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영화 리뷰]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박정은 대리는 7년간 근무했던 회사에서 지방의 하청업체로 파견 명령을 받아 내려온다. 현장 소장은 물론 직원들도 반기지 않으며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하지만, 그녀는 1년만 버텨 다시 돌아가자는 일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뭘지 해야 할 일이 뭘지 찾는다. 와중에 원청에서 하청업체에게 파견직의 급여까지 책임지라 하고는 예산을 줄여 버린 것이다. 누구 하나는 나가야 할 판이 되었다.
온갖 유무형의 압박 속에서 정은은 송전탑 수리 현장에 함께하고자 한다. 비록 아무것도 모르고 할 줄 모르고 하기에도 힘들지만, 그곳에서 하는 일이 그것이기에 그녀로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하지 않거나 못한다면 근무 평점이 낮게 나올 것이고, 그녀는 잘리거나 원청으로 돌아가지 못할 수 있다. 그녀는 원청에서 명령하고 하청 소장이 따를 수밖에 없는 '짜고 치는 고스톱'의 희생양인 것이다.
정은이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정신적으로 꿋꿋하게 버티며 육체적으로 지치지 않고 일적으로 잘 해내는 것. 그때 막내가 손을 내민다. 그는 자식 셋을 건사하고자 두 개의 알바를 더 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지만, 아이러니하게 그 때문에 근무 평점이 가장 낮아 언제 잘릴지 모르는 상황이다. 더욱이 정은이 파견나왔으니 자리가 가장 위태롭다. 그럼에도 최선을 다하며 노력하는 정은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는 둘, 적응해 가는 정은, 변하지 않는 원청의 자세, 과연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이태겸 감독, 그리고 유다인과 오정세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 화제작 중 하나로 이태겸 감독이 꾸준히 추구해 온 '노동의 가치'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만든 작품이다. 한국 영화 최초로 송전탑을 소재로 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그런가 하면, 작은 영화답지 않은 화려한 캐스팅으로 화제를 모았다. 자그마치 유다인 배우와 오정세 배우. 둘 다 스펙트럼이 넓으면서도 좋은 연기력으로 정평이 나 있다.
유다인 배우는 2011년 최고의 한국 영화 중 하나로 봐도 무방한 <혜화, 동>으로 당시 거의 모든 영화제에서 신인여우상 후보에 올라 몇몇에서 수상한 적이 있다. 연극, 뮤직비디오, 광고, 드라마, 영화 등을 쉴 새 없이 오가며 자기 몫을 다하고 그중에서도 영화계에서 큰 영화와 작은 영화를 막론하고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주저없이 출연하는 것 같다.
오정세 배우는 최근 유독 눈에 많이 띄었는데 '대박'이 터진 드라마들인 <동백꽃 필 무렵> <스토브리그> <사이코지만 괜찮아>에서 주연으로 활약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야말로 연극, 드라마, 영화 가릴 것 없이 정녕 쉬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하지만 흔들림 없이 자기 몫 이상을 다하는 배우가 아닐 수 없다. 특유의 분위기로 중무장한 채 작품 보는 눈까지 갖췄으니,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앞으로가 기대된다.
'효율'이라는 괴물 앞에 모든 게 무색하다
영화는 제목에 확고부동한 메시지가 들어가 있어 매우 직선적이고 스피디하며 화끈하기까지 할 것 같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해고하지 않을 것이다!' 같이 말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하나의 이야기만 들어가 있지 않았다. 생각해 볼 만한 여지가 있는 이야기가 곳곳에 있었다. 부당하게 하청업체로 파견된 어느 직원의 이야기로만 읽힐 수 없었다.
자세한 뒷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추측해 보건대, 정은은 좋지 않은 학력과 스펙으로 입사해 오랫동안 피나는 노력으로 모든 입사 동기들이 우러러 마지 않은 직원이었다. 그런데, 모종의 이유로 혹은 여자라는 이유로 퇴사 압박을 받았고 그녀가 버티자 하청업체로 파견시켜 버린다. 원청의 상사는 하청업체의 소장을 압박해 그녀에게 일을 가르치지 않는 건 물론이고 일을 주지 않아 '합리적으로' 그녀의 근무 평점을 낮게 줘서 그녀를 잘리게 만드려고 한다.
원청으로 돌아갈 생각만 하던 정은에게 하청업체의 열악한 실태가 보이기 시작한다. 감전과 낙하 사고의 위험이 매 작업마다 도사리는 송전탑 관리라는 중요한 일을 하지만, 작업복도 지급되지 않고 '안전'의 중요성은커녕 오로지 '효율'이라는 괴물의 중요성만 날아올 뿐이다. 안전 수칙보다 우선되는 게 효율 수칙이고, 작업자의 안전보다 중요시되는 게 빠르면서도 정확한 작업이다.
'누구 하나 죽어야 정신을 차리지'라는 말이 있는데 그조차 통하지 않는 게 이 바닥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송전탑과 노동자를 생각하면 생각나는 게, 2012년 '송전탑 농성' 사건이다. 당시 현대차 사내하청 해고노동자 최병승 씨와 천의봉 현대차 비정규직노조 사무국장은 사측이 대법원 판결에 따라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해 줄 것을 요구하며 송전탑에서 장장 296일 동안 농성했다. 위험천만한 곳에서 목숨을 걸고 농성하는 모습에서 영화 속 막내의 대사가 겹친다.
"우리 같은 사람은 두 번 죽는 거 알아요? 한 번은 전기구이, 한 번은 낙하. 345000볼트에 한 방에 가거든요. 근데, 그런 거 하나도 안 무서워요. 우리가 무서운 거는... 해고예요. (중략) 박 대리는 해고보다 사망이 문제겠네요."
영화적으로 볼 만한 구석들
이 영화는 비단 화려한 캐스팅과 확고한 메시지뿐만 아니라 영화적으로도 볼 만한 구석이 있다. 시종일관 신경을 긁어 대는 것 같은 음악이 그중 하나인데, 일면 전류가 흐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정은과 막내의 위태로운 심리와 현 상황이 반영된 듯도 하다. 그런가 하면, 정은이 처음 송전탑을 눈앞에서 대면했을 때의 아찔한 느낌이 기억에 남는다. 종종 멀리서 보이곤 하는 송전탑은 흥미의 대상 정도로 그치곤 하는데, 막상 눈앞에서 봤을 땐 누구도 설명하지 못할 두려움을 피해가기 힘들지 않을까 싶다. 잘 표현해 냈다.
영화의 중후반, 도무지 오르지 못할 것 같던 송전탑을 천천히 오르고야마는 정은의 '여정'이 참으로 길게 이어지는 장면이 두 번 나온다. 영화를 관통하는 아주 중요한 장면이라는 걸 누가 봐도 알 정도인데, '상승'이라는 단어로 연상되는 카타르시스는 주지 못하지만 묵직한 울림을 준다. 하청업체로 '하강'한 정은이 송전탑을 오르며 자신을 되찾았기 때문일까, 비로소 송전탑 노동자로서 한 발을 내디뎠기 때문일까. 보는 이마다 다를 것 같다.
2012년 송전탑 농성 사건을 연상시키는 것 외에 '왜 송전탑이어야 했을까'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이 영화가 최초로 송전탑을 소재로 했으니 만큼, 영화 작업을 하는 게 매우 어렵다는 게 정평 나 있었을 테고 잘 알았을 텐데 말이다. 송전탑의 또 다른 특징을 캐치한 걸까. 송전탑은 송전탑으로만 가늠하기 힘들 테다, 송전탑과 송전탑을 관리하는 노동자들을 함께 가늠해야 한다. 모든 이가 송전탑의 수혜를 받지만 정작 송전탑에 관심 가지는 이는 없듯이, 많은 노동자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위험천만한 일을 하지만 관심 가지는 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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