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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MCU의 미투 시대를 위한 선언문 <블랙 위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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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블랙 위도우>

 

영화 <블랙 위도우> 포스터.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이하, 'MCU')가 어느덧 페이즈 4에 도달했다. 2008년 <아이언맨>으로 시작해 2012년 <어벤져스>로 페이즈 1을 마쳤고, 2013년 <아이언맨 3>으로 시작해 2015년 <앤트맨>으로 페이즈 2를 마쳤으며, 2016년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로 시작해 2019년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으로 페이즈 3를 마쳤다. 페이즈 1~3을 통칭해 '인피니티 사가'라고 불린다. 

 

MCU 역사의 시작이자 가장 큰 장이 지나고, 페이지 4는 영화가 아닌 드라마 <완다비전>으로 시작했다. 결과는 역시 대성공, 이어서 <팔콘과 윈터 솔저> <로키> 시즌 1이 연이어 나왔다. 그리고 드디어 영화 <블랙 위도우>가 선보였다. 본래 2020년 5월에 개봉할 예정이었으나, 여지 없는 코로나 여파로 1년 이상 연기된 것이다. 

 

<블랙 위도우>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아이언맨 2>로 MCU 역사에 처음 등장한 블랙 위도우의 처음이자 마지막 솔로 영화이다. 일찍이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많은 논란을 낳으며 호크아이의 짧은 대사로만 언급되었을 뿐인 나타샤(블랙 위도우)의 죽음, 이 영화로 10여 년을 함께한 그녀를 제대로 보내 줄 수 있을까? 

 

어느 위장 가족의 다짐

 

1995년 미국 오하이오, 자매 나타샤와 옐레나가 엄마 멜리나가 저녁을 먹고 있다. 아빠 알렉세이가 집으로 오더니 때가 되었다는 말과 함께 의문의 디스크를 챙겨 가족들과 집밖 어디론가 향한다. 비행기가 있는 곳에 도달한 가족, 비행기를 타려는 찰나 '쉴드'의 차량이 그들을 쫓는다. 우여곡절 끝에 탈출한 가족, 쿠바에 도착해 드레이코프 장군을 만난다. 곧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다. 나타샤와 옐레나는 레드룸으로 보내져 '위도우'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고 알렉세이는 수용소에 갇히며 멜리나는 드레이코프를 위해 일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시빌 워 후 로스가 이끄는 진압부대가 나타샤를 잡으려고 한다. 하지만 나타샤는 여지 없이 탈출해 노르웨이로 향하고 다시 안전가옥으로 간다. 한편, 옐레나는 모로코에서 모종의 임무를 수행 중이다. 타깃 저격에 실패한 그녀는 근접 격투로 타깃을 잡고자 하는데, 그때 알 수 없는 빨간 세럼이 뿌려져 세뇌가 풀려 정신을 차린다. 옐레나는 곧 도주한다. 레드룸에서 모든 걸 보고 듣던 드레이코프 장군은 태스크마스터를 출격시킨다. 

 

안전가옥에서 재회하는 나타샤와 옐레나, 한바탕 진심 어린 격투를 벌인 후 그동안의 이야기를 풀어놓지만 곧 위도우들에게 쫓긴다. 가까스로 추격을 피한 그녀들은 레드룸과 드레이코프를 무너뜨리기로 결심하고 드레이코프와 긴밀했던 아빠 알렉세이와 엄마 멜리나를 찾아간다. 위장 가족은 다시 만나 함께 어떤 일을 벌일 수 있을까? 레드룸과 드레이코프를 무너뜨릴 수 있을까?

 

여자의, 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영화

 

<블랙 위도우>는 여자의 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영화임을 천명한다. 단순히 MCU 최초의 단독 여성 감독의 작품이자 주요 캐릭터들이 여성이기 때문이지만은 않다. 극중에서 드레이코프가 '세뇌'를 이용해 위도우들을 컨트롤하지 않는가. 최근 몇 년간 대두되고 있는 가스라이팅과 그루밍 범죄, 세뇌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원리는 모두 같다. '심리적 지배'의 원리 말이다. 

 

나타샤와 옐레나는 레드룸과 드레이코프를 무너뜨리는 것만큼 위도우들을 세뇌의 그늘에서 풀려나게 하려 안간힘을 쓰는데, 영화가 말하고 또 보여 주려는 바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다. 사실 레드룸과 드레이코프는 구 소련의 잔재로 영화가 다분히 첩보물의 형식으로 나아갈 수도 있었으나, 완전히 다른 일종의 '선언문'처럼 보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다. 영화는 구 소련의 잔재를 미투 이전 시대의 잔재로 치환시켜 버린 것이다. 이제 세상은 새롭게 정립된다, 미투 이전 시대와 미투 이후 시대. 

 

영화는 또한 '가족'에 대해서도 구 소련 또는 냉전 시대의 잔재와 함께 말하고자 한다. 알렉세이, 멜리나, 나타샤, 옐레나 넷은 3년간 한 가족이었지만 완벽하게 냉전 시대의 산물이었다. 목적을 달성하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뿔뿔이 흩어져 버렸으니 말이다. 시간이 흘러 우여곡절 끝에 또 다른 목적을 위해 다시 만난 그들, 무슨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 

 

'진짜' 가족과 '가짜' 가족의 구분이 사라진 지 오래다. 더 이상 혈연으로만 이뤄진 가족만이 가족이라고 할 수 없는, 해선 안 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런 양상에서 나타샤 가족을 들여다보면, 가짜 가족을 양산한 냉전 시대의 잔재를 함께 처부수며 비로소 진짜 가족으로 발돋움하는 것이리라. 이제 그들은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함께하게 되었기 때문에. 

 

블랙 위도우의 아쉬운 마지막

 

<블랙 위도우>는 기존 MCU 영화들에 비해 확실히 다른 면이 있다. 어쩔 수 없는 스케일 그리고 액션의 차이가 존재한다. 그녀에겐 날아다니거나 강력한 무기를 휘두르거나 엄청난 힘으로 적을 찍어 누르는 능력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없어 보이거나 후달려 보이는 느낌은 없다. 육체 대 육체가 격렬히 부딪히는 장면의 향연은 보기 드문 박력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본> 시리즈나 <분노의 질주> 시리즈 그리고 타 MCU 영화에서 차용한 듯하지만, 훨씬 현대적으로 극대화시킨 장면들은 꽤나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이 영화의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충분하고도 넘치는 오락적 재미, MCU의 유기적인 전개를 위한 맞춤 설정, 현시대 주요 이슈들을 가져와 영화 내용과 결합시키는 능력 등 어느 하나에서도 빠지지 않음에도 어디에 문제가 있다는 걸까. 아이러니하게도 '블랙 위도우' 자체를 다루는 데 있다. 블랙 위도우의 마지막이었음에도, 블랙 위도우 자체를 제대로 다루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들여다보면, 블랙 위도우가 어떻게 탄생했고 어떻게 탈출했으며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가를 제대로 알기 힘들다. 그녀의 진짜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기 힘들다는 것이다. 대신 그녀의 특장점인 '연계'와 '조율'에 초점을 맞춰 어벤져스니 가족이니 위도우니 하는 것들에 시선이 가닿아 있다. 그런 것들이 블랙 위도우 자체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여러 모로 아쉬운 건 사실이다. 

 

MCU 세 번째 작품인 <아이언맨 2>부터 모습을 드러낸 '블랙 위도우', 비록 이제야 솔로 무비를 탄생시켰지만 엄연한 원년 멤버이다. 그녀를 오롯이 보내는 마지막이라기엔 영화 외적으로 아쉬움을 남긴 채, 영화 내적으론 역시 '마블'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