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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도서

전설의 자동차 디자이너 피터 슈라이어의 모든 것 <디자인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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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도서 리뷰] <디자인 너머>

 

책 &lt;디자인 너머&gt; 표지. ⓒ윌북

 

언젠가부터 도로 위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차종이 쏘나타에서 K5로 바뀌었다. 대략 10년 정도 된 것 같은데, K5가 2010년 초중반에 출시되었으니 얼추 맞는 것이다. 자타공인 무색·무취의 양산형 자동차만 고집해 왔던 또는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어 왔던 기아에서 어떻게 이리도 빼어난 외관의 차를 만들 수 있었을까,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자동차에 대해 잘 모르고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더더욱 알지 못했던 10여 년 전에도, K5 디자인에 관한 이야기는 건네 들은 기억이 있다. 독일에서 아우디 디자인을 도맡았던 세계적인 디자이너를 영입했다는 얘기였는데, 그야말로 전 세계 자동차 시장을 선도하는 '유럽 자동차 DNA'가 한국에 상륙했다고 봐도 무방했던 것이다. 

 

그의 이름은 피터 슈라이어, 현 현대자동차그룹 정의선 회장이 '디자인 경영'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2006년에 전격적·파격적으로 영입해 기아자동차 디자인 총괄 CDO 앉힌 인물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현대자동차그룹 디자인 총괄 사장을 거쳐 디자인 고문의 자리에 있는데 그의 평전이 나왔다. (불과 얼마 전, 현대차 세대 교체의 일환으로 그의 퇴진이 결정되었다)

 

<디자인 너머>(윌북)라는 멋드러진 제목, 세계적인 아트북 출판사 '타센'의 책들처럼 이미지와 텍스트가 예술적으로 어우러진 레이아웃, 넓디 넓은 판형에 양장본까지. 국내에서 보기 힘든 책의 종류인 만큼 접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피터 슈라이어 디자인의 근원

 

책은 크게 세 파트로 나눠진다. '탐험가', '바이에른에서 한국으로', '디자이너'인데 아무래도 시간의 흐름으로 흘러가기에 순서대로 들여다보는 게 좋을 듯하다. 그러며 다양한 궁금증을 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피터 슈라이어의 어린 시절은 어땠는가, 어떻게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었는가, 왜 전 세계를 호령하는 유럽의 폭스바겐에서 디자인을 총괄하다가 한국의 기아로 건너오게 되었는가, 그가 디자인한 자동차들은 무엇인가, 그가 추구하는 디자인 상은 무엇인가, 그는 자동차의 미래를 어떻게 보는가. 

 

자동차 디자이너 피터 슈라이어의 시작은 할아버지의 공방에 있다. 그는 어린 시절 일요일이면 공방에서 지냈다. 그런가 하면, 그의 디자인 영감의 원천은 참으로 다양하다. 자동차는 물론, 글라이더 면허를 취득했을 정도로 비행에 애정이 깊었고 세계 챔피언십에 참가했을 정도로 스켈레톤에 진지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화가 살바도르 달리, 뮤지션 프랭크 자파, 트럼펫 연주자 마일스 데이비스, 디자이너 디터 람스는 피터의 창조성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도 바우하우스는 피터 슈라이어 디자인의 근원이라 할 만하다. 

 

피터는 미술대학에 낙방했을 무렵 우연히 뮌헨 응용과학대학교의 산업디자인과 광고 포스터를 보고 지원한다. 그의 이력을 결정지은 첫 번째 순간이었다. 두 번째 순간은 대학교 3학년 때 찾아오는데, 객원 교수의 추천으로 아우디에서 3개월 동안 인턴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인턴이 끝나갈 무렵 거짓말처럼 세 번째 순간이 찾아왔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교수의 제안으로, 런던 왕립예술대학교로 가게 된 것이다. 회사가 후원해 주는 건 물론이었다. 다시 아우디로 돌아와 10년 넘게 마음껏 실력을 내보였다. 

 

한국으로 향하는 피터 슈라이어

 

2006년 피터 슈라이어는 누구나 인정하고 또 부러워할 만한 지위에 올라 있었다. 아우디 A2와 TT, 폭스바겐 뉴비틀과 파사트 B5 등 이름을 걸고 성공시킨 자동차가 줄을 이었고, 가히 전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자동차 디자이너로 이름을 날렸다. 폭스바겐 고위직에 올라 일을 줄여 가면서 은퇴와 그 이후까지 인생 후반 전체가 편하게 보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때, 한국의 기아에서 전화가 걸려 온다. 피터는 그때 당시를 가리켜 '머릿속에서 '찰칵' 하고 어떤 소리가 났다'고 표현한다. 뭔가 흥미로운 일이 있을 것 같다는 확신. 

 

피터는 고민없이 운명처럼 한국으로 향한다. 그리고 책은 두 번째 파트에 해당하는 여기에선 피터 슈라이어가 아닌 한국 그리고 기아가 속해 있는 현대차그룹(이하, '현대')에 대해 훨씬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한국 현대 경제에서 현대가 상징하는 바, 한국 기업에서 가족이 상징하는 바, 기아의 이미지 쇄신에서 피터가 상징하는 바. 

 

한국인, 한국어, 한국 문화, 한국 음식, 한국 디자인까지 살펴보고 한국과 피터의 고향이자 근본 독일을 따로 또 같이 두며 비교하고 동질감을 불어넣으려 한다. <디자인 너머>라는 책에서 '바이에른에서 한국으로' 파트가 차지하는 비중은 양과 질의 측면에서 모두 가장 낮다. 그리 새로울 게 없는 얘기들이 이어졌고 피터 슈라이어라는 사람의 서사를 매끄럽게 풀어가는 데도 도움을 주지 못했다. 무엇보다 50여 쪽 중에 한국의 다양한 정취를 담은 사진이 40여 쪽인데, 큰 감흥을 느끼기 힘들었다. 의도는 알겠으나 와닿지 않은 것이다. 

 

피터 슈라이어의 디자인 원칙

 

마지막 파트가 이 책의 핵심이자 피터 슈라이어의 핵심이라 할 만하다. '디자이너'라는 장제목에 걸맞게, 그가 그동안 디자인한 자동차들을 다양한 사진과 자세한 설명으로 보여 준다. 아무래도 그가 뽑았을 대표작일 것 같은데 1996년 폭스바겐 파사트 B5, 1997년 폭스바겐 골프, 1998년 폭스바겐 뉴비틀, 1998년 아우디 TT, 1999년 아우디 A2, 2008년 기아 쏘울, 2010년 기아 옵티아/K5, 2010년 기아 스포티지, 2011년 기아 스팅어, 2014년 현대 인트라도, 2018년 현대 넥쏘 등을 자세하게 볼 수 있다. 물론, 이밖에도 유명한 자동차들이 즐비하니 골라 보는 재미가 있다. 

 

그에겐 나름의 확고한 원칙이 있다. 디자이너로 일하는 내내 한결같이 지향하는 게 단순함과 명료함이라고 한다. '직선의 단순함'이라는 문구로 정립하는데, 구체적인 지침이 아닌 영감을 주는 표현이자 문자 그대로 해석해선 안 된다고 한다. 선을 설정할 때나 여러 요소를 결합하거나 자동차의 실내와 외장 디자인이 연관성을 갖도록 만들면서 단순함을 어떻게 적용할지 논의할 때야말로 '직선의 단순함'이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조약돌과 당구공 선언문>에 피터의 창조적 비전이 담겨 있다. 2013년 기아와 현대의 전 세계 디자인 센터를 총괄하는 사장으로 승진한 후 2016년 새 비전을 발표한 것인데, 현대를 조약돌로 기아를 당구공으로 이미지화한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본질은 물, 기아의 본질은 눈의 결정이다. 둘의 물리적 성질은 다르지만,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는 명징하고 창의적인 리더십 아이디어들을 표상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피터는 가장 원론적인 개념으로 '균형'을 추구한다. 절대로 어느 한 곳에 치우치지 않고 조화롭고자 한다. 자동차 디자이너이지만, 자동차뿐만 아니라 세계 만물에 지대한 관심을 둔다. 독일인이지만, 한국에서 일하고 생활하며 독일과 한국 디자인의 원할한 합체를 원한다. 최고의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지만, 언제나 '다음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반복하며 책 제목처럼 '너머'를 생각한다. 지금은 지나가기 마련이고, 다시 삶을 살아가야 하며, 다음의 너머 또는 너머의 다음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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