은 어떠 했겠는가. <원 세컨드>는 20분의 시간을 들여 필름을 이동시켜 세척하고 증류수로 닦아 내고 말리고 감는 작업을 오롯이 보여 준다. 이보다 더 필름이 극진한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영화가 생긴 이래 절대적인 역할을 해 온 필름을 향한 헌사로도 읽힌다. 필름 덕분에 영화를 봤고 영화 덕분에 문화생활을 할 수 있었으며 문화생활 덕분에 팍팍한 삶을 위로할 수 있었다. 인류가 더 나은 방향으로 향하는 데 큰 공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점점 더 퇴색되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필름의, 필름을 위한, 필름에 의한 이야기를 남겨 두고자 했던 게 아닌가 싶다. 

 

1초의 영원성으로 나아가기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힘을 모아 필름을 되살려 함께 영화를 보니 <영웅아녀>라는 작품이다. 한국전쟁 때 중공군의 활약을 그린 선전영화, 문화대혁명 시절의 대표적 베스트셀러라고 할 만하다. 제2농장 모두가 열광하니, 작품이 <영웅아녀>라서가 아니라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 대한 열광이다. 지금 우리가 영화를 대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그런데, 장주성과 류가녀는 <영웅아녀>에 아무런 관심도 감흥도 없다. 장주성은 중화 뉴스에 나오는 딸에게만 관심이 있고, 류가녀는 뭐든 좋으니 필름만 있으면 된다. 

 

알고 보니, 류가녀 남매에겐 부모가 없다. 아빠는 다른 살림을 차려 아이들을 버렸고 엄마는 아이들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장주성이 모종의 이유로 딸을 스크린으로나마 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류가녀는 아빠가 엄연히 살아 있지만 볼 수가 없다. 동병상련에서 빚어지는 아이러니한 관계가 장주성과 류가녀 사이에서 펼쳐진다. 반목했던 그들은 점점 서로를 이해하고 또 챙긴다. 

 

필름이라는 소유성 강한 물질은 언젠가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이다. 사라지지 않더라도 퇴색되거니와 완전하지 못할 테다. 그러니 단 1초라도 직접 보고 머리와 가슴에 간직해 영원성을 담보하는 게 어떨까. <원 세컨드>가 궁극적으로 전하고 또 남기고 싶은 건 필름을 향한 추억과 더불어 필름의 불필요성이 아닐까. 필름으로 상징되는 아날로그의 앞날이 디지털인 것처럼, 필름으로 상징되는 소유성의 앞날은 영원성이지 않을까.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대신해 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