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영화 리뷰] <마이 뉴욕 다이어리>
1995년 가을, 버클리에서 학교를 다니는 작가지망생 조안나는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글을 쓰기 위해 뉴욕에 입성한다. 런던 UCL에서 영문학 석사를 따고 <파리 리뷰>에서 시로 등당한 수재이자 작가로 몇몇 출판사는 좋아할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출판사는 반기지 않을 터였다. 결국 그녀는 출판사가 아닌 작가 에이전시에 지원한다. 출판사나 작가 에이전시나 비슷할 거라 생각한 것이다.
뉴욕에서 가장 오래된 작가 에이전시 'A&F 에이전시'에 CEO 마가렛의 조수로 입사한 조안나, 이런저런 잡일을 맡는다. 와중에 아주 중요한 듯 또는 경우에 따라 아주 하찮은 듯한 일이 맡겨지는데, 출간한 지 수십 년이 지난 <호밀밭의 파수꾼>의 제리 샐린저(J. D. 샐린저)에게 쏟아지는 팬레터에게 일괄적인 답변을 보내는 것이었다. 작가님은 편지를 받지 않으니 전해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답변.
조금씩 지쳐 가는 조안나,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 몰래 제리에게 오는 팬레터를 읽어 보는 게 유일한 낙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제리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퇴근하는 마가렛에게 달려가서 전화를 바꿔 주고 난 후, 새로운 소식이 전해진다. 그가 30년 만에 책을 낸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30년 전에 <뉴요커>에 실렸던 소설을 말이다, 유력 출판사가 아닌 버지니아의 1인 출판사에서 출간한다고. 조안나는 팬레터가 계속 신경 쓰인다.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마는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연상된다
영화 <마이 뉴욕 다이어리>의 원제는 <마이 샐린저 이어>(My Salinger Year)다. 뉴욕에서 가장 오래된 작가 에이전시 '해럴드 오버'에서 1년간 일했던 조안나 래코프가 그 경험을 바탕으로 쓴 동명의 베스트셀러 회고록이 원작이다. 제리 샐린저 그리고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거대한 작가와 책이 작품의 중심에 있지만,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얘기는 뉴욕 청춘의 불안정한 삶이다.
캐나다 출신의 필리프 팔라도 감독은 10여 년 전 <라자르 선생님>으로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에도 오른 적이 있는 실력파로, 만드는 작품마다 깊은 울림을 건네 왔다. 은은하고 서정적이며 강렬하지 않게 강렬하다. 그동안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 다양한 작품이 초청되어 소개되었는데 <마이 뉴욕 다이어리>는 제70회 베를린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어 2020년 초에 소개된 바 있다.
냉철하고 가혹한 면이 있는 세련된 여성 상사와 그녀의 비서로 일하게 된 촌스러운 사회 초년생, 어디서 본 듯한 조합이 아닌가? 최고의 패션 매거진 '런웨이'에서 편집장 미란다와 비서 앤드리아가 마주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생각난다. 다른 게 있다면, <마이 뉴욕 다이어리>가 보다 진중하고 잔잔하며 서정적이다. 두 작품을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을 테다. 패션계와 문학계의 차이 아닌 차이 그리고 공통점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샐린저 그리고 <호밀밭의 파수꾼>
<호밀밭의 파수꾼>은 자그마치 1951년에 출간했으니, 2021년 기준으로 60년이 된 작품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매년 수십 만 권이 팔리고, 현재 7000만 권 이상 팔렸다고 하니 언젠가 1억 부 클럽에 입상할 게 분명하다. 개인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작품인데, 이 소설이 내 삶에 끼친 영향력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도 많은 이가 다양한 이유로 제리에게 팬레터를 보내니, 그들도 <호밀밭의 파수꾼>에게서 큰 영향을 받은 게 분명하다.
조안나가 힘들어 했던 건 사회초년생 그리고 작가지망생으로서의 삶이 아니었다. 그보다 제리 샐린저에게 보내는 팬레터를 처리하는 일이 직접적으로 다가왔다. 팬들의 절실한 마음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전달되니 말이다. 조안나 자신도 누구보다 절실했기에 공감이 간 게 아닌가 싶다. 현실은 상사의 전화를 대신 받고 작가들을 안내하고 음료를 대접하지만, 작가라는 꿈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런가 하면, 조안나의 배려심 또는 오지랖이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고 좌절감만 주기도 한다. 팬레터에 답장을 써 주고 싶은 마음이 발동한 것인데, 그녀는 제리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작가지망생으로서 아니 작가로서 사람을 향한 배려심과 세상을 향한 오지랖은 필수요소다. 비록 그녀에게 돌아온 건 표면적으로 질책뿐이었지만 내면적으로 큰 깨달음이었을 테다.
'뉴욕'의 여의치 않은 청춘
뉴욕의 청춘은 항상 여의치 않은 것 같다. <틱, 틱... 붐!>의 존이 그렇고 <프란시스 하>의 프란시스가 그렇다. 이번엔 <마이 뉴욕 다이어리>의 조안나가 그렇다. 원제와 완전히 다르게 한국어 제목에 '뉴욕'이 들어간 건 우리나라 관객을 향한 셀링 포인트가 샐린저보단 뉴욕에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텐데, 영화의 메시지를 더 잘 담아 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왜 뉴욕의 '청춘'이 아니라 '뉴욕'의 청춘인 걸까. 이를테면, 다른 나라의 청춘 영화를 보면 수도가 아닌 지방 이야기일 때 지명을 붙이지만 배경이 수도일 때면 굳이 지명을 붙이지 않는다. 물론 뉴욕이 미국의 수도는 아니지만 명색이 '세계의 수도'라는 거대한 별칭이 붙어 있지 않은가. 그건, 뉴욕이라는 도시의 특별함 때문이 아닐까 싶다.
도시가 성공의 다리 역할을 하는 건 어느 곳이나 매한가지겠지만, 뉴욕은 경제·문화·패션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사실상 거의 모든 것의 중심인 것이다. 청춘에게 있어서, 가고 싶은 곳이자 가야 하는 곳이고 가야 할 것 같은 곳이며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곳이다. 청춘이 뉴욕으로 향하는 게 아니라 뉴욕이 청춘을 빨아들이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니 뉴욕의 청춘은 힘들다.
<마이 뉴욕 다이어리>도 샐린저 이야기를 걷어 내면 오롯이 청춘의 이야기이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흔들리며 나아갈 수밖에 없는 청춘. 그런 와중에도 샐린저 이야기를 걷어 낼 수 없는 건, 조안나가 샐린저에게서 그리고 샐린저에게 보내는 팬레터에서 많은 걸 얻기 때문이다. 도전하고 실패해도 너무 좌절하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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