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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도서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전원 옥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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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도서 리뷰] <전원 옥쇄하라!>

 

책 <전원 옥쇄하라!> 표지. ⓒ에이케이 커뮤니케이션즈

 

지난 8월 10일, 광복절 즈음에 맞춰 오래된 일본 만화책 한 권이 국내 최초로 정식 번역 출간되었다. <전원 옥쇄하라!>(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라는 얼핏 들으면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를 제목이지만, 지은이가 미즈키 시게루이다. <게게로의 기타로>라는 일본 요괴만화의 시작이자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작품을 만든 장본인으로, 데즈카 오사무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예술가 말이다.

 

더욱이 <전원 옥쇄하라!>는 제2차 세계대전에 관한 작품으로 작가 본인이 직접 참전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 내놓은 것이었다. 즉, 일본 작가가 일본인의 입장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단면을 그려 낸 작품이었다. 우리나라 입장에선 일제 강점기가 시대적 배경이니 만큼, 작품이나 작가의 의도가 어떻든 긍정적으로 대하기가 어렵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광복절에 맞춘 듯 소개된 데에는 확고한 이유가 있을 테다. 아니, 있어야 맞다. 작가는 도대체 어떤 경험을 했고 그 경험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전해 주려 한 걸까.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제목의 '옥쇄'가 뭔지 간략히 알아 보자면, 책에서는 '자살특공'이라고 표현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살특공을 종용한 일본군 입장에선 '천황을 위한 숭고한 죽음'을 뜻했으며 문자를 그대로 직역하면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진다'는 뜻이다. 굉장히 민감한 단어인 것이다.

 

전원 옥쇄하라

 

때는 1943년 말, 장소는 서남태평양의 뉴브리튼섬 코코포,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바이엔 지대 500명은 바이엔을 손쉽게 점령한다. 선임병들에게 상시적으로 갈굼과 폭행을 당하는 초임병들, 적군 하나 없는 낙원 같은 바이엔에서 황당하게 하나둘 죽어 나간다. 뎅기열에 걸리고, 벌목한 나무를 옮기다가 골절상을 당하고, 물고기를 잡으며 입으로 물었다가 질직사하고, 물에 빠져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어느 날, 대공 감시 중 미군 전투기가 출몰한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몇몇이 죽임을 당한다. 다음 날, 적이 있다고 예상되는 곳으로 갔다가 누군가가 죽임을 당한다. 정월 휴무일을 즐긴 다음 날, 몇몇 병사가 바다를 감시하는 적의 어뢰정에 노출되기도 하고 폭격기에 노출되기도 한다. 적의 공습이 머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게 되었다.

 

오래지 않아 미군 폭격기가 기지를 공습하고 수송선단이 바이엔에 상륙한다는 정보를 듣고 방어책을 구상한다. 하지만 속절없이 무너지고 마는 바이엔 지대, 중대장은 일단 후퇴 후 게릴라전으로 버텨 보자는 의견을 내지만 지대장은 돌격 부대를 편성해 적의 교두보를 기습하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거니와 본진마저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지대장은 전원 옥쇄할 것을 명령하는데...

 

이 만화의 생명력

 

자그마치 1973년에 출간되어 2011년에 영문판으로도 출간되었고 2021년에 이르러 한국어판으로도 출간된 <전원 옥쇄하라!>, 이 작품의 권위는 작가 미즈키 시게루로도 충분하지만 2009년에 만화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아이스너상 최우수 북미판 국제작품 부문을 수상했고 2012년엔 만화계의 칸영화제로 불리는 앙굴렘 국제 만화 페스티벌 유산상을 수상한 것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이 옛날 이야기를 다룬 옛날 작품이 근래 그리고 지금까지도 생명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뭘까. 작가가 직접 체험한 전쟁의 의미 없는 단면을 생생하게 살려 낸 이야기에 제일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작품 도중, 미군의 대대적인 공습과 상륙으로 도망치던 어느 소대의 소대원이 한 말이 정곡을 찌른다. 그는 정작 중요한 내지가 매일 폭격 당하며 엉망이 되도록 당하고 있는 마당에 소대장에게 "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런 곳에서 싸우고 있는 겁니까?"라고 묻는다. 소대장은 "그건 나도 몰라"라고 답한다.

 

비단 일개 소대장과 소대원의 대화일 뿐이지만,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정곡을 찌르는 대화이면서 전쟁이라는 개념 혹은 현상 자체의 정곡을 찌르는 대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일본군이 서남태평양의 작은 섬에 와서 도대체 뭘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려야 하는 걸까 말이다. 군인이라면 응당 싸워야 한다고 하지만, 또한 전쟁통에 군인 하나하나는 말보다 쓰임이 없다고 하지만, 이유도 모른 채 명령 같지도 않은 명령 한마디로 목숨을 저버려야 하는 게 말이 되는가.

 

이 만화를 보고 나면 '가미카제'라고 불린 자살 공격의 일본군 특공대마저 다르게 보인다. 그동안엔 가미가제를 주체로 봤던 경향이 있다. '오롯이 자신의 의지로 천황을 위해 자기 한몸 불사질러 적을 타격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들을 객체로 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일제, 즉 일본 제국주의라는 거대 악 아래에선 모두가 희생자일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

 

전쟁의 이면

 

그동안 영화, 드라마, 소설 등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전쟁'의 단면을 수없이 봐 왔다. 전 세계가 냉전의 영향력 하에 있었을 때까지만 해도 적군과 아군으로 극명하게 나눠 대립하는 전쟁 영화가 대세를 이뤘다면, 냉전 종식 후엔 전쟁을 철학적·인본적으로 바라보려는 전쟁 영화가 대세를 이뤘다. 전쟁의 양상이나 역할에서 전쟁의 이유를 고찰하는 것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 <전원 옥쇄하라!>는 자그마치 1973년에 나왔지만 전쟁을 철학적·인본적으로 바라보려는 의지가 투철했다. 적군은 거의 모습을 드러 내지 않거니와 드러 내더라도 명확하지 않은 반면, 아군은 전투가 일어나지 않으면서도 황망하게 죽어 가는 세세한 이야기까지 끄집어 내 보여 준다. 전쟁의 황망함과 허무함을 보여 주면서도, 아군 즉 일본군이 전략·전술적으로도 틀렸고 인본적으로도 틀렸다고 말하고 있다. 애초에 해선 안 되는 전쟁이었으며 이어 나가서도 안 되는 전쟁이었다고 말이다.

 

수많은 '재밌는' 전쟁 콘텐츠를 뒤로 하고 이 작품을 제일선에 손꼽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매칭되는 작품으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1987년작 <풀 메탈 재킷>이 생각나는데, 군대문화 그리고 전쟁의 부조리함을 예리하게 비판하며 전쟁 영화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 더 이상 전쟁 콘텐츠에서 재미를 찾지 않겠다. 다른 콘텐츠라면 몰라도 전쟁 콘텐츠에선 의미를 찾아야 할 때다. 이 작품을 통해 깨닫게 된다면, 그 또한 큰 의미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