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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도서

추리소설로 당대를 들여다보는 탁월한 역사서 <애거서 크리스티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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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도서 리뷰] <애거서 크리스티 읽기>

 

책 <애거서 크리스티 읽기> 표지. ⓒ휴머니스트

 

추리 소설을 잘은 모르더라도 '애거서 크리스티'라는 이름은 들어 봤을 테고, 추리 소설을 즐겨 읽지 않더라도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 한 권쯤 접해 봤을 테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 <ABC 살인사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예고 살인> 등을 말이다. 물론, '셜록 홈스'의 아서 코난 도일이 더 많이 알려져 있다고 하면 반박하기 쉽진 않겠지만 적어도 내 마음속의 No.1 추리 소설 작가는 그녀이다.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 66권의 장편소설과 14권의 단편집과 19권의 희곡까지 100여 권의 책을 출판했고 2017년엔 가장 많이 번역된 작가로 기네스북에 올랐고 2018년엔 역사상 가장 많은 소설을 판 작가로 올랐다. 제 아무리 추리 소설이 '재미'가 최우선이라고 해도 세상과 인간 본연에 대한 '통찰'이 없다면 이만큼 많이 팔릴 수 없었을 것이다. 추리 소설을 B급 소설이라고 폄하할 이유가 없고 추리 소설가인 애거서 크리스티를 비평할 가치가 없는 작가라고 매도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이토록 매혹적인 애거서 크리스티라니, 많은 학자가 그녀의 작품과 그녀의 생애에 대해 연구해 봤음직하지만 접한 기억이 없다. 그렇게 그녀의 작품들만 접했던 와중, 한 역사학자가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들을 통해 그때 그 시대를 들여다보는 작품을 내놓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동안 꽤 많은 역사 책으로 대중과의 접점을 찾고자 노력해 왔던 설혜심 교수의 <애거서 크리스티 읽기>(휴머니스트)라는 책으로, 애거서가 창조한 캐릭터들에 지극한 현실성이 부여되어 있다는 점을 들어 애거서의 생애와 애거서의 소설들과 당시 시대상을 한데 엮어 냈다. 역사학과 사회학의 단면 엿보는 지식 욕구,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을 거의 모두 짚어 보는 재미까지 완벽했다.

 

애거서 크리스티로 당대 읽기

 

설혜심 교수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과 애거서 크리스티라는 사람의 생애에서 당대를 역사학·사회학적으로 들여다보는 단서를 충분히 얻었을까. 작가는 책을 통해 16가지 단서를 뽑았다. 일별하자면 다음과 같다. 탐정, 집, 독약, 병역면제, 섹슈얼리티, 호텔, 교육, 신분 도용, 배급제, 탈것, 영국성, 돈, 계급, 미신, 미시사, 제국이다. 애거서를 어느 정도라도 접한 이들에 한해서, 몇몇 키워드는 바로 받아들일 만하고 몇몇 키워드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으며 몇몇 키워드는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이를 테면 탐정, 집, 독약, 영국성, 계급, 미신 등은 바로 받아들일 만하거나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키워드들이다. 셜록 홈스만큼 유명한 탐정이 에르퀼 푸아로이고 제인 마플이 아닌가. 그런가 하면 애거서가 소싯적에 간호사로 약제사로 일했던 건 아는 사람은 다 아는데, 그 경험을 한껏 살려 상당한 작품에 독약이 나온다. 집은 어떤가, 데뷔작부터 스타일즈였고 이후에도 할로, 침니스, 엔드하우스처럼 제목에 집을 내세운 작품이 있을 정도이다. 그녀는 <자서전>에 "집 보러 다니는 일은 언제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취미다"라고 썼다. 

 

'회색 뇌세포'라는 유명한 단어를 만들어 낸 푸아로 덕분에 그녀의 소설이 굉장히 과학적일 것 같지만, 그녀의 수많은 소설에서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비과학적인 내용이 아주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게 사실이다. 작가는 이 텍스트에서 나아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심령술이 '망자를 대신할 일종의 대체재'로 역할을 했는데 그때가 추리소설의 황금기와 겹친다는 콘텍스트까지 알아 냈다. 즉, 애거서와 애거서의 소설이 시대와 아주 밀접하게 조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흥미가 동하는 키워드들

 

애거서 크리스티를 오래 읽어 오면서도 도무지 알 도리가 없는 키워드들도 있다. 그중에서도 흥미가 동하는 건 병역면제, 배급제, 미시사, 제국 등이다. 애거서와 애거서의 소설보다 역사학·사회학적 이야기들이 주를 이룰 것 같아서다. 이 책 <애거서 크리스티 읽기>는 엄연히 역사학자가 지은 역사 인문서가 아니던가. 하여, 얻고자 하는 건 애거서와 애거서의 소설보다 그녀가 활동했던 시대이자 그녀의 소설이 지어진 배경이다. 이 책은 그 역할도 충실히 해내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초반부터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영국은 징병제로 전환한다. 그러며 시스템을 고안하는데, 신체적 상태에 따라 본토와 해외 적합과 해외 적합과 본토 적합 그리고 부적합의 네 가지로 분류했다. 그런가 하면 보호 직업군에게는 징집을 면제해 줬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영국이 고전을 면치 못하자 처칠 수상은 여성도 징집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했다. 고전적인 젠더 역할이 뒤바뀐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애거서가 소설로 다룬 바 있는데, 군 복무와 남녀평등의 역학 관계가 자못 흥미롭다. 

 

'미시사'라는 키워드와 애거서 크리스티의 접함점이 뭘까 생각하면 정녕 아무것도 알 도리가 없다. 미시사라고 하면 거시사의 반대 개념일 테고 사소하거나 작은 역사를 일컬는 말로 이해된다. 하지만, 작가는 거시사가 국민 일반의 공통점에 주목한다면 미시사는 개개인의 다양한 행위, 동기, 전략 등을 찾아 보는 거라고 말한다. '탐정이 실마리를 찾는 것'과 흡사하다는 것, 하여 애거서의 소설에는 미시사를 설명할 수 있는 단초들로 가득하다고 한다.

 

이를테면, 미시사는 줌인 기법을 동원해 역사를 보고 일반적인 역사서술에서 소외되었던 사람들의 삶을 주목하며 거시사가 상정하는 집단적 경험과 일치하지 않는 개인의 삶을 포착해 낸다. 또 한 사람에게서 여러 개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이야기체의 역사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나라는 한 개인이 나의 인생뿐 아니라 역사의 한 장면에서 당당히 주인공이 된다니, 멋있지 않은가? 작가에 따르면, 애거서의 다양한 소설들에서 미시사의 사례를 수없이 뽑아 낼 수 있다고 한다. 이 역시, 멋있지 않은가?

 

색다른 역사 지침서

 

책을 읽으며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면, '애거서 크리스티'라는 사람에 대해 알지 못했거나 잘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되는 부분일 테다. 그녀의 작품에는 차별이나 편견이 심하고 심각한 부분들이 많이 나오는데, 애거서의 삶과 생각을 엮어서 볼 때 의도가 다분해 보인다. 그런가 하면 작가의 말마따나 그녀는 여성해방주의자인 듯하면서 여성혐오적이고, 자본주의의 폐해를 비판하면서도 돈을 좋아하며, 코즈모폴리탄을 표방하면서도 영국우월주의자인 모습을 보인다. 

 

작가의 바람처럼, 이 책 <애거서 크리스티 읽기>가 단순히 애거서와 애거서의 소설을 다시 읽고 나아가 비평적으로까지 읽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20세기 영국의 역사, 특히 전간기(제1차 세계대전 종결~제2차 세계대전 발발)의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조금 아니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런 식의 역사 읽기라면 누구라도 쉽고 재밌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싶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소한 팬이자 역사라는 분야를 사랑하는 이들에겐 완벽한 지침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필자처럼 말이다. 지식 욕구도 채워지며 재미까지 충분했다. 또 다른 어떤 이의 색다른 모습, 그를 통해 들여다보는 정석적인 역사가 기다리고 있을지 자못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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